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하시중
문하시중(門下侍中)은 고려시대 중서문하성의 최고 관리로 실질적으로 정무를 담당하는 관직 중 최고위 관직이었다. 품계는 종1품이다.
고려의 문하시중 | |
---|---|
門下侍中 | |
소속 | 중서문하성 |
품계 | 종1품 |
지명자 | 고려 국왕 |
임명자 | 고려 국왕 |
임기 | 일정하지 않음 |
상관 | 고려 국왕 |
초대 | ?[1] |
설치일 | 982년 |
마지막 | 이성계 |
폐지일 | 1392년[2] |
후신 | 조선 좌의정, 우의정[3] |
982년(성종 1) 내사문하성(內史門下省)을 설치하면서 처음으로 문하시중(門下侍中)을 두었으며, 문종(文宗, 재위 1046∼1083) 대 내사문하성이 중서문하성으로 개칭되면서 중서문하성의 장관을 일컫게 되었다. 종1품으로 정원은 1명이며, 같은 종1품직인 중서령(中書令), 상서령(尙書令)과 함께 재신(宰臣)으로 일컬어졌다. 고려 시대 중서령이나 상서령은 일반적으로 명예직이나 증직(贈職)인 경우가 많아, 문하시중이 수상에 해당하는 최고위 관직으로 기능하였다.
1275년(충렬왕 1) 원나라의 간섭으로 중서문하성과 상서성을 병합하여 첨의부(僉議府)로 격하되면서, 문하시중의 명칭도 첨의중찬(僉議中贊)으로 바뀌고 좌⋅우첨의중찬을 두었다. 이후 첨의부의 개칭과 관제 개편에 따라 도첨의시중(都僉議侍中), 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 등으로 명칭을 바꾸고 인원도 1명으로 줄였다. 1356년(공민왕 5)에는 반원 운동으로 관제가 전면적으로 복구되면서 중서문하성이 부활되었고 다시 문하시중이라 하였다. 그러나 이후에도 관제 개편으로 첨의정승, 첨의시중 등으로 명칭이 바뀌곤 하였다. 1369년(공민왕 18)에는 도첨의부가 문하부(門下府)로 개편되면서 다시 문하시중이라 하였고, 문하좌시중, 문하우시중 2명을 두었다. 창왕(昌王, 재위 1388~1389) 대 왼쪽을 더 우대하는 원칙에 따라 좌시중은 문하시중으로, 우시중은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으로 각각 바뀌었다. 조선 시기에 들어 문하부가 의정부(議政府)에 병합되면서 좌시중과 우시중은 의정부의 좌의정과 우의정으로 계승되었다.
역사
편집982년(고려 성종(成宗) 원년)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설치하였다.
고려 문종(文宗) 때에 정원을 1인으로 정하고, 관품을 종1품으로 하였다.
1275년(충렬왕(忠烈王) 원년)에 첨의중찬(僉議中贊)으로 고치고, 좌·우 각각 1인씩을 두었다.
1298년에 충선왕(忠宣王)이 왕위를 이어받고 도첨의시중(都僉議侍中)으로 고쳤다가, 조금 뒤에 다시 중찬(中贊)으로 개칭하였다.
1308년 충선왕이 원(元)에 있으면서 정승(政丞)으로 고쳤으며, 1인으로 줄였다.
1330년(충숙왕(忠肅王) 17년)에 충혜왕(忠惠王)이 다시 중찬으로 고쳤다가, 뒤에 다시 우정승(右政丞)·좌정승(左政丞)으로 고쳤다.
1354년(공민왕(恭愍王) 3년)에 다시 시중으로 고쳤다가, 조금 뒤에 다시 우정승·좌정승으로 개칭하였다.
1356년(공민왕 5년)에 문하시중·수시중(守侍中)으로 고쳤다.
1362년(공민왕 11)에 다시 첨의우정승(僉議右政丞)·첨의좌정승(僉議左政丞)으로 개칭하였다가 1363년(공민왕 12)에 첨의좌시중(僉議左侍中)·첨의우시중(僉議右侍中)으로 개칭하였으며, 1369년(공민왕 18년)에 문하좌시중(門下左侍中)·문하우시중(門下右侍中)으로 고쳤다.
창왕(昌王) 때에 좌시중은 문하시중으로, 우시중은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으로 각각 바뀌었다.[4]
이후 조선에 이르러 1394년 시중을 '정승'으로 바꾸었고, 1401년에는 문하부를 의정부로 개편하면서 좌정승, 우정승은 각각 좌의정, 우의정이 되었다.
역대 문하시중 (고려)
편집역대 문하시중 (조선)
편집성명 | 재임 기간 | 관직 |
배극렴 | 1392년 ~ 1393년 | 문하좌시중 |
조준 | 문하우시중 | |
조준 | 1393년 ~ 1398년 | 문하좌시중, 문하좌정승 |
김사형 | 문하우시중, 문하우정승 | |
심덕부 | 1398년 ~ 1399년 | 문하좌정승 |
성석린 | 문하우정승 | |
성석린 | 1399년 | 문하좌정승 |
민제 | 문하우정승 | |
민제 | 1399년 | 문하좌정승 |
하륜 | 문하우정승 | |
이거이 | 1399년 ~ 1400년 | 문하좌정승 |
하륜 | 문하우정승 | |
김사형 | 1400년 ~ 1401년 | 문하좌정승 |
이서 | 문하우정승 |
추증 문하시중
편집문하시중 지위에 임명은 고려, 1392년 이후의 조선 두 국가에서 모두 등장하므로 《고려사》에 모든 문하시중 임명 기록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성명 | 추증 시기 | 추증 국왕 |
김맹[125] | 문종 | |
김인존 | 1131년 | 인종 |
기탁성 | 1179년 | 명종 |
용득의 | 1241년 | 고종 |
서신 | 1380년 | 우왕 |
이자춘 | 1392년 음력 8월 | 조선 태조 |
구홍 | 1403년[126] | 조선 태종 |
문하시중, 도첨의시중, 중찬, 정승, 중찬, 우정승•좌정승, 시중, 우정승•좌정승, 문하시중•수시중, 첨의우정승•첨의좌정승, 첨의좌시중•첨의우시중, 문하좌시중•문하우시중, 시중•수시중
기타
편집같이 보기
편집각주
편집- ↑ 982년(성종 1) 2성6부제가 도입되어 내사문하성의 문하시중이 수상(首相)으로서 기능하는 실질적 최고 관직이 됨. 기록상 988년 최승로가 수문하시중으로 가장 먼저 언급됨. 다만 982년~988년 사이에 문하시중을 지낸 인물들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음.
- ↑ 고려의 문하시중은 고려가 망국한 1392년에 없어짐. 다만 고려의 관제를 일부 계승한 조선 초기까지를 문하시중의 연장선이라고 본다면, 문하좌시중, 문하우시중을 고친 문하좌정승, 문하우정승이 의정부좌정승, 의정부우정승으로 바뀐 1401년에 폐지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의정부는 1400년에 설치되었고, 문하부는 1401년에 폐지되어 의정부에 통합되었다.
- ↑ 고려의 내사령, 중서령 등은 문하시중보다 품계가 높았으나 일종의 명예직에 불과하여 문하시중이 실질적인 수상(首相)에 해당하였다. 고려 전기의 내사령, 중서령 등은 고려 후기로 가면서 영도첨의, 영문하, 판문하 등으로 바뀌고, 조선 건국 후에는 영문하로 불리다 판문하로 개칭된다. 이후 판문하는 영의정부사로 바뀌는데 이것이 영의정의 기원이다. 영의정부사는 1436년(세종 18) 의정부의 의결에 참여하게 되면서 수상(首相)으로서의 면모를 갖기 시작했으며, 1466년(세조 12) 영의정으로 개칭된다. 한편 문하시중은 조선 초기 문하좌시중, 문하우시중으로 이어지다 문하좌정승, 문하우정승으로 바뀌고, 1401년(태종 1) 문하부가 폐지되고 의정부에 통합되면서 의정부좌정승, 의정부우정승이 되었으며, 1414년(태종 14) 판부사를 거쳐 좌의정, 우의정이 되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좌의정이 수상(首相)으로서 기능했으나 전술한 것처럼 1436년(세종 18) 영의정부사, 즉 영의정이 의정부의 의결에 참여하기 시작하면서 점차 수상으로서의 지위를 영의정에게 넘겨주게 된다.
- ↑ 《고려사》 권76 지 권제30 백관1(百官 一) 문하부 시중직의 시기별 호칭
- ↑ 정식명칭이 있더라도 원문의 표기를 따랐다. 정식명칭 등은 각주로 보완하였다.
- ↑ 불과 하루만에 박질영으로 교체되었다. 두 달 뒤인 918년 8월 23일 기사에서는 前 시중 김행도라고 언급하고 있다.
- ↑ 광평시중은 고려 초기 최고 관부였던 광평성의 장관인 시중을 말한다. 태봉의 관제를 따른 것이며, 태봉의 관제는 신라의 관제를 모방한 것이다. 신라는 집사부에 시중을 두었었다.
- ↑ 류덕영은 태조의 제6왕후 정덕왕후 류씨의 아버지이다. 고려사 열전 태조 후비 정덕왕후 유씨(류씨)편에 유덕영(류덕영)을 시중으로 언급하고 있다. 공훤이 시중으로 있던 927년에 877년생인 태조 왕건의 나이가 50세이고, 태조의 장인인 류덕영은 그보다 10~30세 정도 많을 가능성이 크므로 60~80세 정도가 된다. 따라서 927년 이전에 시중을 역임하거나 시중으로 치사했을 가능성이 커 보인다.
- ↑ 927년 9월에 시중으로 언급되고 있다.
- ↑ 935년 10월 1일에 섭시중(攝侍中)으로 언급되고 있다.
- ↑ 949년 3월 13일 기사에, 정종(定宗)이 서경 천도를 시도할 때(947년) 시중(侍中) 권직에게 서경에 궁궐을 건축하게 했다고 한다.
- ↑ 989년 5월 죽었다.
- ↑ 993년 10월, 994년 4월 시중으로 언급함.
- ↑ 고려사 권93 열전 권제6
- ↑ “한언공(韓彦恭)”.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1995.
- ↑ 1004년 6월 죽었다.
- ↑ 한언공, 김승조, 최숙은 차례대로 목종 묘정의 배향공신이다. 한언공이 1001년부터 1004년 6월까지 문하시중을 지냈고, 류윤부가 1009년 3월에 문하시중에 임명되었으므로, 1004년~1009년 사이에 공백이 생긴다. 시중으로 언급되고 있는 김승조, 최숙이 이 기간에 문하시중을 지냈을 것으로 추측된다.
- ↑ 한언공, 김승조, 최숙은 목종 묘정의 배향공신이다. 한언공이 1001년부터 1004년 6월까지 문하시중을 지냈고, 류윤부가 1009년 3월에 문하시중에 임명되었으므로, 1004년~1009년 사이에 공백이 생긴다. 시중으로 언급되고 있는 김승조, 최숙이 이 기간에 문하시중을 지냈을 것으로 추측된다.
- ↑ “유윤부(柳允孚)”.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1995.
- ↑ 위수여가 시중에 임명된 1012월 2월에 치사한 것으로 보인다. 1014년 4월에는 치사직에 내사령이 더해졌다. 1015년 8월 18일 내사령 유윤부(류윤부)가 죽었다고 했다. 여기서 실직이 아닌 경우 前 내사령이라고 하지 않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시중을 지내다 시중으로 치사하면 前 시중이라고 지칭한다. 그러나 예외가 있을 수 있어 주의할 필요가 있다.
- ↑ 1012년 4월 문하시중 위수여가 죽었다.
- ↑ 유진은 1014년 4월 수문하시중에 임명되었는데, 1019년 8월 기사에는 문하시중 유진이 죽었다고 하였다. 1014년~1019년 사이에 품계가 올라 수(守)를 붙이지 않고 문하시중이 된 것으로 보인다.
- ↑ 1027년 1월 25일 문하시랑평장사 유방이 사직을 청하니 문하시중으로 올려 치사케 했다.
- ↑ 1030년 5월 19일 문하시중이 더해졌고, 1031년 6월 검교태사 시중이 되었으며, 1031년 8월 20일 죽었다.
- ↑ 1037년 9월 문하시중으로 언급함.
- ↑ 1046년 3월, 동년 8월 시중으로 언급함.
- ↑ 1047년 6월, 1048년 11월, 1050년 1월 시중으로 언급함. 1055년 7월 4일 내사령으로 올려 치사케 함.
- ↑ 1056년 3월, 1057년 8월 시중으로 언급함.
- ↑ 김원충은 1050년 1월 문하시랑평장사 판상서형부사에 임명된다. 이후 문하시중으로 승진시켜 치사케 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당대의 권력가인 문하시중 이자연이 1061년 사망할 때까지 그 직을 유지한 것으로 생각되고, 1061년 12월 바로 왕총지가 문하시중에 임명되었기 때문이다.
- ↑ 얼마 안 되어 죽었다고 함.
- ↑ “박성걸(朴成傑)”.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1995.
- ↑ 1063년 9월 12일 검교태위 문하시중으로 승진시킨 후 치사케 함.
- ↑ 1073년 5월 7일 문하시중으로 언급함. 따라서 그 이전에 임명되었을 것이다.
- ↑ 1075년 1월 9일 죽었다.
- ↑ 1077년 5월 13일 수태사 겸 문하시중으로 임명했는데 당일 죽었다.
- ↑ 1082년 8월 9일 문하시랑으로 재직 중이었다. 따라서 1082년 8월~1086년 4월 사이에 문하시중에 임명되었거나 문하시중으로 승진하여 치사케 된 것으로 보인다. 1093년 4월 3일 죽었다.
- ↑ “이정공(李靖恭)”.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1995.
- ↑ 1096년 6월 24일 시중으로 언급함.
- ↑ “이위(李瑋)”.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1995.
- ↑ “김약온(金若溫)”.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1995.
- ↑ 고려사 권100 열전 권제13 두경승
- ↑ “이항(李抗)”.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1995.
- ↑ 1275년 중서문하성과 상서성이 통합하여 첨의부로 관제개편되면서 문하시중이 첨의중찬으로 될 때, 문하시중이었던 김방경의 관직이 첨의중찬으로 바뀐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1275년까지 문하시중으로 역임 중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 ↑ 1275년 중서문하성과 상서성이 통합하여 첨의부로 관제개편되면서 문하시중이 첨의중찬으로 될 때, 문하시중이었던 김방경의 관직이 첨의중찬으로 바뀐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1275년부터 첨의중찬을 역임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 ↑ 첨의중찬으로 치사케 한 것이다. 따라서 실직이 아니라 명예직 따위로 보이나 명확히 구별하기 어려운 점이 있어 일단 기록한다. 이 기간에는 김방경이 첨의중찬으로 재직 중이기 때문에 실직이 아닐 가능성이 더욱 크다.
- ↑ 1281년 이후 1289년 이전 기간 중 중찬으로 치사케 하였다. 이미 찬성사로 치사하였는데 다시 중찬으로 치사케 한 것이다. 따라서 실직은 아니고 명예직에 가까우나 명확히 구별하기 어려운 점이 있어 일단 기록한다.
- ↑ 1294년에 중찬이었다는 기록만 있다. 전후 기록을 볼 때 첨의중찬 허공이 죽은 1291년부터 홍자번이 첨의중찬에 임명된 1294년까지 중찬을 역임한 것으로 보인다.
- ↑ 첨의중찬으로 치사케 한 것이다. 전후 상황을 볼 때 실직이 아님이 거의 틀림없다. 일단 기록한다.
- ↑ 초명은 홍문계였다.
- ↑ 홍문계, 즉 홍규에게 첨의중찬을 더하여 치사케 하였다. 즉 실직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명확한 구별이 어려워 일단 기록한다.
- ↑ 1296년 우중찬에 홍자번이 좌중찬에 조인규가 임명되어 있었으므로, 정가신이 첨의중찬으로 임명된 때는 1296년~1298년 사이로 볼 수 있다. 고려사에 1298년 "6월" 첨의중찬으로 치사한 정가신이 죽었다고 한다. 다만 1298년 "5월"에 관제 개편으로 도첨의중찬이 도첨의시중으로 바뀌기 때문에 첨의중찬으로 치사한 때는 1298년 "5월" 이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 ↑ 1298년 1월에 즉위한 충선왕은 동년 5월 관제를 개편하면서 도첨의중찬을 도첨의시중으로 고쳤다. 조인규는 사도 시중 참지광정원사로 임명되었다. 다만 동년 8월 충렬왕이 복위하고 동년 12월 관제를 복구하게 된다. 즉 도첨의시중은 다시 도첨의중찬으로 바뀐다.
- ↑ 첨의중찬으로 삼은 후 바로 치사케 하였다.
- ↑ 1300년~1302년 사이에 우중찬으로 임명된 듯하다.
- ↑ 1278년 이후 1302년 이전의 기간이지만 정확히는 알 수 없다.
- ↑ 1288년 첨의찬성사로 치사하였으나, 1288년~1303년 사이에 첨의중찬으로 치사케 하였다.
- ↑ 원래 고려는 좌를 우보다 높였는데, 원나라의 간섭으로 첨의부로 관제를 격하하면서 원나라처럼 우를 좌보다 높였다. 그러나 고려사 기록을 보면 이때 다시 좌를 우보다 높였다고 한다. 다만 충선왕이 복위한 1308년 다시 우를 좌보다 높였다.
- ↑ 한희유는 1303년 5월 이미 우중찬으로 임명되었다. 1303년 11월 기사에는 도첨의우중찬 판전리사사에 임명했다고 되어 있는데, 기존의 우중찬에 판전리사사만 더한 것인지 확실치 않다. 다만 기존에는 우중찬이 좌중찬보다 높았으나 이때는 우중찬이 좌중찬보다 낮아진다.
- ↑ 원래 고려는 좌를 우보다 높였는데, 원나라의 간섭으로 첨의부로 관제를 격하하면서 원나라처럼 우를 좌보다 높였다. 그러나 고려사 기록을 보면 이때 다시 좌를 우보다 높였다고 한다. 다만 충선왕이 복위한 1308년 다시 우를 좌보다 높였다.
- ↑ 1289년 이후 1303년 이전의 기간이지만 정확히는 알 수 없다.
- ↑ 원래 고려는 좌를 우보다 높였는데, 원나라의 간섭으로 첨의부로 관제를 격하하면서 원나라처럼 우를 좌보다 높였다. 그러나 고려사 기록을 보면 이때 다시 좌를 우보다 높였다고 한다. 다만 충선왕이 복위한 1308년 다시 우를 좌보다 높였다.
- ↑ 원래 고려는 좌를 우보다 높였는데, 원나라의 간섭으로 첨의부로 관제를 격하하면서 원나라처럼 우를 좌보다 높였다. 그러나 1303년 다시 좌를 우보다 높였고, 충선왕이 복위한 1308년 다시 우를 좌보다 높였다.
- ↑ 원래 고려는 좌를 우보다 높였는데, 원나라의 간섭으로 첨의부로 관제를 격하하면서 원나라처럼 우를 좌보다 높였다. 그러나 1303년 다시 좌를 우보다 높였고, 충선왕이 복위한 1308년 다시 우를 좌보다 높였다.
- ↑ 1305년 11월 권서행성사(權署行省事)가 되어 임시로 정동행성 사무를 맡았다.
- ↑ 1305년 9월 도첨의중찬으로 올려 치사케 했다.
- ↑ 1298년~1308년 2월 사이에 첨의중찬을 지냈으나 정확한 시기는 불명이다.
- ↑ 1308년에 정승으로 언급되고 있다.
- ↑ 기존 첨의정승에 감춘추관사 대녕군을 더한 것인지 신규로 첨의정승 감춘추관사 대녕군으로 임명한 것인지 불분명하다.
- ↑ 1307년 찬성사, 1308년 중호를 지냈고, 1312년 사망하였다. 고려사 1312년 08월 기사에 첨의정승으로 치사한 이혼(李混)이 사망하였다고 기록하였다. 관직 이력을 볼 때 최유엄보다 후에, 류청신보다 전에 첨의정승으로 임명되어 치사했을 것으로 보인다.
- ↑ 초명은 홍문계였다.
- ↑ 1321년 수첨의정승에 임명된 후 동년 10월 첨의정승으로 치사하였다.
- ↑ 1321년 10월 첨의정승으로 올린 후 치사케 하였다. 같은 날 민지도 첨의정승으로 치사케 하였는데, 당시 첨의정승 인원은 1명이었으므로 배정은 치사직만 올리게 한 후 바로 치사한 경우에 해당한다.
- ↑ 1321년 10월에 이미 종1품 판삼사사에 임명되었으므로, 이후 몇 년내에 첨의정승에 임명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330년 2월 정승으로 치사한 김태현을 권정동행성사(權征東行省事)로 임명했다는 기사 전까지는 기록이 없어 첨의정승을 지낸 시기는 확실치 않다. 1321년~1324년 사이에 첨의정승이 공석이므로 이때 첨의정승을 지낸 것으로 보인다.
- ↑ 이미 첨의정승으로 치사했던 김태현은 1330년 2월 권정동행성사로 임명된다.
- ↑ 윤보는 1321년 10월 수첨의찬성사로 치사하였고, 이후 1321년~1329년 사이에 첨의정승으로 가직되었다가 1329년 7월 죽었다.
- ↑ 당시에 도첨의정승의 인원은 1명이었는데 같은 날 최유엄, 김심 2명이 수첨의정승에 임명되었다.
- ↑ 당시에 도첨의정승의 인원은 1명이었는데 같은 날 최유엄, 김심 2명이 수첨의정승에 임명되었다.
- ↑ 고려사 김이 열전에는 1326년 첨의정승으로 승진하고 1327년 중찬으로 고쳐 임명되었다고 한다. 다만 이때는 관제가 개편된 기록이 없어 의문이다. 참고로 충혜왕이 즉위한 1330년 관제 개편으로 도첨의정승이 도첨의중찬으로 바뀌고, 1332년 충숙왕이 복위하면서 다시 도첨의정승으로 환원된다.
- ↑ 1327년 11월에 정승으로 언급되고 있다.
- ↑ 1329년 7월까지도 정승으로 재직 중이었다. 김심이 도첨의중찬에 임명되는 1330년 4월까지 재직한 것으로 보인다.
- ↑ 충혜왕이 즉위한 1330년 관제 개편으로 도첨의정승이 도첨의중찬으로 바뀌었다. 고려사 윤석 열전에 충혜왕 초에 윤석의 관직을 중찬으로 고쳤다고 기록하고 한다.
- ↑ 1341년 5월, 1342년 6월, 1343년 7월, 1344년 2월에 정승을 지내고 있었다.
- ↑ 1342년 6월 조적의 난 때 호종한 신하들을 공신으로 책록할 때 정승 채하중이 정승 이능간보다 먼저 언급되고 있어 채하중은 우정승인 것으로 보인다.
- ↑ 1342년 6월 조적의 난 때 호종한 신하들을 공신으로 책록할 때 정승 채하중이 정승 이능간보다 먼저 언급되고 있어 이능간은 좌정승인 것으로 보인다.
- ↑ 1341년~1344년 사이에 정승을 지낸 것으로 보인다. 1344년 4월 정승으로 언급되고 있다.
- ↑ 당시 채하중이 정승으로 재직 중이었는데 우정승으로 보이는 바 기철은 좌정승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 ↑ 1348년 4월 왕후와 함께 섭행정동성사(攝行征東省事)에 임명되었다.
- ↑ 1346년 5월에도 우정승으로 있었다.
- ↑ 1346년~1347년 사이에 정승으로 임명된 것으로 보인다. 1347년 1월에 정승으로 언급되고 있다.
- ↑ 고려사 왕후 열전에 우정승으로 기록되어 있다. 비슷한 시기에 김영돈이 좌정승인 것을 봐서도 노책이 우정승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 ↑ 1346년~1347년 사이에 정승으로 임명된 것으로 보인다. 1347년 2월에 좌정승으로 언급되고 있다.
- ↑ 1348년 4월 기철과 함께 섭행정동성사(攝行征東省事)에 임명되었다.
- ↑ 초명은 이군해(李君侅)였으나 이암(李嵒)으로 개명함.
- ↑ 1351년 10월에 섭정승권단정동성사(攝政丞權斷征東省事)에 임명되었다.
- ↑ 1352년 8월 기사에서 정승으로 치사한 것을 언급하고 있다. 1351년 11월 평해부원군에 임명된 것으로 봐서 1352년 경 정승으로 치사한 것 같다.
- ↑ 1353년 11월에 죽었다.
- ↑ 1354년 정승을 시중으로 고치고, 얼마 후 다시 우정승, 좌정승으로 고쳤다.
- ↑ 1342년 7월 영천부원군에 봉해졌는데 이때쯤 좌정승 영도첨의사에 임명된 듯하다. 1341년에 이미 채하중과 함께 정승에 임명된 적이 있다.
- ↑ 1356년 11월에 유배 보냄.
- ↑ 1369년 10월 24일 기사에, 시중 김일봉의 딸을 오왕에게 시집보냈다고 언급함. 다만 1365년 4월 10일 기사에 이미 평성부원군 김일봉이 죽었다고 기록함. 김일봉이 1363년 3월 판삼사사에 재임 중이었고 1364년 2월에 영도첨의에 오른 것을 볼 때, 판삼사사가 된 후 영도첨의가 되기 전에 시중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기간 중 류탁이 좌시중이었으므로 김일봉은 우시중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1363년 11월 경복흥이 수첨의시중으로 언급되는 것을 보면 이때쯤 첨의시중(좌시중)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 ↑ 우시중으로 추정됨.
- ↑ 1369년 10월 24일 기사에, 시중 김일봉의 딸을 오왕에게 시집보냈다고 언급함. 다만 1365년 4월 10일 기사에 이미 평성부원군 김일봉이 죽었다고 기록함. 김일봉이 1363년 3월 판삼사사에 재임 중이었고 1364년 2월에 영도첨의에 오른 것을 볼 때, 판삼사사가 된 후 영도첨의가 되기 전에 시중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기간 중 류탁이 좌시중이었으므로 김일봉은 우시중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1363년 11월 경복흥이 수첨의시중으로 언급되는 것을 보면 이때쯤 첨의시중(좌시중)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 ↑ 첨의시중(좌시중)으로 추정됨.
- ↑ 초명은 경천흥이다.
- ↑ 1363년 11월 수첨의시중으로 언급.
- ↑ 초명은 경천흥이다.
- ↑ 1368년 8월 하옥됨.
- ↑ 초명은 경천흥이다.
- ↑ 1369년 11월 기사에서 1368년 12월에 도첨의좌시중에 임명되었던 이인임을 수문하시중으로 언급함. 따라서 1368년 5월에 도첨의우시중으로 임명되었던 이춘부는 1369년경 문하시중으로 관직이 바뀌었을 것으로 보인다.
- ↑ 1369년 11월 기사에서 1368년 12월에 도첨의좌시중에 임명되었던 이인임을 수문하시중으로 언급함.
- ↑ 1372년 3월 이인임을 수시중으로 언급. 1374년 5월에는 前 시중으로 언급.
- ↑ 1374년 6월 시중 염제신을 유배 보냄.
- ↑ 같은 시기 경복흥이 좌시중이므로 염제신은 우시중이라고 생각된다.
- ↑ 고려사 권89 열전 권제2 충숙왕 후비 명덕태후 홍씨편을 보면 1380년 정월 경복흥과 이인임을 시중으로 언급함.
- ↑ 고려사 권89 열전 권제2 충숙왕 후비 명덕태후 홍씨편을 보면 1380년 정월 경복흥과 이인임을 시중으로 언급함.
- ↑ 조선왕조실록 태조 4년 10월 11일 기사에 좌시중에 이르렀다고 기록하였다. 즉 문하좌시중이 지낸 것이다.
- ↑ 1384년 11월에 임견미가 문하시중으로 이성림이 수문하시중으로 임명되었다. 1385년에 세운 태고사원증국사탑비의 뒷면에 문하시중 임견미, 수문하시중 이성림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 ↑ 이성림은 1384년 11월에 수문하시중에 임명되어 재직 중이었고, 1386년 8월 이인임이 좌시중으로 임명되었으며, 같은 달 이성림이 우시중으로 언급되고 있는 것을 보면, 문하시중 임견미를 좌시중 이인임으로 교체하면서 동시에 수문하시중이던 이성림의 관직을 우시중으로 고친 것으로 보인다.
- ↑ 고려사절요, [1]
- ↑ 고려사 최영 열전을 보면 장방평이 명에 들어가지 못하고 돌아온 1387년 11월경 반익순을 좌시중으로 언급하고 있다. 오기가 아니라면 이때쯤 좌시중 이성림이 우시중으로 우시중 반익순이 좌시중으로 자리를 바꾼 것으로 보인다.
- ↑ 고려사 최영 열전을 보면 장방평이 명에 들어가지 못하고 돌아온 1387년 11월경 반익순을 좌시중으로 언급하고 있다. 오기가 아니라면 이때쯤 좌시중 이성림이 우시중으로 우시중 반익순이 좌시중으로 자리를 바꾼 것으로 보인다.
- ↑ 1388년 6월 파직됨.
- ↑ 1392년 4월 4일 판전객시사 조영규 등이 정몽주를 살해함.
- ↑ 1392년 7월 12일 배극렴을 우시중으로 언급함. 중간에 문하시중, 수문하시중을 좌시중, 우시중으로 고친 것인지 오기인지 불명확함. 만약 고친 것이라면 이성계의 문하시중 직은 좌시중으로 고쳤다는 말이 됨.
- ↑ “김맹 (金猛)”.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 ↑ “구홍(具鴻)”.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1995.
- ↑ 《고려사》 권76 지 권제30 백관1(百官 一) 문하부 시중직의 시기별 호칭
참고 자료
편집- 《재상》, 〈고려의 재상〉, 박윤규 저, 이가서(2005년, 162~163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