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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유라시아 육상 제국
(청조에서 넘어옴)

대청국(중국어 정체자: 大淸國, 병음: Dàqīngguó, 만주어: ᡩᠠᡳᠴᡳᠩ
ᡤᡠᡵᡠᠨ
Daicing Gurun[주 1], 몽골어: ᠳᠠᠶᠢᠴᠢᠩ
ᠤᠯᠤᠰ
Dayičing Ulus, 1587년 또는 1601년 또는 1616년[1] 또는 1636년 5월 15일[2] 또는 1644년 6월 5일[3][주 2] ~ 1912년 2월 12일[4] 또는 1924년 1월 5일)은 대청제국(大淸帝國)[5][6] 청조(淸朝)[7], 중화대청국(中華大清國)[8], 암바 다이칭 구룬(만주어: ᠠᠮᠪᠠ
ᡩᠠᡳᠴᡳᠩ
ᡤᡠᡵᡠᠨ
Amba Daicing Gurun)[9][주 3], 만청(滿淸)[10], 중국(中國, 만주어: ᡩᡠᠯᡳᠮᠪᠠᡳ
ᡤᡠᡵᡠᠨ
Dulimbai Gurun)이라고도 한다.

다이칭 구룬 / 대청국
ᡩᠠᡳᠴᡳᠩ
ᡤᡠᡵᡠᠨ
/ 大淸國
1616년1912년
문장
국새
국가 공금구
1911년 ~1912년
18세기 청 제국의 강역
18세기 청 제국의 강역
수도 허투 아라(만주어: ᡥᡝᡨᡠ ᠠᠯᠠ, 1583~1587)
퍼 아라(만주어: ᡶᡝ ᠠᠯᠠ, 1587~1603)
허투 아라(만주어: ᡥᡝᡨᡠ ᠠᠯᠠ,1603~1619)
자이퍈(만주어: ᠵᠠᡳᡶᡳᠶᠠᠨ, 1619~1620)
사르후(만주어: ᠰᠠᡵᡥᡡ, 1620~1621)
랴오 양(만주어: ᠯᡳᠶᠣᠣ ᠶᠠᠩ, 1621~1625)
묵던(만주어: ᠮᡠᡴᡩᡝᠨ, 1625~1644)
버깅(만주어: ᠪᡝᡤᡳᠩ, 1644~1912) 북위 39° 55′ 동경 116° 23′  / 북위 39.917° 동경 116.383°  / 39.917; 116.383
정치
공용어 만주어, 몽골어, 한어, 티베트어, 위구르어
정부 형태 전제 군주제, 입헌 군주제
황제 천명제 (1616 ~ 1626)
강희제 (1661 ~ 1722)
옹정제 (1722 ~ 1735)
건륭제 (1735 ~ 1796)
광서제 (1875 ~ 1908)
선통제 (1908 ~ 1912)
역사
 • 누르가치, 겅옌 한 즉위
후금 성립
•국호 개칭
•북경 정복
신해혁명
황제 퇴위
•황실 해체
1616년
1618년
1636년
1644년
1911년
1912년
1924년
지리
면적 13,150,000km2
내수면 비율 2.8%
인구
1820년 어림 383,100,000명
기타
통화 위안 (1889년부터) ()
이전 국가
다음 국가
후금
명나라
중가르 칸국
겔룩파
북원
정씨왕국
중화민국 임시 정부 (1912년)
청나라 소조정
러시아 제국
복드 칸국
티베트 왕국
타이완 민주국
영국령 홍콩
인도 제국
현재 국가 중화민국의 기 중화민국
중화인민공화국 중화인민공화국
홍콩의 기 홍콩
마카오 마카오
러시아의 기 러시아
몽골의 기 몽골
인도의 기 인도
부탄의 기 부탄
네팔의 기 네팔
파키스탄의 기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의 기 아프가니스탄
키르기스스탄 키르기스스탄
카자흐스탄의 기 카자흐스탄
타지키스탄 타지키스탄
우즈베키스탄 우즈베키스탄
미얀마 미얀마
베트남 베트남
라오스의 기 라오스
일본 일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중국의 역사
중국의 역사
신화 ~ 진의 통일 이전
선사 시대
황하·장강 문명기원전 4800?~기원전 3500?
신화·삼황오제기원전 4000?~기원전 2070?
기원전 2070?~기원전 1600?
기원전 1600?~기원전 1046?
기원전 1046?~기원전 256
  서주 기원전 1046?~기원전 771
  동주 기원전 771~기원전 256
    춘추 시대 기원전 771~453
    전국 시대 기원전 453~221
고대 ~ 근대의 중국
기원전 221~기원전 206

기원전 202~서기 220
  전한 기원전 202~서기 8
  8~23
  후한 25~220

삼국 시대 220~280
  220~265
  촉한 221~263
  229~280
265~420
  서진 265~316
  동진 317~420 오호 십육국 시대
304~439
남북조 시대 386~589
581~619

618~907
무주 690~705

오대십국시대
907~979

916~1125

960~1279
  북송
 960~1127
서하
1038~1227
  남송
 1127~1279

1115~1234
1271~1368

1368~1644


1616~1912

현대의 중국
중화민국 (북양 정부, 국민정부) 1912~1949
  만주국 1931~1945
중화인민공화국
1949~현재

중화민국
(타이완)
1949~현재

v  d  e  h

청나라는 현재 중국 본토 지역에 존재했던 정복 왕조 가운데 가장 큰 정치적 실체였다. 청나라는 1644년에 멸망시킨 명나라보다 영토는 2배 이상 커졌고, 인구는 3배 이상 늘어났다. 청나라 안에는 정복된 수많은'한족'뿐만 아니라 남서쪽 변겅 지대를 따라 거주했던 한족들과 대만과 그 밖의 변방과 내지의 고지대에서 새롭게 정복지역의 대만 한족(漢族) 중국인들을 정복한 만주족들이 있었다..[11] 만주족들은 중국인 한족(漢族)들에게 수치스러운 변발을 강요하며 한족(漢族)들을 통치했다.

청나라는 서양 열강들에 의해 반식민지가 되어 역사를 마감하는 장이 됐지만,[12] 청의 통치자인 만주족은 그들의 영역을 전적으로 '중국화'하지는 않았다. 단지 수많은 종족-민족적 구성원들을 통치하기 위해 한족 세계에서는 진시황한 무제로부터 이어져온 중국의 '황제'이자 '천자', 몽골 유목민의 초원 세계에서는 '카안'(몽골어: ᠬᠠᠭᠠᠨ Qa'an), 티베트를 중심으로 한 티베트 불교도의 세계에서는 쿠빌라이 카안의 전통을 이은, 불법의 수호자인 '전륜성왕'이자 '문수보살 황제', 타림 분지의 위구르 무슬림 세계에서는 1758/59년 이전의 지도자, 준가르 콩타이지를 대체한 이리장군(만주어: ᡳᠯᡳ
ᠵᡳᠶᠠᠩᡤᡳᠶᡡᠨ
Ili Jiyanggiyūn)을 통한 간접적인 지배자이자 '이슬람의 보호자'라는[13] 유가적 배역을 맡았을 뿐이다.[14] 따라서 청을 중화제국으로 보는 것은 완전히 틀린 관점이며, 중국은 청의 일부일 뿐이며, 한족 신민들은, 숫자가 절대 다수였음에도, 만주족 고유의 여러 가지 특성이 제도와 문화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던 청 제국[15] 아래에서 정치·문화적으로 소수였다.[16] 《대청율례(大淸律例)》는 단지 한족 신민들만을 위한 것으로, 제국의 나머지 신민들은 체계의 적용대상이 아니었다. 그것은 홍무제가 펴낸 《대명율(大明律)》에서 그 내용을 거의 따왔기 때문에 비한족 신민들에 적용된 사례가 없다. 청 제국의 각 종족은 각기 다른 법률을 적용받았다. 만주족은 《팔기칙례(八旗則例)》 티베트와 몽골족은 《이번원칙례(理藩院則例)》, 동투르키스탄의 무슬림은 《회동칙례(會同則例)》의 적용을 받았다.[17]

목차

역사

건국

청 제국은 홍 타이지가 제국을 선언한 1636년으로 볼 수 있지만, 그 기원은 1587년, 혹은 1601년 팔기의 재편, 혹은 1616년 후금의 건국까지 소급될 수 있다.[18]

 
누르가치가 니칸 와이란이 웅거한 투룬성을 공격하는 장면을 묘사한 《만주실록(滿洲實錄, 만주어: ᠮᠠᠨᠵᡠ ᡳ
ᠶᠠᡵᡤᡳᠶᠠᠨ
ᡴᠣᡠᠯᡳ
Manju-i Yargiyan Kooli)》의 삽화.

1583년에 독자적인 깃발을 내걸고 과감히 거병한 누르가치는, 니칸 와이란의 세력을 제거하는 데 성공하였을 뿐만 아니라 세력을 급속도로 확대하여 마침내 숙수후를 비롯한 '만주 구룬'의 통일을 달성하였다. 그는 1587년 퍼 아라에 성을 쌓고 그곳을 근거지로 삼았다. 누르가치는 대량의 인삼과 모피를 거래하면서 경제력을 축적하는 한편, 해서여진야인여진의 여러 집단을 하나씩 복속시켜 나갔다. 1592년에는 일본의 침략을 받은 조선에 원군을 파견하겠다고 제안하기도 하였으며, 그 이듬해에는 예허와 하다를 위시한 해서여진 뿐만 아니라 만주 지역 서북부에서 유목하던 코르친 몽골을 비롯한 아홉 구룬이 결성한 연합군을 격파함으로써 만주 지역의 최강자로 확고하게 자리매김하였다.

원문
만주어: ᡥᠠᠰᡥᡡ ᡝᡵᡤᡳᡩᡝ ᡳᠯᡳᡥᠠ ᡝᡵᡩᡝᠨᡳ ᠪᠠᡴᠰᡳ᠈ᠵᡠᠸᡝ ᠨᠣᠪᡳ ᡝᠮᡨᡝ ᡝᡵᡤᡳᠴᡳ ᠣᡴᡩᠣᠮᡝ ᡤᡝᠨᡝᠪᡳ᠈ᠵᠠᡴᡡᠨ ᠠᠮᠪᠠᠨ ᡳ ᠵᠠᡶᠠᠪᡳ ᠨᡳᠶᠠᡴᡡᡵᠠᡥᠠ ᠪᡳᡨᡥᡝ ᠪᡝ ᠠᠯᡳᠮᡝ ᡤᠠᡳᠪᡳ᠈ ᡥᠠᠨ ᡳ ᠵᡠᠯᡝᡵᡳ ᡨᡠᡴᡳᠶᡝᡥᡝ᠈ᠠᠮᠪᠠ ᡶᡠᠯᡤᡳᠶᠠᠨ ᡩᡝᡵᡝ ᡳ ᡩᡝᠯᡝ ᠰᡳᠨᡩᠠᠪᡳ᠈ᡝᡵᡩᡝᠨᡳ ᠪᠠᡴᠰᡳ ᡥᠠᠨ ᡳ ᡥᠠᠰᡥᡡ ᡝᡵᡤᡳᡩᡝ ᠵᡠᠯᡝᡵᡳ ᡳᠯᡳᠪᡳ᠈ᡥᠠᠨ ᡳ ᠰᡠᠰᠠᡳ ᠵᠠᡴᡡᠨ ᠰᡝ ᡩᡝ ᡶᡠᠯᡤᡳᠶᠠᠨ ᠮᡠᡩᡠᡵᡳ ᠠᠨᡳᠶᠠ ᠠᠨᡳᠶᠠ ᠪᡳᠶᠠᡳ ᡳᠴᡝ ᡝᠮᡠᡩᡝ᠈ᠪᠣᠨᡳᠣ ᡳᠨᡝᠩᡤᡳ ᠮᡠᡩᡠᡵᡳ ᡝᡵᡳᠨᡩᡝ᠈ᠠᠮᠪᠠᠨ ᠠᠪᡴᠠ ᡤᡝᡵᡝᠨ ᡤᡠᡵᡠᠨ ᠪᡝ ᡠᠵᡳᡴᡳᠨᡳ ᠰᡝᠮᡝ ᠰᡳᠨᡩᠠᡥᠠ ᡤᡝᠩᡤᡳᠶᡝᠨ ᡥᠠᠨ ᠰᡝᠮᡝ ᡤᡝᠪᡠ ᡥᡡᠯᠠᡥᠠ᠈ᡥᡡᠯᠠᡥᠠ ᠮᠠᠩᡤᡳ ᠨᡳᠶᠠᡴᡡᡵᠠᡥᠠ ᠪᡝᡳᠰᡝ᠈ ᠠᠮᠪᠠᠰᠠ᠈ ᡤᡝᡵᡝᠨ ᡤᡝᠮᡠ ᡳᠯᡳᡥᠠ᠈ᡨᡝᡵᡝᠴᡳ ᡨᡠᡨᡨᡠ ᡤᡝᡵᡝᠨ ᠪᠠ ᡳᠯᡳᡥᠠ ᠮᠠᠩᡤᡳ᠈ᡥᠠᠨ ᡨᡝᡥᡝ ᠰᠣᡵᡳᠨᠴᡳ ᡳᠯᡳᠪᡳ ᠶᠠᠮᡠᠨᠴᡳ ᡨᡠᠴᡳᠪᡳ᠈ᠠᠪᡴᠠ ᡩᡝ ᡳᠯᠠᠩᡤᡝᠯᡳ ᡥᡝᠩᡴᡳᠯᡝᡥᡝ᠈ᡥᡝᠩᡴᡳᠯᡝᠪᡳ ᠠᠮᠠᠰᡳ ᠪᡝᡩᡝᡵᡝᠪᡳ ᠰᠣᡵᡳᠨᡩᡝ ᡨᡝᡥᡝ ᠮᠠᠩᡤᡳ᠈ᠵᠠᡴᡡᠨ ᡤᡡᠰᠠᡳ ᠪᡝᡳᠰᡝ ᠠᠮᠪᠠᠰᠠ ᡳᠯᡥᡳ ᡳᠯᡥᡳ ᠰᡝ ᠪᠠᡥᠠ ᠰᡝᠮᡝ ᡥᠠᠨ ᡩᡝ ᡳᠯᠠᡨᠠ ᠵᡝᡵᡤᡳ ᡥᡝᠩᡴᡳᠯᡝᡥᡝ᠈

— 만문원당(滿文原檔)

해석
하늘이 살려준 가난하고 고생해야할 (주션의) 여러 나라를 사랑하고, 강하지 않고 가난해야할 사람을 현명하게 잘 돌보아준 우리의 한에게 "큰 이름 부르자!"하며 무리가 의논해서 호칭을 정하고는 팔기의 버이러들과 암반들이 무리를 지어 4줄로 정렬하여 4곳을 만들고 8개의 공간에 섰다. 팔기로부터 여덟 암반이 글을 잡고 무리로부터 나아가서 맨 앞에 꿇어앉았고, 뒤에 팔기의 버이러들과 암반들이 무리를 데리고 꿇어앉았다. 한쪽 편에 서있던 아둔 햐와 어르더니 박시가 각각 한쪽에서부터 맞이하여 가서 여덟 암반이 꿇은 채 들고 있던 글을 받아 한의 앞에서 높이 들었다. 그리고선 큰 붉은 탁자 위에 그 글을 놓았다. 어르더니 박시가 한의 왼쪽 앞에 서서 외치길, "한이 58세인 붉은 용해 정월 초하루 원숭이날 용 때, 큰 하늘이 여러 나라를 돌보도록 하라고 임명한 겅옌 한!"이라고 외쳤다. 어르더니 박시가 대명을 부른 후에 꿇어앉은 버이러들과 암반들의 무리가 모두 일어섰다. 무리가 일어나자 앉아있던 한은 옥좌에서부터 일어나서 관청에서 나아가 하늘을 향해 3번 고두하였다. (한이) 고두하고 뒤로 물러나 다시 옥좌에 앉은 뒤에, 팔기의 버이러들과 암반들이 차례대로 "새해가 되었다!"고 한에 각 3번씩 고두하였다.

1603년에 허투 아라로 근거지를 다시 옮긴 누르가치는 정복 활동을 이어나가 예허를 제외한 모든 여진 부족들을 복속시켰다. 이에 명나라와 긴장이 점차 고조되어 갔지만, 누르가치는 1616년 2월 17일, 여진족 수령들의 추대를 받아 즉위식을 거행하고 '겅옌 한'(만주어: ᡤᡝᠩᡤᡳᠶᡝᠨ
ᡥᠠᠨ
Genggiyen Han)을 칭하였다.

이로써 누르가치는 정식으로 한 나라의 군주가 되었다. 이 나라는 아이신 구룬이라고 하는데, 과거 여진족이 세웠던 금나라 계승을 표방한 것이다. 그는 아이신 구룬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니루와 구사를 창설하여 니루를 민정은 물론 군정까지 아우르는 기층 사회 조직으로 발전시켜 사회 조직상의 일대 혁신을 이루었다.[19]

 
영원성 전투를 묘사하는 《만주실록》의 삽화.


1626년, 영원성 전투에서 패배하고 묵던으로 귀환한 누르가치는 곧 병이 들어 68살의 나이를 숨을 거두었다. 누르가치의 뒤를 이어 아이신 구룬의 두 번째 한으로 즉위한 사람은 그의 8남 홍 타이지였다.

홍 타이지는 군사 방면의 곤경을 벗어나기 위해 명나라에 화의를 제한하고 나섰다. 이어서 식량과 물자의 부족을 타개하기 위하여 조선 연해의 가도에 근거를 두고 배후를 위협하던 명나라의 장수 모문룡을 친다는 명분을 내세워 조선을 침공하여 정묘호란을 일으킨 뒤, 조선과 '형제 관계'를 맺고 교역의 루트를 확보했다.

홍 타이지는 원숭환이 지키던 요서 지역에서 산해관에 이르는 방어선을 우회하여, 내몽골 지역을 거쳐 만리장성을 넘어가 약탈전을 벌이는 전략을 구사하였다. 이 전략은 큰 성공을 거두어 명나라의 수도 북경을 포위하기까지 하였다. 당시 홍 타이지는 원숭환이 아이신 구룬과 내통하여 반역을 꾀한다는 말을 유포시키는 계략을 써서 영원성 전투의 영웅 원숭환을 처형하게 만들었다.

요동 지역의 한족 지배와 관련해서는, 정복민과 피정복민의 거주지를 분리하는 정책을 추진하는 한편, 한인을 관료로 등용하여 이들에게 피정복민인 한인 농민에 대한 행정을 맡기는 방식을 취하였다. 또한 문관과 육부를 비롯한 행정 기구를 새로 설치하여 국가의 면모를 갖추어 나갔다.[20]

홍 타이지에게 직속된 기구인 육부는 국가의 대소사를 논의함으로써, 기존의 팔기의 버이러들이 공동으로 수행하던 국가 통치의 영역을 잠식했다. 육부의 업무를 총관한 것은 6명의 버이러였지만, 그들 가운데 아바타이(阿巴泰, 만주어: ᠠᠪᠠᡨᠠᡳ Abatai)만이 홍 타이지의 형이고 나머지는 모두 홍 타이지의 아들과 조카였다.[21]

 
평복차림의 홍 타이지.


이렇듯 대등한 동료 중의 1인자에 불과했던 홍 타이지는 독자적인 업적을 쌓으면서 자신만의 카리스마를 구축해 가는 한편, 아이신 구룬의 권력을 서서히 자신에게로 집중시켜 나갔다. 대버이러 중에서 홍 타이지에게 가장 도전적이었던 아민을 군사적 실패를 이유로 삼아 실각시켜 감금하고, 이어서 자신과 공개적으로 다툼을 벌이다 칼까지 뽑아 들었던 망굴타이에게 강당 처분을 내림으로써 그를 실각시켰다. 마침내 1632년에는 단독 남면을 실현함으로써 한으로서의 권위를 확립했다.

1636년에 병사한 망굴타이가 생전에 반역을 모의했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홍 타이지는 이를 명분으로 망굴타이가 소유했던 정람기를 해체해 버렸고, 다시 새롭게 편성된 정람기는 자신의 장남 호오거에게 주었다. 이렇게 해서 팔기 가운데 삼기를 확보한 홍 타이지는 내부적으로 아무도 도전할 수 없는 권력을 확립하였다.[22]

차하르릭단 칸의 패권 추구에 반발한 많은 몽골 유목민 집단이 아이신 구룬에 도움의 손길을 청하자, 홍 타이지는 릭단 칸이 티베트 방면으로 원정을 떠난 틈을 타 내몽골의 중심부인 후흐호트를 점령하고 내몽골 초원을 장악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어서 1634년 릭단 칸이 천연두에 걸려 청해에서 병사하였고, 1635년에는 릭단 칸의 아내와 아들 에제이가 아이신 구룬에 투항해 왔다. 홍 타이지는 릭단 칸의 아들을 부마로 삼았다.[23]

이렇게 차하르를 제압하는 데 성공한 홍 타이지는 먼저 차하르의 압박을 피해 대거 투항해 왔던 몽골 유목민의 일부를 니루와 구사로 편입시켜 팔기몽고를 조직하였다.[24] 후금의 직접 통치하에 들게 된 몽골인의 수가 대폭 증가했고, 후금 통치하에 여진인과 한인 수가 비슷해지자, 삼자가 공존하는 새로운 국가의 모델이 필요하게 되었고 동시에 국가의 핵심 종족인 주션(만주어: ᠵᡠᡧᡝᠨ Jušen)의 정체성을 고민해야 하는 이중적인 상황이 도래했다.[25]

1635년 11월 22일, 홍 타이지는 '주션'이라는 족명을 폐기하고 '만주'를 공식적이고 유일한 족명으로 선포했다.

원문
만주어: ᡨᡝᡵᡝ ᡳᠨᡝᠩᡤᡳ᠈ ᡥᠠᠨ ᡥᡝᠨᡩᡠᠮᡝ᠈ ᠮᡠᠰᡝᡳ ᡤᡠᡵᡠᠨ ᡳ ᡤᡝᠪᡠ ᡩᠠᠴᡳ ᠮᠠᠨᠵᡠ᠈ ᡥᠠᡩᠠ᠈ ᡠᠯᠠ᠈ ᠶᡝᡥᡝ᠈ ᡥᠣᡳᡶᠠ ᡴᠠᡳ᠈ ᡨᡝᡵᡝ ᠪᡝ ᡠᠯᡥᡳᡵᠠᡴᡡ ᠨᡳᠶᠠᠯᠮᠠ ᠵᡠᡧᡝᠨ ᠰᡝᠮᠪᡳ᠈ ᠵᡠᡧᡝᠨ ᠰᡝᡵᡝᠩᡤᡝ ᠰᡳᠪᡝᡳ ᠴᠣᠣ ᠮᡝᡵᡤᡝᠨ ᡳ ᡥᡡᠨᠴᡳᡥᡳᠨ ᡴᠠᡳ᠈ ᡨᡝᡵᡝ ᠮᡠᠰᡝ ᡩᡝ ᠠᡳ ᡩᠠᠯᠵᡳ᠈ ᡝᡵᡝᠴᡳ ᠵᡠᠯᡝᠰᡳ ᠶᠠᠶᠠ ᠨᡳᠶᠠᠯᠮᠠ ᠮᡠᠰᡝ ᡤᡠᡵᡠᠨ ᡳ ᡩᠠ ᠮᠠᠨᠵᡠ ᠰᡝᡵᡝ ᡤᡝᠪᡠ ᠪᡝ ᡥᡡᠯᠠ᠈ ᠵᡠᡧᡝᠨ ᠰᡝᠮᡝ ᡥᡡᠯᠠᡥᠠ ᡩᡝ ᠸᡝᡳᠯᡝ᠈

tere inenggi. han hendume. musei gurun-i gebu daci manju. hada. ula. yehe. hoifa kai. tere-be ulhirakū niyalma jušen sembi. jušen serengge sibei coo mergen-i hūncihin kai. tere muse-de ai dalji. ereci julesi yaya niyalma muse gurun-i da manju sere gebu-be hūla. jušen seme hūlaha-de weile.

— 만문원당(滿文原檔)

해석
이 날에 한이 말하길, "우리의 나라의 이름은 본래 만주, 하다, 우라, 예허, 호이파이니라. 그것에 무지한 사람들이 주션이라 한다. 주션이라는 것은 시버의 초오 머르건의 후예이니라. 그들이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 이로부터 앞으로 모든 이들은 우리 나라의 본래 이름인 만주라고 부르라. 주션이라고 부르면 죄이다."

즉 홍 타이지는 주션이라는 족명을 폐기함으로써 그 이름에 묻어 있는 과거의 상쟁의 기억, 특히 건주여진해서여진의 상쟁의 기억을 일소하고, '만주'만을 사용함으로써 여진족을 새로운 명칭 아래 하나로 통합하고자 했다.[26] 이에 따라 종래의 팔기는 팔기만주로 불렸다. 그리고 차하르를 꺾고 내몽골 초원의 유목민을 모두 복속시켰을 뿐만 아니라 차하르 칸 가문에 전해 오던 쿠빌라이 카안 이래 몽골 제국 카안의 권위를 상징하는 것인 '제고지보(制誥之寶)'라는 한자가 새겨져 있는 '대원전국(大元傳國)이라는 이름의 금으로 만든 도장을 손에 넣은 홍 타이지는 이제 몽골제국의 정통을 계승한 군주를 자처할 수 있었다.

 
오행의 상생과 상극, 상극인 목, 토, 수, 화, 금 순으로 그려도 안쪽은 상생을 나타내게 된다.

1636년 홍 타이지는 팔기는 물론 내몽골 왕공 및 한족 무장들의 추대를 받는 형식으로 즉위식을 올리고 칭기스 칸으로부터 이어져 온 몽골제국의 전통을 완전히 복원·계승하였음을 보이는 것으로, 아시아 국가들의 시각으로, 옛 몽골 제국의 동쪽 절반을 청이 지배하는 것을 합법화하기 위해 스스로 세 언어로 된 칭호인 매우 관대하고 조화로우며 성스러운 군주(弘德彰武皇帝, 만주어: ᡤᠣᠰᡳᠨ
ᠣᠨ᠋ᠴᠣ
ᡥᡡᠸᠠᠯᡳᠶᠠᠰᡠᠨ
ᡝᠨᡩᡠᡵᡳᠩᡤᡝ
ᡥᠠᠨ
Gosin Onco Hūwaliyasun Enduringge Han, 몽골어: ᠠᠭᠤᠳ‍ᠠ
ᠥᠷᠦᠰᠢᠶᠡᠩᠴ‍ᠢ
ᠨ‍ᠠᠶ᠋‍ᠢᠷ‍ᠠᠮᠳ‍ᠠᠭᠤ
ᠪᠣᠭᠳᠠ
ᠬᠠᠭᠠᠨ
Aγuda Örüsiyegči Nayiramdaγu Boγda Qaγan)를 칭하였으며,[27][28] 또한 중국의 오행론에 따르면, 왕조의 이름에 불(火)의 성분을 가진 명은 쇠(金)의 특성을 가진 아이신 구룬을 이길 수 있었기에 이제 물(水)의 성분을 가지고 명이라는 불(火)을 끌 수 있어야 했다.[29] 그리하여 국호를 기존의 아이신 구룬(만주어: ᠠᡳᠰᡳᠨ
ᡤᡠᡵᡠᠨ
Aisin Gurun)에서 다이칭 구룬(만주어: ᡩᠠᡳᠴᡳᠩ
ᡤᡠᡵᡠᠨ
Daicing Gurun, 大淸國)으로 개칭하고, 만주족이자 요동 한인의 황제이자 몽골의 카안이 됐다. 이는 곧 만주인이 한인, 몽골인과 공존하겠다는 의지를 선포한 것이었고 다종족국가의 표방을 의미했다.[30]

당시 홍 타이지가 제위에 올랐다고 선포하면서 들이민 근거 중 하나는 10년 전 정묘호란으로 조선을 정복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행사에 참석한 조선 사신들은 홍 타이지에게 세 번 무릎 꿇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린다는 삼궤구고두(三跪九叩頭)의 예를 거부했다. 홍 타이지는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31] 홍 타이지는 조선을 침략하여 병자호란을 일으켰다. 이 전쟁의 결과 조선 인조삼전도에서 홍 타이지를 황제로 받드는 치욕스러운 의식을 거행해야 했고, 이후 명나라가 아닌 청 제국의 책봉을 받고 청 제국에 조공을 바쳐야 했다.[32]

홍 타이지는 총과 대포를 능숙하게 다룰 줄 아는 한인들을 기존의 팔기 조직에 속하지 않는 별도의 부대로 조직하여 홍이포를 제작 및 운용하였는데, 이 한인 부대를 '한군'이라고 불렀다. 홍 타이지는 한군의 규모를 계속 확대하여 1642년까지 한군만으로 구성된 팔기 편성을 완료하였는데, 이들 구사는 팔기한군이라고 부른다.

1630년대 중엽부터 홍 타이지가 추진한 일대 혁신으로 탄생한 다이칭 구룬은 더 이상 여진 국가가 아니었다. 다이칭 구룬은 몽골제국의 정통 계승을 지향하는 만주인과 몽골인 그리고 한인의 제국으로 변모했다.[33]

홍 타이지는 《금사》를 만주어로 번역토록 하고 이와 동시에 《요사》와 《원사》또한 만주어 및 몽골어로 번역하게 하였다. 홍 타이지는 --과 중원 왕조 송나라의 역사적 대결 구도를 차용하여 명나라와의 라이벌 관계를 설명하고, 만주 정권의 합법성과 영속성을 강조하였다. 만주의 제국 건설을 이전 요-금-원이 보여준 성공의 역사와 연결시킴으로써 정당화하려 한 것이었다.[34]

홍 타이지가 황제에 오른 숭덕 연간에 이르면 중원 약탈전이 확대되고 1642년의 송산·금주 전투 승리를 토대로 요서 진출이 성사되었으나, 홍 타이지는 여전히 명과의 화의를 염두에 두면서 산해관과 북경에 대한 공략을 끝까지 실행하지 않았다. 천총 연간에 이어 숭덕 연간까지 홍 타이지는 명과 수차례 전쟁을 벌였지만, 산해관 돌파는 한 번도 고려되거나 시도되지 않았다. 홍 타이지는 예전의 중원 침공 방식, 즉 단기적인 약탈전을 계속해야만 당장의 경제적 어려움을 해결하고 원정의 원동력으로 삼을 수 있었다. 결국, 산해관을 넘어 북경을 정복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인물과 새로운 변수의 등장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35]

1643년 홍 타이지의 사후, 청 제국은 황제 계승 문제를 둘러싸고 중대한 정치적 위기를 겪었다. 1643년 당시 홍 타이지의 뒤를 이을 유력한 후보는 홍 타이지의 동생 머르건 친왕 도르곤과 홍 타이지의 장남 파풍가 친왕 호오거였다. 이 두 사람을 추대하려는 세력이 첨예하게 대립하면서 팽팽한 긴장이 조성되었지만, 결국 황제의 자리에 오른 것은 코르친 몽골 출신의 보르지기트 붐부타이의 소생인 홍 타이지의 9남이었던 6살의 어린아이인 푸린이었다. 푸린은 너무 어렸기 때문에 황제의 숙부인 머르건 친왕 도르곤과 우전 친왕 지르가랑이 섭정을 맡았다. 그러나 실제로 청 제국을 이끌었던 인물은 머르건 친왕 도르곤이었다.[36]

이듬해인 1644년 이자성이 이끄는 농민 반란군이 북경을 점령하고, 명의 숭정제는 자살하는 변고가 일어났다. 이때 다이칭 구룬의 섭정 도르곤은 팔기의 거의 모든 병력을 동원하여 명나라를 정복하는 전쟁에 나섰다.

당시 명의 대군을 이끌고 산해관 일대를 지키던 오삼계는 진퇴양난에 빠졌고,[37] 이자성이 세운 순나라가 북경에서 약탈과 만행 등의 악행을 자행하자, 이에 충격을 받은 오삼계는 청에 투항하였다.[38] 청군은 산해관 지역에서 오삼계와 더불어 이자성의 군대를 대파하였다. 이에 이자성은 북경을 버리고 남쪽으로 퇴각하였고, 청군은 북경에 입성하였다.

이어서 청 제국은 아예 북경으로 천도했고, 그해 10월 30일에 자금성에서 이미 작년에 선양에서 다이칭 구룬의 황제로 즉위한 순치제의 즉위식이 거행되었다. 이 즉위식은 다이칭 구룬의 황제가 천명을 상실한 명나라의 주씨를 대신하여 중화제국의 새로운 수명천자(受命天子)가 되었음을 선언하는 의식이었다고 할 수 있다.[39] 이로써 장성 밖에서 이미 성립해 있던 다이칭 제국에 청 왕조로서의 성격도 덧붙여지기 시작했다.[40]

정복

 
청 제국의 산해관 통과전의 세력도와 강희제 시기의 청 제국 형세도

북경 입성 이후 청 제국은 명나라의 원수를 대신 갚아 준다는 명분을 내걸고 농민 반란군을 추격하였다.[41] 한편 초기의 성공에 고무된 청은 중원의 대부분을 점령하기도 전에 모든 남성들에게 변발을 하도록 지시했다.

청 조정은 변발의 강요가 한족 남성들 사이에서 불러일으킬 분노의 정도를 과소평가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족 남성들은 자신들의 전통적인 머리 모양을 청이 이해했던 문화적 정체성의 반영으로 보았을 뿐만 아니라, 앞머리를 깎는 것은 부모가 물려준 신체를 훼손하는 불효라고 받아들였다. 화중의 산지에서 청 관리늬 통치를 받아들였던 엘리트들은 반란을 일으킴으로써 1645년 초 섭정왕 도르곤이 예부에 공포한 칙령에 항거했다. 그들은 산악 요새로 후퇴하여 5~6년을 버티었고, 최후의 한 사람까지 저항했다.

양자강 하류 지역에서는 유혈 사태가 발생했다. 명의 유장 사가법(史可法)은 유려하고 유서 깊은 도시인 양주를 죽음으로 지킬 것을 명령했다. 1645년 5월 청군이 양주를 함락하자, 수많은 사람들이 살해당했고, 살아남은 사람들도 통제되지 않는 한족 병사들에게 강간당하고 살해당했다. 이러한 험악한 사례가 있었는데도 양자강 하류 지역의 지방 엘리트들은 변발 칙령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청군은 가정(嘉定)현에서 20만여 명이 넘는 사람들을 학살했고, 심지어 강음에서는 이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학살당했다고 전해진다.[42]

청 조정은 유교적 통치 수법을 어떻게 실행해야 하는가에 대한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과거 의정왕대신회의는 도르곤, 지르가랑, 그리고 오보이 섭정 치하에서 상당한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지식층의 의견은 대부분 무시되었고, 한족은 그저 피정복민의 하나일 뿐이었다.[43]

 
북경 정복 이후 각지에서 출연한 남명 정권들.

이자성과 장헌충의 농민 반란군은 오래지 않아 진압할 수 있었지만 남부 지방에서는[44] 타도되었던 왕조의 잔당 정권인 남명이 청 제국의 첫번째 경쟁자로 자리잡고 있었다. 통치 기간 내내 친왕에게 영지를 부여했던 명의 정책[주 4]은 1644년에 사망한 숭정제를 계승할 많은 후보자들을 남겨주었고, 이들이 명을 추종하는 신하들에게 주목을 받게 되면서 저항이 발생했다.

1644년 6월, 남경에서 복왕 주유숭은 명의 유신들에게 설득을 당해 마지못해 스스로 홍광제라고 선포했지먼, 청군에게 체포되어 죽게 되면서 그의 치세는 겨우 1년밖에 지속되지 못했다. 그 후 잇따라 몇 명의 친왕들이 저마다 명의 계승자를 자처했고, 다양한 준군사적 저항군이나 산채의 수장들로부터 은신처와 후원자들을 찾기 위해 중국 곳곳을 배회했다. 이들 중 가장 오래 존속했던 영명왕은 1646년에 영력제로 즉위한 후에 광동성, 광서성, 호남성 남부 지역으로 쫒겨다니다가 마지막에 버마로 도망가기 전까지 12년간 운남성에 있었다. 영력제가 오삼계에게 체포되어 1662년 5월에 처형됨으로써 명은 완전히 소멸되었다.[45]

쇠퇴와 멸망

 
1896년, 청 제국 강역도. 홍콩과 연해주, 아무르 이북지역, 중앙아시아의 이리지역, 카슈가르를 상실한 이후의 지도이다.

강희제 이후 옹정제·건륭제까지 3대에 걸쳐 주변 각국을 침공·정복하여 직접 지배하고 조공국(朝貢國)으로 삼아 일대 전성기를 이루었다. 삼대에 이은 청의 전성기를 강건성세(康乾盛世)라고 한다. 그러나 건륭 말기부터 백련, 천리의 난을 계기로 청 제국은 점차 쇠퇴하였다. 한편, 건륭제 즉위 시기에 그레이트브리튼 연합 왕국1792년 매카트니 사절단을 시작으로 이후 몇 차례에 걸쳐 중국에 사절단을 보내 문호 개방을 권유하였으나, 오직 광저우만 개항되었을 뿐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청 초중기에는 공행무역만이 실시되었다.

19세기 무렵에 이러한 편무역으로 인해 중국으로의 은 유출 정도가 심각하다고 판단한 영국계 동인도 회사가 삼각 무역을 실시했으나, 피해를 입은 청 제국에서 엄금론을 펼치며 임칙서를 무역항에 파견하고 아편을 소각하는 등의 조치를 취했다. 그러자 영국은 아편 전쟁을 일으켜 승리했다. 1842년 난징 조약으로 홍콩은 99년간 영국에 할양되었고 상하이 등 5개 항구가 강제 개항되었다. 이후 청에서의 이권 확보를 위해 서구 열강들이 쇄도해오면서 청 제국은 역사상 유례없는 난국을 맞는다.

1851년 홍수전이 기독교 성격의 사회운동인 태평천국 운동을 일으켰다. 태평천국은 외형상 홍수전이 야훼의 자식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아우라 자칭하면서 기독교를 표방했으나, 사실상 만주족 지배로부터의 한족의 독립, 토지의 균등한 분배, 만민 평등을 주장한 사회혁명이었다. 또한 당시 청 제국은 영국·프랑스와의 제2차 아편 전쟁을 겪고 있었다. 이후, 청 제국은 휴전 중재역할을 맡은 러시아 제국1860년 베이징 조약을 통해 연해주를 할양하고 베이징에 외국 공사관의 주재를 허용하였다. 서구열강세력들의 이권 침탈이 심화되었다. 태평천국 운동의 위세는 그러나 흥수전에 대한 우상화를 경계한 서구 열강과 이홍장 등의 같은 한족계 신사층을 파견한 청나라 조정의 협공으로 태평천국은 1864년 수도 천경이 함락되고 홍수전도 자살함으로써 그 막을 내렸다.

1860년대 이후에 전개된 양무운동증국번·이홍장 등 기술적 개혁의 필요성을 깨달은 한인 신사층의 주도로 시작되었으며, 군함과 서양식 대포 등 신식 무기를 제조하고 관련 공업을 진흥시킴으로써 중국 산업화의 기원이 되었다. 이홍장은 영국을 방문하여 빅토리아 훈장도 받았다. 사실 양무 운동은 관독상판제와 표면적인 개혁이라는 점 등 뚜렷한 한계 요인을 안고 있었다. 그 와중의 청일전쟁이 청 제국의 패배로 끝나자 양무 운동이 실패했음이 드러났고, 청의 반복된 패전으로 인해 청 제국을 둘러싼 열강의 각축은 더욱 치열한 양상을 띠었다.

1898년 캉유웨이·량치차오 등은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모델로 한 변법자강 운동을 통해 입헌군주제를 확립하고자 했으나 서태후·위안스카이·이홍장 등 보수세력의 반격(무술정변)으로 수포로 돌아갔다. 이후 1899년에 대규모로 일어난 의화단 운동으로 일본 등 열강 8국의 연합군이 1900년 베이징에서 격돌한 북청사변을 겪고 베이징 의정서를 체결하며 청 제국은 위기에 내몰렸다. 한편 일본이 러일 전쟁에서 승리하고 남만주에 대한 지배권을 획득하여 위협요소가 되었다. 한편 러일전쟁에서 러시아의 패배로 사건의 심각성을 자각한 보수파와 서태후조차 외국으로 유학생을 파견하여 선진국의 헌법과 의회 제도 등을 시찰하였으며, 국내적으로 과거 제도를 폐지하고 각지에 대학을 세워 신학문의 연구 기반을 조성하는 한편 신식 군대도 신설했다. 그러나 이미 각지에서 만주족을 비난하고 한족의 공화국을 지향하는 혁명세력이 움트고 있었다. 이들 모두는 일본의 일부 지식인이 주장한 중일 연대론(中日聯帶論)과도 상호연계되기도 했다.

무창기의 이후 순친왕 자이펑을 위시한 기존 청 제국의 권력층은 사태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혼란에 빠졌다. 청 제국의 대처가 미비한 와중에 1912년 1월 1일 난징에서 민주공화제를 표방한 중화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이때 위안스카이는 입헌군주제의 옹호자임을 자처하며 청 제국의 권력을 장악했으나, 혁명파와의 교섭 과정에서 청 황제의 퇴위를 조건으로 자신이 임시 대총통으로 즉위하는 것에 동의하여 공화제로 돌아섰다. 협상에 나선 융유태후는 군주가 국정에 간섭하지 않는 방법을 제시하여 황제의 직위만이라도 보전하려 했지만 격렬한 반대에 부딪혔다. 결국 1912년 선통제의 퇴위와 함께 청 제국은 공식적으로 소멸하였다.[46], 1924년, 펑위샹의 정변으로 인해 청나라 소조정도 해체되었다.

외교

청나라 초, 정성공 등 청나라에 저항하는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서, 다시 쇄국정책(海禁, 하이진)을 실시하였다. 마침내, 1683년 7월, 정성공의 손자 정극상이 투항하고 청 제국은 타이완 섬을 평정하였다. 1684년, 청나라 조정은 정식으로 바다를 열어, 백성들에게 대외무역을 허락하였다.[47] 또한, 월동(粵東)오문(澳門)(일설에는 광저우), 복건(福建)의 장주부(漳州府), 절강(浙江)의 영파부(寧波府), 강남(江南)의 운대산(雲台山)에 각각 월해관(粵海關), 민해관(閩海關), 절해관(浙海關), 강해관(江海關)을 설립하고 대외무역을 관리하고 관세를 징수하는 기관으로 삼았다. 강절민월 4대 해관은 각자 소재지 성(省)에 소속된 해관 항구를 다스렸으니, 통상적으로 10여개에서 수십개의 해관 항구를 직할로 두었다.[48]

국제사회를 보는 시각에서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 아니라 중국도 세계의 일부라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일으킨 중국은 1876년 10월 영국에 처음으로 공사를 파견하는 새로운 중국 외교사를 썼다. 중국이 외국에 외교사절을 파견한 것은 중국의 대외관계에 중대 변혁이 일어난 것이며, 중국이 근대 서양 국제법을 인정하고 국제사회에 진입한 의미를 지니는 변화였다. 이후 청조는 30년 동안 모두 18개 국가에 연인원 68명의 공사 또는 부사(副使)를 파견했고, 1877년부터는 57개 지역에 영사를 파견했다.[49]

경제

명 말에서 청 초에 이르는 시기에, 시장이 확대되고 상인들의 교역 규모가 커지면서 기존에 가족 중심으로 이뤄지던 회사들이 합자(合資) 형식으로 확대되기 시작했다. 청 초기에는 극장, 광산, 연안 및 해외 운송, 상업 작물, 전당업 등의 사업에 자금을 제공하는 합자회사들이 등장하였다.[50] 북경, 성도 등의 대도시를 중심으로 상품과 서비스를 제공하는 직인들이 모이는 회관(會館)들이 생겨났다. 회관은 숙박이나 창고 등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한편, 상인과 기술자들이 교역을 조정하는 기구의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명 말부터 등장한 이런 회관들은 18세기 무렵에는 청 전역으로 확대되었다.[51]

외국 무역이 활발해져, 은의 유입도 크게 증가하였다. 청은 18세기 초에 인두세(정은)를 따로 거두지 않고, 토지세(지은) 속에 포함시켜, 세금 제도를 단순화한 지정은제를 시행하였다.

18세기 중엽에 선교사를 앞세운 서구열강이 교역을 원하자, 청나라는 교역항을 광저우로 한정하여 서양 상인들을 통제하고, '공행'이라는 특허 상인의 조합에 대외 무역의 독점권을 주었다. 공행무역 등으로 서양 상인들의 무역량이 적었을거라 생각하겠지만, 오히려 그 반대로 청나라의 차와 생사는 유럽에서 많은 이익을 올릴 수 있었기 때문에 서구 열강과 청의 무역량은 날이 갈수록 증가하였다. 한편, 이 시기는 유럽의 상인들 중에서는 영국 동인도 회사가 청나라와의 무역을 독점해 가고 있었을 무렵이었다. 무역량이 늘어남에 따라 영국은 청나라와 무역에서 '무역 역조 현상'이 두드러졌다. 막대한 양의 은을 청에 지불하게 된 영국은 이를 개선하기 위해 청나라에게 무역 제한조치의 철폐를 요구하였다.

19세기가 되자, 영국은 무역적자를 메우기 위해 동인도 회사를 앞세워 인도에서 생산되는 아편을 중국에 수출하였다. 매년 급격히 영국 동인도 회사의 아편 수출양이 증가하자, 청나라는 국내의 아편중독자가 늘어나는가 하면, 막대한 양의 은이 빠져나가게 된다. 이무렵 청나라는 '은본위제'를 실시했었는데, 청나라는 영국과의 '아편 무역'으로 인해 은의 급격한 감소로 국가체제의 위기를 맞게된다. 1830년대에는 은의 가격이 두 배 이상 폭등하고, 그 결과 은으로 세금 납부하던 농민들과 상인들은 부담이 두 배로 늘어났고, 결국 세금이 제대로 징수되지 않아, 국가 재정이 곤란한 지경에 빠져 버린다.

1840년 제1차 아편전쟁 이후, 외세 열강세력들의 침탈이 본격적으로 심화되면서 청나라의 경제상황은 더욱 악화되게 된다.

청나라때에는 양자강 중류 지역이 최대의 쌀 재배 지역이 되고, 감자, 양파, 땅콩, 옥수수 등의 외래작물이 재배되었다. 이러한 농업에서의 상품 작물 재배와 함께 면, 제지, 제당 등의 분야에서 매뉴팩처가 발달하였다.

문화

 
건륭제문수보살로 묘사한 그림. 청더, 즉 열하에 있던 티베트 불교 사원 보녕사에 걸려 있던 불화다. 이 그림 가운데에는 건륭제가 문수보살의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건륭제를 문수보살로 묘사한 불화는 현재 여섯 또는 일곱 점 정도 넘아 있으며 스웨덴, 베이징, 선양, 라싸 등에 보관되어 있다.[52]

만약 청 제국의 직성 지역에서만 사료를 채취해서 보면 청 제국 군주는 한화에 성공한 '중국'의 수명천자처럼 보이지만 직성 이외의 지역에서 사료를 채취해서 보면 전혀 다른 모습이 떠오른다. 몽골 유목민의 초원 세계에서는 카안(몽골어: ᠬᠠᠭᠠᠨ Qa'an)의 이미지, 티베트를 중심으로 한 티베트 불교도의 세계에서는 불법의 수호자인 전륜성왕이자 '문수보살 황제'라는 이미지, 타림 분지의 위구르 무슬림 세계에서는 이슬람의 보호자라는 이미지를 각각 갖게 된다. 그리고 기인의 세계에서는 누르가치의 계승자인 한(汗, 만주어: ᡥᠠᠨ Han)으로 표상되었다.[53]

청 제국은 중원의 방대한 한족 지배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 때문에 중원에서 중국의 전통문화와 여러 제도를 답습하고, 한족의 협력을 얻어 지배체제를 확립하고자 하였다. 특히 한족의 지식인층을 회유하여 관심을 정치와 사회문제로부터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서 그들을 동원하여 대편찬 사업을 추진하였다. 강희 연간의 『강희자전(康煕字典)』, 옹정의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 건륭의 『사고전서』는 그렇게 하여 생긴 것이다.

반면에 반(反)청적이라 판단한 사상에는 용서 없는 탄압을 가하여 이른바 문자의 옥을 일으켰다. 실증주의(實證主義)에 투철한 실사구시(實事求是) 학풍인 고증학은 이미 명대에 시작을 보았지만 청조의 사상 탄압은 한인 학자로 하여금 더욱더 고증학으로 나아가게 하여 정치 문제로부터 도피시켰다. 그러나 고증학은 그 자신 일종의 과학적 객관주의이며, 서양 과학문명의 영향도 더해져 학문의 전분야에 새로운 국면이 전개되었다. 가령 실제의 측량으로 제작된 황여전람도(皇與全覽圖) 등은 이러한 학풍의 소산인 것이다.

또한 청대에는 소설과 희곡의 발달이 한층 더 현저하여 『홍루몽(紅樓夢)』 『유림외사(儒林外史)』 『요재지이(聊齊志異)』 등 걸작이 나왔고, 희곡도 풍성하게 연출되었다. 회화에서는 중국의 전통적 기법 외에 카스틸리오네에 의하여 서양의 화법(畵法)이 받아들여졌고, 건축은 원명원(圓明園)과 같이 베르사유 궁전에도 비길 만한 훌륭한 건축물들이 건설되었다.

의복의 큰 특징은 단추가 있다는 것이다. 또한 속은 바지이고 옆으로 트어져 있는 형식인데 이때 전족이 몸에 나쁨에도 불구하고, 귀족은 물론 서민까지 퍼져있었다.

종교

기독교

경교와 천주교

중국에서는 일찍이 당나라 시대에 네스토리우스파[京敎]선교사들이 입국하여 대진사라는 교회를 세우고 선교활동을 하였다. 천주교는 명나라때부터 마테오 리치 신부(1552년-1610년)등의 예수회 선교사들의 전교활동으로 소개되었다. 천주교 선교사들이 중국에서 전교하면서 겪었던 어려움 중 하나는 조상 제사 문제였다. 조상 제사 문제는 1704년 조상 제사에 반대하는 도미니쿠스 수도회와 조상 제사를 중국인전통으로 존중하는 예수회간의 신학논쟁으로 이어지는데, 결국 교황청에서 조상 제사를 천주교 교리에 어긋나는 것으로 규정하여 금지함에 따라 중국의 천주교 신자들과 선교사들은 탄압을 받게 되었다.[54] 천주교 선교사들은 유럽에 중국 문화를 소개하여 유럽 지식인들의 중국연구열을 높이는 계기를 만들었으며, 중국인들과 똑같은 을 입는 등 중국전통 문화를 존중하였다.

개신교

개신교중국에서 선교활동을 하였다. 18세기 독일에서 태동한 모라비안 교인들은 중국에서 선교활동을 하였으며, 1860년에는 영국제임스 허드슨 테일러와 그의 아내 마리아 테일러가 선교활동을 하였다. 이들은 중국사람들과 똑같은 을 입음으로써 중국인들에게 다가섰는데, 당시 개신교 선교사들에게는 파격적인 일이었다. 허드슨 테일러는 1865년 중국내륙선교회(영어: China Inland Mission,CIM)를 결성하여 1898년 중국 후난성을 마지막으로 선교활동을 하였다. 그의 뒤를 이은 중국 내지선교회 선교사들은 1949년 중국 공산당중화인민공화국정부를 수립하여 1951년에 철수할 때까지 활동하였으며, 1964년 OMF(영어: Overseas Missonary Fellowship)으로 선교회의 이름을 바꾸었다.[55]

청나라의 중앙 관제

중앙 정치 제도

청나라명나라의 정치제도와 관료제도를 팔기군과 만한병용을 제외하고는 동일하게 사용했다.

행정구역

 
가경 25년(1820년) 시기, 청나라의 행정구분도.
 
광서 34년(1908년) 시기, 청나라의 행정구분도.

청나라 초기 행정구역은 18개의 성(省)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각 성은 7~13개의 부(府)로 나뉘었고, 각 부는 다시 7~8개의 현(縣) 또는 주(州)로 분류되었다.

건륭제 말기인 18세기 말 청나라에는 1,281개의 현과 221개의 주가 있었다.[56]

통치 행정 구역의 구분

통치 행정 구역의 구분은 성-부-주-현-청 (省-府-州-縣-廳)이었고, 성에는 민정과 감찰을 위해 포정사(布政使) ·안찰사(按察使)가 있었다. 또한, 1-3개 성에 총독 1명이, 1개 성에 순무 1명이 있었다. 그리고 각 성에는 장관급에 해당하는 제독 (군사), 총원 (교육), 학정사 (?), 도원이 있었다. 그리고 부 ·주 ·현에는 지부(知府) ·지주(知州) ·지현(知縣)이 수장이었다.

같이 보기

각주

노트

  1. 1819년, 미상의 편찬자가 태조고황제(太祖高皇帝) 실록을 필기체 만주문자로 번역한 《Taidzu Dergi Hūwangdi i Ben Gi Bithe》에는 암바 칭 구룬(만주어: ᠠᠮᠪᠠ
    ᠴᡳᠩ
    ᡤᡠᡵᡠᠨ
    Amba Cing Gurun)으로 표기했다.
  2. Pamela Kyle Crossley 「신청사에 대한 조심스러운 접근」, 윤영인 편, 『외국학계의 정복왕조 연구 시각과 최근 동향』, 동북아역사재단, 2010, 1쪽, "20세기 초 중국의 민족주의 역사가들은 청대사를 “왕조,” 즉 단순히 중국사의 한 시기로 규정했고 이러한 관점은 곧바로 영어권 학계에 전해졌다. 이 세대가 남긴 놀라운 학문적 유산은 아직까지도 우리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는데, 바로 청조의 시종(始終) 연도이다. 지금 학자들은 청대가 중원의 정복으로 시작하여 1911년 10월 중국 민족주의자들의 봉기에 끝났다는 견해를 다시 검토하고 있다. 청대를 “1644년부터 1911년까지”로 보는 것은 중국의 강고한 민족주의적 역사관이 낳은 직접적인 결과이다."
  3. 윤영인; 이용규; 김선민; 토마스 알슨; 미할 비란; 테무르; 파멜라 크로슬리; 이시바시 다카오. 《외국학계의 정복왕조 연구 시각과 최근동향》. 동북아역사재단. 218~219쪽. ISBN 9788961871976. , 청말에는 국호인 대청(大淸)에 대한 만주어 표기가 청 초기의 ‘대청(Daicing)’에서 ‘대대청(Amba Daicing)’으로 변화하고 있다.
  4. Reuven Amitai-Preiss, David O. Morgan(1999), "The Mongol Empire & its Legacy", BRILL, pp. 260 - 73., 오카다 히데히로는 명 황제가 명나라의 황자들을 각지의 제후왕으로 분봉하여 군대를 맡긴 것은 이나 송대의 전례가 없는데, 이는 명나라가 몽골제국 스타일의 분봉을 모방하여, 중국식 왕조임에도 부족-봉건적 외관을 가지게 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각주

  1. Crossley, Pamele K.(2009), “The Influence of Altaicism on East Asian Studies", 194~196쪽.
  2. 李國祁. 《中國歷史》. 三民出版社. ISBN 9789571406565. 
  3. 李國祁. 《中國歷史》. 三民出版社. ISBN 9789571406565. 
  4. 李國祁. 《中國歷史》. 三民出版社. ISBN 9789571406565. 
  5. , 《고종실록》 39권, 광무 3년 9월 11일 양력 4번째기사, "光緖二十五年八月初七日。 大淸帝國欽差議約全權大臣二品銜太僕寺卿徐壽朋。"
  6. 흠정헌법대강》"一、大清皇帝統治大清帝國,萬世一系,永永尊戴。"
  7. 효종실록》 8권, 순치 9년 3월 30일 신축 2번째기사, "遽遭李子成之亂, 且綠淸朝侵伐南京, 弘光天子被害, 天下洶擾, 小商等不敢回歸, 轉投交趾, 行商爲業, 今至七年。 竊聞, 淸朝, 愛民如子, 故將還本土, 正月二十二日自日本發船, 二月初九日到貴國地方, 遇風船敗, 同伴二百十三人皆溺死, 存者僅二十八人。 懇祈老爺, 大發慈悲, 直送小商等于日本, 則庶可得生也。 若送北京, 道路逾遠, 二三年當到本土, 而其全生得達, 不可必也。 自此距日本, 纔數日程, 自日本距南京, 亦數月程, 父母、妻子重得相逢, 恩莫大焉。 伏乞稟于國王殿下, 施行云云。卓男悉記所見, 且將供辭, 報于濟州牧使李元鎭, 元鎭馳狀以聞。
  8. 미중천진조약》, "茲中華大清國與大亞美理駕合眾國因欲固存堅久真誠友誼,明定公正確實規法,修訂友睦條約及太平和好貿易章程,以爲兩國日後遵守成規,爲此美舉。"
  9. 石橋秀雄,「大淸國の國書]」(『歷史と地理』, 世界史の硏究 162, 山川出版社, 1995)
  10. Pamela Kyle Crossley 「신청사에 대한 조심스러운 접근」, 윤영인 편, 『외국학계의 정복왕조 연구 시각과 최근 동향』, 동북아역사재단, 2010, 1쪽, "滿淸이라는 용어는 과거 제국의 무능력, 부패, 압제에 대한 비난과 함께 중국어 저술에서 널리 사용되었다."
  11. Willia T Rwe. 《하버드 중국사 청 중국 최후의 제국》. 21세기 하버드 중국사 시리즈. 너머북스. 11쪽. ISBN 978-89-9460627-9. 
  12. William T. Rowe. 《하버드 중국사 청 중국 최후의 제국》. 21세기 하버드 중국사 시리즈. 너머북스. 12쪽. ISBN 978-89-9460627-9. 
  13. 구범진, 《청나라, 키메라의 제국》 제4장 청 제국과 러시아, 민음사, 225쪽
  14. William T. Rowe. 《하버드 중국사 청 중국 최후의 제국》. 21세기 하버드 중국사 시리즈. 너머북스. 356~365쪽. ISBN 978-89-9460627-9. 
  15. Crossley, Pemela Kyle; 양휘웅. 《만주족의 역사》. 돌베게. 374쪽. ISBN 9788971995310. 
  16. Reuven Amitai-Preiss, David O. Morgan, 《The Mongol Empire & its Legacy》, BRILL, 1999, pp. 260 ~ 73
  17. M. Shimada, Shinchō Mōko Rei no Kenkyū
  18. 윤영인; 이용규; 김선민; 토마스 알슨; 미할 비란; 테무르; 파멜라 카일 크로슬리; 이시바시 다카오. 《외국학계의 정복왕조 연구 시각과 최근동향》. 동북아역사재단. 196쪽. ISBN 9788961871976. 
  19. 구범진. 《청나라, 키메라의 제국》. 서울대 인문 강의. 민음사. 61~66쪽. ISBN 9788937484940. 
  20. 구범진. 《청나라, 키메라의 제국》. 서울대 인문 강의. 민음사. 68~71쪽. ISBN 9788937484940. 
  21. 이훈. 《만주족 이야기》. 너머북스. 167~168쪽. ISBN 9788994606514. 
  22. 구범진. 《청나라, 키메라의 제국》. 서울대 인문 강의. 민음사. 74~75쪽. ISBN 9788937484940. 
  23. 구범진. 《청나라, 키메라의 제국》. 서울대 인문 강의. 민음사. 76쪽. ISBN 9788937484940. 
  24. 구범진. 《청나라, 키메라의 제국》. 서울대 인문 강의. 민음사. 76쪽. ISBN 9788937484940. 
  25. 이훈. 《만주족 이야기》. 너머북스. 151~152쪽. ISBN 9788994606514. 
  26. 이훈. 《만주족 이야기》. 너머북스. 152쪽. ISBN 9788994606514. 
  27. Reuven Amitai-Preiss, David O. Morgan, 《The Mongol Empire & its Legacy》, BRILL, 1999, pp. 260 - 73
  28. 구범진. 《청나라, 키메라의 제국》. 서울대 인문 강의. 민음사. 76~77쪽. ISBN 9788937484940. 
  29. 기세찬(2017), 《신청사 연구사 분석을 통한 담론의 함의》, 군사연구 제144집, 19쪽.
  30. 이훈. 《만주족 이야기》. 너머북스. 168~169쪽. ISBN 9788994606514. 
  31. 병자호란을 끝낸 건 천연두였다[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32. 구범진. 《청나라, 키메라의 제국》. 서울대 인문 강의. 민음사. 77쪽. ISBN 9788937484940. 
  33. 구범진. 《청나라, 키메라의 제국》. 서울대 인문 강의. 민음사. 77~78쪽. ISBN 9788937484940. 
  34. Mark C. Elliott, “Whose Empire Shall It Be?: Manchu Figurations of Historical Process in the Early Seventeenth Century”, Lynn Struve ed., Time, Temporality, and Imperial Transition, Honolulu: University of Hawaii Press, 2005, pp.31-63.
  35. 박민수(2018),《홍타이지 시기(1627-1643) 만주의 對 중국 전략》, 國防部 軍史編纂硏究所, 229쪽.
  36. 구범진. 《청나라, 키메라의 제국》. 서울대 인문 강의. 민음사. 78~79쪽. ISBN 9788937484940. 
  37. 구범진. 《청나라, 키메라의 제국》. 서울대 인문 강의. 민음사. 81쪽. ISBN 9788937484940. 
  38. William T. Rowe. 《하버드 중국사 청 중국 최후의 제국》. 21세기 하버드 중국사 시리즈. 너머북스. 43쪽. ISBN 978-89-9460627-9. 
  39. 구범진. 《청나라, 키메라의 제국》. 서울대 인문 강의. 민음사. 81쪽. ISBN 9788937484940. 
  40. 윤영인; 이용규; 김선민; 토마스 알슨; 미할 비란; 테무르; 파멜라 크로슬리; 이시바시 다카오. 《외국학계의 정복왕조 연구 시각과 최근동향》. 동북아역사재단. 218쪽. ISBN 9788961871976. 
  41. 구범진. 《청나라, 키메라의 제국》. 서울대 인문 강의. 민음사. 82쪽. ISBN 9788937484940. 
  42. Dennerline, The Chia-ting Loyalists; Wakeman, "Locakism and Loyalism during the Ch'ing Conquest of Kiangnan" in Wakeman and Grant, eds., Conflict and Control.
  43. William T. Rowe. 《하버드 중국사 청 중국 최후의 제국》. 21세기 하버드 중국사 시리즈. 너머북스. 48~51쪽. ISBN 978-89-9460627-9. 
  44. 구범진. 《청나라, 키메라의 제국》. 서울대 인문 강의. 민음사. 82쪽. ISBN 9788937484940. 
  45. William T. Rowe. 《하버드 중국사 청 중국 최후의 제국》. 21세기 하버드 중국사 시리즈. 너머북스. 51~52쪽. ISBN 978-89-9460627-9. 
  46. 정세련, 《中國 國體變革期 滿洲族 團體의 政治活動, 1901-1924》, 2014, 32쪽.
  47. 《淸聖祖實錄》卷一一七,第10頁
  48. 劉軍《財經問題硏究》(大連)2012年11期 第21-30頁
  49. 박승준 (2010). 《한국과 중국 100년》. 서울: 기파랑. 14쪽. ISBN 978-89-91965-12-6. 국제사회를 보는 시각에서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 아니라 중국도 세계의 일부라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일으킨 중국은 1876년 10월 영국에 처음으로 공사를 파견하는 새로운 중국 외교사를 썼다. 중국이 외국에 외교사절을 파견한 것은 중국의 대외관계에 중대 변혁이 일어난 것이며, 중국이 근대 서양 국제법을 인정하고 국제사회에 진입한 의미를 지니는 변화였다. 이후 청조는 30년 동안 모두 18개 국가에 연인원 68명의 공사 또는 부사(副使)를 파견했고, 1877년부터는 57개 지역에 영사를 파견했다. 
  50. 나퀸 (1998), 83쪽
  51. 나퀸 (1998), 84-85쪽
  52. 구범진 (2012). 《청나라, 키메라의 제국》. 서울대 인문 강의. 민음사. 32쪽. ISBN 9788937484940. 
  53. 구범진 (2012). 《청나라, 키메라의 제국》. 서울대 인문 강의. 민음사. 225쪽. ISBN 9788937484940. 
  54. 《5시간만에 읽는 교회사》/유현덕 지음/작은 행복 p.181
  55. “한국 OMF홈페이지에 올라온 OMF역사 설명문”. 2009년 4월 24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9년 7월 6일에 확인함. 
  56. 나퀸 (1998), 31쪽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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