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명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가 (1888–1968)

홍명희(洪命憙[1], 1888년 5월 23일 ~ 1968년 3월 5일)는 독립운동가 이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정치가이다. 해방 후 1948년 월북하여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으로도 활동했다. 1948년 9월부터 1962년까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내각 부수상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의 초대, 제3대 부위원장(1948년 9월 - 1957년, 1958년 10월 - 1968년)을 역임하였다. 그는 일제강점기 당시에 이광수, 최남선과 더불어 조선의 3대 천재로 대표되었던 인물이었으며[2], 소설 《임꺽정》의 작가로 유명하다. 본관은 풍산. 호는 벽초(碧初), 필명은 가인(假人) 또는 가인(可人)·백옥석(白玉石)이다. 일생동안 소설창작, 언론활동, 정치활동, 독립운동 등의 다양한 활동을 하였다.

홍명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초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임기 1948년 9월 9일 ~ 1953년 9월 9일
주석 김두봉 북조선 국가원수
총리 김일성 북조선 총리

이름
별명 호(號)는 벽초(碧初)
필명 홍가인(洪假人) 또는 홍가인(洪可人)·백옥석(白玉石)
신상정보
출생일 1888년 5월 23일
출생지 조선 충청도 괴산군
사망일 1968년 3월 5일(1968-03-05)(79세)
사망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노환으로 병사
경력 소설가 출신 정치가
조선로동당 명예대표고문위원
정당 조선로동당
부모 홍범식(부)
은진 송씨 부인(모)
조경식(계모)
배우자 여흥 민씨 부인
자녀
3남 3녀
  • 장남 홍기문(洪起文)
    차남 홍기무(洪起武)
    3남 홍기하(洪起夏)
    장녀 홍주경(洪姝瓊)
    차녀 홍무경(洪茂瓊)
    3녀 홍계경(洪季瓊)
친인척
친조부, 고모부, 사위
종교 없음(무신론)

생애 편집

생애 초반 편집

출생과 가계 편집

홍명희는 충청도 괴산군 괴산읍 동부리(괴산 홍범식 고가)에서 출생하였으며[3], 근처 제월리로 이주했으며 지난날 한때 충청도 괴산군 증평면 증평리에서도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다. 제월리에는 그의 일가가 살던 생가가 존재하고 있다.[3]

그의 가계는 풍산 홍씨선조인목왕후의 딸인 정명공주(貞明公主)와 남편 영안위 (永安尉) 홍주원(洪柱元, 1606~1672)의 차남 홍만형(洪萬衡, 1633~1670)이 그의 10대조이다.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친정인 홍봉한, 홍인한 형제는 홍주원의 장남 홍만용(洪萬容, 1631~1692)의 증손이고, 방계 선조들 중에는 정조 때의 세도재상 홍국영도 있다. 또한 다산 정약용의 처가 역시 그의 집안의 방계 혈족들이었다.[4] 고모 홍정식은 독립운동가 조완구의 아내이기도 했다.[1]

홍명희의 증조부 홍우길은 장원급제후 대사헌, 예조판서 이조판서를 지냈고, 할아버지 홍승목은 정2품 중추원 참의를 지냈으나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이후 조선총독부가 주는 작위를 받았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인 금산군수 홍범식은 한일합방에 분개하여 자결한다. 어려서 생모를 잃고, 아버지 홍범식은 조씨와 재혼했으며, 계모 조씨에게서 이복 동생들이 태어났다.

생모 은진 송씨(恩津 宋氏, 1871~1890)는 군수 송은로(宋殷老)의 딸로,[1] 송시열과 함께 서인의 영수였던 동춘당 송준길(宋浚吉, 1606~1672)의 9대손이다. 외숙 송종면(宋鍾冕, 1866~?)도 문과 급제자였다.[5]

1900년에 참판 민영만(閔泳晩, 1863~1916)[6]의 딸 여흥 민씨(驪興 閔氏, 1885~1953)와 결혼하였다.[1][7] 장인 민영만은 고종(高宗, 1852~1919)의 외조부 민치구(閔致久, 1795~1874)의 형 민치대(閔致大)의 손자이며, 민선호(閔璿鎬)의 아들이다. 명성황후 민씨(明成皇后 閔氏)순명효황후 민씨(純明孝皇后 閔氏) 집안과도 그리 멀지 않다.[8]

학창시절과 독립운동 활동 편집

1901년부터 1906년 일본으로 가기 전까지 중경의숙에서 학문을 공부하고 문학에 처음 접함. (부친은 법학을 하길 바랬으나 문학을 더 좋아함.)

그는 일찍이 일본으로 유학, 일본다이세이 중학(大成中學)에서 수학하였다.[9]


1910년 8월 29일 그의 아버지 홍범식대한제국의 관료로 경술국치에 치욕을 느껴 자결하였다. 당시 일본에서 공부하던 홍명희는 아버지의 자결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아 학업을 포기하고 조선에 돌아온다.[10] 그가 부친상 중인 1911년 4월에 일본 문예지에 게재한 일본어 단편 소설 "유서"가 근래 발굴되었다.[11]

그는 항일의식을 자결로 실천한 아버지가 남긴 '일본 제국주의에 협력하지 말고 저항하라'는 유언을 그대로 받들어 실천하였다. 1919년 3.1운동에 괴산에서 충청북도 최초로 참여하였다.[12] 상하이로 건너가서는 이광수를 다시 만나기도 했다. 이때 그는 이광수와 친밀하게 지내며 그에게 톨스토이를 권했다고도 한다.[13] 홍명희는 조소앙, 이광수 등과 함께 상하이에서 궁핍한 생활을 계속하였는데, 이광수는 '도저히 상하이 생활을 못하겠다'고 선언하고는 귀국길에 오른다. 하지만 홍명희는 이광수를 버리지는 않았다.[14]

항일 독립운동으로 수차례 옥고를 치르면서도 그는 동아일보 편집국장과[15] 시대일보 사장을 역임했다. 또한 이승훈이 설립한 오산학교 교장 근무, 아들 홍기문과 함께 참여한 신간회 결성등의 업적도 남겼다.

아들 홍기문의 증언에 의하면 맑스주의를 공부한다며 원서를 읽고, 가와카미 하지메(河上肇, 1879~1946)야마카와 히토시(山川均, 1880~1958) 등의 책을 사서 보기도 했다고 한다.[16] 또 1920년대 중반에는 조선 공산당 비밀 당원이었다가 출당 조치를 당하기도 했다고 한다.[17] 이로 볼때 그가 적극적인 공산주의 활동을 한 적은 없는 것 같지만, 상당히 우호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은 것은 사실로 보인다.

1927년현대평론》이 창간되자, 그 창간호에 이관용(李冠鎔)·안재홍·김준연·이순탁(李順鐸)·백남운(白南雲)·이긍종 등과 함께 참여하였다.[18] 1928년 11월 21일 소설 임꺽정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13년에 걸쳐 조선일보에 연재된 것을 비롯해 1930년대 그가 쓴 거의 모든 글은 조선일보와 자매지 '조광'에 발표됐다.

소설 임꺽정은 '살아 있는 최고의 우리말사전'이라 불리었는데, 임꺽정 저자 홍명희의 투옥과 개인 사정 등으로 연재가 4차례 중단됐으며, 1940년 조선일보가 폐간된 뒤에는 '조광'에 발표됐다. 1940년 일제의 가혹한 탄압에 못 이겨 조선일보에 연재하였던 소설 '임꺽정'을 중단하고 고향으로 내려가 칩거, 은둔생활을 지냈다.

1941년에 임전대책협의회(臨戰對策協議會)[19], 1945년에는 언론보국회(言論報國會)[20]이광수(李光洙, 香山光郞), 최남선(崔南善) 등과 나란히 참여하여, 그도 친일 시비에서 완전히 자유롭기는 어렵다.

광복 이후 편집

사회운동 편집

1945년 해방 뒤, 벽초는 조선문학가동맹 중앙집행위원장을 역임하면서[21] 사회주의 운동을 했다. 1945년 12월 19일 서울운동장에서 개최된 임정개선환영대회에서 축사를 하였다.[22]12월 23일 오후 2시 김구가 주관하는 순국선열추념대회에 참여하였다.[23] 순국선열추념대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23]

1945년 12월말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한반도에 대한 5년간의 신탁통치가 결정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12월 29일 서울신문과의 기자회견에서 반탁운동을 전개할 것을 역설했다.[24] 김구와 임시정부 측이 신탁통치안에 반발하여, 강력한 반탁운동을 추진하면서 12월 30일 결성된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信託統治反對國民總動員委員會)」에 홍명희도 박헌영 등과 함께 참여하여 중앙위원과 상임위원(常任委員)이 되었다.[25][26] 또 같은 해 12월 30일에 40여 개의 좌익단체가 모여 「반파쇼공동투쟁위원회」 결성대회를 열었는데 그가 위원장이 되어 신탁통치안 철폐요구 성명서를 채택했다.[27] 그러나 신탁통치가 후견통치라는 것과 분단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임을 인식하고 반탁운동에서 탈퇴하고 찬탁으로 돌아섰다.[28]

1947년 7월에 여운형이 암살된 이후[29] 홍명희가 근로인민당의 당수가 되어 활동하였으나 홍명희의 인기는 여운형에 댈 것이 못 되었다. 이후로도 민주통일당(民主統一黨), 민주독립당(民主獨立黨) 등 군소 정당의 대표를 맡았으나 정치적 역량 부족으로 세력 확대에는 실패했다.[30]

단정수립 반대와 남북협상 참여 편집

 
1948년 8월, 황해도 해주에서 열린 '인민대표자대회'. 왼쪽부터 백남운, 허헌, 박헌영,홍명희.

1947년 11월 총선 실시 및 감시를 위해 입국하는 UN위원단 환영대회에 명예회장 이승만, 회장 조소앙에 이어 부회장으로 참여하였다.[31] 1948년 1월 UN한국위원단이 도착하면서 단독정부 수립 불가피론과 남북협상론이 나오자 그는 남북협상을 지지하였다.[32]

그는 1945년 12월 김일성(金日成), 무정(武丁) 두 사람의 입경(入京) 환영준비 위원장을 맡은 바 있는데,[33] 그들의 입경은 성사되지 않았지만 김일성은 이때부터 홍명희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대체적으로 보아 중도좌파에 해당하는 인물인 홍명희는 1946년 봄부터 북한공산당에 포섭되었다고 하며, 1946년 3월말과 8월에 두 차례 비밀리에 북한을 방문하여 김일성 등 지도급 인사들을 만났고, 이들의 요청에 응하여 남한에서의 정치 활동을 했다는 흔적이 많이 보인다. 그의 비밀 방북에는 일찍부터 공산주의자가 된 둘째 아들 홍기무의 역할이 있었다고 한다. 1947년 11월 중순 세 번째로 방북하였고, 돌아온 이후로 남한 단독 총선 반대와, 남북 협상 성사를 위해 적극 노력하였다. 1948년 4월 김구의 방북은 성시백(成始伯, 1905~1950)의 공작도 있었지만 홍명희의 설득이 결심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고 한다.[34]박갑동은 남로당의 홍남표(洪南杓, 1888~1950)[35]가 홍명희를 시켜 김구가 방북하도록 공작을 하게 했다고 한다.[36]

홍명희는 김구 등의 방북 직전인 1948년 2월에도 비밀리에 북한을 방문하고 왔다고 하는데,[37][38] 소련군의 군사위원이었던 레베데프 (Nikolai Lebedev, 1901 – 1992) 소장이 남긴 "레베데프 비망록"이 1994년 공개되면서 1948년의 남북정치협상은 소련군의 치밀한 정치공작에 따른 것이었다고 밝혀졌다.[39] 그는 1948년 4월 남북협상차 방북하는 김구, 김규식 등과 같은 때 방북하였으나 돌아오지 않고 북한에 눌러 앉았다.[40][41]

 
1948년 9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초대 내각, 홍명희 (앞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

북한에 남은 홍명희는 몇달 뒤인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에 남한과 미국을 격렬히 비난하는 대남방송을 하였다.[42]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의 정치활동 편집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잔류하던 홍명희는 1948년 9월 9일, 북한 부수상(副首相)에 선임 되었다.[43]

이후 노동당 군사위원회 위원.[44], 내각 부수상 등으로 주요정치활동을 하였으며, 한국전쟁에 반대한 인물들 중 한명으로 알려져 있다.

1949년 1월 평양에서 열린 조소(朝蘇)공식회의(제1차회의)에 북한 대표로 참석해 소련 사절단에게 공군을 확장해 줄것을 강력히 요구하였다.[45]

 
1949년 3월 김일성의 모스크바 방문을 수행하여 소련 최고회의 앞 계단을 오르는 장면. 앞줄 왼편부터 박헌영, 최용건, 홍명희, 김일성.[46] 당시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남침에 대한 지원을 요청했다 거절 당했다. 동행한 홍명희도 당연히 김일성의 남침 계획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스탈린은 이듬해 초 남침을 승인했고, 홍명희는 남침 준비와 전쟁 수행에 협조하였으므로 그도 6.25 주요 전범의 한 사람이다.

김일성이 1949년 3월 스탈린에게 남침 전쟁을 지원해줄 것을 요청하러 모스크바를 방문할 때 그도 부수상 자격으로 동행하였고, 당시 사진이 많이 남아 있다.[46][47][48] 스탈린은 당시에는 남한에 미군이 주둔하고 있고, 북한군이 압도적 우위를 확보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불허했다. 그후로 김일성은 무려 48차례나 스탈린에게 남침 승인을 요청했고,[49] 번번이 거절하던 스탈린은 중국이 공산혁명에 성공하는 등 상황이 유리하게 변하자 마지 못해 1950년 1월 30일 남침을 지원하겠다는 의사를 김일성에게 통보하였다.

이런 일들은 부수상이었던 홍명희도 김일성의 남침 계획을 일찍부터 잘 알고 있었고 이에 협력했다는 증거가 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6.25 남침 개시 이튿날인 6월 26일 조직된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하는 전쟁 최고 지휘부였던 7인 군사위원회의 위원이었으므로[50][51] 그도 주요 6.25 전범 중의 한 명이다.

1950년 7월 4일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는 남한 토지개혁의 실시를 발표했다. 이미 그 이전인 1949년 5월 13일 <공화국 남반부의 토지개혁실시를 위한 법령기초위원회>가 조직되어 남한 토지개혁 준비 사업에 착수하고 있었는데, 홍명희가 그 위원장을 맡아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원칙의 토지개혁 법령안을 만들었다.[52] 이런 것들은 그가 일찍부터 김일성의 남침 계획에 적극 협력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1949년 9월 김정숙이 죽자 김일성(金日成)은 1950년 1월 15일에 홍명희의 딸 홍영숙(洪永淑)과 재혼한다.[53] 6.25 남침 당시 그는 김일성의 장인이었다. 6.25 때 체포된 김일성의 전속 간호부 조옥희(趙玉姬)가 홍영숙은 심장이 약하다고 증언했으므로 아마 그 문제 때문인 것 같지만 그녀가 결혼 초기에 죽어 이 사실은 그다지 잘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 후로도 김일성은 홍명희를 여러모로 배려하고 지원하여 두 사람은 상당한 유착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54]박갑동(朴甲東, 1919~ )에 의하면 홍명희는 부수상에 선임되자 이에 감격하여 쌍둥이 딸 둘을 김일성 관저에 가정부로 들여보냈다 한다.[55] 이들 중 한명이 1950년 1월 15일 김일성과 결혼한 것이다.

 
1958년 5월 5·1절 경축행사가 끝난 뒤 평양 교외 호수에서 김일성(오른쪽)과 홍명희가 뱃놀이를 하고 있는 모습.[54] 이 사진은 김정일이 16세때 찍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56]

대부분의 월북 문인들이 숙청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홍명희만 고위직에서 승승장구한 것은 이러한 김일성과의 유착관계가 작용했을 것이다. 그가 다른 여러 문인들의 숙청에 대해서 어떤 입장을 취했는지는 알려진 바 없지만 적극적으로 변호한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 그는 6.25 전쟁 중인 1952년 "근로자"지에 《김일성 장군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창건자이며 조직자이다》라는 글을 써서 전범 김일성을 찬양한 바도 있다.[57]

한국 전쟁 때 피난오던 도중 이광수가 심한 동상과 폐결핵으로 사경을 헤매자, 그는 직접 이광수를 찾아 왔다. 그는 김일성의 재가를 얻어 평안북도 강계군에서 15킬로미터 떨어진 자기 숙소에 데려갔다가 인민군 병원으로 옮겼다. 그러나 이광수폐결핵의 악화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44]

1961년 5월 13일 부수상 홍명희가 위원장이 되어 북한의 각 정당사회단체를 대표하는 33명의 준비위원들이 모여 노동당 외곽단체의 하나로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를 조직하였고, 이를 통해 대남 정치공세를 펼쳤다.[58] 올림픽 위원장(委員長),[59] 과학원장(科學院長)으로있다가 1962년에 최고인민회의상임위원회부위원장(最高人民會議常任委員會副委員長)에 선임 됐었다.[60]

대남 적대 활동에 간여 편집

북한에 아무 기반도 없었고, 공산주의 활동을 맹렬히 한 전력도 없던 홍명희가 1948년 4월 월북 직후 부수상이라는 최고위직에 발탁된 것은 상당히 의외의 인사로 보인다. 하지만 이면에는 그가 해방 직후부터 비밀리에 북한을 왕래하며, 북한에 포섭되어[34] 남한에서 갈등을 부추기는 정치활동을 주로 했고, 김구와 김규식의 방북을 성사시키고, 동행한 400여명의 인사중 70여명이 북한에 눌러앉게 하여[61] 아직 정부 출범도 못한 남한의 우파 진영에 심대한 타격을 입히고, 남북협상 찬반으로 남한내 갈등을 조장시킨 공로를 인정받은 결과로 보인다. 당시 남으로 귀환하지 않은 70여명은 방북후 갑자기 북한 잔류를 결정했을 가능성은 희박하므로 처음부터 북한을 위해 활동하던 사람들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62]

홍명희의 아들과 비서가 남파되어 간첩활동을 하다 체포된 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는 대남 공작에도 적극 간여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차남 홍기무(洪起武)는 1949년 9월 초순에 남파되어 홍명희가 월북전 당수로 있었던 민주독립당(民主獨立黨)의 조직을 강화하고, 한국 정부 파괴 및 요인 암살 등을 기도하다 12월 말에 체포되었다.[63] 그는 6.25 때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자 감옥을 탈출하여 장인 위당 정인보(爲堂 鄭寅普, 1893~1950.09.07)를 납북하였고,[64][65] 위당의 죽음에 직접적 책임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6.25 당시 홍명희 그는 김일성의 장인이었으며, 홍명희의 장남 홍기문 그는 김일성의 첫째 처남이었다.

홍명희는 월북할 때 둘째 아들 홍기무를 데리고 갔는데 그는 위당 정인보(爲堂 鄭寅普) 선생의 둘째 사위였습니다. 다음 위당 선생의 자제분인 정양모(鄭良謨)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의 증언,

“아버님과 벽초 선생이 절친해 벽초의 둘째 아들 홍기무와 둘째 누이의 혼사가 이루어졌다. 벽초가 1948년 남북연석회의에 가며 둘째 아들을 데리고 가 돌아오지 않았다. 그 후 둘째 매형(홍기무)이 남파간첩으로 내려왔다 붙잡혔다. 당시 아버님은 감찰위원장이었다. 6·25가 나자 형무소를 탈출, 서울이 점령당하자 큰 차를 타고 우리 집에 왔다. 장인에게 큰 절을 하더니 ‘장인께서도 저와 같이 혁명 사업을 하시지요’라고 했다. 그랬더니 아버지께서 ‘너는 유물론자고 나는 유심론자인데 어떻게 같이 혁명 사업을 하느냐’고 반문했다. 그러자 다시 큰 절을 하더니 ‘장인이 절개를 지키는 건 존경합니다. 그렇지만 우리 인민정부에 협력 안하시면 반동입니다’라고 하고 갔다. 그 며칠 후 보안서원 몇 명이 와서 아버지를 데리고 갔다.”[64][65]

홍기무는 6.25 당시 인민군이 점령한 서울에서 당 연락부장 이주상(李胄相, 1915~?)의 지시로 내무성 정보국장 방학세(方學世, 1912~1992)의 요인 납북 공작에 협력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66]

위당의 셋째 아들이자 홍기무의 처남 정흥모(鄭興謨)는 6.25 때 국군으로 참전하여 전사하였다. 두 집안은 친구고 사돈이라는 좋았던 인연이 마지막에 악연으로 돌변한 경우이다.

홍명희의 차석 비서 김원철(金元哲)도 6.25 때 남파되어 선전 사업 중에 서울 탈환으로 9월 20일 월북하였다. 지령을 받고 1950년 11월 5일 다시 남파되었다가 청량리 친척집에서 11월 14일에 체포되었다.[67]

6.25 와중에 그의 고모부 조완구(趙琬九, 1881 ~ 1950)나 위당 정인보를 납북한 일에도 그가 개입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당시 북한 요원들은 납북 대상자 명단을 사전에 준비해서 내려왔다고 하는데, 이들이 포함된 것은 부수상인 홍명희의 뜻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그의 내락 없이 하급자들이 부수상 친인척의 신병을 함부로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6.25 전후로는 전쟁 준비와 수행에 적극 협력하여 전쟁에 대한 책임이 상당하다. 휴전 이후로는 1961년 5월 13일 부수상이었던 그가 위원장이 되어 노동당 외곽단체의 하나인 조국평화통일위원회(祖國平和統一委員會, 조평통)를 조직했는데, 이 단체는 대남 정치 공작과 선전을 지속적으로 수행하여, 남한 내 여론을 분열시키고 갈등을 유발하는 일들을 해 왔다.[68]

그가 간여했는지는 불분명하나 그의 제자로 알려진 이구영(李九榮, 1920~2006)도 1958년 7월 간첩으로 남파되어 내려왔다가 9월에 부산에서 검거되어 1980년까지 22년간 징역을 살았다.[69][70]

사후 편집

1968년 3월 5일 사망하였다.[60] 사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평양 애국열사릉에 안장되었다. 현재 그의 생가는 충북 괴산군에 의해서 보전되어 있다.

기념문학비 건립 편집

1998년 10월 17일 벽초문학비건립추진위원회에 의해서 홍명희 선생의 문학가로서의 업적을 기리는 문학비가 건립되었다. 하지만, 홍명희의 월북사실을 문제삼은 괴산 재향군인회 등의 우파단체들의 반발때문에 1948년 월북했다는 문구가 삽입된 새로운 비문이 2000년 6월 12일 건립되었다.

가계 편집

  • 증조부 : 홍우길(洪祐吉, 1809~1890), 이조판서 역임
    • 조부 : 홍승목(洪承穆, 1843~1925), 병조판서 역임 / 생부는 홍우필(洪祐弼)
      • 아버지 : 홍범식(洪範植, 1871 ~ 1910), 경술국치 때 자살
      • 생모 : 은진 송씨(恩津 宋氏, 1871~1890) : 군수 송은로(宋殷老)의 딸[1]; 오빠 송종면(宋鍾冕, 1866~?)[5]
      • 계모 : 조경식(趙璟植, 1876~1950) : 6.25 전쟁 중 우익 인사들에게 끌려가 살해 당함.[3][71]
        • 동생 : 홍성희(洪性憙, 1894~?) : 형 홍명희와 함께 월북.[41]
        • 동생 : 홍도희(洪道憙, 1903~1923)[1][72]
        • 동생 : 홍교희(洪敎憙, 1907~1922)[1][72]
      • 고모 : 홍정식(洪貞植, ? ~ 1945년 2월), 조완구(趙琬九, 1881 ~ 1950)에게 출가
  • 처 : 여흥 민씨(驪興 閔氏, 1885~1953) : 민영만(閔泳晩, 1863~1916)[6]의 딸[1][72][73]
    • 장남 : 홍기문(洪起文, 1903~1992) : 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회과학원 부원장
    • 장자부 : 덕수 이씨
      • 손자 : 홍석형(洪錫亨, 1936~?) : 노동당 계획재정부장으로 있다 숙청 당함.[74]
      • 손자 : 홍석중(洪錫中, 1941~) : 소설가
    • 차남 : 홍기무(洪起武, 1910~?) : 초명 기은(起殷)[1]. 간첩으로 남파되었다가 피체 투옥되었다 6.25때 탈출하여 월북함.[64][63]
    • 차자부 : 정경완(鄭庚婉 1920~?), 정인보의 둘째 딸[54][64]
      • 손자 : 홍석우
      • 손자 : 홍석주
      • 손녀 : 홍석매(1957~)[75]
    • 3남 : 홍기하(洪起夏, 1919~1920)[76][77]
    • 장녀 : 홍주경(洪姝瓊, 1921~?)
    • 차녀 : 홍무경(洪茂瓊, 1921~?)
    • 3녀 : 홍계경(洪季瓊, 1926~?)[78]

1950년 1월 15일 그의 딸 홍영숙(洪永淑, 또는 홍애연(洪愛姸)[79])이 김일성과 결혼하였는데,[53] 맏딸 또는 둘째딸[80]이라는 것으로 보아 쌍둥이인 홍주경과 홍무경 중 한 명일 것으로 추정된다.

홍명희의 조부 홍승목(洪承穆, 1843~1925)이 1867년에 작성한 직계 선조 계보 "풍산홍씨직파연보도(豐山洪氏直派年譜圖)"가 있다.[81] 부친이 생부 홍우필(洪祐弼)로 나오므로 당시는 아직 홍우길의 양자가 되기 전이다.

참고 문헌 편집

홍명희를 연기한 배우들 편집

같이 보기 편집

각주 편집

  1. 풍산홍씨 대동보 문경공계 추만공파[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풍산홍씨대동보간행위원회, 1985) 3권 pp.593~594 (page597)
  2. ㄱ독립운동가강신욱 기자 (2009년 7월 25일). “<NEWSIS FOCUS>고향서 외면당하는 벽초 홍명희”. 뉴시스. 2009년 10월 19일에 확인함. 
  3. (신문로) 벽초 홍명희, 그 진실과 화해(신명식 2009.03.05)[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내일신문 2009-03-05일자
  4. 정약용의 장인 홍화보(洪和輔)는 영안위 홍주원의 4촌 동생 홍주문(洪柱文)의 증손이다. 풍산홍씨족보 豊山洪氏族譜, 1933, 권 1 p.74
  5. 송종면(宋鍾冕)|응옥(凝玉) / 음관|왕대미상(未詳) 년 문음진신보(文蔭縉紳譜) Archived 2017년 4월 9일 - 웨이백 머신
    송종면(宋鍾冕) / 문과|고종(高宗) 26년 (1889) 알성시(謁聖試) Archived 2017년 4월 9일 - 웨이백 머신
  6. 민영만(閔泳晩, 1863~1916) : 고종(高宗) 28년(1891) 신묘(辛卯) 증광시(增廣試) 병과(丙科) 25위 Archived 2017년 4월 9일 - 웨이백 머신 문과방목
  7. 강영주, 벽초 홍명희 연구 (창작과 비평, 1999) p.30
  8. 여흥민씨파계보. 상-하 (서울, 여흥회, 1988) : 삼방파(三房派) 하권 pp.311~312
    항일(抗日)과 친일로 이어진 명성황후 후손들의 120년 영락 Archived 2017년 4월 15일 - 웨이백 머신 조선닷컴 2015-10-08
  9. 首席占領 皇城新聞 1909년 6월 9일 ●首席占領 : 日本留學生 洪命憙(年二十二)氏 去光武十一年三月에 東洋商業豫科第二學年을 終了고 私立大成學校第三學年에 編入야 成績이 好더니 今에 五年級首席을 占領얏다고 日本某報에 該氏의 寫眞을 添附揭載얏더라.
  10. (단독)소설「임꺽정」홍명희 자필 편지 4통 경북 안동서 발견 중앙일보 2018.02.19
  11. 홍명희가 일본어로 쓴 단편소설 '유서' 발굴 연합뉴스 2016/08/03
    벽초 홍명희의 일본어 단편소설 ‘유서’ 발굴 경향신문 2016.08.03
  12. 騷擾事件의 後報, 충청북도 槐山, 자세한 후보 Archived 2018년 5월 27일 - 웨이백 머신 每日申報 1919-03-24 03면 02단
    騷擾事件의 後報, 충청북도 槐山, 주모자 체포됨 Archived 2018년 5월 27일 - 웨이백 머신 每日申報 1919-03-25 03면 03단
    學生은 放還, 주모자는 오인 Archived 2018년 5월 27일 - 웨이백 머신 每日申報 1919-03-26 03면 07단
    槐山事件首魁, 공소하여 감형 Archived 2018년 5월 27일 - 웨이백 머신 每日申報 1919-05-28 03면 06단
  13. 이우탁《김구, 장보고, 앙드레김》(이우탁, 출판사 동아시아, 2006) 126페이지
  14. 이우탁《김구, 장보고, 앙드레김》(이우탁, 출판사 동아시아, 2006) 127페이지
  15. 동아일보, 임시주주 총회에서 사주 김성수는 동아기자단과 군소주주들의 요구를 묵살하고 신간부 조직(제4대 사장 : 이승훈. 주필 겸 편집국장 : 홍명희) Archived 2017년 4월 21일 - 웨이백 머신 1924년 5월 14일 : 한국사데이타베이스 근대사 연표
  16. 장세윤, 벽초(碧初) 홍명희(洪命熹)의 현실인식과 민족운동 : 일제강점기(强占期)를 중심으로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15집 (독립기념관, 2000.12) p.324
    홍기문,「아들로서 본 아버지」,『조광(朝光)』제2권 5호(1936년 5월)
  17. 장세윤, 벽초(碧初) 홍명희(洪命熹)의 현실인식과 민족운동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15집 (독립기념관, 2000.12) pp.336~337
  18. 1927년 ~: 이긍종(李肯鍾) - 한국학중앙연구원
  19. 本社主催 大座談會 臨戰對策協議會, 百二十人士가 府民館서에 會合 삼천리 제13권 제11호 1941년 11월 1일
    戰時奉公 强化運動 三千里社 主催로 臨戰對策協議會 每日申報 1941년 8월 23일 면수 : 02 단수 : 16
    二千萬이 愛國戰士로 銃後奉公을 義勇化 - 臨戰對策協議會서 實踐決議 每日申報 1941-08-26 면수 : 04 단수 : 16
  20. 總力戰에 先驅된 思想戰士 必勝의 陣 昨日, 言論報國會 感激의 發會式 - 역원(役員) 명단 2면 4단 매일신보 1945-06-09
  21. 文學同盟中央委員結成大會에서 選擧 Archived 2017년 3월 24일 - 웨이백 머신 중앙신문 1945.12.15
  22. 자료대한민국사 제1권 > 1945년 12월 19일 > 임정개선환영대회, 서울운동장에서 개최 동아일보, 서울신문 1945년 12월 20일, 22일
  23. 아! 비운의 역사현장 경교장(1993,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213
  24. 자료대한민국사 제1권 > 1945년 > 洪命熹, 기자회견에서 반탁운동 전개 역설 : 1945년 12월 29일 서울신문 1945년 12월 30일
  25. 자료대한민국사 제1권 > 1945년 >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 중앙위원 선임 : 1945년 12월 30일 서울신문 1946년 1월 1일 (국사편찬위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印은 常任委員) ▲洪命憙 ..▲洪南杓 ▲朴憲永 등 포함
    자료대한민국사 제1권 > 1945년 >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 파업단행과 상무위원 선정 : 1945년 12월 31일 동아일보 1946년 1월 1일 (국사편찬위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洪命憙, ...洪南杓 朴憲永 金若水..
    南北朝鮮, 左右一致, 行動方針을 討議 決定, 反託總動員中央委員會 Archived 2017년 3월 24일 - 웨이백 머신 중앙신문 1946.01.01 상임위원 : 21명중 첫번째 홍명희
  26. 아! 비운의 역사현장 경교장(1993,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255
  27. 반파쇼공동투쟁위원회결성총회, 신탁안 철폐요구 성명서 발표 서울신문, 조선일보 1946년 1월 1일 (자료대한민국사 제1권 1945년 12월 31일)
  28. 기고문 "1947년의 조선 정국과 나의 지향" 중 "五年間 信託 못치르랴" / 洪命熹 Archived 2017년 3월 24일 - 웨이백 머신 民主衆報 1947.01.01
  29. 여운형 장례식 거행 1947년 8월 3일 (조선일보 1947년 8월 5일) 洪命憙의 봉도문 낭독
  30. 民族統一黨組織, 洪命熹氏中心으로 Archived 2017년 3월 24일 - 웨이백 머신 중앙신문 1946.08.20
    日帝惡法과 彷彿, 立法意圖는 奈邊에, 民主統一黨 洪命熹氏 談 Archived 2017년 3월 24일 - 웨이백 머신 朝鮮中央日報 1947.09.21
    民獨黨 中執委員 洪命熹氏等 選定 Archived 2017년 3월 24일 - 웨이백 머신 獨立新報 날짜 1947-10-22
    黨代表洪命憙氏, 民主獨立黨 部署 Archived 2017년 3월 24일 - 웨이백 머신 중앙신문 1947.11.01
    民獨黨 대표에 洪命憙씨 1947년 11월 1일
  31. UN委員團歡迎大會, 國議主催로 擧族的으로 開催 Archived 2017년 3월 24일 - 웨이백 머신 독립신문 1947.11.30
  32. 單政은 抵死反對, 차라리 軍政의 賛成할지언정, 洪命熹氏의 時局談 Archived 2017년 3월 24일 - 웨이백 머신 朝鮮中央日報 1947.11.22
    金九先生에 敬意, 民獨黨首 洪命憙氏談 Archived 2017년 3월 24일 - 웨이백 머신 朝鮮中央日報 1948.01.31
    洪命熹氏 談, 南北統一 爲하야 끝까지 鬪爭하겠다 Archived 2017년 3월 24일 - 웨이백 머신 朝鮮中央日報 1948.03.04
    洪命憙氏絶叫, 可能한 地域云云의 單選, 政權慾 아니면 欺瞞策 Archived 2017년 3월 24일 - 웨이백 머신 獨立新報 1948-03-23
  33. 金日成武丁將軍, 入國歡迎會를 準備 Archived 2017년 4월 10일 - 웨이백 머신 중앙신문 1945.12.18
    金日成, 武丁 두 장군과 獨立同盟 入京 환영준비 자유신문 1945년 12월 21일
  34. 중앙일보 특별취재반, 『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서울: 중앙일보사, 1993), 하권 pp.212~223. 해방 후 홍명희의 정치활동과 북한과의 연결에 대한 서용규(북한 노동당 고위간부 출신 박병엽의 가명)의 증언이 자세히 나온다.
    양동안, 1948년의 남북협상에 관한 연구 Archived 2018년 12월 14일 - 웨이백 머신 정신문화연구 2010.06 통권119호
    양동안, 1948년 남북협상과 관련된 북한의 대남 정치공작 국가정보연구 제3권 1호 (한국국가정보학회 2010-08-17)
    양동안, 해방공간에서의 남북한 정보·정치공작 활동 2010-02-23 한국국가정보학회 학술세미나 발표문
  35. 홍남표(洪南杓)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36. 전 남로당 지하총책 박갑동씨 사상편력 회상기 / 환상의 터널­그 시작과 끝:61 중앙일보 1990.01.26 종합 3면 :◎제2부 해방정국의 좌우대립 / 백범 종종 조만식 밀서 받아 / 남로당선 홍명희 통해 접근 시도하기도
  37. 양동안, 1948년 남북협상과 관련된 북한의 대남 정치공작 국가정보연구 제3권 1호 (한국국가정보학회 2010-08-17) p.21
  38. 홍명희, 京橋莊(경교장) 방문, 김구와 요담 1948.03.18 경향신문 1면
  39. 48년 남북정치협상은 蘇각본 - 蘇 민정사령관 레베데프 비망록 중앙일보 1994.11.15 종합 1면
    <평양의 4김회담>1. 레베데프 비망록 - 자료적 가치 중앙일보 1994.11.15 종합 8면
    <평양의 4김회담>2. 金九 올 때까지 대표자회의 연기 중앙일보 1994.11.16 종합 8면
    <평양의 4김회담>2. <해설> 蘇군정 남한정세 손금보듯 중앙일보 1994.11.16 종합 8면
    <평양의 4김회담>3. 蘇,김일성에 신문보도 일일이 지시 중앙일보 1994.11.17 종합 8면
    <평양의 4김회담>4. 白凡 "나는 김일성 만나러 왔을뿐" 중앙일보 1994.11.21 종합 8면
    <평양의 4김회담>5. 蘇 朴憲永도 빠뜨려선 안된다 중앙일보 1994.11.22 종합 8면
    <평양의 4김회담>6. 蘇 南대표에 총선후 정부수립 약속 받아라 중앙일보 1994.11.23 종합 8면
    <평양의 4김회담>7. 끝 조만식 南行 白凡 요구에 金日成 침묵 중앙일보 1994.11.24 종합 8면
    손세일 전 국회의원, 김구는 북한 가서 대체 뭘 했나? Archived 2017년 4월 24일 - 웨이백 머신 조선 Pub 2014-11-07
  40. 洪命憙氏 北行 Archived 2017년 3월 24일 - 웨이백 머신 민중일보 1948.04.21
    單選單政 反對가 目標, 民族勝利 爲하야 鬪爭, 金九·洪命憙·趙素昻氏 熱辯 Archived 2017년 3월 24일 - 웨이백 머신 獨立新報 1948.04.24
    洪氏等 諸代表 黃海製鐵 視察 Archived 2017년 3월 24일 - 웨이백 머신 獨立新報 1948.04.28
    燦爛한 北朝鮮의 發展, 오직 建設이 있을 뿐, 洪命憙氏等北朝鮮印象 Archived 2017년 3월 24일 - 웨이백 머신 獨立新報 1948.05.05
    洪命熹氏와 李克魯氏 殘留 Archived 2017년 3월 24일 - 웨이백 머신 민주중보(民主衆報) 1948-05-08
  41. 장세윤, 벽초(碧初) 홍명희(洪命熹)의 현실인식과 민족운동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15집 (독립기념관, 2000.12) p.344
    이인(李仁), 「나의 교우 반세기(交友半世紀)」, 『신동아(新東亞)』 1974년 7월호 (東亞日報社) pp.283~284
  42. 洪命熹氏 放送 內容 Archived 2017년 3월 24일 - 웨이백 머신 朝鮮中央日報 1948.08.22
    월북한 남조선민주독립당홍명희(洪命熹), 남한 동포에게 <철석같이 단결하여 선거에 참여하라>고 방송 1948년 8월 2일 ≪북한연표≫ 국토통일원, 1980
  43. “김일성내각 組閣을 완료”. 경향신문. 1948년 9월 11일.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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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5. 6.25 전쟁사 제1집 - 전쟁의 배경과 원인 Archived 2017년 3월 25일 - 웨이백 머신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戰史編纂委員會) 2004 : p.535.
  46. 남성욱 외저, 한국의 외교 안보와 통일 70년 Archived 2017년 3월 18일 - 웨이백 머신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2016. 3. 15) p.124 : 북한의 김일성은 1949년 3월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스탈 린에게 남침을 지원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1949년 3월 모스크바를 방문한 김일성과 박헌영 Archived 2017년 3월 18일 - 웨이백 머신 우리 역사 넷 : 사진 설명에는 나와 있지 않으나 박헌영 옆에 있는 앞줄 맨 오른 쪽이 부수상 홍명희이다.
  47. 北韓代表(북한대표)의名簿(명부) 1949.03.06. 경향신문 1면
    金日成쓰딸린氏等會談, 비신스키外相參席下에 Archived 2017년 4월 10일 - 웨이백 머신 朝鮮中央日報 1949.03.08
    蘇(소)에借款要求(차관요구) 北韓代表派遣(북한대표파견) 1949.03.06. 동아일보 1면
    北韓代表團訪蘇 Archived 2017년 3월 24일 - 웨이백 머신 부산 民主衆報 1949.03.06
    北(북),南侵(남침) 48년부터 준비 1992.08.19. 동아일보 1면
  48. The Korean Government Delegation's Visit to Moscow (Korean Version) 1949 : Digital Archive, Wilson Center
  49. Kathryn Weathersby, “New Findings on the Korean War” Cold War International History Project Bulletin, 3 (Fall 1993), p.14: This was Kim Il Sung’s war; he gained Stalin’s reluctant approval only after persistent appeals (48 telegrams!).
  50. 북한, 군사위원회 조직 △위원장 김일성 위원 박헌영·홍명희·김책·최용건·박일우·정준택 대한민국사연표 1950년 6월 26일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고재홍, "북한군 최고사령관 위상 연구" 서울 : 통일연구원, 2006 (KINU 정책연구시리즈 ; 06-07) pp.11~12 군사위원회 설치, pp.32~36 (표 Ⅱ-1) 당‧최고사령관‧군사위원회 명의 주요 발표(1950.6~1955)
    6.25 전쟁사 제1집 - 전쟁의 배경과 원인 Archived 2017년 3월 25일 - 웨이백 머신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戰史編纂委員會) 2004 : p.607~608 군사위원회 조직
  51. 북한연표 해설목록 : 한국전쟁 발발 한국사데이타베이스
  52. 북한연표 해설목록 : 남한 토지개혁 결정 한국사데이타베이스
  53. 홍명희(洪命熹) 맏딸과 김일성(金日成) 재혼(再婚) 연합신문(聯合新聞) 1950.01.25
    김일성(金日成)이 재혼(再婚), 홍명희(洪命熹) 맏딸 영숙(永淑)과 자유신문 1950년 1월25일 2면 10단
    김일성(金日成) 재혼(再婚) 한성일보(漢城日報) 1950.01.25
    깨여지는 괴뢰(傀儡)의 백일몽(白日夢) 치열화(熾烈化)한 반소반공운동(反蘇反共運動) 1950.01.25. 경향신문 2면
    김일성(金日成) 전속 간호부 조옥희(趙玉姬), 체포 후 기자회견 부산일보 1951년 3월 1일
    History of the North Korean Army U.S. Army Far East Command, July 31, 1952; 원문 pp.90~91 (pdf pp.144~145) : In January 1950, he (KIM Il Sung) is said to have married a daughter of HONG- Myong Hui, a Vice Premier of the North Korean Regime.
    金昌順 著, 歷史의 證人 (서울, 韓國亞細亞反共聯盟, 檀紀4289 (1956) : 홍명희의 둘째딸이 김일성과 결혼했다고 함.
  54. 김일성-홍명희家에 얽힌 인연 조선닷컴 2004.02.10
    김일성, 벽초 홍명희에 특별예우 / 중책 주고 세간살이 보내줘 며느리, 北 통일신보에 소개 벽초, 本紙에 ‘임꺽정’ 연재 조선일보 2004.02.11 A26면
  55. 환상의 터널­그 시작과 끝:110 중앙일보 1990.05.28 종합 5면
  56.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16세때 직접 찍은 사진 연합뉴스 2005-03-18
  57. 홍명희, 《김일성 장군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창건자이며 조직자이다》 「근로자」지 1952년
  58. 조국평화통일위원회 결성대회(평양, 위원장 홍명희(洪命憙)) 1961년 5월 13일 : ≪북한연표≫ 국토통일원, 1980년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 홍명희(洪命憙), 남북간 내왕 촉구 담화 발표 1964년 10월 30일 : ≪북한연표≫ 국토통일원, 1980년
  59. 북한올림픽위원장 홍명희(洪命憙), 남북단일선수단 구성과 관련 IOC 위원장에게 전문 1959년 7월 4일 : ≪북한연표≫ 국토통일원, 1980년
    북한 올림픽위원장 홍명희(洪命憙), 동경올림픽 불참 관련 담화 1964년 10월 10일 : ≪북한연표≫ 국토통일원, 1980년
  60. 홍명희사망(洪命熹死亡) 1968.03.06. 경향신문 2면
    북괴인민부상위장(北傀人民副常委長) 홍명희사망(洪命憙死亡) 1968.03.06. 동아일보 1면
  61. 양동안, 1948년의 남북협상에 관한 연구 Archived 2018년 12월 14일 - 웨이백 머신 정신문화연구 2010.06 통권119호 p.39
    강영주, 벽초 홍명희 연구 (창비, 1999) p.566
  62. 『兩金氏 이미 降服』 北朝鮮의 謀略宣傳 Archived 2018년 6월 8일 - 웨이백 머신 현대일보 [現代日報] 1948년 4월 15일 2면 : 김구와 김규식이 방북하기도 전에 북한에서는 이미 그들이 항복했다고 하고, 이승만도 머지않아 항복한다고 선전하고 있었다.
    유어만(劉馭萬) 중국 총영사의 代電 제119호 (1948년 4월 20일) : "2김과 가까운 사람의 말에 의하면, 이번 북상한 1-2백 명 가운데 대부분이 남으로 내려오지 않을 것이라 합니다. 나머지는 2주일 정도 뒤 漢城으로 되돌아 올 것입니다."
  63. 홍기무(洪起武) 등 기소 자유신문 1949년 12월 25일
    괴뢰(傀儡) 앞잡이 홍명희(洪命熹) 아들 등(等) 송청(送廳) 1949.12.25 경향신문 2면 : 이북 괴뢰집단 부수상 홍명희(洪命熹)의 둘째아들 대의사 홍기무(洪起武)와 번일병(憣一炳)외 3명
    민국(民國)의 기밀(機密)을 노리는 제오열(第五列)에 주의(注意)하자 1950.02.16 경향신문 2면
  64. D-story 44 : 조선의 3대 천재와 동아일보-홍명희 편(3) 2010.08.09 동네(동아미디어그룹 블로그) : 차남 홍기무(洪起武)는 위당 정인보의 사위인데, 간첩으로 남파되었다가 6.25 때 장인 위당을 납북했다.
    D-storyⅡ 100 : 납북된 동아일보 인사들 동네(동아미디어그룹 블로그) 6월 - 19 - 2013
  65. 정양모(鄭良謨)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의 부친 정인보 납북 당시 일에 대한 증언 (동영상) 6.25전쟁납북진상규명위원회 게시일: 2013. 12. 11.
  66. 한상도, 한국전쟁 발발 직후 납북인사들의 북행길과 삶의 모습 Archived 2017년 4월 26일 - 웨이백 머신 건국대 통일인문학연구단 "제32회 콜로키움 자료집 p.8" (2014년 5월 22일)
    김효선, 건국이념의 상실이 한국미래 어둡게 해 한국논단 2009년 8월호
    김효선, 국회 프락치사건 관련자들의 운명 NewDaily 2012.06.25
    이태호(李泰昊) 저 / 신경완 증언(전 북한조국통일 민주전선 부국장 정무원 부부장),『압록강변의 겨울』 (다섯수레, 1991) p.16
  67. 괴뢰(傀儡) 부수상 홍명희(洪命희) 비서(秘서) 김원철(金元哲)을 체포문초(逮捕問招) 1950.11.20 동아일보 2면
    死亡者(사망자)만十(십)일만餘名(여명) : 홍명희의 비서 김(金元哲)을 체포 1950.11.16 동아일보 2면
    합동수사본부, 홍명희 비서 김원철 체포 1950년 11월 20일 : 한국사데이타베이스 대한민국사연표
  68. 조국평화통일위원회 통일부 북한정보포털
  69. 間諜 李九榮 死刑 求刑 국제신보 1958.12.03 (1판2면)
  70. 간첩 이구영(李九榮)에도 死刑 求刑 - 부산일보 1958-12-03
  71. 장세윤, 벽초(碧初) 홍명희(洪命熹)의 현실인식과 민족운동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15집 (독립기념관, 2000.12) p.348
    김승환(金昇煥),「벽초 홍명희의 문학사상」,『민족문학사연구』, 제13호(1998년 12월) pp.295-296
  72. 강영주, 벽초 홍명희 연구 (창작과 비평, 1999) p.148
  73. 北 김일성 - 홍명희家에 얽힌 비화 연합뉴스 2004.02.10 : 둘째 며느리 정경완이 시모 민씨가 시부 홍명희보다 15년 먼저 졸했다고 함.
  74. 홍석형 계획재정 부장이 중국 스파이? 자유 아시아 방송 (RFA) 2011-10-10
  75. “[CJ Kang 방북기54]우연히 만난 홍명희, 정인보 선생의 자손들”. 《NK투데이》. 2015년 10월 2일. 2018년 4월 4일에 확인함. 
  76. “한국사 콘텐츠”. 2018년 4월 5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8년 4월 4일에 확인함. 
  77. 홍원표. “민족의 비극과 저항에 관한 이야기: 홍명희의 삶과 『임꺽정』” (PDF). 
  78. “돌아오지 않은 사람들 홍명희가 북한에 남은 이유   주간조선 >”. 2018년 4월 4일에 확인함. 
  79. “6.25北(북)에서 본 證言(증언) <16> 제4부 開戰準備(개전준비) 진행 (1949년)”. 2018년 4월 4일에 확인함. 
  80. 김창순 (1956). 《歷史의 證人》. 한국아세아반공연맹. 
  81. 풍산홍씨직파연보도(豐山洪氏直派年譜圖)

외부 링크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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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임
(초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제1대 부총리
(박헌영, 김책과 공동)
1948년 9월 ~ 1951년 1월 30일
후임
박헌영, 홍명희
전임
박헌영, 김책, 홍명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제2대 부총리
(박헌영, 최창익과 공동)
1951년 1월 30일 ~ 1953년 3월 31일
후임
홍명희, 박창옥, 최창익
전임
박헌영, 홍명희, 최창익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제3대 부총리
(김일, 박창옥, 최창익과 공동)
1953년 3월 31일 ~ 1956년 9월
후임
홍명희, 김일
전임
김일, 홍명희, 박창옥, 최창익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제4대 부총리
(김일과 공동)
1956년 9월 ~ 1957년 9월 20일
후임
김일, 정일룡, 남일, 박의완, 정준택, 최용건, 홍명희
전임
홍명희, 김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제5대 부총리
(김일, 남일, 박의완, 정일룡, 정준택, 최용건과 공동)
1957년 9월 20일 ~ 1958년 10월
후임
김일, 남일, 박의완, 정일룡, 정준택, 최용건, 홍명희
전임
김일, 남일, 박의완, 정일룡, 정준택, 최용건, 홍명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제6대 부총리
(김일, 남일, 박의완, 정일룡, 정준택, 최용건과 공동)
1958년 10월 ~ 1962년 10월 23일
후임
김광협, 김창만, 남일, 리종옥, 리주연, 정일룡, 정준택
전임
(없음)
제1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1948년 - 1953년
후임
홍명희
이극로
전임
홍명희
제2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이극로와 공동)
1953년 - 1957년 9월
후임
김원봉
전임
김원봉
제4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이극로와 공동)
1958년 10월 - 1961년 3월 25일
후임
홍명희
박금철
전임
홍명희
리극로
제5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박금철과 공동)
1961년 3월 25일 - 1968년
후임
최용건
전임
(없음)
제1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가부수반
1948년 - 1953년
후임
홍명희
이극로
전임
홍명희
제2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가부수반
(리극로와 공동)
1953년 - 1957년 9월
후임
김원봉
전임
김원봉
제4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가부수반
(리극로와 공동)
1958년 10월 - 1961년 3월 25일
후임
홍명희
박금철
전임
홍명희
리극로
제5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가부수반
(박금철과 공동)
1961년 3월 25일 - 1968년
후임
최용건
전임
여운형
진보정당 당수
1947년 7월 - 1948년 4월
후임
장건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