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만식
조만식(曺晩植, 1883년 2월 1일 ~ 1950년 10월 18일)은 한국의 독립운동가이자 일제강점기의 교육자·종교인·언론인·시민사회단체인·정치인이다. 22세 이후 상업과 종교활동에 종사하다가 1919년 3.1만세운동과 중국 출국실패 등으로 투옥당하기도 하였다. 오산학교에서 교사와 교장으로 교편을 잡기도 했다. 일제강점기하에 교육활동과 물산장려운동·국내민간 자본으로 대학설립 추진 운동인 민립대학 기성회 운동, YMCA 평양지회 설립, 신간회 등을 주도하였다. 1946년 1월 평양 고려호텔에 감금된 뒤 한국 전쟁 중 공산군의 세력에 의해 살해되었다.[1] 국산 물산장려운동과 일본 제품 불매운동을 적극적으로 주도하여 조선의 간디라는 별칭이 붙기도 했다. 평안남도 강서군에서 출생하였으며, 아호는 고당(古堂), 본관은 창녕(昌寧)이다.
고당 조만식
古堂 曺晩植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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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 | |
임기 | 1945년 8월 15일 ~ 1945년 9월 7일 |
주석 | 요시프 스탈린 (소련 대원수) |
의장 | 김일성 (북조선 인민위 위원장 직무대리) |
신상정보 | |
출생일 | 1883년 2월 1일 |
출생지 | 조선 평안도 강서군 (現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안남도 강서군) |
사망일 | 1950년 10월 18일 | (67세)
사망지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양에서 총살형 집행됨. |
학력 | 일본 메이지 대학교 법학과 |
경력 | 조선민주당 총재 |
정당 | 조선민주당 |
부모 | 아버지 조경학(曺景學) 어머니 김경건(金敬虔, 본관은 경주.) |
형제자매 | 조은식(누이동생) |
배우자 | 박씨 부인(사별) 이의식(사별) 전선애(삼혼) |
자녀 | 조칠숭(아들) 조연명(아들) 조연창(아들) 조연흥(아들) 조연수(아들) 조선부(딸) 조선영(딸) |
친인척 | 강의홍(둘째사위) |
종교 | 유교(성리학) → 개신교(장로교) |
웹사이트 | 조만식 - 두산세계대백과사전 고당 조만식 선생 대한민국 국가보훈처 공훈록 |
생애
편집생애 초반
편집유년기
편집1883년 2월 1일 아버지 조경학(曺景學)과 어머니 경주김씨 김경건(敬虔)의 독자로 태어났다. 아버지 조경학은 매년 벼 백 섬을 거둬들이는 평안남도 강서 출신의 향반으로, 평양에서 일종의 위탁판매업이라 할 수 있는 물산객주 일을 하던 상인이었다. 조만식은 평안남도 강서 출신으로, 본적은 평안남도 강서군 반석면 반일리 내동이었다. 1888년 6세에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하고 1896년 한문 수학을 마쳤다. 1905년 평양의 개신교 계열 학교인 숭실학교(또는 숭실중학)에 입학하였으며, 숭실중학에서 수학하면서 재학 중 개신교에 입문했다.[2] 어린 시절의 조만식은 병약하였고, 아버지는 어린 아들에게 강인한 정신력을 키워주려 노력하였다. 한번은 어린 동네 아이들에게 얻어 맞고 울면서 집에 들어온 적이 있었는데, 부친은 그때 울고 온 아들에게 "사내 자식이 창피하게 얻어맞고 다니려거든 밥도 먹지 말거라." 하며 벌을 세웠다 한다.[3] 그 뒤 체력을 단련하고 무예를 연마하여 격투기의 일종인 날파람을 익혀 호신술로 활용하면서 어린 조만식은 날파람의 명수로 이름나도록 연마하기도 했다.[4] 아버지 조경학은 "사람이란 의리가 있어야 한다. 절의(節義)를 존중하고 지켜야 하느니라"하며 의리와 절의의 중요성을 자녀들에게 역설하였고, 이는 그의 생애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그보다 5살 아래인 누이 동생 조은식 역시 아버지의 가르침의 영향을 받았는데, 은식은 열일곱에 결혼하여 결혼 3년 만에 남편을 잃고 청상 과부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녀는 재혼하지 않고 지조와 절개로 50년을 수절한 후 고고하게 생을 보냈다.[3] 그 뒤 조만식은 평안남도 평양 숭실중학교에 입학하였다.
포목상 경영
편집1897년 15세 때부터는 포목상을 경영하기 시작했다. 포목상을 경영하다가 한정교와 동업으로 지물상을 경영하여 재산을 모으게 되었다. 이 무렵 술 잘 먹고 돈 잘쓰는 사업가로 이름을 날렸다.
1895년 그는 부모의 권유로 2세 연상의 박씨(朴氏) 부인과 결혼하였다.[5] 첫 아들 조칠숭이 태어났지만 정신박약아였고, 가정의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결혼생활 7년 만인 1902년 그는 첫부인 박씨와 사별하였다.[5] 1902년 전주이씨 이의식 여사와 재혼하였다.[5] 장애아였던 장남 조칠숭은 그의 나이 26세 때에 요절하고 말았다.[5] 1904년 2월 러일전쟁이 발생하자 조만식은 장사를 그만두고 가족들을 이끌고 대동강 중류 지방의 베기섬에 있는 벽도지리(碧島只里) 마을로 피난을 떠났다. 그 무렵 고당의 나이 22살 때 피난 생활 중에 급우의 전도로 교회에 나가게 되었다.[5]
개신교 입문
편집장대현교회
편집조만식은 22세에 장로교에 귀의하여 신앙 생활을 시작하였다.[6] 폭음으로 건강을 잃어 부모로부터 생활의 절제를 권유받았고 동료 한정교는 그에게 그리스도 신앙에 귀의할 것을 권고하였다. 개신교에 입문한 한 후 조만식은 한정교를 따라 평양 장대현 교회에 출석했다.[4] 주일 낮에 1천 5백명을 육박할 만큼 신자가 많던 장대현 교회의 교회당에 처음 들어 선 순간 조만식은 거대한 군중들의 분위기를 보고 놀랐다 한다. 당시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대규모 인파가 서양 선교사의 예배집례에 따라 열광적으로 노래하다가, 다시 온 무리가 함께 부르짖기도 하는 광경에 그는 충격을 받았다. 처음 개신교 예배를 목격하고 충격을 받은 그는 며칠 밤을 잠 못 이루다가 교회에 본격적으로 다니면서 신앙에 귀의하게 되었다.[4]
숭실학교 재학 시절
편집놀기를 좋아하고, 대주가(大酒家)로 용맹을 떨칠 정도였던[4] 조만식은 신앙 생활을 시작한 직후 술과 담배를 끊고 방탕한 생활을 정리하기 시작했다.[4][6] 1905년초 평양 장대현 교회의 신년사경회를 통해 감화받은 조만식은 3월이 되자 고당은 숭실 중학교에 입학을 결심, 아버지를 여러 번 설득한 끝에 평양 숭실중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4] 숭실중학교에 원서를 제출시 초라한 몰골 때문에 배위량 박사 등이 거절하였으나 여러번의 설득으로 1905년 그는 숭실중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4][7].
금욕주의
편집숭실중학교에서 교장으로 일한 배위량 박사는 한국인이 술을 지나치게 좋아해서 폐단이 많은 것을 보고 학교의 교칙으로 금주령을 내렸다. 술이 신앙 생활하는데 방해가 된다는 것을 알고 있던 그는 철저하게 금주 교육을 시켰던 것이며, 수업중에 술 주(酒)라고 써야할 대목이 나오면 그 글자를 일부러 피하여 ○표로서 술 ‘주’자를 썼다.[8] 숭실중학교의 교장이자 은사였던 배위량 박사와 박자중 교사의 감화를 받았다. 그러나 박자중 교사는 조만식이 숭실중학교 재학 중이던 1906년 6월 21일 56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8] 또한 교외의 인물로는 도산 안창호와 남강 이승훈의 영향을 받기도 했다. 중학교에 다니며 금연과 금주를 결심하였으나, 술과 담배 습관을 완전히 끊기 어려워 그는 급우들과 망을 보면서 몰래 담배를 피우다가 들켜서 여러번 벌을 받기도 하였다.[6] 그러나 그해에 조만식은 금연·금주에 성공했고 그 후 40년을 일체 금주, 금연하면서 지조를 지켰다.[6]
청년기
편집일본 유학
편집숭실중학교 재학 중 그는 시내에서 평양의 태극서관 주인 안태국의 활동과 강연, 기독교 민족지도자 안창호 등의 활동과 연설을 우연히 듣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안창호의 연설에 감화받은 그는 실력을 양성하는 길이 민족을 구하는 길이라 확신하고 일본유학을 결심한다.[9] 1906년 동경조선기독교청년회 설립에 관여하였고, 김정식 등과 유학생을 보호하는 활동을 했다.[10] 1908년 숭실중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으로 건너가서 1910년까지 정칙영어학교에서 영어[7] 와 수학을 공부하였다. 일본 유학 시절 그는 인도의 민족해방운동가 간디의 일대기인 '간디전'을 읽었으며[8] 영어를 공부하던 도중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가 주창한 인도주의와 무저항주의, 민족주의에 관한 글을 공감하여 이를 독립운동의 거울로 삼았다.[2][7] 그 뒤 심지어 복장이나 삶의 스타일까지 간디풍을 즐겨 따라하였으며[8] 무저항주의와 비폭력주의의 실천과 간디 정신을 따라 매사에 스스로 절제하려 노력하였다.[8] 한편 인재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그는 국내 대학 설립운동에 참여하여 후원하기도 했다. 1910년봄 정칙영어학교를 졸업하고 메이지 대학교(明治大學校) 전문부 법학과에 진학하였다. 이때 송진우, 김성수 등을 만나 친구관계를 형성하였다.
일본 도쿄 유학 시절 조만식은 '동경한인교회'의 영수로 기독교청년회의 회장으로 바쁜 나날을 보냈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이 영수로 시무한 장로교단 소속의 동경한인교회를 1911년 여름, 백남훈, 김영섭 등과 함께 장로교와 감리교의 연합교회(재일본 동경조선예수교연합교회)로 개편하였다. 이는 1909년 5월 한인 장로교회가 설립된 이후 하나둘씩 늘어난 감리교회 출신 유학생들이 따로 예배를 드리는 것을 목격하고, 이국땅에서 교파 문제로 개신교인들이 분열된 듯한 인상을 주어서는 안 되겠다고 판단한 때문이었다. 더불어 조만식은 지방별로 나뉘어 따로 놀던 동경 유학생사회를 하나로 통합하는 데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망국적인 지방할거주의 문제를 통감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고향을 묻지말자"고 외치며 전라도 출신의 송진우, 경기도 출신의 안재홍과 힘을 합해 1911년 겨울, 출신지방별로 나뉘어 있던 유학생회를 구선유학생친목회로 통합하였다. 조선유학생친목회는 창립 몇 달 만에 일제에 의해 해산당하고 말았지만, 1913년 가을 재일본동경조선유학생학우회의 발족으로 이어지며 뒷날 2.8 독립선언의 디딤돌이 되었다.[11]
일본 도쿄 유학 중 1910년 여름 조만식은 잠시 귀국하여 고향에 돌아왔다. 고향에 머무르고 있을 때 8월 29일 경술국치 소식을 접하였다.[9] 치욕스러운 한일합방에 분노를 느낀 그는 시내의 한일합방 경축식과 일본의 신사에서 신을 모셔오는 행사장에 난입하여 아수라장으로 만들려다가 아버지 조경학이 계속 간곡히 만류하여 그만둔다.[9] 자신이 나설 때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격정을 참은 그는 참는 것이 진정한 용기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9] 그 뒤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메이지 대학을 다녔다.
계몽·사회 활동
편집오산학교 이야기
편집1913년 3월 31살의 늦은 나이에 메이지 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평안북도 정주의 오산학교 교사로 근무하다가 1915년 오산학교 교장으로 승진했다.[7] 당시 오산학교는 설립자 이승훈이 105인 사건으로 투옥되어 학교를 유지하기조차 힘든 위기에 놓여 있던 때였다. 조만식은 그런 학교에 부임하여 봉급도 받지 않고 교사로, 교장으로 만 8년 동안 모두 3차례 걸쳐 봉직하면서 학교를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11]
3.1운동이야기
편집1919년 오산학교 설립자인 이승훈을 필두로 교사와 직원에 이르기까지 3·1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하였다. 그도 교장직을 사직하고[7] 3·1운동에 적극 가담했다가 수배되어 피신, 1919년 3월 4일 안명근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렀던 독립운동 동료 도인권과 함께 평양을 떠나 국내를 탈출, 상해로 망명하려던 중, 평안남도 강동에서 일본 헌병대의 추격을 받았다. 도인권은 미리 몸을 피했으나 그는 체포되어 평양에 압송되었고, 보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형을 언도받고 평양감옥에서 1년간 복역하였다. 3.1 운동 직후 그가 1년 형을 선고받고 평양 감옥에 수감되자 아버지 조경학은 아들이 형무소에 갇혔다는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아 졸도하였다.[3] 집에서는 가장의 인사불성으로 온 집안이 초상집이 되었으나 얼마 후 아버지 조경학은 병석에서 일어났다.[3] 병석에서 일어난 아버지는 지팡이를 짚고 그가 수감된 평양형무소에 가 형무소 주변을 한바퀴씩 돌았다고 한다.[3] 외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정성을 본 사람들은 그의 정성에 감복하였다. 어느 날 아버지가 조만식을 면회하기 위해 형무소를 찾아가서 옥중 간수에게 취사장의 위치를 물은뒤 간수의 안내를 받아 취사장으로 갔다.[3] 형무소 취사장에서 조경학은 수수와 콩으로 지어진 밥을 직접 시식하고는 너털 웃음을 지으면서 “뭐, 이만하면 견딜만하겠다” 하며 아들을 면회하게 되었다.[3] 조경학은 쏟아지려는 눈물을 억지로 참고, 염려의 기색을 숨긴 채 태연하게 아들의 안부를 묻고는 이정도의 식사면 건강에 지장이 없으니 잘 이겨내라며 사내에게 이런 고생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며 참고 견딜 것을 주문하였다.[3] 아버지 조경학은 외아들에 대한 걱정을 감추면서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3]
민족자본
편집평양감옥에서 1년간 복역한 후 1920년 1월 평양 형무소에서 2개월의 형 만기를 남겨 두고 가석방을 받았다.[6] 일반적으로 가석방 소식은 감방 내에서 경사와 같았지만, 그는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감형을 단호하게 거절, "10개월 동안 수감된 것 자체가 불법인데 가석방이라는 이름으로 은전을 받는다는 것은 더욱 불명예스러운 일이니 가출옥을 하지 않고 이대로 잔여 형기를 모두 채우고 나가겠다"며 거절하였다.[6] 그러나 받아들여지지 않고 가석방조치 되었다. 평양교도소에서 석방된 뒤 조만식은 다시 오산학교에 교사로 부임하였다. 그리고 20년 10월 오산학교 교장직에 취임하였다.[2] 1921년 평양 YMCA청년회 총무가 되고, 산정현교회(山亭峴敎會)의 장로에 선출되었다. 고당 조만식 선생은 산정현교회에서 장로가 되어 주기철 목사를 담임목사로 청빙하는 등 공동체를 위해 마음을 다해 일할 때에 교우들에게 모범을 보였다. 산정현교회에선 예배에 늦으면 교회 문앞에 있어야 했는데, 고당 조만식 선생도 공동체의 규칙을 존중하여 예배에 늦으면 스스로 서 있었다.1922년 국산품 애용을 독려하기 위해 조선물산장려회를 결성하고 회장에 취임했으며[12] 부회장으로는 저명한 변호사였던 한근조를 찾아가 초빙해서 영입하였다. 평양 YMCA 총무를 지내기도 하였다.[12] 이때부터 “조선의 간디”로 불리었다. YMCA 청년회를 중심으로 그는 YMCA내에 장,감여합 저축조합을 조직하였고, 자본을 모아 평양 양말회사를 설립하여 한민족이 일본의 경제적 지배에서 벗어나도록 애쓰기도 하였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편집민립대학 설립 운동
편집1923년에는 김성수, 송진우 등과 함께 연정회(硏政會) 조직에 동참하였다.[7] 연정회의 구성 목적은 민족 교육을 위한 대학 설립 목적의 조선민립대학기성회를 조직했으나 일제에 의해 좌절되었다.[2][7][13] 바로 숭인중학교(崇仁中學) 교장에 취임하였다.[7] 그러나 조선총독부의 계속된 탄압과 압력 끝에 1926년 숭인학교 교장직을 사퇴하였다.[7] 1921년 평양 YMCA 청년회 총무로 취임하였다. 평양 YMCA 청년회 총무로 취임되면서 그는 평안도를 대표하는 민족 지도자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1921년부터 1932년 평양 YMCA 총무직을 지내는 동안 그는 평양을 비롯한 평안도 전역을 근거지로 조선물산장려회를 창립하고, 자신이 구상한 '풀뿌리 민족운동'을 실천에 옮겨 나갔다. 조만식은 YMCA를 거점으로 지역사회의 공론을 형성하였고, 물산장려회 같은 조직을 만들어 지역의 개신교계와 상공업계,교육계,여성계,청년계를 하나의 '네트워크'식으로 엮어나갔다. 1927년 신간회 결성에도 참가했다.[2] 1927년 평양지역의 신간회 조직 활동에 적극참여하고[7] 신간회 평양지회장에 추대되었다.[13]
실력양성운동
편집1929년 평양에 공회당이 설립되자 참석하였다. 개관식 사회를 맡은 조만식은 공회당의 명칭을 '백선행 기념관'이라고 명명하였다.[14]
1929년 인파를 모아 서울역 앞에 집결하여 광주만세운동 진상보고 민중대회를 개최하려 하였으나 조선 총독부 경찰에 의해 체포되었다[13] 가 풀려났다. 1930년 관서체육회 회장에 취임하였고, 1930년대 이후로 잡지 《삼천리》에 칼럼을 기고하기도 했다. 1932년 평양 YMCA 청년회 총무직을 사퇴했다. 1932년에는 숭실학교 후배인 조병옥이 출감하자 경영난에 빠진 조선일보에서 그를 사장으로 임명하였고 조만식은 조선일보 사장에 취임해 경성부로 활동무대를 옮겨 사장직을 맡았다. 조선일보의 사장이 되자 편집국장에 주요한(朱耀翰), 전무겸 영업국장에 조병옥을 임명했다. 그가 조선일보를 인수하여 사장이 되자 조선총독부로부터 신사참배와 지원병제도를 협조하라는 요청이 왔으나 모두 거부하였다.[12] 그러나, 조만식은 거의 평생을 평양에서 살아온데다 경성부에서 활동하기에는 적응을 잘하지 못했다고 한다. 후에 조만식은 신문사 경영난 악화와 지역감정의 혹독한 시련을 받은 채 9개월만에 퇴사하게 되었다.[15]
조선일보 사장직에 물러난 이후 조만식은 다시 평양으로 돌아와 조선물산장려회와 관서체육회의 회장으로 복귀하여 지역사회의 대소사를 챙겨 활동했다. 한편 이봉창·윤봉길 사건으로 안창호가 상하이에서 체포되어 수감되자, 여운형, 이광수 등과 함께 매일 안창호를 찾아 안부를 물었으며 그의 옥바라지를 하기도 했다.
증산교의 일파인 보천교와도 관계를 갖고 출입하였다. 독립자금 중 많은 부분이 보천교를 통해 종교자금 명목으로 모금되었으며, 이 때문에 조만식이 보천교와 관계를 맺고 출입한 이후, 조만식을 비롯해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보천교를 출입했던 것으로 조선총독부에 알려지게 되었다.[16][17]
조만식이 출입한 이래 조만식 외에도 한규숙·장덕수·최팔용·송진우·백관수·조병욱·신석우·김철수·김철수(동명이인)·안재홍·백남훈·설태훈·임모, 김모 등이 보천교에 출입하게 되었다.[18] 이 외에도 그와는 동명이인인 조만식(趙晩植)도 보천교에 가담하였다.[18] 당시 신문기사에 따르면 조만식과 한규숙(韓圭淑) 등은 보천교 신도들이 마련한 30만 원을 독립 군자금으로 만주에 보내려다가 발각되어 조선총독부 경찰서에 체포되기도 했다.[16][17] 조만식과 한규숙이 체포된 원인은 그들과 함께 권총 2자루를 소지하고 있다가 검거된 '상해 밀정'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함께 관여한 월곡의 후손들은 보천교에 있다 체포된 사람은 고당 조만식이 아닌 1936년에 신의주에서 사망한 동명이인이라 증언하였다.[18]
사회단체 활동
편집1932년 조만식은 평양의 을지문덕묘소를 돌보면서 '을지문덕장군 묘 수보회'(墓修保會)를 창립하고 그 회장에 취임하였다. 이후 평양 고아원 및 양로원, 인정도서관 개관 등에도 참여하여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933년 백선행이 사망하자 조만식은 평양 시민들을 이끌고 자발적으로 장례식에 참여하여 애도하였다.[19]
1935년 12월 18일 부인 이의식 여사가 별세하였다. 그 뒤 아내를 잃고 혼자 살고 있었다. 이때 주변의 소개로 옛 제자인 전선애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전선애는 이 무렵 개성 호수돈여자고등학교 기숙사 사감으로 재직하고 있었다.[20] 다시 만난지 3개월 만인[20] 1937년 봄 조만식은 전선애와 결혼하였다.[20][21] 개성 호수돈여자고등학교 기숙사 사감으로 있으면서 미국유학을 준비중이던 전선애는 조만식과 결혼하게 된 동기로는 조만식의 인품을 보고 결혼하게 된 것이라고 진술하였다.[20] 1936년 공석인 목사를 대신하여 산정현 교회의 일을 보고 있던 조만식은 목사가 된 제자 주기철에게 산정현 교회의 목사로 부임해줄 것을 요청하였다.[22] 은사의 부탁을 받은 주기철은 곧 평양 산정현 교회의 담임목사로 부임해 왔다.[22]
이무렵 안창호가 중국 상하이에서 체포되어 송환되었다. 그는 여운형과 함께 안창호에게 문안인사차 찾아다녔다. 1937년 동우회 사건으로 평양의 독립운동가에 대한 검거와 탄압이 지속되자, 조만식도 이때 체포되어 서울에 이송되었으나 혐의점이 없어 20여일만에 풀려났다. 1938년 2월 2일 딸 조선영(趙善英)이 태어났다.
창씨개명 거부와 태평양 전쟁 전후
편집1938년 3월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구속수감 후 갖은 고문을 당한 안창호가 간경화 및 고문후유증 등으로 별세하자 조만식은 일제의 감시와 방해속에서도 안창호 장례위원회 위원장이 되어 윤치호, 양주삼, 장택상 등과 함께 서울에 올라와 장례를 집행하였다. 4월 안창호의 장례식은 서울에서 집행되었다.[23]
1939년 12월 18일 정동의 이화여전 강당에서 80여 명의 관계자들이 모인 가운데 후원회 창립총회가 개최되었다. 여기에서 12개조의 후원회 장정을 통과시키고 25명의 위원을 선출했다.[24] 조만식도 이화여전 후원회 위원의 한사람으로 선출되었다.[24]
1943년 지원병제를 실시하면서 "아시아·태평양 전쟁에 조선청년이 참전하는 것이 일본인과 동등해지는 길"이라며 회유했던 당시 일제 총독부의 협조요청을 단호히 거부했다.[7] 총독부는 그를 이용하여 민심을 회유해 보려던 조선군 사령관 이타가키 세이시로(板垣正四郞)의 면담을 거절하고 지원병제를 반대하다가 구금되었다 곧 석방되었다. 1943년 11월 16일에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학도에게 고한다”라는 조만식의 이름으로 조작된 학병 지원 기사가 실렸다. 그러나 이는 도용이었고, 당시 평양 지사장 고영한이 날조하였음이 나중에 당시 평양 특파원 김진섭 씨의 증언으로 밝혀졌다.[25] [26]
1944년 주기철 목사가 옥사하고 산정현 교회가 강제로 폐쇄되자 그는 1945년 봄 가족들을 데리고 강서 고향으로 내려갔다. 1940년대 후반 일본이 아시아·태평양 전쟁에서 패망할 무렵, 서울에 있던 여운형이 조선총독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로부터 통치권을 교섭을 받았던 것처럼, 총독부는 평남도에서는 조만식에게 차를 보내 평양으로 모셔오고자 하였다. 그러나 조만식은 이를 거부했고 대신 오윤선이 보내준 차를 타고 평양에 입성했다. 조만식은 1945년 8월 하순 여운형 등이 밀사 손치웅을 평양에 보내 그에게 남으로 내려올 것을 요청 받았지만 "뜻은 함께 하겠으나 몸은 여기 남겠다"는 의사를 밝히고 사양하였다.[2][7]
정치 활동
편집해방 직후의 정치활동
편집평남 건준위원회 활동
편집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되자 평안남도 도지사는 고향에 은거하고 있는 조만식에게 차량을 보냈다. 그러나 일본 총독이 타는 차는 탈수 없다며 심부름 온 김항복을 통해 돌려 보냈다.[6] 해방 직후 청년들이 그를 찾아왔고, 조만식은 만주에서 귀국한 백선엽 등을 비서로 채용했다. 백선엽은 광복직후 잠깐 조만식의 비서로 활동하기도 했다.[27] 1945년 8.15 해방 이후 조만식은 여운형 등과 함께 건국준비위원회 결성을 주도하였으며, 8월 16일 조선건국 준비위원회 평안남도를 조직하고 치안과 행정을 담당하며 혼란기를 수습했다.[12] 이어 그는 평양지역 시민들로부터 뜨거운 지지를 받아가며 건국준비위원회 평안남도위원회 위원장에 선출되었다.[28]
1945년 8월 25일 소련군이 평양[30]에 진주한 이후, 소련군의 권고에 따라[12] 광복 직후 조만식이 주도한 건국준비위원회 평안남도 지부와 현준혁이 이끄는 조선공산당에서 각각 16명의 위원을 선정하여 평안남도 인민정치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조만식은 인민정치위원회 위원장이 되고, 오윤선과 현준혁이 각각 인민정치위원회 부위원장에 선출되었다.[31] 현준혁은 연희전문과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를 나온 수재로 공산주의자였지만 조만식을 공대하며 원만한 관계를 유지[32] 하였고, 조만식-현준혁을 통한 좌우의 협력관계를 이끌어나갔다.[32] 이후 조만식은 치안공백상태에 있던 북한 지역의 정치적 혼란을 정리해나갔다. 이북에 진주했던 소련군 25군의 정치사령부 정치담당관이었던 G. 메클레르(1909~2006) 중좌는 '평양은 조만식의 판이었다.'라고 회상할 정도였다.[33][34][35] 조선건국준비위원회 평남지부의 명단에는 준비위원: 김병연, 노진설, 김광진, 지창규, 김동원, 한근조, 총무부장에는 이주연, 재무부장에는 박승환, 선전부장에는 한재덕, 산업부장에는 이종현, 지방부장에는 이윤영, 교육부장에는 홍기주, 섭외부장에는 정기수, 치안부장에는 최능진 등이 각각 선임되었다.[34] 이 중 노진설, 한근조, 이윤영, 최능진 등은 훗날 월남하여 대한민국 정부수립에 참여하게 된다.
8월 24일 평안남도 건국치안대 대원들을 위문하였다. 이때
“ | 우리 민족에게 총칼이 필요 없어요. 총칼을 휘두르는 자는 제 총칼에 망하거든... | ” |
라고 하였다.
9월 3일 현준혁이 트럭을 타고 갈때 조만식은 그와 함께 동승하였는데[32], 현준혁의 암살을 예측한 그는 현준혁이 암살당할 당시 조만식은 긴급하게 사람을 보내 현준혁을 구명하고자 했으나 극우 테러단체 백의사에 의해 암살당해 조만식의 구명노력은 무위에 그치고 말았다.[12][32] 조만식은 현준혁을 공산주의자로 평가하지는 않고, 다만 좌경화된 민족주의자로 보고 있었다. 1945년 9월 8일 조선인민공화국(인공)의 내각이 발표되었는데, 조만식은 인공 내각의 재정부장으로 선임되었다.[36][37] 그러나 미 군정 진주 후 인민공화국 내각이 와해되면서 사퇴하게 되었다.
9월 12일 평양 산수소학교에서 '인민 정치위원회'가 무장한 소비에트 연방군의 감시 속에 개최되었다.[6] 조만식은 그 날 인민정치위원회의 사회를 진행하였다. 인민정치회의를 개최하였으나 공산 측의 방해 공작으로 민족진영의 의견은 빈번히 묵살되었다. 공산진영측에서 민족진영을 향해 인신 공격까지 퍼붓자 조만식은 분연히 일어나 이들을 질책하였다.[6] 1945년 9월 30일 조만식은 소련군 정치장교 메클레르 중좌의 소개로 김일성을 만난다. 조만식은 김일성의 나이가 의외로 젊은 것을 들어 의심하였으나 이내 받아들였다.[38] 10월 7일 조만식은 평양에서 '북조선 5도 임시인민위원회' 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39] 스승 유영모의 동창이자 친구인 조만식과 안면이 있던 함석헌은 이날 조만식을 마지막으로 보았다고 회상하였다.[39] 한편, 이남 지역에서는 미군정으로부터 11명 고문(9명 한국민주당,1명 여운형, 1명 조만식) 가운데 한명으로 임명되었으나, 조만식은 평양에 있었으므로 참여하지 않았다.[40]
해방 직후의 정국 수습
편집1945년 가을부터 전국의 지방의 농민연맹지국들이 실시하던 3·7제를 반대했다.[41] 1945년 9월 21일 날짜로 소련은 민주정당, 사회단체들의 광범한 블록에 기초를 둔 부르주아민주정권을 창설하라고 공식적으로 지시를 내린다.[42] 이를 수행하기 위해 민족주의자가 필요했는데, 민족주의자 인사들은 대부분 월남했고 북조선 지역에는 거의 남아있지않았다. 유일하게 남은 민족주의자는 조만식뿐이었다. 조만식은 '나는 노린내 나는 소련군이 싫다.'고 공언할 정도로 배타적인 민족주의자였다. 소련군정은 직접 나서지 못하고 김일성과 최용건을 통해 독자적인 정당을 만들라고 권유했다.[43] 9월 27일에는 평안남도 인민위원회는 3·7제를 적용했다.[44] 조만식은 항의의 뜻으로 이틀 동안 평안남도 인민위원회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는 또한 인민위원회가 자본가들을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44] 1945년 10월 14일 김일성 장군 환영 평양시 민중대회의 준비위원장을 맡았고[32] 10월 16일 ~ 10월 17일 평양의 요리집 가선(歌扇)에서 김일성 가족을 위한 환영연을 주관하였다.[32]
소련 정부는 북조선에 독자적인 정권기구를 수립하려는 소련군정의 구상을 전면적으로 수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소련군정의 계획이 아무런 반대 없이 곧바로 실현된 것은 아니다. 조만식은 소련군정의 구상에 분명히 반대의사를 표명했다. 그는 11월15일 김일성과 한 대담에서 “이승만, 김구, 김일성 등을 포함하는 중앙정부의 수립에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만식은 이러한 정부의 수립에 참여하기 위한 자신의 서울 방문 계획을 김일성과 협의했다.[45]
김일성은 “인민의 참여에 기초해서 밑으로부터 정권기관을 수립해 나가고 나중에 중앙정부를 수립해야 한다”고 답변했지만, 조만식은 “12월1일 이전에 중앙정부를 수립해서 외국군대의 철수문제를 제기할 수 있도록 서둘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김일성이 점령군의 철수를 방해하고 있다”고 비난했다.[45] 조만식의 남한 방문은 소련 군정의 거부와 감시로 무산되었다.
10월 중순 김일성과 면담하였다. 한 월남자의 진술에 10월 20일경 김일성은 조만식을 만났고, 새로운 정당을 구성하는데 같이 일하자고 제안했다고 미군정 정보기관에 증언하였다.[44] 김일성은 조만식을 설득하기 위해 처음만났을 때부터 '선생님'이라 깍듯이 부르며 큰절을 올리기도 하고 여자 접대원이 딸린 고급 요정으로 초청해 성대히 대접하기도 했다. 그러나, 조만식은 술과 노래도 모르는 철두철미한 우국지사였다. 조만식은 '남북이 분단된 상태에서 북조선에만 정당'을 만들자는 설득을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다. 김일성은 조만식을 만날때마다 '선생님'이라 불렀지만, 돌아와서는 '조만식을 초기에 죽여 없애자.'고 떠들곤 하여 소련군 장교들을 놀라게 했다.[43] 결국, 김일성은 독단적으로 조선공산당으로 사업의 중심을 되돌렸다.[44]
조선민주당 창당
편집김일성의 협력제안을 거절하고 난 이후인 10월 하순 조만식과 비공산계 민족주의자들은 공산주의자들의 대안이 될 수 있는 정당의 창당을 논의하기 시작하였다.[46] 1945년 10월 28일 북조선5도행정국이 설치되자 위원장에 선출되었다.[47]
1945년 11월 3일 조만식은 '광주학생운동을 기념하는 뜻에서 민족·민주계열이자 최초의 개신교 정당인 조선민주당을 창당하였다.[39] 조선민주당은 창당에서 ‘105인 사건’을 기념하여 105인의 창당발기인을 두었고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을 기념하여 중앙상임위원은 33인으로 하였다. 조만식은 조선민주당의 당수(黨首)가 되어 반공노선과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펼쳤다.[12] 부당수에는 그의 제자였던 이윤영과 최용건[48] 이 선출되었다. 1945년 10월 조선민주당의 정강에서 조만식은 친일파들의 즉각적인 해임 조항에 반대했다.[41]
조선민주당은 곧 면단위 지구당을 만들었으며 11월의 지방 인민위원회 선거에서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46] 조선민주당은 창당 수개월 만에 50만 당원을 확보할 정도로 대중들로부터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49][50] 당원 대부분은 조만식의 인품과 독립국가 건설에 대한 순수한 염원을 보고 입당하여 당원이 되었다.[49] 조만식의 지지기반은 그가 세운 조선민주당의 지지자였던 개신교세력과 자산계급이었다.[51] 특히 평안남도에서 압도적이었던 보수적인 미국식 장로교도들 사이에서 폭넓은 지지를 획득하고 있었다.[1]
조만식과 그의 지지자들은 소련의 북조선 점령 과정에서 점차 공산주의자들 및 소련과 충돌하게 되었다.[51] 소련군은 어떻게든 조만식이 친소련적 입장에 서도록 회유와 압박을 가하였다.[49]
신탁통치 반대운동
편집1945년 12월 신탁통치가 결정되면서 4개국 신탁통치안에 대한 문구가 쟁점이 되어 찬·반탁 구도가 설정되자 조만식에게는 정치적으로 불리하게 작용하였다.[12] 김구가 모스크바 3상회담에 반발, 강력한 반탁운동을 추진하자 12월 30일 결성된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 위원이 되었다.[52] 조만식은 광복 당시 북조선 지역에서 유력한 지도자였고 개신교인들을 중심으로 일정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는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통일 임시정부 수립'안에는 찬성했으나, 소련 측에서 후견제로 표현한 신탁통치안에 대해서는 강력히 반발했다.[11] 12월 28일 모스크바 3상회의에 이어 모스크바 3국 외무장관회의에서 신탁통치안이 통과되자 소련은 조만식을 계속 재촉하였다.[49] 소련은 모스크바 결정에 대한 조만식의 격렬한 반대에 당황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로마넨코 장군은 조만식이 모스크바 신탁통치 결정을 받아들이도록 신탁통치가 아니라 후견이라며 끈기있게 설득했고[53] 만일 조만식이 협력한다면 조선 정부의 고위직으로 옹립하고 김일성을 군부에만 맡기겠다는 파격적인 제안까지 했다.[53] 소련 군정청장 겸 소비에트 연방 극동사령부 정치위원 스티코프는 조만식을 찾아와 '당장 신탁 지지성명을 내라'고 요구하였다.[49] 그러나, 조만식은 '그 말이 그 말'이라며 반대했을뿐 아니라 완강히 거절했다. 이에 흥분한 스티코프가 권총을 빼들고 위협하였다. 조만식은 자신의 한복 옷자락을 헤쳐 보이며 '그래, 쏘아라'고 맞받았다 한다. 그 기개에 질린 스티코프는 얼굴만 붉히고 되돌아갔다. 치스차코프 점령군 사령관은 '신탁통치 결정서에 서명만 해 주면 조선의 대통령으로 만들어 주겠다'고 조건을 제시하였으나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49]
1945년 12월 27일 모스크바 결정이 알려진 직후, 조만식은 평안남도 인민위원회 확대회의에서 신탁문제를 둘러싸고 소련과 공개적으로 충돌했다.[53] 소련 측은 1946년 1월 2일, 4일, 5일의 세차례에 걸쳐 조만식에게 새로 수립될 정부의 대통령 자리까지 제시하면서 모스크바 협정을 지지할 것을 요청했다.[54][55]김일성도 1945년 12월 말 이후 빈번하게 조만식을 방문하였으며, 조만식의 오랜 제자인 최용건은 조만식을 19번을 찾아가 설득하였지만 조만식은 끝내 모스크바 의정서에 대한 지지를 거부하였다.[54][55]
1946년 1월 5일 이후에도 개신교인 중심의 조선민주당을 창당하여 반탁 운동을 벌이던 조만식은 뜻을 바꾸지 않았고, 신탁통치 협정문 안건에 관한 사회를 거부함으로써 북조선에서 정권을 잡은 김일성 세력에 의해 곧바로 인민정치위원회 위원장에서 축출된 뒤 조만식은 결국 1월 5일부터 연금상태에 처하게 되었다.
당시 소련군 소좌로 제25군 특별정치선전공작대인 '제7부'의 부책임자로 있었던 레오니드 바신(Леонид Васин, 1915~2006)의 후일 증언에 의하면 북조선 주재 내무인민위원회총책 아노힌 (Николай Анохин, 1898~1974) 소장이 협력을 거부하는 조만식에게 '일제가 항복 직전 그를 석방한 것은 일본 첩자였기 때문'이라는 누명을 씌워 신문과 방송이 이를 보도하게 한 후에 연금했다고 하였다.[56][57][58] 미군이 기록한 1948년 5월 남북협상차 방북후 귀환한 "김구, 김규식이 발표한 공동성명(Kim Koo and Kim Kiusic issue joint statement: 1948-05-06)"[59]에도 "양인 모두 조만식을 만나지 못했는데, 그를 친일 반역자로 낙인찍어 재판에 회부할 서류들을 마련중으로 보였다 (Both reported that they did not see Cho Man Sick, against whom dossier is apparently being compiled, for possible trial, as died in wool pro-Japanese traitor.)"고 하였다.
북조선은 내외 방문객들에게 조만식이 고급호텔에서 좋은 대접을 받고 있다고 선전했지만, 이는 명백한 연금이었다. 조만식이 물러난 조선민주당 위원장에는 빨치산파 최용건이, 부위원장에는 홍기주가 선출되었다. 이렇게 공산주의자들이 주도권을 쥠으로써 반탁운동의 중심이던 조선민주당은 찬탁의 거점으로 돌아서게 되었다.[60]
정계 축출 이후
편집연금생활
편집46년 1월 5일 고려호텔에 연금된 것을 시작으로 한국 전쟁 때까지 투옥되어 있었다. 1월 23일 김일성은 조만식을 반동으로 규탄하고 조선민주당을 접수, 2월 24일 최용건을 북조선민주당 당수로 임명하였다.[47] 한편 조만식이 조선민주당에서 강제 축출되자 최용건은 '조만식이 일본인의 신민이 되는 것을 칭찬하고, 격려한 사이비 민족주의자라고 격렬하게 성토했다.[51][61] 1946년 2월 1일 대한민국 비상국민회의가 개최되었는데 조만식은 김구, 김규식, 이승만, 권동진, 김창숙, 오세창, 홍명희 등과 함께 비상국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다.[62] 미군정청의 브라운 소장이 방문하자, 그는 자신을 방문한 미군정청의 브라운에게 "나는 북한 일천만 동포와 운명을 같이 하겠소." 라며 월남권유를 거절하였다.
1946년 2월 9일부터 2월 11일까지 북조선을 방문한 여운형과 신탁통치 관련 안건에 관해 협의했다.[12][63] 북조선의 저명 인사들은 조만식에게 월남할 것을 권하였지만 그는 '이북 동포들이 고통 받고 있는데 나 혼자만 월남할 수 없다'며 듣지 않았다.[49]
이승만과 김구는 1946년 4월 밀사 김욱을 조만식에게 파견하였다.[12][63] 밀사로 파견된 김욱을 접견한 조만식은 자신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은 방임[63] 하면서도 직접 문서에 서명하지 않았다.[12] 대신 밀사는 조만식의 유고시 그를 대행하는 이윤영의 서명을 받아서 이승만과 김구에게 제출했고, 소련 측에 대한 반박자료로 미·소공위에 제출되었다. 이윤영은 ‘이승만과 김구에게만 이 문서를 보여준다’는 조건하에 서명하였지만 결국 문서가 공개되자 월남하였다.[12][64] 조선민주당은 당수인 조만식이 연금상태에 있던 상황에서 부당수인 이윤영마저 월남하자 다른 부당수였던 최용건에 의해 장악되었다.[12]
1946년 5월 남한과 북조선의 단독정부 수립이 확실시되자 그는 밀사를 보내 후처 전선애를 불렀다. 자신의 최후를 예감하여 머리카락을 삭발해 두었다가 면회시간에 전선애에게 자신의 머리카락과 자른 일시를 적은 쪽지를 담은 흰 편지봉투를 전선애에게 건내주었다.[6]
조만식은 아내 전선애에게 호텔에 놓여 있던 피아노로 찬송가를 연주하게 하였고 그 사이 세 자녀를 데리고 방으로 들어가 기도한 뒤 작별인사를 나누었다.[6][20]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그는 여기서 눈뜬 장님을 만드는 것보다 위험이 따르겠지만 자녀들을 서울로 데려다가 공부를 시키는게 좋겠다며 아내에게 월남을 권고했고, 가족과 작별한 뒤 전선애는 조만식이 건네준 머리카락을 품에 간직하고 세 자녀와 함께 월남하였다.[21][65] 10월 남한 미군정의 경제고문 번스(Authur C. Bunce)는 평양 방문기간 중 조만식을 만났다.[66][53] 번스를 초청한 소련군의 경제고문인 1등 서기관 발라사노프(Valasanov)는 조만식이 신탁통치를 지지하지 않는 반동이라고 번스에게 말했다.[66][53] 번스에 의하면 당시 '조만식은 비교적 건강한 정신 상태에 있었다. 그런데 그는 우리를 떠나보내기를 주저했다.[66][53]'고 진술했다.
1947년 6월말 브라운 소장 등 미군정 대표단이 회담차 특별열차로 평양을 방문했을 때, 조만식은 6월 30일 평양역의 열차 안에서 브라운 소장과 두세 시간 회담을 가졌다.[67] 소련군은 미군정 대표단의 대인접촉을 극심하게 차단했는데[68] 예외적으로 허용해 주었던 것 같다.
해방 초기에도 여운형· 김규식 등으로부터 남한으로 내려오라는 권유가 있었으며[2] 김일성 세력과 마찰을 빚던 즈음부터는 남한의 반공 우익 세력들과 미군정, 월남한 개신교인들은 반탁 운동의 기수로 신망이 높은 그를 월남시키려는 노력을 계속했으나, 조만식은 북녘의 동포들을 버리고 혼자 내려갈수 없다며 월남을 거부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수립 이후
편집1948년 5월 남북협상을 마치고 돌아가는 김구는 김일성에게 조만식을 데리고 가게 해줄것을 부탁하였으나 김일성은 자신에게는 권한이 없다며 주둔군 당국의 양해가 있어야 된다며 거절하였다.[69]
1950년 6월 10일 한국 전쟁이 발발하기 보름 전에 북조선에서는 김삼룡 및 이주하를 조만식과 38선에서 교환하자고 주장하며, 6월 23일을 협상기일로 제안했다.[70] 이는 북조선 부수상 겸 외무상인 박헌영의 강력한 요구에 따른 것이었다. 1950년 6월 16일 이승만은 북에서 먼저 보내라는 요구를 했고, 6월 18일 북조선은 동시교환을 주장했다. 한동안 “먼저 보내라,” “아니다. 동시에 교환하자”라는 공방을 되풀이하였다.[71][72]
죽음
편집1950년 5월 16일 북조선 당국이 조만식을 남쪽에서 활동 중 체포되었던 김삼룡, 이주하와 교환할 것을 제의하기도 하였으나 이승만은 좀 더 확실히 하기 위해 북조선이 고당선생을 먼저 보여주길 원했으나 북조선은 동시교환을 주장하여 결국 결론없이 끝이 났다. 한국 전쟁 발발 후인 1950년 10월 15일 조만식은 북조선 내무성 안에서 일단의 내무서원들에 의해 살해되었다.[73] 정황은 비슷하나 총살된 날짜가 10월 18일이라는 설도 있다(박길룡 증언). 소련 출신으로 김일성의 통역과 북조선 외무성 제1부상을 지내다가 1959년 소련으로 돌아갔던 박길룡 등의 증언에 의하면 조만식은 1950년 10월 18일 퇴각 중이던 북조선 지도부의 결정에 따라 대동강변 내무성 정보처에서 한규만 소좌 등에 의해 다른 민간인들과 함께 학살되었다고 한다.[2][74][75] 그러나 중공군과 함께 북조선 당국이 다시 평양에 들어온 이후, 그의 죽음은 유엔군 및 한국군에 의한 학살이라고 주장된 바 있다.[2]
1952년 1월 23일자 미국 CIA 보고서에는 1951년 9월~10월 현재 북한에서 구금 중이거나 추적 중인 도망자 명단에 조만식이 나오며, 수년간 구금되었던 그가 도주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고 하였다.[76] 이로보아 당시 미군도 조만식의 생사에 대한 확실한 정보가 없었던 것 같다.
사후
편집1970년 8월 15일 건국공로훈장 대한민국장(훈 1등)이 추서되었다.
1965년 '고당의 날' 기념준비위원회가 주최한 '고당경모회'행사가 거행되었다. 1966년 평남민보사 발행으로 일대기인 <고당조만식>이 발간되었다. 1976년 1월 21일 고당조만식선생기념사업회(초대 회장 한경직(韓景職), 상임위원장 박재창(朴在昌))가 창립되었다. 1976년 12월 7일 어린이대공원에 동상이 건립되었고, 1992년 10월 20일 오두산 통일전망대에도 동상이 건립되었다.
1991년 11월 5일 서울특별시 동작동 국립묘지에서 열린 고당선생 추모-안장식때 시신 대신 유발이 안장되었다.[21] 1993년 8월 23일 '고당조만식선생 물산장려운동73주년 기념 학술대회'가 열렸다. 1995년 10월 저서 고당조만식회상록 이 출간되었다. 현재 서울 능동 어린이대공원과 경기 파주의 오두산 통일전망대에 동상이, 저동에는 고당기념관이 세워져 있다. 2000년 3월 27일 후처 전선애가 사망하자 국립묘지 조만식의 묘소 옆에 합장되었다.[21] 매년 10월 16일~10월 17일 사이에 추모식이 열리고 있다.
가족의 행방
편집고려호텔 연금 기간 동안 그와 함께 있던 차남 조연창과 사위 강의홍은 한국 전쟁 직전에 투옥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후 행방은 묘연하다.[77] 6.25사변 전에 강제노동소로 끌려간 후 그는 질병으로 남평양의과대학병원에 옮겨졌고 다시 미림리에 있는 치안국에 이감된 이후 소식 불명이다. 전선애가 월남할 때 데려온 자녀들 중 조연흥은 조선일보 전무와 이사를 지내기도 했다.
이력
편집- 1888년 서당에서 한문 수학
- 1895년 첫 번째 부인 박씨와 결혼
- 1897년 장사에 종사하기 시작
- 1899년 아들 칠숭(七崇)이 태어남
- 1902년 첫 부인 박씨 사망, 전주이씨 이의식(李義植)과 재혼
- 1907년 미국에서 귀국한 안창호가 경성부와 평양부에서 강연, 조만식은 안창호의 강연을 찾아다니며 들었음
- 1909년 아들 칠숭이 요절
- 1910년 3월 일본 도쿄에서 메이지대학교 전문부 법학과에 입학.
- 1910년 음력 3월 25일 장녀 조선부(曺善富) 출생.
- 1910년 8월 한일합방을 축하하는 평양 거주 일본인 행사에 반발, 일본인 행사를 방해하려 하였으나 아버지의 만류로 그만둠.
- 1911년 일본 도쿄에 재일 한국인 교회를 설립하고 신자 대표직을 맡았다. 이무렵 고하(古下) 송진우, 인촌(仁村) 김성수 등을 만나 자주 교류하였다.
- 1913년 4월 평안북도 정주군 오산학교 교사로 초빙되어 부임하였다.
- 1914년 5월 20일 아들 조연명(曺然明) 태어남
- 1916년 음력 5월 15일 딸 조선희(曺善姬) 태어남
- 1919년 2월 오산중학교 교사직을 사임
- 1919년 3월 3일 3.1운동의 영향으로 평양 모락시장(沙川市場)에서 모락시장 만세사건이 일어나, 만세운동에 가담하였다.
- 1919년 3월 4일 3.1운동 직후 대사명을 띠고 도인권(都寅權)과 상해임시정부로 향하던 중 평안남도 강동군 열패에서 일본 헌병 보조원을 사칭하는 자에게 붙잡힘, 헌병 보조원의 밀고로 평양형무소에 투옥.
- 1920년 8월 23일 평양에서 조선물산장려회를 창립함
- 1921년 평양 YMCA청년회 총무로 선출
- 1920년 9월 서울 형무소에 가서 남강(南岡) 이승훈을 면회
- 1927년 신간회 결성에 참여[34]
- 1932년 평양 YMCA청년회 총무를 사퇴
- 1932년 6월 15일 제8대 조선일보 사장 취임
- 1933년 7월 18일 조선일보 사장 사임
- 1935년 8월 27일~8월 30일 금강산 장안사 방문
- 1936년 마산에 내려가 오산학교 시절 제자인 주기철 목사를 산정현교회 목사로 부임해줄 것을 부탁하였다.
- 1936년 8월 18일 딸 조선희(曺善姬), 강의홍(康義弘)과 결혼.
- 1936년 4월 잡지 《삼천리》지에 <생산과 소비의 우리의 각오>라는 논설을 발표.[8]
- 1937년 조선총독부 조선군 사령관 이타가키 세이시로가 순시차 평양에 들러 그를 만나고자 했을 때, 그는 만나주지 않고 강서로 피신했으며, 끝까지 한복을 고수하였다.
- 1942년 11월 14일 아들 조연수(曺然守) 출생
- 1943년 8월 14일 맏사위 정재윤(鄭在允) 41세로 사망
- 1943년 신사참배와 지원병제도 협조 거부[34]
저서
편집- 《고당 조만식 회상록》(1995, 고당조만식기념사업회)
당대의 평가
편집러시아연방국방성중앙문서보관소 소련 군정문서, 남조선 정세 보고서 (1946~1947) 1946년 3월 22일자 내용에 '사회여론조사부는 각지로 자신의 대표 20명을 파견하여 실업자들, 상인들, 소자산가들과 면담을 실시하였다.'고 한다. 여기서 '이승만, 김구, 김규식, 여운형, 박헌영, 조만식, 김두봉, 김일성 가운데 누가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하는 설문조사에서 '대다수는 여운형과 조만식을 지지하였고, 이승만과 김규식을 지지한 사람은 2명이었다.'고 적혀있다.[78]
평가
편집- 조선(한국)의 간디 : 일본 유학 시절 영어를 배우면서 접한 간디의 무저항주의와 민족주의에 감명을 받아 이를 평생의 지표로 삼았다. 그는 광복을 맞을 때까지 이 사상에 근거하여 일제에 불복종하되 비폭력과 무저항을 수단으로 삼는 민족 자본 육성과 민족 교육, 민족 언론 활동 등에 몰두했다. 개량 한복을 입고 국산품 애용 운동을 벌이던 그에게 붙여준 별명이다.
- 태평양 전쟁으로 탄압이 심해지던 일제강점기 말기까지도 일제에 협조하지 않고 지조를 지켰기에 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았다.
- 조만식이 38선 이북지역에서 정치적으로 몰락하고 조만식을 따르던 개신교계 사람들이 월남하여, 북조선 공산주의자들은 휠씬 수월하게 자신들이 원하는 체제를 이북지역에 수립할 수 있었다는 견해가 있다. 조만식은 자신을 따르던 이들이 자신의 곁에 남아서 투쟁해 주기를 결코 고집하지 않았다. 일제의 폭압에 맞서 비폭력 저항운동을 벌였던 평화주의자의 일관된 모습이라는 평가가 있다.[12]
- 찰스 암스트롱은 그의 저서 '북조선 탄생'에서 조만식이 김일성과 함께 (정치를) 했다면 북조선의 정치는 상당히 다른 발전양상을 보였을 것이고 김일성은 결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지도자가 될 수 없었을 것[46] 이라고 평가했다.
“ | 고당은 나와 만날때 마다 냉면집 데려가신 따뜻한 분이셨지만, 신앙심을 기초로 한 기독교 인생관을 가지셨기 때문에 옳지 않고 바르지 않은 일에는 추호도 용서가 없으신 어른으로 거짓을 싫어하고 꾸미기를 싫어하셨다. | ” |
— 최승만(崔承萬)
|
“ | 고당은 시원한 바람처럼 와서 겨레의 가슴을 한번 시원하게 스치고 사라진 성경의 실천자이다. 국권회복의 꿈을 가슴속 깊이 간직하고 꾸준히 활동하신 인물이다. 남북통일은 고사하고 동서화합도 하기 어려운 현실에서 자기희생의 지도자가 그리워진다.[79] | ” |
— 김동길
|
- 함석헌(咸錫憲)은 그를 아니라고 할 수 있는 용기를 지닌 사람이라고 평가하였다.
“ | 자그마한 키에 무릎을 치는 무명 두루마기, 머리는 박박 깎고 물 수 물 얽은 얼굴에 수염도 별로 없고, 눈은 작고, 음성은 나지막했던 조만식 선생인줄 거의 안다고 한다. 남들이 조만식 조만식 해도 솔직한 말로 나는 무엇이 위대한지 몰랐다. 그런데 해방 후 죽음을 앞둔 선택에 '그러마'가 아니고 '아니다'라는 죽음의 선택을 하는 것을 보고 역사의 인물, 조만식의 값을 알았다. 비겁한 민중을 깨우기 위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죽음으로 보여준 민중의 참지도자이다.[80] | ” |
— 함석헌
|
정치노선
편집조만식의 사상이나 정치노선에 대해서는 반공주의 성향보다 중도우파 성향에 가까웠다.[81][82] 그는 마르크스주의의 유물론과 무신론에 대해서는 반대했지만, 사회주의 사회정책에 대해서는 호의적인 입장을 보였다. 이는 중산계급의 입장만을 대변하려 한 기존의 보수 우파와 달리, 그는 일찍부터 도시서민과 소농민의 입장을 폭넓게 대변하는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82][83]
외모
편집작은 체구에 무명 두루마기를 주로 입었는데 함석헌의 묘사에 의하면 무릎 을 왔다갔다 했다고 한다. 머리는 박박 깎고 물 수 물 얽은 얼굴에 수염도 별로 없었다.[80] 고 한다. 한편 머리에 눈은 작고, 음성은 나지막했다 한다. 만년의 조만식은 모자 대신 머리에 붕대 또는 수건으로 묶고 생활하였다.
친일 의혹설과 이에 대한 비판
편집다른 민족주의자들과 같이 그도 학도병 지원을 독려했다는 의혹이 북조선으로부터 제기되었는데, 1943년 11월 16일자 조선총독부 어용기관지 매일신보에 '학생들에게 일본의 전쟁에 지원할 것'을 공식적으로 독려하는 학병권유문 1건을 근거로 삼고있다.[51] 이는 조만식의 명성에 엄청난 손상을 입히게 되는데[51][84] '조만식의 징병 호소 의혹'은 후에 해방정국 김일성을 비롯한 공산당에서 당시 민중들로부터 많은 신망을 얻었던 그를 '민족반역자'라고 선동하여 일방적으로 정치적 악용으로 몰아붙였으며, 조선민주당이 조만식에서 최용건으로 바뀔때 정적 숙청과 비판의 명분을 제공하였다.[85]
그러나 이에 대해서 친일청산 문제 연구가인 김삼웅(전직 독립기념관장)은 '한국사를 뒤흔든 위서'에서 이 학병권유문 글이 매일신보 평양지사장 고영한 등에 의해 날조된 것이라고 규정짓고 있다.[85] 그 근거로 당시 매일신보 평양 특파원으로 근무한 김진섭이 쓴 '조만식 선생 인터뷰 조작기사 쓴 평양지사장 자살(대한언론인회보, 2000년 9월 1일자)'이라는 글을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고영한 지사장이 내게 고당 선생을 취재해오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선생은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겠나' 하시곤 함구했다. 지사로 돌아와 '안 계시더라'고 허위보고할 수밖에 없었다. 며칠 뒤 고 지부장이 직접 나섰고 사흘쯤 뒤 인터뷰 내용이 신문에 실렸다. 아무리 뜯어봐도 조작 기사였다.
광복 후 고 지사장에게 함께 상경하자고 권했더니 내일 아침에 만나자고 해서 헤어졌다. 다음날 새벽에 찾아갔더니 지사장 어머니께서 '우리 애가 어젯밤 자살했다'고 했다. 어머니는 뚜렷한 이유를 모른다고 했지만 며칠 뒤 소문이 돌았다. 지사 직원 중 한 사람이 고 지사장을 평소 친일파로 몰아세워 괴로워했을 뿐 아니라 고당 선생의 인터뷰 조작 사건으로 많이 자책하는 것을 보았다는 주변의 이야기들이 무성했다."
또한, 다른 반론으로는 고당 조만식은 1943년에 조선군 주둔 사령관이던 이타가키의 지원병제도 협조 요청을 수차례 거절했다가 구금까지 당했던 철저한 우국지사였던 인물이다. 그리고, 설령 학병권유문이나 친일단체에 그의 명의가 있다해도 중요한것은 '무슨 활동을 했으며, 그 반대급부는 무엇을 얻었느냐?'를 제시해야 한다.[86] 그러나 고당은 실제 일제말기 총독부로부터 끊임없이 감시와 협박을 당하기만 했었다. 즉, 고당 조만식의 '친일 의혹설'은 사실과는 전혀 다른 '이름 도용'된 것이다.[26]
가계
편집기타
편집조만식을 연기한 배우들
편집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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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복 1년 전 미군(美軍) 정보당국이 작성한 '조선 지도자 5인(人)' 평가표 조선일보 2008.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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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
편집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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값 확인 필요: length (도움말). - ↑ 가 나 '여운형 학도병 권유' 기사는 조작됐다'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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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蘇軍(소군) 北韓(북한)서 日軍(일군) 항복받을 때 한국인 曺晩植(조만식)선생 유일 참석 1992.10.01 동아일보 4면
日軍항복식에 曺晩植 유일지도자로 입회 연합뉴스 1992.10.01
"조만식은 끝까지 신탁통치에 찬성하지 않았다" 조선닷컴 2016.02.25
孫世一의 비교 評傳 (74)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 - 李承晩과 金九 : 聯合軍과 함께 國內進入 바라 -1945年 8月(下)- 월간조선 2010년 5월호 - ↑ 소련군은 일찍이 8월 21일에 원산항에 입성했고, 8월 22일에 일본군으로부터 공식적인 항복을 받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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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北韓)에 부르주아 민주정권(民主政權) 수립" 스탈린, 점령(占領) 소련군(蘇聯軍)에 비밀지령 문서 50년만에 공개 1993.02.26. 동아일보 6면 - ↑ 가 나 박헌영 평전, 안재성 지음. p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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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가는 날은 "天運(천운)의 날" 朝鮮爲(조선위)해 일 못함이 遺憾(유감) 브少將(소장)이 말하는 曹晩植氏(조만식씨) 동아일보 1947-07-08 1면 - ↑ 蘇聯軍(소련군)은 우리를 監視(감시) 要人外(요인외)는 美人 接觸不能(미인 접촉불능) 美代表一行 平壤印象談(미대표일행 평양인상담) : 【駐(주)서울AP特派員(특파원)「로버|쓰」氏提供合同(씨제공합동)】 동아일보 1947-07-08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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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韓國戰爭史 第1卷(改訂版) 北傀의 南侵과 緖戰期 Archived 2017년 8월 29일 - 웨이백 머신》 〈第3章 北傀의 全面南侵 5. 高浪浦 -汶山-奉日川地區 戰鬪〉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戰史編纂委員會) (1977, 개정판) 393쪽.
- ↑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 1950년대편 1권》. 5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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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명림 (2002). 《한국 1950 : 전쟁과 평화》. 서울: 나남. ISBN 89-300-3939-1.
- ↑ 한밤 평양형무소서 처형/극적으로 밝혀진 「조만식선생 최후」 중앙일보 1991.07.19 종합 3면
- ↑ 찰스 암스트롱, 북조선 탄생 (김연철 번역, 서해문집, 2007) 200페이지
- ↑ 1. ARREST OF NORTH KOREAN POLITICAL AND RELIGIOUS LEADERS 2. NORTH KOREAN CONCENTRATION CAMP FOR COLLABORATORS Archived 2019년 10월 12일 - 웨이백 머신 REPORT March 17, 1952
- ↑ 전선애, 고당선생 회상기 Archived 2016년 3월 4일 - 웨이백 머신 (창녕조씨 홈페이지)
- ↑ 러시아연방국방성중앙문서보관소 소련군정문서, 남조선 정세 보고서 1946~1947
- ↑ 고당조만식회상록 (고당기념사업회 편, 조광출판사, 1995) 281~284페이지
- ↑ 가 나 함석헌-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 사상계 1956년 6월호
- ↑ 조만식 동상과 통일동산
- ↑ 가 나 《민중과 함께 한 조선의 간디》, 장규식 저. p246
- ↑ 장규식. 《민중과 함께 한 조선의 간디》. p246쪽.
소련 군정에서도 그를 함부로 대할 수 없었던 이유 역시 그때문이었고, 소련군 당국은 그를 북한지역 최고지도자로 추대하려 했었다. 그러나, 그는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 회의에 대해서는 강력하게 반대의사를 표했었는데, 이러한 이유에 대해서는 중앙대학교 역사학과 조교수로 지내는 장규식이 분석한 바 있다. 장규식에 의하면 "고당은 신탁통치 문제를 일제하에 제기된 자치론과 비슷하게 생각한 것 때문이며, 또 '동아일보'의 오보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거 같다. 그래서 자치론에 대해 그랬듯이 신탁통치 주장을 독립을 유보하자는 주장으로 받아들이고, 일제강점기 시기 신간회 당시와 마찬가지로 비타협적 무저항의 시민불복종 노선을 걸은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 ↑ 조영암, 고당 조만식 (정치신문사, 1953) 41,42페이지
- ↑ 가 나 찰스 암스트롱, 북조선 탄생 (김연철 번역, 서해문집, 2007) 416페이지
- ↑ 일제강점기 말기에는 사회적으로 명망높았던 인사들(홍명희, 허헌, 김병로, 이인, 여운형, 안재홍, 김약수, 이극로 등등)을 무작정 명의도용해서 각종 어용단체에 넣었기 때문이다.
- ↑ 조연흥은 1967년 조선일보에 입사해 38년간 근무하고 조선일보 사회부장, 제작국장, 전무이사 등을 지냈으며 2005년 정년퇴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