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손

조선 중기의 문관으로 김종직의 문인이었으며 사관을 지냈으며 무오사화에 희생되었다.

김일손(金馹孫, 1464년 2월 13일(음력 1월 7일)~ 1498년 8월 14일(음력 7월 27일))은 조선 성종·연산군 때의 문신이며 학자, 사관, 시인이다. 본관은 김해이며, 자는 계운(季雲), 호는 탁영(濯纓)[2], 소미산인(少微山人)이다. 시호는 문민(文愍)이다.

김일손
출생1464년 2월 13일(음력 1월 7일)
조선 경상도 청도군 북상면 운계동
사망1498년 8월 14일(음력 7월 27일)
사인능지처참
성별남성
국적조선 조선
별칭자(字)는 계운(季雲) 호는 탁영(濯纓), 소미산인(少微山人) 시호는 문민(文愍)
학력이맹전에게서 수학하다 김종직에게서 수학
직업문신, 학자, 정치인, 작가
종교유교(성리학)
부모아버지 김맹, 어머니 이씨
배우자우씨, 김씨
자녀2남 첩자와 양자 대장
탁영교지[1](濯纓敎旨)

성종 때 춘추관의 사관(史官)이 되어 스승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세조를 비난한 목적으로 사초(史草)에 실었고 이것을 국문 도중에 드러나 반역죄로 사형당한다.

호(號) 탁영(濯纓)은 ‘갓끈을 씻는 사람’이란 뜻으로서 초나라 굴원(屈原)의 ‘어부사(漁父詞)’ 중 “창랑의 물이 맑으면 나의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나의 발을 씻으리”에서 따온 것이다.

생애편집

출생과 가계편집

김일손은 1464년(세조 10) 경상북도 청도군 북상면 운계동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용인 이씨의 꿈에 세 용마(龍馬)를 보고 세 아들을 낳아, 아들의 이름을 모두 마(馬)변이 있는 글자로 지었다고 한다. 큰 아들이 연천군(燕川君) 김준손(金駿孫)이며, 김기손(金驥孫)은 둘째이고, 막내아들인 그가 김일손(金馹孫)이다. 아버지 김맹(金孟)은 세종조에 집현전 교리가 되었다가 계유정란에 사직하고 귀향하였다가 성종조에 좌랑공신이 되었다. 벼슬은 사헌부 집의이다. 큰 형 김준손은 성종조에 홍문관 직제학을 지냈고 유배지에서 연산군의 학정을 규탄하는 격문을 선시하였고 작은 형 김기손은 사헌부감찰과 병조·이조좌랑, 창녕현감을 지냈으며, 효성의 귀감으로 후세에 알려지는 김극일(金克一 )의 손자이다.

성장기편집

1471년(성종 2년) 아버지 김맹이 예문관 봉교로 부임하자 외가 근처 용인 압고리(鴨皐里)에 이주했다.

형제들과 옥수정사(玉樹精舍)에서 〈소학〉·〈통감강목〉·사서(四書) 등을 배웠다. 1478년 성균관에서 입학하고 15세에 단양 우씨(丹陽 禹氏)와 혼인하였다.

1480년(성종 11년)에 아버지의 노환으로 가족이 고향 청도에 돌아갔다. 생육신의 한사람인 이맹전의 문하에서 수학하다가 밀양의 점필재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 찾아가 그의 제자가 되었다. 1483년 부친상을 당하였다. 그는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강혼(姜渾)·남효온(南孝溫) 등과 사귀었다.

2년간 이맹전김종직의 문하에서 수학하다가 이맹전이 병사하자 김종직의 문하에서 생활하다시피 하며 그에게서 성리학과 글, 사물을 배웠다. 그 당시 사림의 대표적 으뜸이던 김종직의 문하생인 그는 오래 스승의 문하에서 수학하다가 1486년(성종 17년)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生員)이 되었다.

관료 활동편집

과거 급제와 관료 생활 초반편집

상경한 뒤 같은 해 식년문과에 급제하였다. 처음 승문원에 들어가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로 관직 생활을 시작해, 곧 정자(正字)로서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을 겸하였다.

부인상을 당하고 그 뒤 모친 봉양을 위해 진주의 교수(敎授)로 나갔다 2년 동안 진주에 머물면서 진주목사 경대소(慶大素)를 비롯한 문인 30여 명이 촉석루(矗石樓)에서 진양수계(晉陽修禊)을 결성하였다. 병을 핑계로 교수직을 사임하고 고향에 돌아가 운계정사(雲溪精舍)를 열고 학문 연구에 몰두하였다.

1489년(성종 20년)에 정여창(鄭汝昌)과 두류산(頭流山)을 유람하고 〈두류기행록(頭流紀行錄)〉을 남겼다. 충청도 목천에서 예안 김씨(禮山 金氏)와 재혼하였다. 같은 해 9월에 성종에게 치도(治道) 12항을 상소했다.

언관 활동편집

1491년(성종 21년)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고, 뒤에 이조정랑(吏曹正郞)이 되었다. 주서(注書)·부수찬·장령·정언·이조좌랑·헌납·이조정랑 등을 두루 지냈다. 그는 주로 언관(言官)으로 있으면서 유자광(柳子光)·이극돈(李克墩) 등 훈구파(勳舊派) 학자들의 부패와 비행을 앞장서서 비판하였고, 한치의 굽힘이 없었다.

성종 때 춘추관 헌납(獻納) 재직시에 이극돈과 성준(成俊) 등이 새로 붕당의 분쟁을 일으킨다고 상소하여 이극돈을 비롯한 훈구파의 원한을 샀다. 그 뒤 질정관(質正官)으로 명나라에 파견되었을 때는 정유(鄭愈) 등의 중국 학자와 교유하며 사상을 주고 받고, 정유가 지은 〈소학집설 小學集說〉을 가지고 귀국하여 조선에 전파했다.

사관 활동편집

춘추관의 사관(史官)으로 있으면서 전라도관찰사 이극돈(李克墩) 등의 비행을 그대로 적었고, 윤필상 등의 부패 행위도 사서에 기록했다. 그러나 근거가 부족한 유언비어들을 검증없이 싣거나 자신의 스승인 김종직의 개인적인 시나 자기 동문들의 명단을 국가 공문서인 사초에 기록하는 등 사관으로서는 매우 부적절하게 행동한다.

또한 세조 찬위의 부당성을 풍자하여 스승 김종직이 지은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초에 실었다. <조의제문>은 그의 스승 김종직항우(項羽)가 초 회왕(懷王), 즉 의제(義帝)를 죽이고 찬탈한 것을 기록한 것으로, 초 의제를 조상하는 형식이었지만 실은 단종을 의제에 비유한 것으로 세조의 찬탈을 비난한 것이었다. 이 조의제문과 여러 왕실모독및 유언비어로 1498년(연산군 4년) 유자광·이극돈 등 훈구파가 일으킨 무오사화(戊午士禍) 때 그 결과로 김종직은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하였고, 권오복(權五福)·권경유(權景裕)·이목(李穆) 등 사림파 여러 인물들과 함께 처형당하게 된다.

그의 언행 가운데 훈구파에서 문제로 삼았던 것은 덕종의 후궁인 소훈 윤씨(昭訓尹氏)에게 이유 없이 지나치게 많은 전민(田民)과 가사(家舍)를 내렸다고 세조의 실정을 비판했고, 세조가 소훈 윤씨와 소의 권씨 등 장남 덕종의 후궁을 범하려다가 실패한 것을 기록했으며, 〈조의제문〉을 그대로 사초에 기록하였다.

1496년 음력 1월 ‘시국에 관한 시폐(時弊) 26개조’를 상소하면서 소릉복위를 주청하였다. 음력 3월 모친상을 당했다. 3년상을 마치고 1498년초 공직에 복귀했다.

학조 비판편집

학조가 왕실의 위세를 업고 해인사 주지를 자신의 수하로 갈아치운 사실을 기록한 것이 문제가 된 것이었다.[3] 또한 학조가 세종의 아들인 광평대군영응대군의 땅과 백성들을 사취한 사실도 문제가 된 기록이었다.[3] 승려 학조세조의 불사에 참여하여 총애를 받았고, 세조의 측근인 공신 김수온의 형제였다.

영응대군 부인 송씨는 군장사란 절에 올라가 설법을 듣다가 계집종이 깊이 잠들면 학조와 사통을 했다.[4] 그는 학조대방군부인 송씨의 간통 사실을 성종의 면전에서 직접 언급하며 이를 비판하였다.

그러나 공문서인 사초에 기록하기에는 근거가 부족한 경우가 많았는데 일례로 대방군부인 송씨의 기록의 근거는 동대문에 붙은 비방서 하나뿐인데 그걸 근거로 공문서인 사초에 기록해버렸다.

또한 무오사화 당시 이 사실도 사초에 들어 있었다.[4]

생애 후반편집

훈구파 비판편집

그는 세조의 꿈 때문에 어이없이 부관참시된 단종의 어머니인 현덕왕후(顯德王后)의 소릉(昭陵)을 복구할 것을 주장하였고, 황보 인(皇甫仁)·김종서(金宗瑞) 등을 절의를 지킨 인물로 평가하고, 숙의권씨(淑儀權氏)의 노비와 토지를 권람(權擥)이 가로챘다고 비판하였다. 이러한 그의 비판은 동료들로부터도 위험한 것으로 여겨져 정광필이나 남곤, 김굉필, 김전, 김안국 등은 그런 신랄한 지적을 한 그에게 되도록 외부에 발설하지 말라고 충고하거나, 오히려 그를 나무라고 질책했다.

그의 직언을 비판한 정광필김안국, 남곤, 김전, 김굉필 등은 살아남았지만, 그의 직언에 동조했거나 긍정적이었던 김종직의 문하생들은 대부분 무오사화갑자사화로 희생된다.

세조정희왕후 윤씨의 상중에 전라도관찰사 이극돈이 기생을 불러다가 술을 마신 것을 사초에 기록했다. 이것이 동료 사관을 통해 이극돈에게 알려지면서 그는 사초에서 상중에 기생과 어울린 내용을 빼줄 것을 청탁하였으나 김일손은 이를 단호하게 거절한다.

무오사화와 죽음편집

만년의 그는 풍병(風病)을 앓고 있었다. 그런데 1498년에 《성종실록》을 편찬할 때 앞서 스승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을 사초에 실은 것이 노사신·한치형·윤필상·신수근 · 유자광 등을 통해 연산군에게 알려졌다. 그 내용인 즉, 세조를 비방하고, 노산군의 억울한 죽음을 애도하는 것이 바로 그 이유였던 것이다. 곧 체포되어 심한 고문 끝에 대역죄로 음력 7월 광통방(廣通坊)[5]에서 능지처참되고, 권경유 · 권오복 · 허반 등 다른 많은 사류도 화를 당하게 되었다.

이 일을 무오사화라 한다. 이를 계기로 세조 때 등장하여 성종 때에 날개를 펴며 세력을 확장해나가던 신진 사림은 집권층인 훈구파에게 숙청되었다.

사후편집

그는 주로 언관(言官)으로 있으면서 유자광(柳子光)·윤필상·이극돈(李克墩)·임사홍 등 훈구파(勳舊派) 학자들과 학조 등 승려들의 부패와 비행을 앞장서서 신랄하게 지적과 규탄했다.

연산군1504년(연산군 10)에 갑자사화 때 ‘김일손의 집 땅을 깎아 평평하게 하라’고 명하고 아버지 김맹(金孟)을 부관참시하고, 그의 첩자 김청이(金淸伊)·김숙이(金淑伊)는 사람을 보내어 목을 베어 효수형에 처해졌다. 그리고, 이들을 죽이며 연산군은 “세조께서는 가문을 변화시켜 임금이 되신 분인데, 이와 같은 말을 차마 하였으니, 어찌 이보다 더한 난신적자가 있겠는가”라고 비판했다. 그의 가족이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해 자손이 끓겼지만 큰 형 김준손(金駿孫)의 차남 김대장(金大壯)이 입후(立後)하여 그의 대(代)를 이었다.

중종반정 이후 신원되었고, 문민(文愍)이라는 시호가 내려졌으며, 중종 때 직제학, 현종승정원 도승지, 순조 때 이조참판에 각각 추증되었다. 경상북도 청도의 자계서원(紫溪書院), 경상남도 함양의 청계서원(靑溪書院), 충청남도 목천(木川)의 도동서원(道東書院) 등에 배향되었다. 문집에 《탁영문집》이 있다.

그는 거문고를 좋아했고 능숙한 연주가였다. 그가 남긴 거문고는 탁영금이라고 해서 귀중한 유물이다. 김일손이 타던 거문고는 1490년경 만든 것으로 추정되며, 옛 선비들이 사용한 악기로는 유일하게 국가문화재(보물)로 지정되었다.

저서편집

  • 《탁영문집》
  • 《회로당기》
  • 《속두류록》

평가와 비판편집

긍정적 평가편집

일찍이 스승인 김종직을 닮아 사장(詞章)에 능했으며, 당시 고관들의 불의와 부패를 규탄하였다.

패관잡기에는 그를 평하기를 "계운(季雲·김일손의 자)은 참으로 세상에 드문 선비였으나, 불행한 시대를 만나 화를 입고 죽었다"고 애석해 했다. <사우명행록>(師友名行錄)은 "공은 참으로 세상에 드문 재주요, 묘당(廟堂)의 그릇이었다. ...(이하 중략)... 인물을 시비하고 국사를 논의함은 마치 청천백일 같았다. 애석하도다. 연산군이 어찌 차마 그를 거리에 내놓고 죽였는가"라고 연산군을 비판하고 있다.

지족당 남곤은 그의 문장력과 시 재주가 동문 수학들 중에서는 가장 뛰어났는데, 불행하게도 일찍 죽음을 당했다며 항상 애통해하였다.

남효온은 ‘김일손은 세상에 보기드문 자질을 타고났으며, 종묘에서 사용할 수 있는 그릇’이라고 추켜세웠다.

남명 조식은 그에 대해 “살아서는 서리를 업신여길 절개(凌霜之節)가 있었고, 죽어서는 하늘에 통하는 원통함이 있었다”고 하면서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다.

1668년 노론의 영수 우암 송시열은 "탁영선생은 문장과 절행으로서 한 시대의 으뜸이었던 분인데 불행하게도 연산군을 만나 동시(東市)에서 처형당하는 화를 입었고, 그 화는 온 사림(士林)에 미치었다. 지금도 당시의 일을 말할 때면 기가 막히고 목이 메지 않는 사람이 없다. 중국 사람들까지도 칭찬하여 말하길 ‘동국(東國)의 한유’라 하였다."라고 탁영선생문집 서문을 지었다.

부정적 평가편집

그러나 과격하다는 비판도 있다. 후대에 월정 윤근수가 지은 <월정만필>에 의하면 "김일손이 정광필과 양남어사(兩南御史)가 되어 용인의 객관에 같이 묵었을 때 ‘시사를 논하는데 강개하여 과격한 말을 많이 했다"고 전한다. 정광필 등은 그가 너무 과격하다며 이를 나무랐다고 한다.

사상과 신념편집

  • 立異以爲高 君子不取(입이이위고 군자불취) : 남다름을 대단하게 보는 것은 군자가 할 바가 아니다.[6]

사장(詞章) 중시편집

김종직의 문인 중에는 김굉필·정여창 등과 같이 경학(經學)을 중시하면서 ‘수기(修己)’를 지향하는 계열과, 남효온·조위 등과 같이 사장(詞章)을 중시하면서 ‘치인(治人)’을 지향하는 계열이 있었는데, 김일손은 후자의 대표적 인물이었다.

그는 일찍이 스승 김종직을 닮아 사장(詞章)에 능통했다.

두류시(頭流詩)

푸른 물결 넘실넘실 노젓는 소리 부드러워

옷소매 스치는 맑은 바람 가을인양 서늘하다.

머리 돌려 다시 보니 정말 그 모습 아름다워

한가한 구름 흔적 없이 두류산을 넘어가네.

지리산 유람 때 지은 시

도한강(渡漢江)

말 한마리 느릿느릿 한강을 건너는데

꽃잎은 물결 따라 흐르고 버들은 찡그린 듯하네.

미천한 신하 이제 가면 언제 다시 오겠는가

그래도 고개 돌려 남산을 돌아보니 이미 봄은 저물었더라.

사직을 청하고 낙향하면서 지은 시

한편, 현실 대응 자세는 매우 과감하고 진취적이었다. 예컨데 소릉 복위 상소나 조의제문을 사초에 수록한 사실 등에서 정치적 성향을 엿볼 수 있다. 이는 세조의 즉위 사실 자체와 그로 인해 배출된 공신의 존재 명분을 간접적으로 부정한 것으로서, 당시로서는 극히 모험적인 일이었다.

외금내고(外今內古) 자세편집

1493년(성종 24년) 겨울 독서당에서 공부하다 틈날 때 마다 거문고를 배웠는데, 권오복이 물었다. “여러분께서는 옛것을 좋아하면서 왜 오현금이나 칠현금을 곁에 두지 않습니까?" 김일손이 답하기를 “지금의 음악은 옛날 음악에 말미암은 것이오. 소강절이 옛날 옷인 심의를 입지 않고 ‘지금 사람은 마땅히 지금의 옷을 입어야 한다’ 고 했는데, 나는 이 말을 취한 것이오”

김일손은 지금의 육현금만 고집했던 것은 아니었다. 육현금을 독서당에 비치해 두었고, 또 오현금을 집안에 두었다. 어떤 손님이 보고 의문하니 김일손이 답하기를 “겉으로는 지금의 것을, 마음으로는 옛것을 따르고자 합니다.”

공납의 폐단 비판편집

지리산 기행문 《속두류록》에 깊은 산중에까지 미친 시정의 폐단에 눈살을 찌푸리는 광경을 서슴 없이 기술하고 있다.

하동 오대사 인근 주민들이 이정의 횡포로 번잡한 조세와 과중한 부역에 시달린다고 하소연하였고, 지리산에 잣이 많이 난다는 속설을 믿고 해마다 관청에서 잣을 독촉하느라 주민들이 산지에서 사다가 공물로 충당한다는 사실을 숨김 없이 토로하였다. 또한 하동 쌍계사에 들렀을 때는 관청에서 은어를 잡는데, 불어난 물로 여의치 않자 승려들에게 살생에 필요한 물건들을 준비하라 재촉하는 모습 등 기술하였다.

또한 굶주림을 이기지 못한 산속 백성들이 밭을 일구려고 좌방사 앞의 밤나무를 도끼로 찍어 남긴 것을 본 탁영의 “높은 산 깊은 골까지 개간하여 경작하려 하니, 나라의 백성이 많아진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의 생활을 넉넉하게 하고, 그들을 교화시킬 방도를 생각해야 할 것이다”라는 말에서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를 중시하는 조선 초기 신진학자의 의식세계를 가졌다.

김일손이 등장한 작품편집

관련 문화재편집

기타편집

학맥편집

학통상으로는 정몽주의 학파였다. 학맥상으로는 백이정안향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백이정, 안향이제현이색정몽주길재김숙자김종직→김일손으로 이어진다.

백이정, 안향이제현이색정도전

             →이숭인
             →정몽주권근
                  →권우세종대왕
                     →정인지
                  →길재김숙자김종직정여창
                             →김굉필조광조
                                 →김안국
                                 →김정국
                             →주계부정 이심원
                             →김일손
                             →김전
                             →남곤

남곤의 추도시편집

남곤은 그의 동문이자 친구였으며 같은 스승 김종직의 문하에서 공부했다. 무오사화로 죽임을 당한 탁영(濯纓) 김일손의 묘를 중종반정 후 이장할 때 남곤은 글을 지어 "공(公)은 참으로 세상에 드문 재주요 묘당(廟堂)의 그릇이었다. 소장(疎章)과 차자(箚子)의 문장이 넓고 깊음이 큰 바다와 같았고, 인물은 시비하고 국사를 논함이 마치 청천백일(靑天白日) 같았다. 애석(哀惜)하도다 연산군이 어찌 차마 그를 거리에 내놓고 죽였는가, 공은 실로 세상에 드문 선비였다.불행한 때를 만나 화(禍)를 입고 죽었구나" 하고 애석해 하면서 만시(輓詩)를 지었다.

귀신(鬼神)은 아득하고 어두운데 천도는 진실로 알기도 어렵구나.
귀신도 천도는 좋아하고 미워함이 인간과는 달라 화와 복을 항상 거꾸로 베푸나니,
길고 긴 이 우주(宇宙)에 오래 사나 짧게 사나 하루살이와 같은 것이라.
촉루의 즐거움이 인간의 임금보다 나은지 어찌알랴,
달관으로 한 웃음에 부치니 뜬 구름처럼 아득하다.
다만 아깝기는 세상에 이름난 사람은 한번 나기 매양 어렵도다.
수백년을 걸려서야 겨우 한번 보게되네.
그를 보고도 성취시키지 못하니 태평의 다스림을 어느 때에나 보랴,
나의 난 것이 무슨 다행으로 그대와 동시였네,
서한시대(西漢時代)의 문장이요,송(宋)나라 원풍(元豊), 희녕(熙寧)시대의 인물이었네,
정치의 잘못됨을 한 숨 쉬고 통곡(痛哭)하며,
옳은 일이라면 용감(勇敢)히 하였도다.
강관의 무리들이 옆에서 이를 갈며 엿보는 줄 어찌 알았으랴,
큰 칼 쓴 죄인으로 문득 사형장(死 刑場)으로 가란 말가,
세상 만사에 없는 일이 없구나,
동해 바다가 끝없이 너르네,
지금은 세상이 바로 되어가 혹한 법도 풀어져 선하고 악한 것이 구별이 되네,
어찌 무오년의 원통(寃痛)함은 아직도 신설(伸雪)하지 못하는고,
춘추의 필법에는 내 임금의 허물을 위(諱)하는 예가 있어
정공(定公).애공(哀公)의 기록에는 숨긴 말이 많다하나 이렇게 춘추(春秋)를 지은 성인(聖人)은 하늘과도 같아서 후세 사람 따를 바 못되고,
붓을 잡아 들은대로 쓰는 것은 사가(史家)의 상례이다.
들은바 가 바르고 틀림이 있다해도 그것은 사람의 사견(私見)이다.
그것을 정리 편찬하는 데는 실록청(實錄廳)이 있으니
허위로 된 것이면 깎으면 그만인데
다만 뱃속의 칼이 터럭속의 흠터를 찾아냈네.
위(魏)나라 사람들이 국악(國惡)을 써서 길거리 에 보인 것과는 비할 것도 아니로다.
벼슬 자리에서 직무(職務)를 행하지 못했다면 그 죄는 매를 치면 될 것이요
,현능한 인재에는 특별히 용서하고 감형하는 옛 법도 있는 바다.
이런 말씀 아뢰어 임금의 의혹을 풀어드릴이 없구나.
세월도 10년을 넘게되니 식자들의 가슴에 영원한 슬픔이여,
파타성(跛타城) 성동의 낮은 언덕 초라하여 시체 감출곳 되지 못하네
사랑하는 자질들이 좋은 땅 가려 이장 (移葬)하려 하도다.
그대는 지금 하늘 위에서 굽어보면 먼지만 자욱하리.
솔개나 굼벵이를 택하지 않거든 하물며 이땅저땅 상관하랴마는
인간에서 구구하게 성묘 (省墓)하고 제사(祭祀)드리기 편함을 취함이네.
처량하다 목천현(木川縣)에 구불 구불한 산기슭,
후일에 도지(圖誌)를 편찬(編纂)할 때 이 무덤 기록하여 빼지마오.

가계편집

6대 조부 김관(金管)은 불교를 배척하고 유학 진흥에 공헌한 선비이다. 정몽주와 교유한 고조부 김항(金伉)[주해 1]청도에 터를 잡아 대대로 정착하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증조부 의흥 현감(義興縣監) 김서(金湑)이다. 할아버지는 모암 김극일(金克一)로 길재(吉再)에게 수학했고 효성이 지극하여 절효(節孝)라고 일컬어졌다. 아버지는 남계 김맹(金孟)으로 김숙자(金叔滋)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또한 형인 김준손(金駿孫)과 김기손(金驥孫)도 정시(庭試)에 합격함으로써 가문 전체가 당대에 이름을 떨쳤다. 김일손의 가계는 영남 사림의 정통적인 맥과 흐름을 같이하고 있는데, 이러한 가문 배경으로 인해 어려서부터 도학과 문학에 쉽게 접할 수 있었다.

선대편집

  • 6대조부 : 김관(金管, 1250년(고려 고종 37년) ~ 1345년(충목왕 1년)) - 수로왕의 49세손. 충목왕 때 판도판서
  • 6대조모 : 나주 임씨(羅州 林氏) - 대사성 임의충(林宜衷)의 딸
  • 현조부 : 김문숙(金文淑, 1293년(충렬왕 19년) ~ 1348년(충목왕 4년)) - 경덕재생
  • 현조모 : 서산 류씨(瑞山 柳氏)
  • 고조부 : 김항(金沆, 1326년(충숙왕 13년) ~ 1382년(우왕 8년)) - 도제고 판관
    • 종고조부 : 김저(金佇)
  • 고조모 : 청주 고씨(淸州 高氏) - 학사 고지린(高知麟)의 딸
  • 증조부 : 분릉군 김서(盆陵君 金湑, 1342년 (충혜왕 3년) ~ 1420년 (조선 세종 2년) 향년 79세로 별세), 의흥 현감
    • 종증조부 : 김위(金渭)
  • 증조모 : 밀양 박씨(密陽 朴氏) - 중서내령 박천봉(朴天鳳)의 딸
  • 조부 : 김극일(金克一, 1382년(우왕 8년)∼ 1456년(조선 세조 2년))
    • 종조부 : 김태일(兌一)
  • 조모 : 경주 이씨(慶州 李氏) - 한성판윤 이연(李湅)의 딸
    • 아버지 : 김맹(金孟, 1410년(태종 10년) ~ 1483년(성종 14년)) - 1455년(조선 세조 1), 이조 참판
    • 전모 : 진주 정씨(晉州 鄭氏) - 어은 정중건(鄭仲虔)의 딸
    • 생모 : 용인 이씨(龍仁 李氏) - 형조참의 이양(李讓)의 딸, 공조전서 이중순(李中順)의 증손
      • 백부 : 김건(金健)
      • 숙부 : 김용(金勇)
      • 숙부 : 김순(金順)
      • 숙부 : 김인(金靭)
      • 숙부 : 김현(金鉉)

형제편집

  • 형 : 연천군 김준손(燕川君 金駿孫,[주해 2] 1454년 ∼ 1508년)
  • 형수 : 이씨(李氏)- 이설(李設)의 딸, 자녀를 두지 못했다.
  • 형수 : 제주 고씨(濟州 高氏)- 첨정 고태익(高台翼)[주해 3]의 딸
    • 조카 : 김대유(金大有, 1479년 ~ 1551년), 호는 삼족당(三足堂)
    • 조카 며느리 : 벽진 이씨(碧珍 李氏) - 현감 이량(李樑)의 딸
      • 종손 : 김성(金鋮) - 서출(庶出)
      • 종손 : 김생(金鉎) - 서출(庶出)
  • 형수 : 남원 양씨(南原 梁氏) - 직장 양보(梁普)의 딸, 판상서 양우용(梁友龍)의 증손
    • 조카 : 김대장(金大壯) - 계부 김일손에게 출계
    • 조카 : 김대축(金大畜, 1496년 ~ 1563년)
    • 조카 : 김대아(金大雅, 1498년 ~ 1576년)
    • 조카 : 전의 이씨 이공권(李公權)에게 출가
  • 형 : 김기손(金驥孫,[주해 4] 1456년 ∼ 1493년)
  • 형수 : 흥해 최씨(興海 崔氏) - 직제학 최연(崔淵)의 딸, 현감 최윤(崔潤)의 손녀, 대사성 최강(崔康)의 증손
    • 조카 : 김부영(金富榮) - 삼종형제 김적수(金積水)의 차남
      • 종손 : 김만성(金晚成, 1535년 ~ 1584년)
  • 이복 누나 : 김진경(金震卿)에게 출가, 진주 정씨의 소생
  • 누나 : 파평 윤씨 윤기분(尹起汾)에게 출가
    • 조카 : 윤수(尹燧)
    • 조카 : 윤돈(尹燉)
  • 누나 : 한양 조씨 조건(趙鍵)에게 출가 - 이조정랑 조덕생(趙德生)의 아들
    • 조카 : 조여우(趙如愚)
    • 조카 : 조여회(趙如晦)
    • 조카 : 현풍 곽씨 곽당(郭塘)에게 출가
  • 서형 : 김원(金元, 1456년 ~ 미상) - 통사랑
    • 조카 : 김진심(金震諶) - 선무랑
  • 서형 : 김형(金亨, 1459년 ~ 1520년) - 시강원 부사직
    • 조카 : 김대심(金大諶) - 충순위 부사정
    • 조카 : 김대홍(金大洪)
    • 조카 : 김소축(金小畜)
  • 서형 : 김이(金利, 1461년 ~ 미상)- 훈련원 도정
  • 서형 : 김정(金貞)
  • 서형 : 김흠(金欽)
  • 서형 : 김명(金明) - 통례원 좌통례
    • 조카 : 김옥(金鋈)
  • 서형 : 김문(金文)
  • 서형 : 김사(金思)

부인과 후손편집

  • 초배 : 단양 우씨(丹陽 禹氏) - 호군 우극관(禹克寬)의 딸, 감찰 우원보(禹元寶)의 손녀, 안정공 우홍강(禹洪康)의 증손, 충정공 우현보(禹玄寶)의 현손
  • 후배 : 예안 김씨(禮安 金氏) - 참판 김미손(金尾孫)의 딸, 낙안군수 김신(金新)의 손녀, 이조 참판 김숙량(金叔良)의 증손
    • 양자 : 김대장(金大壯, 1493년 ∼ 1549년) - 창녕현감
    • 자부 : 남원 양씨(南原 梁氏)- 현감 양치준(梁治準)의 딸
      • 손자 : 김갱(金鏗) - 사헌부 지평
      • 손부 : 밀양 박씨(密陽 朴氏) - 병재 박하징(朴河澄)의 딸
      • 손자 : 김장(金鏘) - 충좌위 사과
      • 손부 : 전주 류씨(全州 柳氏) - 류세봉(柳世鳳)의 딸
        • 증손 : 김치삼(金致三, 1560년 ∼ 1625년)
        • 증손 : 김치세(金致世, 1563년 ~ 1597년) - 서출(庶出), 순창에서 활동한 의병장
        • 증손 : 김치수(金致水, 1566년 ~ 1625년) - 서출(庶出)
        • 증손 : 김치륜(金致倫) - 서출(庶出)
        • 증손녀 : 문화 류씨 류광선(柳光先)에게 출가
        • 증손녀 : 순천 김씨 김류(金瀏)에게 출가
        • 증손녀 : 풍양 조씨 조엽(趙曄)에게 출가
      • 손녀 : 광주 안씨 안굉(安宏)에게 출가 - 예빈시부정 안팽명(安彭命)의 손자이며 판관 안경우(安景祐)의 아들
        • 외증손 : 안극충(安克忠)
      • 서손 : 김령(金鈴, 1520년 ~ 1607년) - 부호군
      • 손부 : 밀양 박씨(密陽 朴氏) - 박언정(朴彦貞)의 딸, 소요당 박하담(朴河淡)의 후손
      • 손부 : 한양 조씨(漢陽 趙氏) - 조창호(趙昌浩)의 딸
        • 증손 : 김계우(金啓遇, 1562년 ~ 1622년) - 훈련원 판관
        • 증손 : 김계무(金啓務, 1565년 ~ 1628년) - 선략장군
        • 증손 : 김계상(金啓常, 1567년 ~ 미상) - 울산부사
        • 증손 : 가성군 김수원(伽城君 金秀源, 1569년 ~ 1630년) - 내금위장 호성공신 3등, 단원 김홍도(金弘道)의 선조
        • 증손녀 : 달성 배씨 배인권(裵仁權)에게 출가
        • 증손녀 : 반남 박씨 박장수(朴章秀)에게 출가
        • 증손녀 : 남원 양씨 양기문(梁起門)에게 출가
      • 서손 : 김순(金錞, 1522년 ~ 미상) - 장사랑
        • 증손 : 김치방(金致邦)
        • 증손 : 김치목(金致穆)
      • 서손 : 김굉(金鍠, 1524년 ~ 1578년)
        • 증손 : 김우성(金禹成)
        • 증손 : 김우삼(金禹三)
      • 서손 : 김용(金鎔, 1526년 ~ 미상) - 진사
        • 증송 : 김치원(金致遠)
      • 서손 : 김용(金鏞, 1528년 ~ 미상)
        • 증손 : 김업산(金業山)
      • 서손 : 김록(金録, 1529년 ~ 1585년)
        • 증손 : 김치완(金致完)

각주편집

  1. 보기드물게 금박을 섞어 만든 붉은 장지를 사용함
  2. '이종범의 사림열전' 김일손(金馹孫): 당신의 죽음은 하늘의 시샘이었다 ① - 프레시안
  3. 이덕일, 사화로 보는 조선 역사 (석필, 2005) 312페이지
  4. 박홍갑, 사관 위에는 하늘이 있소이다 (가람기획, 1999) 114페이지
  5. 조흥은행 본점이 있던 광교 네거리 근처
  6. 《탁영집(濯纓集)》, 〈영산현감신담생사당기(靈山縣監申澹生祠堂記)〉

참고 문헌편집

  • 성종실록
  • 연산군일기
  • 대동야승
  • 연려실기술

외부 링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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