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토론:Asadal/2012년 상반기

마지막 댓글: Asadal님 (12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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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상반기 사용자 토론 내용을 보관합니다. -- 아사달(Asadal) (토론) 2012년 5월 13일 (일) 15:50 (KST)답변


"환영합니다" 틀 -- 2012년 1월 9일 (월) 02:12 (KST)

파일:Crow.jpg 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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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올리신 파일의 설명에 전 세계 누구나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라고 쓰셨는데, 이는 위키백과:저작권 정책에서 말하는 영리적 이용 또한 허가하는 것입니까? --가람 (논의) 2012년 1월 29일 (일) 01:31 (KST)답변

답변을 요청합니다. 적절한 해답이 없으시다면, 위 문서는 위키백과:삭제 정책에 의거하여 삭제될 수 있습니다. --가람 (논의) 2012년 1월 29일 (일) 01:39 (KST)답변

예, 영리적 목적으로 사용하셔도 됩니다. Cnsuh (토론) 2012년 1월 29일 (일) 01:46 (KST)(주)아사달답변

덧붙여서, 본 파일의 설명에서는 '로고'라고 말하고 있습니다만, 귀 회사 홈페이지를 참고하면, 로고와 상이하게 차이가 있는 것으로 판단됩니다만, 이에 대해 설명을 요청합니다. --가람 (논의) 2012년 1월 29일 (일) 01:53 (KST)답변

그렇군요. '로고'라는 말을 삭제하고 '상징'으로 수정했습니다. Cnsuh (토론) 2012년 1월 29일 (일) 01:55 (KST)(주)아사달답변

마지막으로 올리신 파일의 경우 인터넷에서 떠돌아 다니는 경우를 많아 볼 수 있어서 확인 차 여쭙는 말씀입니다만, 저 파일의 저작권자는 '아사달' 회사가 분명 맞습니까? --가람 (논의) 2012년 1월 29일 (일) 02:00 (KST)답변

예, 맞습니다. 제가 저희 회사 디자이너와 함께 여러 차례 수정하면서 직접 그린 그림입니다.Cnsuh (토론) 2012년 1월 29일 (일) 02:03 (KST)(주)아사달 대표이사 서창녕답변

답변 감사합니다. 위 파일에 달려있는 {{Copyrighted free use}} 틀에 {{PD-self}} 틀을 덧대어 달아주신다면, 좀 더 배포에 용이하다고 판단합니다. :) --가람 (논의) 2012년 1월 29일 (일) 02:09 (KST)답변

두 개가 어떻게 다른가요? Cnsuh (토론) 2012년 1월 29일 (일) 02:21 (KST)서창녕답변

사실상 같은 틀입니다. 이와 관련해서는 틀:PD-self#동일한 틀을 참고해주세요. --가람 (논의) 2012년 1월 29일 (일) 02:24 (KST)답변

예, 요청한대로 처리했습니다. 그리고 (주)아사달 홈페이지( http://company.asadal.com/asadal/crow.htm )에도 같은 내용으로 글을 올려두었습니다. Cnsuh (토론) 2012년 1월 29일 (일) 02:35 (KST)서창녕답변

확인하였습니다. 또한, 삼족오 문서에도 재적용됨을 알려드립니다. --가람 (논의) 2012년 1월 29일 (일) 02:37 (KST)답변
예, 좋군요. 가람 님도 늦은 밤까지 수고가 많습니다. :) Cnsuh (토론) 2012년 1월 29일 (일) 02:42 (KST)서창녕답변

발해 국호 관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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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진국 이라고 하시는거 보면 환빠이신가요?

이미 결정되어 있는 내용을 바꾸지 말아 쥐기 바랍니다.

최근 학계에서도 발해 스스로가 국호를 발해라고 했다는것이 정설 입니다.

대진국이라는 것은 환단고기에 나오는 내용이고요

진국은 신당서 구당서에 나오는 내용이죠 또는 그냥 말갈이라고도 하지만

한국기록 삼국유사 등에서는 고구려의 남은 무리들이 태백산 밑에 스스로 나라를 세워 발해라 하였다. 라고 나옵니다

발해인들이 스스로 칭하길 고려라고 칭하기도 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일본에 문서를 보낼때 고려 국왕 대흠무 라고 한것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발해라 적힌 기와가 발견되기도 하고 최근 학계에서는 발해가 스스로 국호를 정했고 이는 발해 정효공주 묘에서도 발해왕을 황상이라 칭했으며

또 발해 황후의 릉도 발견되었습니다.(왕후가 아닌 황후) 발해는 스스로 연호를 사용 했으며 매우 자주적인 국가 였습니다.

이로보아 최근 학계에서는 발해 스스로 국호를 정했는데 당나라에서는 말갈 등 비칭으로 부르기도 했으며

발해 건국되기전 걸걸중장 대조영이 당의 영주를 탈출 하고 도망갈때 당나라 황제 측천무후가 걸걸 중상을 '진국공'에 걸사비우를 허국공에 봉했습니다.

이 '진국공'에 봉했는데(물론 걸걸중상은 거부) 당에서는 이 '진국공'에 봉한것을 가지고 발해가 처음 국호를 진국으로 했다고

구당서 신당서에 기록 해놨습니다. 한국 학계에서는 이것으로 보아 당나라가 일방 적으로 중화사상에 입각해 사서에 자기중심적으로 쓴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이것이 일반적인 학계에 견해입니다.

학계에서는 발해가 먼저 스스로 국호를 발해라 했고, 나중에 당이 발해국왕에 형식상 책봉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진국 이라는것도 비슷하게 보고 있습니다. 당이 고구려 부흥을 막고 고구려 유민들을 회유 하고자

고구려 유민 지도자인 걸걸중상을 '진국공'에 봉해 회유 하고자 했습니다. 이것을 나중에 당이 사서에 기록 하길

처음에 당이 '진국공'에 봉했고 발해가 국호를 처음에 진국이라 하고 또는 말갈이라고 하다가 나중에 발해군왕에 봉해서 국호가 발해가 되었다고

일방적으로 당이 중화사상에 입각해 자기 중심적 기록을 했다는게 학계에 견해입니다.

현재 정설은 고구려 유민들이 영주를 탈출 하자 당에서 이를 회유하고자 유민 지도자 걸걸중상을 진국공에 봉하여 회유하려 했지만

걸걸중상은 이를 거절 하고 나중에 당에서 군대(이해고)를 보내 걸걸중상과 걸사비우를 죽이고 계속 진격 하는데

대조영이 고구려유민과 말갈족을 합쳐 당군을 격파하고 동모산에 나라를 새워 스스로 국호를 발해라 정했는데

처음에는 고구려의 부흥을 인정하지 않던 당이 결국에는 발해의 건국을 인정 하고 대조영을 발해군왕에 형식상 책봉 합니다.

이것이 현재 학계에 정설입니다.

학계에서 인정 되는 내용만 올려 주시기 바랍니다. 학계에서 위서라고 하는 환단고기에 나오는 대진국이라던지

학계에서 인정 하지 않는 진국이나 발해말갈이라는것은 학계에서 인정 받지 못합니다. 육군 주임원사 (토론) 2012년 1월 29일 (일) 15:04 (KST)답변

예, 잘 알겠습니다. 발해 역사에 대해서 상당히 깊이 연구한 것 같군요. 덕분에 좋은 내용을 알게 되었습니다. 앞으로도 이런 내용을 잘 모르는 사람이 많을 것 같으니, 발해의 국호에 대해서 따로 자세히 몇 줄 정도 더 추가해 주면 좋겠습니다. 즉, 발해의 원래 국호가 대진국이라는 주장에 대해 간략히 쓰고, 그 주장에 대한 반대의견을 함께 적어놓으면 앞으로 이런 문제가 또 발생하는 것을 예방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사달 (토론) 2012년 1월 30일 (월) 02:12 (KST)서창녕(Cnsuh)답변

오랜만에 이 글을 다시 읽어보니, "육군주임원사" 님이 좀 오버한 면이 있군요. 아무 근거도 없이 상대방에게 "환빠"라고 몰아부치는 것은 좋은 토론 방식이 아닙니다. 저는 환빠도 아니고, 그런 비난의 말을 들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는 사람입니다.
유득공이 쓴 발해고라는 책을 보면, 발해는 원래 국호를 "진국"이라고 했는데 나중에 "발해"라고 국호를 고쳤다고 적혀 있습니다. 물론 현대 역사학계에서 발해고의 내용을 인정하든 혹은 인정하지 않든, 발해를 "진국"이라고 불렀다는 말을 했다고 해서 무조건 환빠라고 하면 곤란합니다. 유득공은 조선 시대 실학자인데, 그럼 유득공도 환빠인가요? 환단고기가 나오기도 전에 조선 시대에도 환빠가 있었나요?
그냥 내용이 마음에 안 들면 내용만 지적하면 되지, 왜 상대방에게 환빠라고 딱지를 붙이나요? 듣는 사람 굉장히 기분 나쁠 수 있습니다. 혹시 지금이라도 이 글을 보신다면, 저에게 정중히 사과하셔야 하겠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저 "환빠" 아닙니다.

아사달 (토론) 2012년 3월 29일 (목) 00:11 (KST)답변

참고로 조선의 실학자 유득공이 발해고라는 책에서 쓴 군고 부분을 요약해서 올려 드립니다. 이 내용이 옳건 틀리건 그게 쟁점이 아닙니다. 유득공도 발해를 진국이라고 불렀다는 사실이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발해를 진국이라고 부른다고 해서 환빠라고 몰아부치지는 말아달라는 부탁만 드리겠습니다.

군고(君考)는 발해의 역대 임금에 대한 고찰이다. 진국공(震國公)은 성이 대씨(大氏)이고 이름이 걸걸중상(乞乞仲象)이며 속말말갈인(粟末靺鞨人)이다. 발해를 건국한 고왕 대조영(大祚榮)은 진국공의 아들로서 고구려의 장수였는데 아주 용맹스러웠고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 하였다. 아버지 진국공이 사망하고 걸사비우가 이해고의 공격을 받아 죽자 대조영은 이를 피해 도망하다가 천문령에서 고구려와 말갈 군사를 이끌고 이해고를 크게 격파하였다. 대조영은 걸사비우의 무리를 병합하여 읍루족이 살았던 동모산을 거점으로 말갈과 고구려 유민들을 규합하여 성력 원년(서기 698년)에 나라 이름을 진(震)이라고 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라 진국왕(震國王)이 되었다. 당나라 현종 2년(서기 713년)에 고왕 대조영을 발해군왕에 책봉하고 그 땅을 홀한주로 삼자 이때부터 나라 이름을 발해(渤海)라고 부르게 되었다. 무왕 대무예(大武藝)는 고왕 대조영의 아들로서 인안이라는 연호를 사용했는데, 개원 20년(서기 732년)에 대장 장문휴(張文休)를 시켜 바다를 건너 당나라 등주를 공격하여 등주자사 위준을 죽이고 큰 승리를 거두었다. 문왕 대흠무(大欽茂)는 무왕 대무예의 아들로서 당나라에서 안녹산과 사사명이 내란을 일으키자 이에 동조하지 않고 오히려 이들을 소탕하는데 협조하였다. 이 공로로 보응 원년(서기 762년)에 발해국왕에 책봉되었다.

아사달 (토론) 2012년 3월 29일 (목) 01:21 (KST)답변

문서의 전체 삭제 신청 또는 특정판 삭제 신청 알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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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문서의 내용이나 일부 문서의 특정판에 대한 삭제가 신청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달성서씨의 내용은 다른 곳에서 정리 없이 그대로 임의 복사 & 붙여넣기한 것으로 판단되었습니다. --ted (토론) 2012년 1월 29일 (일) 15:03 (KST)답변

제가 쓴 글이 확실합니다. 저작권 침해 행위를 한 적이 없습니다. 제가 쓴 글이 확실하다는 것을 인정해 주신 Ykhwong 님께 거듭 감사를 드립니다. 아사달 (토론) 2012년 4월 1일 (일) 03:51 (KST)답변

달성서씨 문서 관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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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달성서씨 문서를 삭제했던데 다시 살려주세요. 삭제 이유를 보니, 퍼온글이라고 되어 있던데, 퍼온글이 아니라 제가 직접 작성한 글입니다. 저는 달성서씨 26세손 서창녕입니다. 1997년 제 개인 홈페이지를 만들고, 달성서씨 관련 서적을 여러 권 참조하여 제가 직접 글을 작성한 뒤 제 개인 홈페이지에 달성서씨에 관한 글을 올려두었습니다. 그 글이 당시 최고의 인기를 끌면서 각종 인터넷 사이트에서 퍼나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비록 그 글은 제가 직접 작성한 것이었지만 내용이 좋고 여러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는 것이 도움이 될 것 같아서 누구든지 자유롭게 제 글을 이용할 수 있도록 허용하였습니다. 이제 다시 위키백과에 제 글을 올려서 많은 사람들이 달성서씨에 대해서 자세한 내용을 알기를 원하여, 예전에 제가 작성했던 글을 위키백과에 다시 올렸습니다. 다만 제 글에 포함된 사진 2장은 저작권이 확실하지 않아서 사진을 제외한 글 내용만 제가 직접 위키백과에 올린 것입니다. 제 글에 대한 저작권은 PD-self 로 하여 누구든지 영리적 또는 비영리적 목적으로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어제 삭제한 달성서씨에 관한 제 글을 다시 살려주기 바랍니다.

아사달 (토론) 2012년 1월 30일 (월) 02:14 (KST)서창녕(Cnsuh)답변

사용자 하위 문서, 사용자:Cnsuh/달성서씨로 복구했습니다. 사용자토론:Ykhwong#달성서씨 문서 관련에서 사용자:Ykhwong님의 말씀처럼, 위키백과:확인 가능#개인이 출판한 출처 (인터넷 또는 서적)에 따라서, 개인 블로그 글은 출처로 사용할 수 없으므로 해당 글에 위키백과:신뢰할 수 있는 출처를 삽입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그런 이후, 정식 문서로 이동하시기 바랍니다. -- 리듬 (토론) 2012년 1월 30일 (월) 07:14 (KST)답변
예, 좋은 지적 감사합니다. 조만간 정확한 출처를 찾아서 모두 주석을 달도록 하겠습니다. 아사달 (토론) 2012년 1월 30일 (월) 23:57 (KST)달성서씨 26세손 서창녕답변

달성서씨 문서 작성 수고하셨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기여 바라겠습니다. --ted (토론) 2012년 2월 1일 (수) 03:12 (KST)답변

예, 감사합니다. 이 글에 출처를 찾아서 주석을 달려고 집에 있는 족보책이라는 족보책은 전부 다 꺼내놓고 아주 한참을 뒤적였습니다. 원래 제가 이 글을 처음 쓴 것은 1997년경이었는데, 그 때는 新興印刷所에서 1990년 10월 1일자로 발행한 《家乘便覽》이라는 책을 주로 참고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이에 새로 인쇄된 족보 책이 많이 나왔더군요. 그래서 이번에 주석을 달 때는 최근 책도 많이 참고할 수 있도록 여러 책을 주석으로 달았습니다. 앞으로도 제가 위키백과에 글을 올릴 때는 관련 서적을 최대한 찾아서 출처를 정확히 달도록 하겠습니다. Ykhwong 님의 지적 덕분에 제 글이 더 정확해진 것 같습니다. 어쨌든 여러 모로 많이 감사합니다. 아사달 (토론) 2012년 2월 1일 (수) 03:25 (KST)아사달 서창녕답변

달성 서씨 삭제 신청 취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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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이부키 님이 달성서씨 문서에 대해서 삭제 신청을 했던데 취소해 주세요. 삭제 이유를 보니, 인터넷에 떠돌아 다니는 글과 내용이 중복된다고 되어 있던데요. 이 글은 퍼온글이 아니라 제가 직접 작성한 글입니다.

  • 저는 달성서씨 26세손 서창녕입니다. 1997년 제 개인 홈페이지를 만들고, 달성서씨 관련 서적을 여러 권 참조하여 제가 직접 글을 작성한 뒤 제 개인 홈페이지에 달성서씨에 관한 글을 올려두었습니다. (참고: 서창녕 개인 홈페이지 http://www.csuh.pe.kr/profile/dalsungsuh.htm) 그 글이 당시 최고의 인기를 끌면서 여러 사람이 각종 인터넷 사이트에 퍼나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글은 제가 직접 작성한 것으로서 내용이 좋고 여러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는 것이 도움이 될 것 같아서 누구든지 자유롭게 제 글을 이용할 수 있도록 허용하였습니다. 이제 다시 위키백과에 제 글을 올려서 많은 사람들이 달성서씨에 대해서 자세한 내용을 알기를 원하여, 예전에 제가 작성했던 글을 위키백과에 다시 올렸습니다. 제 글에 대한 저작권은 PD-self 로 하여 누구든지 영리적 또는 비영리적 목적으로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습니다.
  • 원래 제가 이 글을 처음 쓴 것은 1997년경이었는데, 그 때는 新興印刷所에서 1990년 10월 1일자로 발행한 《家乘便覽》이라는 책을 주로 참고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이에 새로 인쇄된 족보 책이 많이 나와서 이번에 제 글에 주석을 달 때는 최근 책도 많이 참고할 수 있도록 여러 책을 주석으로 달았습니다.
  • 참고로 며칠 전에도 Ykhwong 이라는 분이 제 글을 삭제했다가 제 해명을 듣고 다시 살려준 적이 있습니다. 제 글을 다시 살린지 불과 몇 시간도 안 되어서 또 삭제 요청이 들어왔네요. 그만큼 제 글이 인터넷에 많이 떠돌아다니고 있어서 유명해진 덕분(?)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어쨌든 이 글은 제가 1997년에 직접 쓴 글이 확실하며, 다른 사람들이 지난 15년간 제 글을 여러 인터넷 사이트에 마구 퍼나른 것입니다. 이제 제가 저작권자로서 PD-self 로 위키백과에 올리는 것이니, 더 이상은 삭제 신청을 하지 말아주세요.

아사달 (토론) 2012년 2월 1일 (수) 03:55 (KST)달성서씨 26세손 서창녕답변

저는 현재 관리자가 아니므로 아사달님의 글을 삭제할 권한은 없습니다. 이부키님께서 삭제 신청을 하신 뒤 다시 삭제 신청을 철회하셨습니다. 아마도 이부키님께서 오해가 있으셨던 것 같습니다. --ted (토론) 2012년 2월 1일 (수) 03:56 (KST)답변

윤내현의 주장으로 문서를 구성하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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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내현 교수의 주장은 현재 역사학계에서 전혀 인정받지 못하는 소수설입니다. 또한 역사학계에서 다수에 의해 논파되기도 한 주장으로서, 매우 부정확하고 편중된 것입니다. 이를 중심으로 문서를 구성하는 것은 위키백과의 중립적 시각에 어긋납니다. 윤내현의 주장을 삭제하거나, 소수설의 하나로 축소하여 서술하여 주시기 바랍니다.--Xakyntos (토론) 2012년 2월 17일 (금) 02:10 (KST)답변

  • 좋은 지적을 해 줘서 감사드립니다. 아사달의 현재 위치에 대해서 윤내현 교수 쪽의 주장만 있고 반대 주장이 없어서 저도 사실 좀 고민하고 있었는데요. 기자조선의 위치가 난하 유역이 아니라 대동강 유역의 낙랑군 주변이라는 주장도 있을테고, 황해도 해주 구월산 설도 있을테고, 경기도 파주군 설도 분명히 있을텐데요. 그 주장도 실으려고 하니, 자료 좀 알려주세요. 아니면 Xakyntos 님께서 역사에 대해서 상당히 해박하신 것 같으니 직접 이 글을 편집해서 반론을 좀 달아주세요. 아사달 (토론) 2012년 2월 17일 (금) 02:39 (KST)답변
불필요한 내용 및 중언부언을 삭제하고 중립적으로 재구성하였습니다. 또한 백악산아사달이나 아사달산과 같은 문서는 불필요합니다. 관련된 내용은 모두 아사달 안에서 소화 가능하며, 윤내현의 주장은 학계 일반에서 인정되지 못하고 비판받고 있는 소수설로서 그렇게 자세하게 소개될 필요가 없습니다.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Xakyntos (토론) 2012년 2월 17일 (금) 17:27 (KST)답변
Xakyntos 님은 고조선의 역사는 허황되어 사실이 아니다라고 생각하시는군요. 그런 주관적 의견을 바탕으로 해서 제가 출처까지 모두 확보하여 자세히 쓴 글을 이렇게까지 잘라내는 것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원래 상태로 복원해 주시고, 각 항목에 대한 구체적 반론을 제시해 주세요. 아사달 (토론) 2012년 2월 17일 (금) 18:11 (KST)답변
Xakyntos 님이 쓴 글 중에서 인용할 부분을 이 글에 포함시켰습니다. 윤내현(尹乃鉉)의 주장에 대한 비판, 황해도 등 다른 곳으로 보는 학설, 위치가 중요하지 않다고 보는 시각이라고 소제목을 붙이고 추가하였습니다. 막상 추가해 놓고 보니, Xakyntos 님의 글은 내용도 빈약하고 근거가 좀 약합니다. Xakyntos 님이 자기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좀 더 자세한 내용을 직접 추가해 주세요. 남의 글 함부로 삭제하지 마시고, 자기 내용을 반론에 자세히 써 주세요. 아사달 (토론) 2012년 2월 18일 (토) 00:01 (KST)답변

토론:아사달을 통해서 이미 말씀드렸습니다만, 귀하의 편집은 백과사전이 아니라 그냥 논문을 베껴 쓴 것입니다. 내용 자체가 불필요하게 상세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아예 아사달이라는 주제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내용을 잔뜩 넣어 놓았습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위서(魏書)를 인용한 삼국유사의 기록

  • 삼국유사가 인용한 위서(魏書)에 따르면 아사달은 단군조선의 최초 도읍지였다. 삼국유사(三國遺事)[1] 기이(紀異) 제1편에는 "위서(魏書)에 이르기를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에 단군왕검(檀君王儉)이 있어 도읍을 아사달(阿斯達)에 정하고 나라를 세워 조선(朝鮮)이라고 일컬으니 고(高)와 같은 때라 하였다."[2]는 기록이 나온다. 일연(一然)은 중국의 역사서인 위서(魏書)를 인용하여 아사달이 단군조선의 도읍지였다고 기록하였다. 하지만 이 위서(魏書)가 중국에서 정사(正史)로 인정하는 북제(北齊)의 위수(魏收)가 편찬한 역사서 위서(魏書)를 말하는지, 아니면 이름이 같은 다른 역사서인지에 대해서 논란이 있다. 이병도(李丙燾)는 삼국유사(三國遺事)를 한글로 번역하면서 역주(譯註)에 "이 《魏書》는 중국 史書임에는 틀림없으나 오늘에 전하는 同名의 書는 아니다."[3]라고 썼다. 오늘날 전하는 위서(魏書)[4]는 중국 남북조 시대의 선비족(鮮卑族)이 세운 북제(北齊, 550년~577년)의 위수(魏收)가 황제의 명을 받아 편찬한 역사서이다. 위서 열전(列傳) 제88편에서 고구려, 백제, 물길(勿吉)[5] 등에 대하여 기록하였는데, 단군조선에 대한 기록이 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일연이 삼국유사에서 인용한 위서(魏書)는 현존하는 북제(北齊)의 역사서인 위서(魏書)가 아니라, 같은 이름을 가진 다른 책이라는 의견이 있다.

몇 줄이 넘어가는 방대한 내용 중에 아사달과 관련된 내용은 채 절반도 안됩니다. 나머지는 아사달과 아무런 관련도 없이 위서가 무엇인지, 위서의 내용이 무엇인지 하는 아무 쓸모 없는 내용만 있습니다. 저 강조한 부분이 아사달을 설명하는데 대체 왜 필요한지 명확하게 알려주시지요. 그것을 설득력있게 설명하신다면 얼마든지 수긍하겠습니다. 다른 내용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사달(阿斯達)과 조선(朝鮮)은 같은 말

백과사전의 소주제 제목을 저런 식으로 쓰는 경우가 대체 어디에 있습니까? 백과사전이라면 백과사전 다운 표현이 있는 겁니다. 어원이라는 제목으로 서술하면 될 것을 무슨 소설이라도 쓰는 것처럼 소제목을 저렇게 달면 어떡합니까? 그 아래의 본문은 더 가관입니다.

동사강목(東史綱目)의 기록
이병도(李丙燾)의 해석
윤내현(尹乃鉉)의 해석
어원학적인 분석

백과사전은 저러한 주제들을 정리하고 요약해서 핵심적인 내용만 모아 서술하는 것입니다. 이병도, 윤내현, 어원학(출처 불명)의 내용은 모두 약간의 어투만 다를 뿐 똑같은 내용입니다. 아사달은 아침 땅이라는 뜻이다라는 똑같은 내용이죠. 대체 이 똑같은 내용을 왜 일일히 상세하게 설명해야 하는 겁니까? 그런 건 논문에서나 하는 겁니다. 백과사전은 논문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아사달의 위치에 대한 여러 주장들 역시 평양이라는 주장이 있다. 어디라는 주장이 있다라고만 서술하면 끝나는 겁니다. 그걸 일일히 논문처럼 설명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약간의 세부 정보는 필요하겠지만, 귀하의 편집과 같은 소논문은 백과사전에 불필요합니다.

불필요하게 길게 서술하긴 했습니다만, 제가 하려는 말의 이미 말했다시피 한마디로 정리됩니다. 백과사전은 논문이 아닙니다. 논문을 쓰시려면 다른 곳에 가서 하십시오.--Xakyntos (토론) 2012년 2월 18일 (토) 10:32 (KST)답변

위키백과:위키백과에 대한 오해 이 문서를 참조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래 인용한 말이 제가 하고자 하는 말의 핵심이 되겠네요. 이 부분도 유의해서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위키백과:위키백과에 대한 오해#위키백과는 정보를 무분별하게 모으는 곳이 아닙니다 --Xakyntos (토론) 2012년 2월 18일 (토) 10:41 (KST)답변
위키백과는 종이에 인쇄된 백과사전이 아닙니다. 위키백과에서 다루는 주제나 분량, 문서 수 등에 대한 “실질적인 제한이 없다.”라는 것입니다. 문서의 주제도 너무 지엽적인 내용만 아니면 허용됩니다. 하지만, ‘기술적으로 할 수 있는 것’과 ‘실제로 해도 되는 것’은 구분해야 합니다.
Xakyntos 님의 글 중에서 아래 내용은 사실이 아닙니다. 여러 번 느끼는 것이지만, Xakyntos 님의 글은 아무런 근거도 없이 주관적인 주장이 너무 강합니다. Xakyntos 님이 쓰기를 "《동국통감》과 《동사강목》은 대체로 《삼국유사》의 기록은 허황되다고 비판하고 있으며..." 이 말은 사실을 왜곡하는 말입니다. 고조선과 아사달에 대해서 역사적 가치가 없다고 폄하하기 위한 매우 주관적인 표현입니다. 위키백과사전의 중립성 원칙에 어긋나는 표현이니 수정해 주세요. 동국통감에서도 단군조선에 대해서 인정하고 있으며, 우리 역사의 뿌리로 단군조선-기자조선-위만조선의 3조선에 대해서 서술하고 있다는 것은 님도 잘 아실 것입니다. 다만 동국통감에 주석에 쓰기를 단군의 나이가 1,048년이라는 삼국유사의 기록에 대해서, 단군이 세대를 전한 역년의 숫자이며 단군의 나이가 아니라는 것이 이치에 맞다라고 되어 있을 뿐입니다. 이 말을 근거로 마치 동국통감이 삼국유사의 기록 전체를 허황되다고 평가한 것으로 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 님이 이 책을 가지고 있는지 몰라서, 동국통감에 나오는 앞뒤 문장을 모두 인용해 드립니다. "... 나라를 가장 오래 다스린 군왕이 50, 60년에 불과하였다. 어찌 단군만이 유독 1048년이나 살면서 나라를 다스렸겠는가. 그 말의 잘못을 알 수 있다. 옛 사람들이 말하는 1048년이란 것은 단군이 세대를 전한 역년의 숫자이며 단군의 나이가 아니라는 것이 이치에 맞다." (국역 동국통감, 탐구당, 1990년)
너무 자세하게 작성하여 [소논문]처럼 보인다는 주장은 일리가 있습니다. 백과사전 양식에 맞게 좀 더 쉽고 친근하게 제 글을 수정하겠습니다. 그런 점에서는 님의 의견에 대해서 존중하겠습니다. 그러나 고조선이나 아사달의 역사 자체를 부정하는 견해에 대해서는 양보할 생각이 없습니다. 게다가 근거도 없이, 동국통감이 삼국유사의 기록을 허황되다고 주장했다는 등 전혀 출처를 알 수 없는 Xakyntos 님의 중립적이지 못한 시각은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게다가 Xakyntos 님이 자기 주장을 하려면, 근거를 대야 하는데, 그냥 역사학계의 일반적인 학설이다, 혹은 다수설이다, 혹은 상대편은 박사학위가 있느냐 뭐 이런 식으로 비학문적인 토론을 하는 자세는 바람직하지 않으니, 앞으로는 주의해 주세요. 아사달 (토론) 2012년 2월 18일 (토) 12:57 (KST)답변
1. 아래는 《삼국유사》의 내용 및 단군 관련 기록을 비판하고 있는 《동사강목》의 내용들입니다.

* 동방의 고기(古記) 등에 적힌 단군에 관한 이야기는 다 허황하여 이치에 맞지 않는다.

  • 고기에 나오는 ‘환인제석(桓因帝釋)’이라는 칭호는 《법화경(法華經)》에서 나왔고, 그 밖의 칭호도 다 중들 사이의 말이니, 신라ㆍ고려 때에 불교[異敎]를 숭상하였으므로, 그 폐해가 이렇게까지 된 것이다.
  • 기자는 어진 성인이시라 어찌 남의 나라를 모점(冒占)할 리 있겠는가? 성인을 모독함이 너무 심하다. 대개 저들이 이미 쇠망하였기 때문에 기자가 와서 풀밭을 헤치고 개창(開創)한 것이다.
이와 유사하게 일연이 승려이기 때문에 허황되게 썼다는 평이 강목과 통감에서 종종 나옵니다. 그리고 제가 굳이 《제왕운기》를 찾아서 추가해놓았다시피, 통감과 강목의 내용은 전적으로 《제왕운기》의 단군신화이지 유사의 단군신화가 아닙니다. 게다가 귀하는 《제왕운기》의 기록은 아예 빼놓으셨군요?
한마디로 말해서, 단군 및 아사달에 대한 기록은 유사와 제왕운기 두 가지만 써 놓으면, 원칙적으로 필요한 원 사료는 모두 제시한 것이 됩니다. 통감이나 강목을 굳이 넣으려면, 비슷하게 조선시대에 단군 신화나 아사달 등에 대해 수록하고 있는 모든 기록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다 써야 형평성에 맞습니다. 그러나 그런 비효율적인 일을 할 필요가 없죠. 통감이나 강목의 내용은 제왕운기와 완전히 같습니다. 기껏해야 글자 한 두 글자 차이죠. 대체 왜 저 두 책을 굳이 직접 인용해서 백과사전의 분량을 늘려야 합니까? 그리고 빠진 다른 수많은 조선시대 기록들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유사나 제왕운기는 단군과 관련된 최초의 기록으로 언급될 가치가 있지만, 통감과 강목은 아닙니다. 어차피 같은 내용이니까요. 그러니 굳이 언급하려면 통감과 강목이 어떤 기록을 취사선택했나 같은 특이사항만 언급하면 됩니다. 귀하처럼 아무런 필요도 없는 원사료의 내용을 모조리 다 써놓는 것이 아니라 말입니다.
2. 근거가 없다고 하셨습니까? 송호정 교수의 책을 분명 근거자료로 들어 놓았습니다. 해당 책은 단군신화의 역사성과 함께 그것이 신화이기 때문에 실제 역사가 아니라고 명백하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신화의 내용을 토대로 허황된 역사를 창작해 내는 것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대한민국 한국사학계의 공인된 견해입니다. 윤내현 교수는 책의 내용 전체가 북한의 리지린을 표절한 것으로 비판을 받고 있고, 표절 의혹은 둘째치고 그 주장 자체가 여러 차례 논파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의 의견을 마치 대단한 것인양 쓰는 것은 위키백과에서 허용될 수 없습니다. 위키백과:중립적 시각#비중이 문서의 내용을 참고해 주십시오.

각각의 시각들을 다루는 비중은 각각의 중요도에 따라야 합니다. 문서의 구성이나 설명에서 소수 의견이 다수 의견보다 두드러져서는 안 됩니다. 사회적 저명성의 기준에 따른 적절한 비중 하에 관점들이 다루어져야 합니다. 다른 정책과 지침을 충족하여 기술하였더라도 일부의 시각만이 과도하게 반영된 경우에는 다른 방향의 관점의 내용이 균형있게 보태지기 전에는 중립적 시각의 위배가 될 수 있습니다.

소수의견이 다수 의견보다 두드러져서는 안됩니다.라는 문장을 똑똑히 보십시오. 윤내현의 주장은 윤내현이 이러이러한 주장을 하고 있다는 것 이상의 내용으로 언급되어서는 안됩니다. 그것이 중립적인 시각입니다. 윤내현의 주장을 장황하게 서술함으로써 다수 의견이 마치 소수 의견인 것처럼 보이도록 하는 것은 위키백과에서 허용되지 않는 것입니다. 윤내현의 주장의 자세한 고증은 출처를 통해 필요한 사람이 찾아볼 수 있도록 하는 것으로 끝내야 합니다. 그의 주장을 모조리 다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Xakyntos (토론) 2012년 2월 18일 (토) 13:54 (KST)답변
덧붙여, 이미 말했다시피 백과사전은 논문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귀하의 편집을 살려 놓고나서 추후에 정리하겠다는 말씀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귀하의 편집을 강요하지 마십시오. 이미 귀하는 본인의 편집이 백과사전에 맞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베이스가 되어야 하는 것은 귀하의 편집이 아니라 저의 정리본입니다. 귀하의 편집에서 살려야 할 부분이 있다면, 그것을 백과사전에 어울리도록 정리한 뒤에 제가 작성해 놓은 내용 안에 어울리도록 넣으십시오.--Xakyntos (토론) 2012년 2월 18일 (토) 14:09 (KST)답변
Xakyntos 님은 동사강목과 동국통감도 구별을 못하시는군요. 제가 동국통감에 대해서 말했는데, 엉뚱하게 동사강목에 대한 글만 잔뜩 올려놓고, 그것을 근거로 제 글을 또 삭제하셨군요. 이런 식의 수준 이하의 토론을 계속 해야 하는게 안타깝습니다. 우선 제 글을 다시 복원해 놓겠습니다. 아사달 (토론) 2012년 2월 18일 (토) 15:31 (KST)답변
게다가 엄연히 존재하는 사실을 삭제하는 것은 위키백과의 원칙에 어긋납니다. 이 말은 제가 쓴 말이 아니라 Xakyntos 본인이 2011년 10월 1일에 쓴 글입니다. 맞죠? 그렇다면 그 원칙을 자기 글에만 적용하지 말고 제 글에도 적용을 해 주세요. "2011년 10월 1일 (토) 02:22‎ Xakyntos(토론 | 기여)‎ (14,163 바이트) (Pjieve(토론)의 7563854판 편집을 되돌림 / 엄연히 존재하는 사실을 삭제하는 것은 위키백과의 원칙에 어긋납니다.)"
또한 제 글에서 일반인들이 이해하기에 좀 어렵게 소논문처럼 구성되어 있어서 이해하기 쉽도록 표현을 바꾸겠다고 했을 뿐이지, 틀린 내용이 있다는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Xakyntos 님은 제 글을 삭제하고 틀린 내용을 올려두셨더군요. 틀린 내용을 근거로 제 글을 덧붙일 수는 없습니다. 수정을 하더라도 올바른 글인 제 글을 근거로 해야 합니다. 아사달 (토론) 2012년 2월 18일 (토) 16:20 (KST)답변
Xakyntos 님의 사과를 요청합니다. 님이 쓰신 글을 보면, "귀하의 편집은 백과사전이 아니라 그냥 논문을 베껴 쓴 것입니다."라는 문장이 있습니다. 제가 하늘에 맹세코 남의 논문을 허락없이 베껴 쓴 적이 없습니다. 삼국유사, 동국통감 등 고조선 관련 글을 인용하고 출처까지 명시하였을 뿐, 남의 논문을 베낀 적이 없습니다. 윤내현 교수의 글을 다소 길게 인용한 부분이 있으나, 명백히 페이지 번호까지 밝혔으며 베낀 것이 아닙니다. 또한 제 전체 글에서 윤내현 교수의 글은 매우 일부분의 내용일 뿐이고, 전체 내용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매우 작습니다. 이런 식의 인신공격을 근거로 남이 쓴 글을 함부로 삭제하지 말아주세요. 삭제의 근거를 제시하든지, 아니면 함부로 제 글을 삭제하지 말아주세요. 남의 논문을 베끼는 것은 매우 큰 잘못입니다. 일종의 도둑질입니다. 정말 제가 그런 잘못을 범하고 있다고 믿고 있나요? 아니라면 정중히 사과해 주세요. 누구나 한 번씩 실수는 할 수 있으니까요. 아사달 (토론) 2012년 2월 18일 (토) 18:10 (KST)답변
1. 제가 말한 베껴썼다는 것의 의미는 논문을 그냥 올려놓은 정도로 어렵고 장황하다는 의미이지 논문을 베끼는 범죄를 저질렀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물론 오해할수도 있는 내용이니 제가 잘못 쓴 것은 맞네요. 그 부분은 사과드립니다.
2. 엄연히 존재하는 사실을 삭제하는 것은 원칙에 어긋납니다. 하지만 그렇게 존재하는 사실들을 백과사전에 어울리도록 수정하고 중립적으로 조정하며 불필요한 내용을 삭제하는 것은 아예 다른 문제입니다. 몇번을 말씀드렸지만, 백과사전은 논문이 아닙니다. 그냥 존재한다고 해서 그걸 모조리 다 써야 한다면 그건 백과사전이 아니죠. 그렇기에 내용을 적절하게 수정하고 축약하는 것과, 사실을 삭제하면 안된다는 것은 충분히 양립 가능합니다.
3. 분명히 말했다시피, 귀하의 편집은 백과사전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귀하의 편집은 베이스가 될 수 없습니다. 스스로 소논문처럼 되어 있다, 백과사전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인정하셨으면서 어떻게 잠시 잠깐이라도 그런 상태의 내용이 위키백과의 내용으로 공개되도록 놓아둘 수가 있습니까? 귀하의 편집에서 필요한 것이 있으시면, 그것을 정리해서 제 편집본에 적절히 추가해 넣으십시오. 귀하의 편집 내용은 백과사전 자체가 아닙니다. 저는 잠깐이라도 귀하의 편집이 공개되어 있는 것을 용납할 수 없습니다.
4. 《동국통감》은 지금 현재 제가 가지고 있지 않아 직접 인용을 못한 것입니다. 그리고 제 편집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귀하가 지적한 부분은 삭제한 상태입니다. 정확한 정보를 확인할 때까지는 옳지 않은 내용이니까요. 그래서 저는 제 주장을 철회하고 삭제하였습니다. 귀하께서도 이렇게 본인의 편집을 수정하시기 바랍니다. 귀하의 편집은 애초에 백과사전이 아니므로, 백과사전에 어울리도록 수정하기 전까지는 공개되어서는 안됩니다.
5. 덧붙여, 제가 재야사학을 비판한다고 천명한 것과, 제가 하는 편집이 중립적이다는 것은 전혀 관계가 없는 일입니다. 저는 적어도 재야사학을 비판하는데 있어서 확실한 근거와 중립적 태도를 버린 적이 없습니다. 종교를 믿는 사람이면 진화론이라던가 무신론 같은 문서를 편집하면 안됩니까? 제가 개인적으로 싫어하고 비판하는 것과, 해당 문서를 편집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그런 어설픈 지적으로 선동하려 하지 마십시오. 이상입니다.--Xakyntos (토론) 2012년 2월 18일 (토) 21:38 (KST)답변
추가로 말씀드립니다. 아래 인용문을 한 번 더 봐주세요.

위서(魏書)를 인용한 삼국유사의 기록

  • 삼국유사가 인용한 위서(魏書)에 따르면 아사달은 단군조선의 최초 도읍지였다. 삼국유사(三國遺事)[1] 기이(紀異) 제1편에는 "위서(魏書)에 이르기를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에 단군왕검(檀君王儉)이 있어 도읍을 아사달(阿斯達)에 정하고 나라를 세워 조선(朝鮮)이라고 일컬으니 고(高)와 같은 때라 하였다."[2]는 기록이 나온다. 일연(一然)은 중국의 역사서인 위서(魏書)를 인용하여 아사달이 단군조선의 도읍지였다고 기록하였다. 하지만 이 위서(魏書)가 중국에서 정사(正史)로 인정하는 북제(北齊)의 위수(魏收)가 편찬한 역사서 위서(魏書)를 말하는지, 아니면 이름이 같은 다른 역사서인지에 대해서 논란이 있다. 이병도(李丙燾)는 삼국유사(三國遺事)를 한글로 번역하면서 역주(譯註)에 "이 《魏書》는 중국 史書임에는 틀림없으나 오늘에 전하는 同名의 書는 아니다."[3]라고 썼다. 오늘날 전하는 위서(魏書)[4]는 중국 남북조 시대의 선비족(鮮卑族)이 세운 북제(北齊, 550년~577년)의 위수(魏收)가 황제의 명을 받아 편찬한 역사서이다. 위서 열전(列傳) 제88편에서 고구려, 백제, 물길(勿吉)[5] 등에 대하여 기록하였는데, 단군조선에 대한 기록이 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일연이 삼국유사에서 인용한 위서(魏書)는 현존하는 북제(北齊)의 역사서인 위서(魏書)가 아니라, 같은 이름을 가진 다른 책이라는 의견이 있다.
강조된 부분을 보십시오. 절반도 넘는 방대한 분량을 차지하는 저 강조된 부분이 과연 아사달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반드시 필요한 정보입니까?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아사달과 직접은 물론이고 간접적으로도 관련이 없습니다. 그저 분량만 늘려놓고 있을 뿐입니다. 엄연히 존재하는 사실을 삭제하는 것은 안되지요. 하지만 아무리 존재한다고 해도 본 문서와 관련이 없는 사실은 삭제해도 됩니다. 귀하의 편집 대부분이 저 상태입니다. 스스로 본인의 편집을 한 번 읽어보십시오.--Xakyntos (토론) 2012년 2월 18일 (토) 21:47 (KST)답변

위키백과:독자연구 금지를 참고해주십시오. 정식적인 내용이 아닐 경우, 일부 설로서 기록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주류설인 것처럼 문서의 다수를 차지해서는 안 됩니다. --가람 (논의) 2012년 2월 18일 (토) 22:03 (KST)답변

다시 말씀드립니다. 귀하의 내용을 백과사전에 어울리도록 정리하여 현재 문서에 어울리도록 추가해 주십시오. 귀하의 현재 편집은 백과사전에 어울리지 않습니다.--Xakyntos (토론) 2012년 2월 18일 (토) 22:17 (KST)답변

토론:상나라에 반론을 남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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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상나라#상나라 동이족 설에 대하여 이 반론으로 논쟁을 끝마칠 수 있기를 바랍니다.--Xakyntos (토론) 2012년 2월 19일 (일) 19:13 (KST)답변

소수설을 중심으로 작성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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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희, 김종서 등은 학계에서도 전혀 인정받지 못하는 소수설을 주장하고 있는 이들로 최근의 연구성과는 커녕 애초에 잘못된 전제를 기반으로 틀린 주장을 하고 있는 문제가 많은 학자입니다. 예를 들어 박선희 교수의 기사를 읽어보면, 요령 지방의 홍산문화에서 발견된 누에상을 근거로 한국이 중국보다 먼저 양잠을 했다는 주장을 하고 있으나, 이는 무엇보다 홍산문화가 한국과 관련이 있는가라는 문제부터 해결해야만 성립이 가능한 논리적 오류입니다. 현대 고고학계는 홍산문화와 요동 지방의 문화권이 크게 다르다는 입장을 공식화하고 있습니다. 복기대, 이종호 등 극히 일부 학자들이 홍산문화를 한국과 관련된 것이라 주장하고 있으나, 현재 아무도 그 주장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즉, 홍산문화가 한국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먼저 증명해야만 박선희 교수의 주장이 성립되므로 저 주장은 애초에 틀린 것이 됩니다. 다른 주장들도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박선희 교수의 해당 주장들은 대부분 이미 1980년대 재야사학자들의 주장과 본질적으로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물론 그러한 주장들은 모두 학계에서 무가치한 것으로 논파된지 오래입니다. 그러므로 애초에 해당 기사는 근거로서 효력조차 없는 틀린 주장입니다. 김종서의 주장 역시 마찬가지로, 김종서의 연구 방법이라는 것이 정말 거짓말 하나 안보태고 지도에다 자를 대고 길이를 재가며 한 것입니다. 이는 심지어 학계에서 암암리에 웃음거리로 취급되기도 했습니다. 김종서의 연구가 얼마나 허튼 것인가에 대해서는 제가 직접 같은 방법으로 확인해서 글을 쓰기도 했습니다. 김종서의 굴곡지수에 대한 짧은(?) 비판.

몇 번 말씀드렸던 것 같습니다만, 아사달 님께서 신문기사나 기타 재야사학자들의 인터넷 글을 읽어보시고 퍼오시는 것은 솔직히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저는 그러한 주장들을 대부분 모두 살펴보았고, 그것이 어떻게 틀렸는지도 하나하나 논증해 드릴 수도 있습니다. 제발 부탁인데 신문기사나 인터넷과 같은 곳에서 보는 것을 주류 학설인양 가져오시는 일은 지양해 주시기 바랍니다. 일일히 되돌리는 것도 힘든 일입니다. 아니면 적어도 한 번 확인이라도 해보시길 부탁드립니다. 저는 제 블로그를 통해서 그러한 주장들 중 일부를 직접 분쇄하기도 했으며, 그 외에도 그러한 주장들이 얼마나 허황되고 제국주의적이고 파시즘에 가까운 위험한 주장인지는 인터넷에서 몇 번 검색만 해 보아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감히 말씀드리건대, 아사달 님께서 보시는 그러한 주장들은 모두 70여 년 전 나치 독일과 제국주의 일본이 하던 주장과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아신다면, 감히 그런 것을 보고 추종하실 수 없으실 겁니다.

어쩌다보니 너무 길게 제 생각을 말씀드린 것 같습니다. 아사달 님께서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을 하실 수 있으리라 생각해서 이렇게 불편한 말씀을 감히 드리는 것이니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Xakyntos (토론) 2012년 3월 4일 (일) 13:34 (KST)답변

예, 잘 알겠습니다. 알려준 블로그(http://xakyntos.egloos.com) 사이트에 가 보았습니다. 참 재미있는 글이 많아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어보았습니다. 특히, "가림토 문자=돌궐 문자" 블로그는 아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Xakintos = 야스페르츠" 님은 지지자도 많고 반대자들도 상당히 많더군요. 어쨌든 이 분야에서 매우 유명한(!) 사람이더군요. Xakyntos 님은 학부 졸업 후에도 전공인 역사학을 계속 공부했으면 좋았을텐데, 지금 회사에 다니는 모양입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블로그를 언뜻 보니까 회사에서 야근하다가 글을 쓴다고 되어 있네요. 자전거 타는 것도 좋아하고(서른살의 무모한 여행기)... 어쨌든 Xakyntos 님은 역사 연구에 탁월한(!) 재능이 있는 것 같은데, 계속 학계에 남아 연구하는 것이 어떨까요? 말투만 조금 고치면(죄송 ^_^) 훌륭한 역사 연구자가 될 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의견 많이 부탁합니다. 아사달 (토론) 2012년 3월 5일 (월) 04:35 (KST)답변
오랜 시간이 지나서 다시 읽어보니, Xakyntos 님은 상당히 "중립적이지 않은" 사람이 확실하네요.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자기가 "중립적"이라고 착각하고 있다는 점이 문제입니다. 말 시작할 때마다 "학계에서도 전혀 인정받지 못하는 소수설을 주장..." 항상 이런 식으로 쓰는데요. 소수설이 다수설이 아니니까 당연히 학계에서 인정을 못 받는 거구요. 그렇다고 하여, 소수설이 유사 역사학이거나 사이비 역사학인 것은 아닙니다. 소수설과 유사 역사학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학계의 소수설이라는 것은 아직 다수설이 안 된 학설일 뿐이지, 사이비 이론이라는 말과 같은 뜻은 아닙니다. 민주주의의 본질은 소수자에 대한 배려와 관용입니다. 그게 없이 소수설을 모두 부정하거나 삭제하거나 이단시하는 것은 민주주의가 아닌 독재입니다. 다수설=정설이기는 하지만, 소수설=유사역사학=사이비이론으로 일치하는 개념은 아닙니다. 원래 학문의 세계는 다수설과 소수설이 끊임없이 상대방을 배려하고 존중하면서 토론해 나가면서 더 나은 학설로 발전해 나가는 것입니다. 반면 유사역사학이나 사이비이론은 소수설이 아니라 그냥 역사학계의 학설 자체가 될 수가 없습니다. 소수설을 내세운 사람에게 사이비 이론가라거나 무슨무슨 빠라거나 하면서 매도(!)하는 것은 학문하는 사람의 태도가 아닙니다. 제가 예전에 대학원 박사과정 다닐 때 기억을 더듬어보면, 항상 다수설과 소수설이 상호 존중하면서 비판한 적이 있지만, 무슨무슨 주의자 혹은 무슨무슨 빠... 이렇게 매도하면서, 소수설을 완전히 매장하는 그런 분위기는 아니었습니다. Xakyntos 님이 아직 혈기왕성한 젊은이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자신과 다른 의견, 소수자의 의견에 대한 배려와 관용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소수설은 사이비 역사학과 같은 개념이 아닙니다. 둘은 하늘 땅 차이입니다. 아사달 (토론) 2012년 3월 29일 (목) 00:52 (KST)답변
Xakyntos 님은 논리적 비약이 좀 심한 것도 흠입니다. "감히 말씀드리건대, 아사달 님께서 보시는 그러한 주장들은 모두 70여 년 전 나치 독일과 제국주의 일본이 하던 주장과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아신다면, 감히 그런 것을 보고 추종하실 수 없으실 겁니다." ---> 이건 진짜 황당한 말입니다. 저는 나치 독일이나 제국주의 일본을 추종하거나 동조하거나 찬양하지 않습니다. 과거에 그런 적도 없고, 앞으로 그럴 계획도 없습니다. 이거야말로, 자기와 생각이 다른 사람에 대해서 배려와 관용이 아니라 무지막지하게 몰아부치는 전형적인 파시즘적 토론 행태입니다. 학계에는 항상 다수설과 소수설이 있습니다. 그게 좋은 것입니다. 다수설=정설만 있고, 소수설은 아예 박멸시켜버리는 그런 학계는 없습니다. 박선희 교수의 주장에 제가 동의한다거나 혹은 그 말이 진리라고 믿고 다른 학설은 틀렸다고 생각하거나 그런 건 아닙니다. 한사군의 위치가 평양 근처인지, 아니면 요동 근처인지에 대해서는 박선희 교수의 문제가 아니라 조선 시대 실학자들 사이에서도 논란이 있던 문제였습니다. 수백년간 다수설과 소수설이 공존하는 상황입니다. 현재는 다수설이 평양설이고, 요동설은 소수설입니다. 과거에도 그랬던 건 아닙니다. 미래는 누가 다수설이 될지 모릅니다. 중요한 것은 이 소수설을 주장한다고 해서 속칭 환빠 혹은 사이비 역사학자인 것은 아닙니다. 학계에서 소수설을 제시한다고 해서, 완전히 논파당해야 할, 파멸시켜야 할, 심한 경우에는 교수 타이틀도 아까우니까 그냥 재야사학자라고 딱지를 붙여야 할 그런 문제는 아닙니다. 소수설은 학자의 양심을 걸고 다수설이 아닌 학설을 주장하는 사람이지, 그 사람이 무슨 파시즘 추종자도 아니고 제국주의 똘마니추종자도 아닙니다. 한사군이 요동에 있다고 주장하는 것과 파시즘 혹은 제국주의자가 무슨 관련이 있나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과거 고구려가 만주 대륙을 지배했다고 해서, 지금 그 만주 대륙이 한국 땅이니까 돌려달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한사군의 위치가 평양이라는게 정설이고, 요동이라는게 소수설이라고 할 때, 소수설을 주장하면 파시즘이 되나요? 한사군이 요동에 있었다고 해서 그 땅이 지금 한국 땅이 되는 것도 아니고, 그 땅을 지금 와서 한국에게 돌려달라고 할 또라이사람도 없습니다. 그런데 마치 한사군의 위치에 대해서 소수설을 주장하면, 그건 아예 학자도 아니다, 교수도 아니다, 재야사학자다... 뭐 이렇게 매도당하는 것 같아서 매우 안타깝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소수설과 사이비 역사학은 다른 겁니다. 소수설은 존중 받아야 하고, 위키백과에서 소수설로 작게 설명하면 됩니다. 사이비 유사 역사학은 역사학이 아니므로, 삭제하든지 아니면 역사가 아닌 설화 혹은 신화 혹은 야사 정도로 표현하면 될 것입니다. 이상 제 의견이었습니다. 생각나는대로 쓰다 보니, 표현이 좀 거친 말이 있는데, 양해해 주세요. 아사달 (토론) 2012년 3월 29일 (목) 01:08 (KST)답변
뒤늦게 이 글을 보게 되어 늦게나마 대답을 드립니다.
1. 저는 아사달 님께서 파시즘을 추종한다고 말한 것도 아니고, 그 정도로 어리석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아사달 님께서 몇차례 작성하신 문서들 속에서 언급되곤 하는 주장들에서 파시즘의 씨앗이 자라고 있다는 것은 반드시 언급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논리적 비약이라고 하셔도 할 말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주장들은 무시무시한 파시즘을 내포하고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아사달 님께서 언급하신 한사군 문제만 해도 그렇습니다. 말씀하셨듯이, 소수설은 당연히 존중되어야 하겠죠. 하지만 논파된 주장은 존중되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리고 요동설은 소수설이 아니라 이미 궐백년 전에 논파된 주장입니다. 100가지 사실들 중 하나가 다른 것을 가리킨다면, 제대로 된 학자라면 그 하나만 왜 다른가를 탐구하지 다른 99개가 틀렸다라고 단정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요동설은 바로 그런 주장입니다. 심지어 현대 역사학은 그 다른 하나가 왜 다른지까지 거의 다 밝혀낸 상황인데 말이죠. 고고학이라는 최신 학문이 발달하기 이전인 전근대 역사학에서라면, 당연히 한사군의 위치 문제는 논란거리가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고고학으로도 이미 증명이 끝난 현대 역사학에서는 문제가 다릅니다. 현대 사회에서 요동설을 주장하는 소위 학자들 가운데 제대로 된 학자는 아직까지 보지 못했습니다. 윤내현 교수는 북한의 학설을 그대로 베껴서 사실상 학계에서 매장된 인물이며, 이덕일이 한 거짓말은 셀수조차 없을 정도입니다. 물론 학자의 부류에 끼워주기 어려운 사람-특히 타 전공자-는 당연히 제외해야 할테지요. 그들이 왜 그런 주장을 할까요? 윤내현 교수는 솔직히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덕일의 의도는 정확하게 알고 있습니다. 그런 주장이 대중에게 먹히기 때문이죠. 그런 주장을 담긴 책이 잘 팔리기 때문이죠.
그런 주장은 필연적으로 파시즘적인 사상을 담아냅니다. 왜냐구요? 소수설이 소수설로서 정설에 정당한 학문적 방법으로 대항한다면 누구나 존중할 겁니다. 하지만 이덕일을 비롯한 요동설을 주장하는 부류들은 모조리 다 내 주장이 맞는데 권력을 가진 소위 식민사학계에서 탄압한다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게 학문입니까? 학자로서 할 주장입니까? 이것이야말로 파시즘입니다. 탄압을 하고 있으니 물리쳐야 하고, 쳐부숴야 할 존재로 만들어 버리니까요. 누가 과연 상대방의 주장을 탄압하고 있을까요?
감히 말씀드리건대, 이런 주장을 존중해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설사 제대로 된 주장이라 할지라도 저런 방법으로 나선다면 절대 존중할 필요도, 존중 받아서도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제대로 된 주장조차 아니니, 더더욱 존중할 필요가 없죠.
2. 아사달 님의 첫번째 말씀은 선후 관계가 잘못되었습니다. 소수설을 내세운다는 이유로 무슨무슨빠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먼저 정상적인 학계를 식민사학, 식민사학자라고 매도했다는 것을 명심해 주십시오. 이덕일은 지금도 현대 한국사학계가 노론/친일파 계열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게 학문입니까? 소수설이라면 다수설을 공격할 때 이런 식으로 해도 될까요? 그들이 무슨무슨빠라고 욕먹는 것은 그들이 먼저 정상적인 학계를 같은 방법으로 공격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그들을 욕하는 것이 잘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만, 그래도 저는 그들을 욕할 수밖에 없네요. 그들이 먼저 시작했으니까요. 그리고 그들의 욕이 제 욕보다 몇배는 더 심각한 매도니까요.
3. 정리하겠습니다. 아사달 님의 말씀은 백번 옳습니다. 그렇다면 그 말씀을 그대로 그 소수설에게 적용해 주십시오. 소수설이 다수설에게 했던 그 끔찍한 매도와 욕설, 낙인찍기를 먼저 보아 주십시오. 감히 말하건대 제가 비판하는 부류의 소수설은 소수설로서 존중받을 자격이 없습니다.--Xakyntos (토론) 2012년 4월 17일 (화) 18:31 (KST)답변
Xakyntos 님, 반갑습니다. 오랫만에 다시 인사 드리니까 우선 반갑다는 생각이 먼저 드네요. 오랜 친구를 만난 것처럼 기분이 좋아지네요. 서로 싸우다가 결국 정이 든 것 같습니다. ^_^
지적한 내용은 잘 새겨서 듣고 있습니다. 김덕일 박사의 책은 별로 읽어본 적이 없고 언론기사를 통해서 본 것 정도인데요. 저도 개인적으로 그 주장에 대해 그다지 신뢰하지는 않습니다. 김덕일 박사는 말 그대로 재야사학자가 맞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윤내현 교수는 《고조선연구》라는 책, 그것도 무려 900 페이지가 넘는 학술 서적을 쓴 분인데요. 무슨 개인적 야욕이나 명예심 때문에 그런 주장을 하는 교수는 아닌 듯하고, 말 그대로 소수설을 주장하는 양심적 학자인 듯합니다. 선의를 가진 소수설 학자이지, 남의 논문이나 베끼는 파렴치한 사람은 아닌 것 같습니다. 물론 님이 윤내현 교수를 매우 싫어한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인신 공격까지 받아야 할 사람은 아닌 듯합니다. 재야사학자와 소수설을 주장하는 양심적인 학자는 다릅니다. 두 가지를 같은 것으로 보면 안 됩니다. 식민사학자와 실증사학자가 서로 다른 것과 같습니다. 재야사학자 입장에서는 실증사학자에 대해서 식민사학자라고 싸잡아 비판하지만, 두 가지가 같은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님이 지적한대로 실증사학자를 식민사학자와 동일시하면서 과도하게 비판하는 것은 옳지 않으며 마땅히 자제해야 합니다. 그런 무차별적인 공격에 대해서 저도 동의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마찬가지 논리에 따라 재야사학자와 학계의 소수설을 주장하는 교수는 서로 다르게 보아야 합니다. 두 부류를 싸잡아서 같은 부류로 공격하는 것은 옳지 않은 듯합니다. 그렇다고 제가 뭐 윤내현 교수나 박선희 교수 등을 개인적으로 잘 아는 것도 아니고, 그 주장에 동조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 소수설이 있다는 것을 관심 있게 읽어본 정도입니다. 다만, 일부 사람들이 학계의 소수설에 대해서 과도하게 비판하고, 인신공격까지 하면서, 심지어 엄연한 대학교수를 (그것도 부총장까지 지낸 사람을, 또한 대한민국 국사 교과서 편집위원으로 활동했던 사람을) 재야사학자라고 매도하고, 논문 표절범으로 몰아부치고 있어서, 이건 좀 아닌 듯하여 의견을 남긴 것뿐입니다. 비록 자신과 의견이 다르더라도 소수설에 대한 존중이 민주주의의 기본이며, 성숙한 토론문화를 위한 기본 전제입니다. 소수설에 대한 관용의 정신이 없었다면, "지구가 태양을 돈다"고 말하다가 종교 재판에 회부된 갈릴레오는 사형 선고를 받아야 했고, 지동설과 관련된 모든 책은 불살라야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알다시피 소수설이었던 지동설은 오늘날 정식 과학 이론이 되었습니다. 물론 대다수의 소수설은 치열한 논쟁 과정에서 논파되고 사라지지만, 간혹 한두 개의 소수설이 살아남아서 다수설이 되고 통설이 되고 결국 정설이 됩니다. 그런 소수설에 의해 인류 역사가 이만큼 발전해 왔습니다. 갈릴레오, 코페르니쿠스, 다윈의 진화론, 루터의 종교개혁론, 링컨의 노예해방 등 처음에는 모두 소수설에서 출발했으나, 오늘날 인류의 지식을 살찌우는 위대한 과학 이론이 되었습니다.
말이 좀 길어졌지만, 제 주장의 요지를 요약하면, 첫째 역사학계에서 소수학설을 주장하는 교수들과 일부 재야사학자들을 동일시하지 말아달라는 것, 둘째 소수설도 위키백과의 한 부분을 차지할 자격이 있다는 것 (물론 다수설처럼 장황하게 서술되어서는 안 되겠지만) - 이것이 제 생각입니다. 아사달 (토론) 2012년 4월 18일 (수) 02:53 (KST)답변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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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고대사는 고조선로서만 표현하기 힘들 뿐만 아니라, 현대사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또한 저 세 명의 인물로만 표현하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따라서, 되돌렸습니다. --가람 (논의) 2012년 3월 28일 (수) 22:35 (KST)답변

고조선 부분은 되돌리기 전이나 되돌린 후나 동일합니다. 어떤 차이가 있는지 모르겠군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부분은 3명을 삭제하겠습니다. 아사달 (토론) 2012년 3월 28일 (수) 23:39 (KST)답변

아, 뒤에서부터 적느라고 잘못 적었군요. 정정합니다. 고조선의 역사는 대한민국에서만(북 제외) 기원전 2333년으로 주장하고 있을 뿐이므로, 그것을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KPOV적 편집에 불과합니다. --가람 (논의) 2012년 3월 28일 (수) 23:51 (KST)답변
도대체 무슨 말씀이신지? 한국사 틀 어디에 고조선이 기원전 2,333년에 건국되었다는 말이 나오나요? 그런 말 없는데요. 게다가 되돌리기 전이나 되돌린 후에나 고조선 부분은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만...

아사달 (토론) 2012년 3월 28일 (수) 23:55 (KST)답변

지금 간격 크기에 대해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간격은 연도를 표기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시는 건가요. --가람 (논의) 2012년 3월 29일 (목) 00:05 (KST)답변
헉~! 그런 심오한 뜻이 있을 줄이야... 고조선의 간격이 너무 넓다는 게 문제이군요? 간격 좀 줄이겠습니다. 아사달 (토론) 2012년 3월 29일 (목) 00:15 (KST)답변
줄여놓고 보니 엄청 많이 줄였네요. 고조선의 역사는 기원전 2333년부터 잡으면 무려 2200년이나 되어서 너무 길어서 도표에 표시하기도 어렵구요. 단군신화는 역사가 아니라 신화이니까 인정하지 않고, 만약 중국 측 기록에 나오는 기자조선부터 인정하면, 기자조선만 1000년이니까 그래도 너무 길죠. 기자조선도 믿을 수 없다고 하니, 좀 더 신뢰할 수 있는 중국 측 기록에 따라서 《관자(管子)》에 나온 기록에 따르면 기원전 7세기부터 존재했구요. 만약 이것도 인정하지 않고, 연나라와 고조선이 전쟁을 벌였던 기록부터 인정을 하더라도 기원전 4세기에는 고조선이 실제로 존재했던 국가였습니다. 위만조선이 망한 것이 기원전 108년이니까, 아무리 짧게 잡아도 고조선은 200년~300년은 존재한 것이 확실합니다. 따라서 고조선의 존속 기간은 가장 짧게 잡아도 200~300년이고, 중국 측 기록에 따라 좀 더 올려잡으면 600년 정도 되고, 만약 고려 때의 《삼국유사》의 기록이나 조선 시대 정식 국사 교과서였던 《동국통감》의 기록을 따르면, 무려 2200년이나 됩니다. 어쨌든 지금 간격은 매우 짧아서 겨우 18년간 존재했던 궁예의 태봉보다도 더 짧게 표현했는데, 설마 이것도 너무 길다고 하면서 문서 되돌리기를 하지는 않겠죠? 아사달 (토론) 2012년 3월 29일 (목) 00:38 (KST)답변

편집 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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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백과의 다른 언어판에 있는 정책 또는 지침입니다. 한국어 위키백과에도 하루빨리 이 정책 또는 지침이 적용되기를 기대해 봅니다. 저처럼 좋은 의도로 선의의 기여를 하고자 하는 사람이 위키백과에 와서 초보자 시절에 당한 말못할 수모와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서라도 하루빨리 아래 정책 또는 지침이 한국어 위키백과에도 도입되기를 기대해 봅니다. 위키백과:편집 분쟁 바로 가기

편집 분쟁은 다른 이의 편집을 반복적이고 공격적으로 되돌리는 성격을 지닌 비생산적인 행위입니다. 위키로서의 위키백과는 ‘공개된 시스템은 고품질의 중립적인 백과사전을 만들 수 있다’는 신념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이는 이성적인 타협과 인내, 그리고 강력한 공동체 정신을 요구하고 있으며, 각각은 무례함과 편집 분쟁과 같은 반사회적 행동으로 인해 효과가 반감됩니다.

내용 되돌리기는 그 편집을 향상시키거나 그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그 편집자와 함께 작업하거나 편집을 향상시키기보다는 오히려 다른 사용자가 좋은 의도로 변경한 내용을 고의로 파기하는 행위입니다. 이는 가볍게 취급되어서는 안됩니다. 이에 대한 적절한 교육과 경고 및 차단을 거친 후에도 경솔하게 그런 행동을 계속하는 편집자는 공동체와 백과사전의 질을 떨어뜨리며, 편집할 권리를 영원히 잃을 수 있습니다.

아사달 (토론) 2012년 4월 1일 (일) 04:02 (KST)답변

이 내용에 대해 토론해 보자고 위키백과 사랑방에 제안을 했습니다.
* 위키백과:사랑방#위키백과:편집 분쟁 정책이 하루 빨리 채택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아사달 (토론) 2012년 4월 1일 (일) 16:43 (KST)답변

저작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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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하의 이 편집한국민족문화대백과의 내용과 매우 흡사합니다. 이에 대해, 해명을 해주셨으면 합니다. 참고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와 위키백과는 서로 저작권 호환이 되지 않습니다. --가람 (논의) 2012년 4월 2일 (월) 14:21 (KST)답변

덧붙여서, 갈사2대왕 문서는 위키백과:독자연구 금지에 의거, 삭제 신청하였습니다. 애초에, 도두왕의 부친에 대해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으며, 따라서 위키백과:저명성에도 문제가 있으며, 무엇보다도 문서 제목이 독자연구로서 부적절하다고 판단되기 때문입니다. --가람 (논의) 2012년 4월 2일 (월) 14:27 (KST)답변

저작권 침해가 아닙니다. 같은 문장이 없습니다. 가람 님께서 알려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의 갈사국 내용은 방금 처음 보았습니다. 갈사왕에 대한 《삼국사기》의 기록 자체가 워낙 간략하여 그 기록이 현존하는 기록의 전부입니다. 다른 내용이 없습니다. 내용이 유사한 것은 모두 원 저작자인 김부식의 《삼국사기》 기록을 참조했기 때문이지 상대방 백과사전을 베꼈기 때문은 아닙니다. 아사달 (토론) 2012년 4월 2일 (월) 18:09 (KST)답변
가람 님이 알려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 실린 갈사국(葛思國) 내용이 좋더군요. 그래서 방금 위키백과의 갈사왕 부분에 바깥 고리로 링크를 걸었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정보 많이 부탁드립니다. 아사달 (토론) 2012년 4월 2일 (월) 22:11 (KST)답변
갈사2대왕의 경우에는 부여의 역대 국왕에 실어야 하기 때문에 꼭 필요한 사람입니다. 부여의 역대 국왕 중 어느 누구도 저명한 사람이 없습니다. 겨우 한두 줄 기록에 나오는게 전부입니다. 위키백과:저명성 기준으로 삭제한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 논리라면 고구려 왕 중에서도 거의 이름만 알려져 있는 모든 왕은 다 삭제해야겠군요? 어짜피 저명성도 없고, 자세한 기록도 남아 있는게 없으니, 한국사 토막글로 처리하면 될 것입니다. 아사달 (토론) 2012년 4월 2일 (월) 18:12 (KST)답변
다시 말씀드립니다, 토론 처음에 언급하였듯이, 저는 문서 제목의 독자연구에 대해 가장 큰 비중을 두고 말씀드렸습니다. 학계에서도, 통용적 표기에서도 '갈사2대왕'이란 표기는 사용하지 않습니다. 위키백과:독자연구 금지#공개 발표된 자료를 근거로 새로운 결론을 이끌어 내는 것을 참고해주시기 바랍니다. --가람 (논의) 2012년 4월 2일 (월) 18:15 (KST)답변

보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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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사2대왕(曷思二代王, 재위기간 ? ~ ?)은 갈사부여의 제2대왕이다. 갈사왕의 아들이자 도두왕의 아버지이다.

갈사2대왕의 성명과 왕호, 재위기간 등은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갈사부여를 건국한 갈사왕의 아들이고 갈사부여의 제3대 왕이자 마지막 왕인 도두왕의 아버지라는 것만 알려져 있다. 갈사왕금와왕의 막내 아들이므로, 갈사2대왕은 금와왕의 손자가 된다.

가족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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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제 토론 알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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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께서 작성하신 위키백과:삭제 토론/아사달 (기업)을 제가 삭제 토론에 올렸습니다. 문서 작성자로서 토론에 참여해 주시기 바랍니다. --어쏭(우리 소통합시다.) "희망을 드립니다." 2012년 4월 4일 (수) 00:17 (KST)답변

두막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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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어 위키와, 일본어 위키를 보면 분류에서 중국의 역사라고 되어 있네요. 한국어의 분류에서는 한국의 옛나라 라고 되어 있네요 문제는 없나요?--18호 (토론) 2012년 4월 16일 (월) 12:19 (KST)답변

두막루는 북부여의 유민들이 건국한 나라입니다. 북부여를 한국사로 본다면 당연히 두막루도 한국사로 봐야 합니다. 국회 전자도서관에서 두막루 관련한 논문도 찾아보았는데, 대한민국 역사학계에서도 한국 역사로 보고 있습니다. 논문을 참고해서 두막루에 대한 좀 더 자세한 내용을 추가하도록 하겠습니다. 중국어 위키와 일본어 위키에서 왜 두막루를 중국의 역사라고 주장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것도 동북공정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요? 하긴 뭐 중국에서는 동북공정에 따라 부여라는 나라 전체를 중국 역사라고 보니까 더 할 말이 없죠. 따라서 부여 왕자인 주몽이 세운 고구려도 중국 역사가 되는데요. 이러다가는 백제를 건국한 온조왕도 부여 출신이니까 나중에는 백제도 중국 역사의 일부라고 하지 않을지 걱정입니다. 아사달 (토론) 2012년 4월 16일 (월) 13:51 (KST)답변
그럼 수고 좀 해주세요--18호 (토론) 2012년 4월 16일 (월) 13:57 (KST)답변

豆莫婁國,在勿吉國北千里,去洛六千里,舊北扶餘也。在失韋之東,東至於海,方二千里。其人土著,有宮室倉庫。多山陵廣澤,於東夷之域最爲平敞。地宜五穀,不生五果。其人長大,性強勇,謹厚,不寇抄。其君長皆以六畜名官,邑落有豪帥。飲食亦用俎豆。有麻布衣,制類高麗而幅大,其國大人,以金銀飾之。用刑嚴急,殺人者死,沒其家人爲奴婢。俗淫,尤惡妒婦,妒者殺之,屍其國南山上至腐。女家欲得,輸牛馬乃與之。或言本穢貊之地也。

[1]의 문단 중 역사의 본문 내용중에 중국의 《위서》(魏書) 두막루조 와 위 인용문과 같은 것인가요? 그리고 옛날의 북부여(北夫餘)이다.舊北扶餘也는 같은 뜻?--18호 (토론) 2012년 4월 17일 (화) 11:13 (KST)답변

중국의 《위서》(魏書) 두막루 조를 인용한 내용입니다. 한자로 보나 한글로 보나 내용은 100% 동일합니다.

두막루국은 물길(勿吉, 말갈) 북쪽 천여리에 있다. 옛날의 북부여(北夫餘)이다. 실위(失韋)의 동쪽에 있고, 동쪽은 바다와 닿아있고, 사방 이천리이다. 그 사람들은 토착하며 살고, 집에 거주하며 창고가 있다. 산과 능, 넓은 연못이 많고, 동이(東夷)의 지역에서 가장 평평하다. 땅은 오곡에 마땅하고, 오과는 나오지 않는다. 그 사람들은 크고 성품이 강직하고 용맹하고, 경계할 줄 알고, 후하여, 노략질하지 않는다. 그 군장은 모두 여섯 가축의 이름으로 하고, 읍락에는 호걸과 장수가 있다. 읍식은 역시 조두를 사용한다. 삼과 베가 있고, 옷은 고려(고구려)와 비슷하고 모자는 크다. 그 나라의 대인은 금과 은으로 장식한다. 형벌은 혹독하고 급하여 살인자는 죽이고, 그 집안사람은 노비로 삼는다. 풍속이 음란하거나 투기하는 것을 가장 싫어하여, 죽이고 시체를 나라의 남쪽 산 위에 놓고, 썩힌다. 여자집에서 이를 얻을려면, 소나 말을 주어야 한다. 혹 말하길, 예맥(濊貊)의 땅이라 한다.

특히 위 내용 중에서 "옛 북부여이다"라는 문장과 "혹 말하기를 예맥의 땅이라 한다" --> 이 두 문장을 근거로 보더라도 두막루가 북부여의 후손인 것이 확실합니다. 또한 본문 내용에 나온 풍습도 북부여의 풍습과 완전히 일치합니다. 두막루는 당나라 때 마지막으로 사신을 보내 조공을 한 기록이 있고, 이 시기 나라가 망해서 일부는 거란족에게 흡수되었고 나머지는 발해로 흡수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문제가 한 가지 있기는 한데, 두막루가 멸망할 당시의 언어가 거란족 언어와 유사한 것이 많이 발견되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두막루가 원래는 부여 계통의 언어를 사용하다가 수백년간 거란족과 교류가 많아지면서 일부 언어가 변화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어쨌든 두막루는 북부여를 계승한 나라이므로 중국 역사가 아니라 한국 역사에 포함되어야 하는게 당연합니다. 아사달 (토론) 2012년 4월 17일 (화) 12:05 (KST)답변

舊北扶餘也。 부분의 의 뜻[2]어떤 명사(名詞)의 어간(語幹)에 붙어서 '옛날의' '묵은' '낡은' 따위의 뜻을 나타내는 말 라고 되어 있네요. Cnsuh님 결론은 옛(舊)북부여(北扶餘)이다(也) 일까요?--18호 (토론) 2012년 4월 17일 (화) 12:19 (KST)답변
구북부여야(舊北扶餘也) = 옛 북부여이다. 당연히 이렇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혹시 다른 해석도 가능한가요? 아사달 (토론) 2012년 4월 18일 (수) 02:14 (KST)답변
 완료다른 해석으로는 불가능할듯하네요--18호 (토론) 2012년 4월 18일 (수) 12:15 (KST)답변

이해관계의 충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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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위키백과에 기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특별히 역사분야에 관심을 갖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사달 (기업)서창녕 문서를 보고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 부적절한 면이 있다고 생각이 들어 말씀을 드립니다. 위키백과: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참조해 보시고 위키백과의 편집자들이 걱정하는 바를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또한 en:WP:COI를 번역한 백:이해관계의 충돌도 상황을 이해하시는데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위키백과를 위해서 기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케골 2012년 4월 17일 (화) 17:01 (KST)답변

좋은 말씀에 감사드립니다. 케골(Ryuch) 님은 얼마 전 관리자로 당선된 분이시더군요. 위키백과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에 경의를 표합니다. 알려준 위키백과의 정책에 대해서 가슴에 새기기 위해 같은 내용을 여러 번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지적한대로 제가 위키백과에 처음 가입해서 쓴 몇 개의 글들이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당시 위키백과의 정책을 잘 모르던 때에 작성한 글인데, 지금 다시 읽어보니까 수정할 부분이 많은 듯합니다. 제가 관련된 글이라 제가 직접 편집하기가 부적절한 것 같습니다. 염치 없는 부탁이지만, 여러 관리자 님들과 사용자 분들이 객관적 시각에서 위 글의 내용을 대폭 편집, 수정, 삭제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사달 (토론) 2012년 4월 18일 (수) 02:21 (KST)답변

한국사와 위화도 회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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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백과에 기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Cnsuh님! 틀:한국사에서 왜 '위화도 회군' 문서를 삭제하셨습니까? 위화도 회군은 고려 역사의 중요한 사건입니다. 제발 다시 틀:한국사에 위화도 회군 문서를 다시 추가해 주거나, 틀에서 '위화도 회군'문서를 뺀 까닭을 설명해 주시기 부탁드립니다. --사용자:Skky999 (토론)

위화도 회군은 님이 지적하신대로 한국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 맞습니다.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하여 결국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건국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위화도 회군을 한국사 틀에 있는 고려 시대 설명 부분에서 삭제한 것은 위화도 회군이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한국사 틀의 고려 부분 세로 칸의 길이가 너무 길어져서 좀 줄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하나를 빼려다 보니, 위화도 회군이 빠지게 되었습니다. 원래 이 한국사 틀은 중요한 사건을 나열하는 표라기보다는 한국 역사에 존재했던 여러 나라들을 시간 순서로 배열하는 표입니다. 그래서 고려 이전까지는 전부 나라 이름만 표시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고려 이후부터는 나라 이름만 표시할 경우, 세로 길이가 너무 짧아지는 문제가 있습니다. 고려와 조선이 너무 짧아지기 때문에 500년이나 존재했던 이 두 나라를 한국사 연표에서 좀 길게 보이도록 하기 위해 몇 가지 설명을 추가한 것입니다. 고려 시대에 추가한 내용 중에서 상대적으로 뭐가 중요하고, 뭐가 덜 중요한지를 가리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사람마다 의견이 다르고 주관이 개입될 수밖에 없을테니까요. 하지만 굳이 상대적 중요성을 따져보면, 국가와 국가의 전쟁이 더 중요하고 그에 따라 수십년간 몽골의 식민지가 되고, 그것에 대항해 삼별초가 별도로 황제를 옹립하고 수십년간 저항한 사건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수십년간 지속된 다른 사건들과 달리, 이자겸의 난, 묘청의 난 등 일회성 또는 단기적 사건들은 모두 한국사 틀에서 삭제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위화도 회군은 단기적 사건이다보니 한국사 표에서 빠진 것 같습니다. 대신 조선 건국 부분에 위화도 회군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나오기 때문에 어느 정도 보완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이상 제 의견이었습니다. 아사달 (토론) 2012년 4월 19일 (목) 23:54 (KST)답변

주석 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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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3]의 편집은 바깥 고리로 할 형식이 아니며, 이 문서(대당고김씨부인묘명)의 본문 내용에 관련된 곳에 <ref></ref>를 사용해주십시오.--18호 (토론) 2012년 4월 24일 (화) 08:30 (KST)답변

좋은 지적 감사합니다. 18호 님의 의견을 반영하여 대당고김씨부인묘명(大唐故金氏夫人墓銘) 글의 본문 내용에 주석을 삽입했고, 새로 평가 부분의 글을 추가로 작성했습니다. -- 아사달 (토론) 2012년 4월 24일 (화) 23:08 (KST)답변
 완료 수고하셧습니다.--18호 (토론) 2012년 4월 25일 (수) 09:57 (KST)답변

삭제 토론 관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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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백과:삭제 토론/아사달 (기업)에서 '문서 개정에 대한 의지'와 관련된 의견이 올라왔습니다. 확인하시고 적절한 답변 부탁합니다. --어쏭(우리 소통합시다.) "희망을 드립니다." 2012년 5월 4일 (금) 10:03 (KST)답변

신속히 알려주신 어쏭 님께 감사드립니다. 해당 문서에 제 답변을 달았습니다. 아사달 (토론) 2012년 5월 4일 (금) 10:39 (KST)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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