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빌라이 칸

몽골제국의 제 5대 카안
(쿠빌라이칸에서 넘어옴)

쿠빌라이 카안(몽골어: ᠬᠤᠪᠢᠯᠠ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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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bilai Qa'an, 페르시아어: قوبيلاى قاآن Qūbīlāī qā'ān, 忽必烈 汗) 1215년 음력 8월 28일(9월 23일) ~ 지원(至元) 31년 1월 22일(1294년 2월 18일)) 또는 쿠빌라이 대칸(Хубилай их ван)은 대원의 제5대 카안(재위 : 1260년 ~ 1294년)이자, 칭기스 칸의 손자이다. 본명은 쿠빌라이(몽골어: ᠬᠤᠪᠢᠯᠠᠢ Qubilai, 한국 한자忽必烈 홀필렬), 묘호세조(世祖), 시호성덕신공문무황제(聖德神功文武皇帝), 존호헌천술도인문의무대광효황제(憲天述道仁文義武大光孝皇帝), 칸호는 세첸 카안(ᠰᠡᠴᠡ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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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čen Qa'an, 薛禪汗, 키릴문자: Сэцэн хаан)이다. 1279년 남송을 정복하고 금나라거란족의 잔당을 토벌하였으며, 고려를 부마국으로 편입하고, 태국, 캄보디아, 자바 섬을 원정하였으며 베트남 북방까지 영토를 확장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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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빌라이 세첸 카안
忽必烈 薛禪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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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čen qaγan
쿠빌라이칸 영정
쿠빌라이칸 영정
지위
몽골 카안
재위 1260년 5월 5일 ~ 1271년 12월 18일
대관식 중통(中統) 원년 3월 24일
(1260년 5월 5일)
대원 카안
재위 1271년 12월 18일 ~ 1294년 2월 18일
대관식 지원(至元) 8년 11월 15일
(1271년 12월 18일)
전임 뭉케 카안
후임 테무르 울제이투 카안
이름
쿠빌라이(몽골어: ᠬᠤᠪᠢᠯᠠᠢ, 러시아어: Хубилай хаан, 한국 한자忽必烈 홀필렬)
별호 세첸 카안(몽골어: ᠰᠡᠴᠡ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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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čen Qa'an, 한국 한자薛禪可汗 설선 가한)
연호 중통(中統) 1260년 ~ 1264년
지원(至元) 1264년 ~ 1294년
묘호 세조(世祖)
칸호 세첸 카안(몽골어: ᠰᠡᠴᠡᠨ
ᠬᠠᠭᠠᠨ
Sečen Qa'an, 한국 한자薛禪可汗 설선 가한)
존호 헌천술도인문의무대광효황제(憲天述道仁文義武大光孝皇帝)
시호 성덕신공문무황제(聖德神功文武皇帝)
신상정보
출생일 1215년 음력 8월 28일(9월 23일)
출생지 막북(漠北) 초원 혹은 허베이 성
사망일 지원(至元) 31년 1월 22일
(1294년 2월 18일) (79세)
사망지 원나라 대도(현, 베이징 시) 황궁 자단전
매장지 부르칸 칼둔
왕조 대원
가문 보르지긴
부친 툴루이
모친 소르칵타니 베키
배우자 소예순성황후
남필 황후
자녀 친킴
제국대장공주
종교 티베트 불교,유교 성리학,샤머니즘,텡그리
Qubilai qaghan.svg

툴루이의 넷째 아들로 경쟁자이자 막내동생 아릭부케 세력을 꺾고 몽골 제국의 카안으로 즉위한다.

1271년 몽골 제국의 국호를 대원(大元)으로 개칭하고 대도(大都, 현재의 베이징 시)를 도읍으로 정하였다. 1276년 2월 4일 남송의 수도 임안을 점령한 뒤 1279년 3월 남송을 멸망시키고 중국을 정복하였으며, 버마·일본 등지에 침공하였다. 그는 중앙아시아 출신 등 다양한 종족을 실력 위주로 채용하고, 실크로드를 정비하였다. 서역에서 오는 문화를 중시하였으며, 티베트 불교를 받아들였다.

또 한편, 카안에 즉위하기 전 자신을 찾아온 고려 원종과 모종의 동맹 관계를 맺었고 그의 아들인 충렬왕을 사위로 맞으면서 고려와 특수관계를 맺었다. 그는 한때 고려와 연합해 일본을 정복하려 했으나 두 차례 모두 태풍으로 실패했다. 여진족은 그를 호필내(呼必賚)라 불렀다.

생애편집

생애 초반편집

출생과 초기 생애편집
 
쿠빌라이 칸의 즉위 직전의 의 영토

쿠빌라이는 칭기즈 칸의 손자이자 툴루이 칸소르칵타니 베키의 넷째 아들이며 몽케 칸의 동생이었다. 1215년 음력 8월 28일(9월 23일)에 태어났으며 막북(漠北) 초원 출생인데, 일설에는 허베이 성 근처에서 태어났다는 설이 있다. 쿠빌라이의 용모는 키가 크고 덩치가 컸다 하며, 쿠빌라이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할아버지 칭기즈 칸의 지시로, 탕구트족 출신 독실한 불교신자 여성이 그의 유모로 지정되었는데, 쿠빌라이는 불교에 유화적인 정책을 펼쳤는데, 후일 이 유모를 높이 평가하였다. 또한 그의 어머니 소르각타니는 중국인들을 탄압하고 착취할 것이 아니라, 그들을 보살피고 다독이는 정책을 취해 우리 몽골에 충성하도록 해야 된다. 중국인들을 멸시하기보다 이해하고 존중할 것을 당부했고, 이는 쿠빌라이에게 영향을 주었다.

몽골호라즘을 정복하고 돌아오는 길에 칭기즈 칸은 1224년 사냥길에 나서 몽케와 쿠빌라이를 시험하였다.[1] 쿠빌라이는 형 몽케와 함께 토끼와 영양을 사냥해왔다. 칭기즈칸은 9살 된 쿠빌라이의 손에 사냥한 동물들의 피와 지방을 묻히게 한 후, 일행에게 쿠빌라이를 지명하며, 이 아이는 지혜로운 소년이라 칭송하였다. 1227년 칭기즈칸이 죽고 아버지 툴루이가 2년간 섭정으로 있게 되자, 아버지를 따라 카라코룸으로 갔다. 그러나 쿠빌라이는 톨루이 가문이고 장남도 아닌 둘째 아들이라는 위치로 인해 1251년경까지는 가문의 회의에서 상당부분 배제되었다.

소년기편집
 
청년 시절의 쿠빌라이 초상화
(13세기작)

1232년 아버지 툴루이가 죽고, 1236년 오고타이는 이미 죽은 툴루이의 가족에게 허베이 성의 8만 호를 주었다. 쿠빌라이는 아직 통치경험이 부족하여 허베이 성 지역 토착민들에게 자치권을 허용하였다. 그러나 지역 토착민 관료들의 농간으로 세금이 적게 걷히고 농민들이 도망치는 일이 발생, 농민의 감소로 영지가 황폐화되자, 쿠빌라이는 직접 허베이 성을 다스렸다. 이때 쿠빌라이는 중국의 여러 문화와 가치관을 받아들이고, 후일 중국인 승려를 카라코룸으로 불러 아들 친김의 교육도 맡기는 등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1242년 쿠빌라이는 중국 화북지역의 저명한 불교승려 하이윤(Haiyun)을 몽골의 오르도에 초빙했다. 1242년 카라코룸에서 하이윤 승려를 만났을 때는, 그와 불교 철학에 대해 담론하였다. 하이윤에게 감명받은 쿠빌라이는 1243년에 태어난 아들 친킴의 교육을 후일 그에게 맡겼다. 1244년부터 쿠빌라이는 본격 사방에서 문인, 학자, 불교 승려 등을 모은 후, 그는 자신의 가신 그룹을 구성하였다.

하이윤은 다른 불교 승려이자 건축가 류병창(劉秉忠), 중국도교 사상과 도교 사제들을 쿠빌라이에게 소개하였다. 류병충은 화가, 서예가, 시인, 수학자였으며 하이윤이 사원의 건립 일을 맡아볼 때는 쿠빌라이의 고문이 되었다. 산시성 출신 학자 자오 비 역시 자신의 측근으로 두게 되었다. 쿠빌라이는 다른 국적의 사람들도 자문, 측근으로 고용하였다. 왜냐하면 그는 몽골은 물론이고, 지역과 제국의 이익, 몽골과 투르크의 균형을 맞추기를 열망했기 때문이었다.

1251년 7월 1일몽케 칸이 몽골의 대칸으로 즉위하자, 쿠빌라이에게 남부군 총사령관 겸 총령 막남한지사무(總領漠南漢地事務)에 임명했다. 쿠빌라이는 곧 허베이 성 장가구에 금련지막부(金蓮川幕府)를 설치하였다. 이때 쿠빌라이는 허형(許衡), 장문겸(張文謙), 두묵(竇默), 조벽(趙璧), 요추(姚樞), 적경(郝經) 등의 한족 문사들을 영입했다. 이때 금나라의 옛 영토를 접수, 금나라 조정에서 일하던 원호문, 장덕휘 등을 초빙하여 유교대종사(儒教大宗師)라는 칭호를 내리고 불렀으나 이들은 요청을 거부하였다.

1251년부터 형인 몽케 칸칭기즈 칸의 셋째 아들이자 그의 백부인 오고타이 칸이 계획했던 남송의 정복과 페르시아 정벌을 결심하고, 페르시아 정벌은 쿠빌라이의 동생인 훌라구에게 맡겼다. 이때 몽케 칸은 쿠빌라이에게 중국 정벌을 맡겼고, 동시에 중국 정벌에 대한 군사·행정의 전권이 주어졌다. 몽케 칸은 쿠빌라이에게 칭기즈칸이 투르크 총독으로 파견했던 마흐무드 야라바치를 딸려 중국 북경으로 보내졌다. 쿠빌라이는 곧 중국 북부 지방의 영향력을 장악하고 자신의 오르도내몽골 중부 혹은 내몽골 남부로 옮겼다.

정복 준비와 대리국 정벌편집

그는 자신의 영지인 화북의 허난 성의 농업 생산량을 늘렸고, 경조(京兆, 산시 성(陝西省) 시안(西安))를 받은 뒤 경조 지역에 행정체제와 보급기지를 갖추었고, 그는 말단의 촌장들에 이르기까지 하나 하나 직접 관리, 감독하였다.

1252년 쿠빌라이는 재판에서 용의자를 무조건 처형한 마흐무드 야라바치를 비판하고, 자오 비는 왕좌에 대한 그의 주제넘는 태도로 그를 공격했다. 몽케는 곧 마흐무드 얄라바흐를 해고했다.

1252년 6월 쿠빌라이는 몽케 칸으로부터 윈난 성(雲南省) 정벌을 명받았다. 쿠빌라이는 윈난 성(雲南省)에 있던 대리국(大理國)을 먼저 침공하여 남송의 측면을 돌파하는 작전을 썼다. 1253년 가을, 그는 명령을 받고 군사를 이끌고 출정, 섬서 성을 출발하여 윈난 지방으로 들어와 3,4개월간의 전투 끝에 그해 겨울에 대리국으로 들어갔다. 1254년 1월 2일 단흥지(段興智)의 항복을 받아내, 대리국의 수도인 대리성(大理城)을 정복하고 운남행성(雲南行省)을 설치했다. 운남행성의 총독인 대리총관(大理總管)은 대리국의 왕족인 단씨를 임명하였다. 그러나 대리국 정복 직후인 1254년훌라구, 아리크 부케 등이 칸의 세력 확장과 인재 포섭 등 칸의 지위에 오르려는 움직임들을 감지하고 되돌아가면서, 부장인 우리양카다이에게 이 지역 인근지역의 위수(衛戍)를 맡겼다. 대도로 들어가 몽케 칸을 알현한 뒤, 1257년 몽케 칸의 지휘 아래 출정에 참여하여 남송 공략을 준비하였으나 1259년 몽케가 갑자기 죽었다.

한편 쿠빌라이는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남송의 북방지역의 한 성곽을 포위, 공격하던 중, 몽케 칸의 전사 소식과 형제 중 막내이기 때문에 고국의 방비를 맡았던 아리크 부케가 스스로를 칸에 오르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사자를 보내 교전 중이던 남송과 휴전을 협정하고 대도로 복귀하였다.

1차 베트남 원정편집

1256년 여름 몽케 칸남송이 몽골 사신들을 압류했다는 이유로 남송 정벌을 선언, 3개의 부대를 편성했다. 쿠빌라이는 3개의 부대 중 중로군 통수(中路軍統帥)에 임명되었다. 그런데 몽케 칸은 갑자기 쿠빌라이에게 대월(베트남) 파견 지시를 내린다. 1257년 베트남 정벌군을 편성, 베트남으로 내려가 저달하(抵達河)에 입성했지만 대월 쩐 왕조는 쿠빌라이 군의 침공을 격퇴 하였다. 1257년 음력 12월 12일에 몽골과 대월 사이에 평화 조약을 다시 수립하였다.

1260년 쿠빌라이 가 대칸이되었을 때 쩐 성종은 몽골에 3년마다 공물을 보내기로 했고, 몽골에서 파견한 다루가치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대월의 왕은 얼마 뒤 몽골에 조공을 보내는 것을 거절했다.

얼마 뒤 쿠빌라이는 대월의 쩐 성종에게 참파 왕국을 정벌하는데 지원군을 내줄 것을 요청했다가, 대월로부터 거절당했다. 쿠빌라이는 대월에 사자를 보내 트란 왕을 왕위에서 물러날 것을 요구했다. 쩐 성종은 백성을 모아 몽골에게 일단 협력할지, 아니면 고국을 위해 싸울 것인가를 투표로 정하게 했다. 투표는 몽골에 대한 항전으로 결정되었다. 대월은 쿠빌라이의 사자를 돌려보냈고, 결사 항전을 선언한다.

회군과 즉위편집

쿠빌라이는 1258년 몽케 칸을 따라 남송 정벌에 출정하였다. 1258년 몽케 칸은 쿠빌라이를 동부지역 군대의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병력을 지원하였다. 쿠빌라이는 통풍을 앓고 있었기 때문에 집에 머물러 있었지만 몽케 칸의 지시를 받고 이주하였다. 쓰촨 성에서 몽케 칸이 사망한 소식을 접한 쿠빌라이는 당분간 몽케 칸의 죽음을 비밀로 부치고 양쯔 근처와 우한 공격을 준비하였다. 쿠빌라이의 군사가 우창을 공략하는 동안 장군 우량카다이의 군대가 합류, 쿠빌라이의 군대를 지원하였다.

1259년 9월 3일 쿠빌라이가 친히 이끄는 몽골 제국 중로군은 화이허(淮河)를 건너 남송에 들어갔으나, 남송의 장군 가사도(賈似道)가 사람을 보내 화의를 요청, 2십만 냥의 은과 연간 2십만 냥의 을 몽골 측에 바치기로 하고 쿠빌라이는 일단 퇴각하였다. 이때 그는 사자로부터 이미 몽케 칸남송 군과의 전투 중 투석기 돌에 맞아 부상 병석에 누웠다가, 그해 8월 11일 쓰촨 성 합주(合州)에서 부상과 이질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쿠빌라이는 그의 아내로부터, 쿠빌라이의 남동생 아리크 부케가 군사를 준비하고 있다는 연락을 받고, 북쪽으로 회군하여 몽골 평원으로 돌아왔다.[2] 쿠빌라이가 몽골에 도착하기 전에 아리크 부케는 수도 카라코룸에서 쿠릴타이를 개최, 스스로를 대칸으로 선언하였다. 쿠빌라이와 그의 넷재 동생 훌라구는 이에 반대하였다. 쿠빌라이의 한인 참모는 쿠빌라이가 대칸의 위에 오르도록 결겨했으며, 중국 북부와 만주에 있는 귀족, 장수들을 설득하여, 중국 북부와 만주의 호족들이 쿠빌라이의 입후보를 지지하였다.

1260년 4월 그는 몽골 남동부 상도(上都)에 도착했다. 카라코룸으로 돌아온 쿠빌라이는 다시 쿠릴타이(Kuriltai, 大會議) 개최를 선언했다. 여기서 그의 지지세력들은 쿠릴타이를 임의로 개최하여 몽골족 부족장들을 소집, 보르지긴 씨족 위주의 부족장들과 소수의 왕실 근친들을 불러모았다. 1260년 4월 15일에 개최된 쿠릴타이에서 쿠빌라이를 정식 대칸으로 선출하였다.

즉위 초반편집

아리크 부케의 도전편집

 
명목상 부하인 일 칸국의 칸에게 보내는 쿠빌라이의 다르마 인장

5월 5일 몽케 칸의 뒤를 이어 만장일치로 쿠빌라이를 칸으로 선출한다고 발표하였다. 1260년 5월 12일 쿠빌라이는 중서성을 제국의 최고 행정기관으로 선포하고, 자신의 부재시 재상이 정무를 주관하도록 하였다. 또한 쿠빌라이는 스스로 자신의 칭호를 짐(朕), 형 몽케 칸을 선황(先皇)으로 칭하였다. 쿠빌라이는 자신이 신뢰하는 중국인 출신 재상 왕문통(王文統)을 평장정사(平章政事),장문겸(張文謙)을 중서성 좌승으로 임명하여 중서성을 장악했다. 6월 29일에는 연호를 중통(中統)으로 선언했다.

그는 자신이 선대 칸의 유언에 의해 제위를 계승했음을 선포했고, 자신이 적법한 계승자임을 발표했다. 아리크 부케 역시 카라코룸에서 쿠릴타이를 열어 자신을 칸으로 선출하고 쿠빌라이를 찬탈자라 공격하였다. 후에 쿠빌라이가 가계상 적자이고 합법적인 군주라는 마르코 폴로의 변호에도 불구하고 정통성 시비, 논란은 그의 생전은 물론 죽은 뒤에도 계속되었으며, 그의 정통성에는 여러 가지 의문이 제기되어 왔다. 심지어 임종 직전의 칭기즈 칸이 당시 어린 아이였던 쿠빌라이를 장래의 칸으로 지목했다는 전설까지 날조되었지만 이를 믿는 사람은 없었다. 수도 카라코룸에서 내전이 발생했고, 카라코룸은 황폐화되었다.

첫 전투에서 아리크 부케가 패하고 그의 사령관 알마다르는 전투에서 사망했다. 아리크 부케는 보복으로 아비수가를 처형하였다.

쿠빌라이는 사촌이자 오고타이 칸의 여섯째 아들인 카단의 지원으로 카라코룸으로 들어가는 식량 보급로는 차단했다. 카라코룸은 쿠빌라이의 대규모 군대에 함락되었지만, 1261년 쿠빌라이가 떠나자 다시 아리크 부케에 의해 점령되었다. 1262년 2월 이저우(夷州) 주지사 리탄(李璮)은 몽골 통치에 반발했고, 쿠빌라이는 그의 재상 사천택(史天澤) 등에게 군사를 주어 리탄을 정벌하게 했다. 리탄의 반란을 진압한 사천택은 리탄을 참수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쿠빌라이는 한족 출신 관료들에 대한 무조건적 신뢰는 거두게 되었다.

아리크 부케 토벌과 내정 단속편집

남부 전선을 확보하기 위해 쿠빌라이는 일단 남송 외교를 시도하고 항저우로 사절을 보냈다. 산시 성쓰촨 성에 있던 몽케 칸의 군대는 아리크 부케를 지지하였다. 쿠빌라이는 염희헌(廉希憲)에게 병력을 주어 쓰촨 성산시 성에 보내 아리크부케의 지지자 류태평을 사살하고, 여러 장수들을 격파하였다. 1263년 6월 13일 쿠빌라이는 추밀원을 최고기관으로 설정하고 추밀원을 최고 군사기관으로 정했다. 장남 연왕 친킴(眞金)을 수중서령(守中書令) 겸 판추밀원사(兼判樞密院事)를 겸직하여 추밀원과 중서성을 장악하게 했다.

1264년 쿠빌라이는 아리크 부케와의 전투에서 그를 패배시키고 항복할 것을 강요했다. 1264년 8월 21일 상도(上都, 현, 카라코룸)에서 아리크 부케는 쿠빌라이에게 일단 항복하였다. 서부 지역의 지도자들은 일단 쿠빌라이를 대칸으로 인정하였다. 쿠빌라이는 아리크 부케가 관할하던 영토를 분할하였다.

그러나 아리크 부케는 항복을 번복하고 끝까지 반발했으나, 아리크 부케는 2년 뒤에 죽었다. 쿠빌라이는 아리크 부케를 지지한 지도자들을 처형하였다. 그러나 아리크 부케를 지지했던 카이두두아가 제국의 서부에서 반기를 들어 몽골제국은 동부와 서부로 분열되었다. 이들은 쿠빌라이의 가까운 친척으로 카이두오고타이의 5남 카시의 아들이고, 두아차가타이의 장남 무투겐의 삼남 이슨 도아의 아들이다.

1267년 2월 25일 금나라의 중도(中都, 현 베이징 시)를 도읍으로 정하고, 금나라의 이궁(離宮)이었던 대녕궁(大寧宮)을 황궁 정전으로 하였다. 1272년 3월 4일 수도 중도의 이름을 대도(大都)로 정하고, 금나라의 구 성곽인 포활남성(包括南城) 외에 새로운 성곽 북성(北城)을 축성하였다.

1271년 12월 18일 조칙을 내려, 금나라 금 장종의 법률 태화율(泰和律)의 사용 금지를 명한다. 일단 몽골의 법률을 적용하게 하는 한편, 태화율을 참고로 법령 정비에 나선다.

파스파 문자 제정편집

파스파 문자(Phags-pa characters, 八思巴文字)는 1265년 몽골 원나라(元) 국사(國師)인 파스파(八思巴)가 쿠빌라이(세조 世祖)의 명을 받아 몽골어를 표기하기 위해 만든 문자로서, 몽골신자·방형몽골문자라고도 하는데, 파스파의 백부(伯父) 사펜이 처음 고안한 것을 파스파가 개량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 파스파 문자는 몇년의 연구 끝에 1270년 제정되었다.

내정 활동편집

 
쿠빌라이 칸에게 경의를 표하는 마르코 폴로
(1410년~1412년 프랑스 서적 Bibliothèque nationale de France. Manuscript Français 2810, fol. 2v에 수록된 삽화)

쿠빌라이 칸은 대칸으로 즉위한 뒤, 중국을 주요 기지로 간주하여 중국을 통치하는 데 집중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서서히 인식했다. 그의 영토는 몽골과 내몽골, 만주 및 중국 화북지역에 국한되었다. 다른 중앙아시아의 칸국으로부터는 명목상의 종주권을 인정받는 선으로 협상하였다. 1260년 8월 쿠빌라이는 독자적인 지폐 교초를 발행했다.[3]

그는 중국의 제도와 문물을 받아들이기로 하고 중국의 정치적, 문화적 모델을 채택하여 갈등을 줄이는 한편, 송나라 중기 이후 동안 엄청난 재력과 전력을 보유했던 지역 영주의 영향을 최소화하려 노력했다. 쿠빌라이는 즉위 직후부터 약 1276년을 전후한 무렵까지 내정을 한인 고문에게 크게 의존하였다. 그는 유병충(劉秉忠) 외에도 허형(許衡)과 같은 한족 출신 고문을 중용하였고, 그 중 일부는 총독으로 임명하여 중국 화북 지역에 파견, 상주시켜, 이 지역을 다스리게 했다.

 
쿠빌라이 칸
(마르코 폴로의 견문록 삽화)

쿠빌라이는 종종 직접 친히 과거를 주관하여 인재를 시취, 채용하였다. 남송 멸망 이전에 투항한 한인 관료와 남송 패망 후에 편입된 이들은 남인으로 분류하여 차별하였고, 몽골의 귀족 외에도 서역과 다양한 강역에서 초빙되어 온 학자들을 관원으로 채용하였다.

1264년 8월 11일 영토를 중원지구(만리장성 이남, 태령, 화이허 이북), 동북지구(흑룡강 유역), 막남막북몽골초원전경(내몽골외몽골), 서백리아지구(시베리아 남부 지역), 서역지구, 토번지구, 운남지구 등으로 개편, 지방을 정비했다.

원나라의 대부분의 지역은 행정관료인 총독과 부총독을 임명하여 파견하였다. 그는 툴루이가문의 인척인 진정(眞定)의 사씨(史氏)와 고성(藁城)의 동씨(董氏) 등의 도움을 얻어 중국인 세습적 봉건제를 폐지하고, 지역 호족들의 발호를 억제하였으며 각 주의 지사와 부지사를 쿠빌라이가 직접 임명하여 파견, 중앙집권제를 확립했다. 또한 티베트 지역은 자치권을 부여하는 한편 제국의 중서성이 통치에 직접 관여하게 하였다.

1264년 9월 7일 직접 《지원개원소 (至元改元詔)》라는 칙령을 반포하고 연호를 지원(至元)으로 개정했는데, 이는 《역경 (易經)》의 내용 중 지재곤원지의(至哉坤元之義)에서 따온 것이다. 중통 5년은 지원 원년이 된다.

쿠빌라이는 대운하 재건, 공공 건물 수리, 도로 확장 정책을 펼쳐 경제력을 상승시켰다. 그러나 그의 국내 정책에는 옛 몽골의 관습법과 전통의 일부 반영되고 있었다. 이는 점차 중국식의 제도와 정책으로 변화해갔다. 쿠빌라이는 상인들은 중요한 국정의 파트너로 보고, 1262년 세금의 대상으로 선포했으며 그들을 감독하는 1268년에는 시장 세무부서를 세웠다. 이슬람, 위구르족과 중국 상인들을 장악, 정복은 자신의 작업을 확장 한 후 받는 남중국해인도양의 교역로와 상권을 확보했다. 1266년부터 쿠빌라이 정부의 주요 수입원은 소금 생산권의 독점이었다.

1268년 8월 13일 쿠빌라이는 당나라, 송나라의 어사대를 참고하여 어사대(御史台)를 설치하고 최고 감찰기관으로 하도록 정했다. 우승상 탕차르를 어사대부로 임명하고, 중국인 출신 관료 장웅비(張雄飛)를 시어사로 임명하였다.

1271년 유병충을 재상에 임명했다. 1271년 12월 18일 쿠빌라이는 공식적으로 대재건원(大哉乾元)이라는 뜻으로 국호를 대원(大元)이라 하여 원 왕조를 창설, 스스로를 대원제국 황제이자 대몽골제국 황제로 선언하고 수도를 대도(大都, 'Grand Capital')로 옮겼다. 정식 국호는 대원대몽골국(大元大蒙古國, ᠳᠠ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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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 1272년 그는 서북지역에 도시 상도(上都)를 건설하고 개평부라 했으며, 이 지역은 여름 지역에 머무르는 여름 수도로 지정했다. 쿠빌라이는 중국 남부에 있던 남송 정벌을 기획했다.

그밖에 정복지, 원정지에서 만난 무슬림 학자들 역시 재주에 따라 선별 채용, 30명의 무슬림이 쿠빌라이의 조정에서 고위 관리로 봉사하였다. 왕조의 12개 행정 구역 중 8개에 쿠빌라이늩 특별히 무슬림 출신 총독을 임명하였다.

1274년 2월 9일 대도 황궁의 정전 대명전(大明殿)을 새로 지어 이어하고, 조회를 시작하였다. 태자 친킴과 제친왕, 족장 및 고려 원종이 조회에 참여, 하례하였다.

서역 학자 초빙편집

쿠빌라이는 중근동의 학자와 과학자들을 초빙, 후원하였으며 아라비아 출신 천문학 자들은 산시 성 천문대 건설에 참여하였다. 천문학자 자말 아드 딘 부카리(Jamal ad-Din Bukhari)는 새로운 천문장치 설치와 중국 달력의 보정을 허용 개념을 소개하였다.

또한 아라비아 출신 지도제작자들을 고용, 지도를 제작하게 하여 육로와 해로를 정확하게 기술하게 하였다. 이들은 실크로드를 따라 모든 주변 인접 지역의 정확한지도를 만들었다. 또한 아라비아의 수학자들을 통해 중국에서 유클리드 기하학, 구면 삼각법아라비아 숫자를 소개, 이를 배우게 했다.

정복 활동편집

고려 복속과 제1차 일본 원정 실패편집

 
1266년 일본에 보내는 친필 국서
 
제1차 일본 원정도

쿠빌라이는 즉위 직후 남송공략을 최우선 정책으로 삼았으며, 1268년 한수의 요충 양양의 포위전을 개시했다. 유교 사상의 영향을 받은 일부 자문관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쿠빌라이 칸은 일부 몽골인 측근과 몽골 관리들의 제안에 따라 일본, 미얀마, 베트남, 자바 정벌을 단행한다.

고려 국왕인 충렬이 그의 딸 제국대장공주와 혼인하였고, 이후 고려의 역대 군주들은 원나라의 공주 혹은 종실의 딸과 결혼하여, 원나라의 부마국인 동시에 외손이 된다.

이후 쿠빌라이는 고려에게 공물의 양을 줄이는 대신, 두 차례의 일본 원정에 고려의 협력을 종용하였다.

쿠빌라이는 황후 차브이를 섬기는 인물로서 중앙아시아 출신의 상인 아흐마드 파나카티 를 재무장관에 발탁하여 증세를 꾀해 남송 공략의 준비를 진행시키는 한편, 이어서 복속한 고려를 통해 남송과 통상관계를 맺고 있었던 일본에도 몽골에 대한 복속을 요구했다. 그러나 일본의 가마쿠라 막부는 이를 거부했고, 쿠빌라이는 남송과 일본이 연합하여 원나라에 대항하는 것을 막기 위해 1274년 쿠빌라이는 900척의 함대를 편성하여 고려로 보냈다. 원나라와 고려의 연합군을 편성하여 일본으로 보냈으나, 쓰시마 섬, 이키노시마, 규슈의 다자이후 주변을 석권하는 것만으로 끝났다. 이때 몽골의 선박은 다소 악천후 용골이 없는 강 보트를 기반으로 설계된 선박이라, 풍랑과 해일에 견디지 못하고 그의 함대는 파괴되었다.

일본원정은 실패로 끝났으나, 그 준비를 통해 원정 준비를 위해 설치한 출선기관인 정동행성과 고려정부가 일체화되어, 새로 속국이 된 고려는 원나라 조정과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1차 남송 원정편집

 
원 세조 쿠빌라이 영정
(17세기 작)

1268년 가을부터 친히 남송 정벌을 시작했다. 그러나 양양 태수 여문환(呂文煥)의 군사는 5년간 저항했고, 쿠빌라이는 퇴각과 재 원정을 반복했다. 그는 동생 훌라구에게 사람을 보내 도움을 요청, 아라비아 기술자들에게 투석 병기들을 제작하게 했다. 1273년 3월에 이르러 다시 남송을 본격 공략, 3월 14일 양양(襄陽)이 마침내 함락되고 양양 태수 여문환과 그의 일족이 투항, 남송의 방위시스템은 붕괴되었다. 쿠빌라이는 5년간 자신에게 철옹성으로 저항한 여문환의 군사 능력을 높이 평가해, 원나라의 장수로 받아들이고 환대하였다.

쿠빌라이는 명을 내려 원나라의 병사가 각 성과 도시에서 약탈, 폭행을 저지르는 것을 엄중히 금지시키는 것과, 더불어 항복한 적의 장군을 좋은 대우를 해주는 등 남송의 투항군을 아군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각지의 도시는 차례로 원나라에게 항복했다.

1274년 7월 20일 여사정남소(興師征南詔)를 내려 남송 정벌을 선언, 친히 옛 남송의 천호, 만호 등 남송의 투항군을 합친 대병력으로 공세에 나섰다. 방위 시스템의 붕괴된 남송은 이렇다 할 저항다운 저항도 하지 못하고, 1276년 2월 4일 바린 바얀(伯顔)에 의해 수도 임안(臨安;항주)이 무혈 함락되었다. 공제를 비롯한 남송의 황족은 북쪽으로 연행되었으나, 그의 아내의 요청으로 그는 몽골 제국의 황족과 같은 예우를 하라 명하였고, 남송의 황족들은 몽골 황족의 예에 따라 정중한 대우를 받았다.

우구데이 칸국과 갈등편집

평소 우구데이 칸국을 껄끄럽게 생각하고 있던 쿠빌라이는 자신의 넷째 아들인 노무간에게 대군을 주어 우구데이 칸국과 맞서게 했다. 이 원정군에는 몽케의 아들인 시리기(Sirigi), 아리크 부케의 아들인 요부쿠르, 멜릭 테무르가 있었는데, 이들은 1276년에 진중 반란을 일으켜 노무간을 사로잡은 뒤 킵차크 한국에 넘겨 버리고 자신들은 카이두에게 의탁했다. 노무간1278년에야 탈출에 성공한다.

2차 남송 원정과 정복편집

 
애산전투 유적지 관문

1276년 쿠빌라이는 회유책으로 귀부안민소(歸附安民詔)를 반포, 새로 편입된 강남 지역의 주군현 관리및 사졸군민에게 새 질서를 받아들이고 안정적으로 생업에 종사할 것을 명하였다. 그러나 육수부(陸秀夫) 등은 쿠빌라이의 회유를 거부, 송 단종과 동생 조병을 데리고 도피, 해상유망정권을 세우고 쿠빌라이 군에 저항하였다. 남송의 장군 문천상이 원나라와 강화를 체결하고자 장군 바얀에게 왔다가, 문천상을 사로잡았지만 곧 탈출, 문천상은 육상에서 원나라에 저항한다.

1276년 이후 다시 결집하여 저항하려는 여진족을 토벌하고, 만리장성 밖에 있던 거란족의 잔당을 궤멸, 몰살시켜 내몽골과 만주 지역을 평정하였다. 또한 일부 군사를 보내 위구르 족티베트를 정벌하였으며, 옛 서하 지역의 부흥 운동 역시 좌절시켰다.

1278년 육상에서 저항하던 남송 장군 문천상군을 상대, 장홍범 군에 의해 오파령 전투 궤멸당했다. 장홍범은 문천상을 사로잡는데 성공, 대도(지금의 베이징)로 압송하였다. 쿠빌라이는 사람을 보내 장군이면서 뛰어난 문인이던 문천상을 회유, 여러번 설득을 했으나, 그는 완강하게 거부하고 옥중에서 정기의 노래를 읊었고, 곧 재투옥시켰다. 1283년까지 문천상을 설득했지만 충신은 두 주군을 섬기지 않는다는 요지의 말만 되풀이하고 거절, 결국 1283년 1월 문천상은 처형당한다. 문천상의 사형 선고를 접한 쿠빌라이는 문천상의 사형을 당장 중지할 것을 지시했으나, 이미 문천상은 처형당한 뒤였다.

그 후, 다시 남송 정벌군을 편성하여 해상으로 도망친 남송의 유민을 1279년 3월 19일 애산 전투에서 최종 전멸시키고, 북송 이후 150년 만에 중국을 통일하였다. 송사에 의하면 일주일 뒤, 십만여 구의 시신이 해상에 떠다녔다 한다. 쿠빌라이는 풍부한 옛 남송 지역의 부(富)를 대도로 모이게 하여 그 이윤을 국가에 흡수하였고, 각종 경제제도 정비를 통해, 화북을 중심으로 했던 정권으로서는 유례없는 번영을 맞이했다.

월남 공략 실패와 2차 일본 원정 실패편집

그러나 그 후 이루어진 군사원정은 특별한 성과 없이 끝났다. 1281년 다시 일본에 군대를 보냈으나 이번에도 실패로 끝났고, 1285년1288년에는 베트남에 침공한 군대가 차례로 패배했다. 그러나 베트남의 북방 지역을 차지하는 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그 이전에는 1276년 중앙아시아에서 하이두와 대치하던 원나라 군대에서 몽케의 아들 시리기가 반란을 일으켜 하이두의 세력 확대를 허용시켰다.

 
쿠빌라이 칸의 행차도

그런데도 쿠빌라이는 3번째 일본원정을 계획하는 등 적극적인 대외원정을 추진하였으나, 1287년 즉위 때 지지모체였던 동쪽 3왕가가 나얀을 지도자로 삼아 반기를 들었으며, 중국 내에서도 반란이 빈발했기 때문에 만년의 쿠빌라이는 일본 원정을 포기했다. 또한 1292년 참파원정을 시도하였으나, 이것도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참파 공략을 비롯한 동남아시아에 대한 원정은 상업루트의 개척에 뜻을 둔 경우가 강해, 최종적으로는 해상루트의 안전이 확보되는 성과를 올렸다.

카이두의 봉기와 갈등편집

1277년 오고타이의 손자이며, 다섯째 아들 카시(合失)의 아들인 카이두아리크 부케의 계승을 선언하고, 쿠빌라이의 형 몽케의 아들 시리기, 사촌 사르반[4] 등을 이끌고 상도로 진격, 쿠빌라이는 장군 바얀을 보내 카이두를 상대하게 하고, 격파하였다. 카이두의 거병으로 미얀마 정벌을 일시 중단하였다.

1287년 카이두는 만주와 동몽골을 영지로 하는 카사르의 후손 식투르, 카치운의 후손 카다안, 테무게 옷치긴의 후손인 나얀[5]과 동맹을 맺고 다시 쿠빌라이와의 전쟁에 나섰다. 카이두는 이어 몽골 동부 지역의 부족장들과도 결탁, 군사를 이끌고 다시 상도로 갔다.

1288년 몽골 동부 군대의 맹주인 나얀은 쿠빌라이의 친위대와 결전을 벌였으나 패하고, 쿠빌라이에 의해 처형당했다. 쿠빌라이 칸은 카이두에게 협조했던 몽골 동부지역의 칸들을 몰살시키고, 친히 카이두를 상대하였다. 나얀 등이 패한 이후 대부분의 반란 가담 세력들은 쿠빌라이에 항복하였다. 쿠빌라이가 몽골 동부로 간 사이 카이두의 군사가 우세하였다.

동쪽 반란군과 함께 상도로 진군했던 카이두는 쿠빌라이의 손자인 카말라를 격파하는 등 우세한 전황을 유지했지만 나얀을 평정한 쿠빌라이가 본군을 이끌고 상도로 온다는 소식을 듣고 본국으로 회군하였다. 이 원정이 실패한 후 카이두는 산발적인 전투를 몇 번 더 벌였으나 바얀의 방어에 막혀 큰 성과를 거두진 못했다. 이후로도 카이두는 쿠빌라이의 종주권에 반발, 끊임없이 쿠빌라이와 갈등하였다.

미얀마, 캄보디아 원정 및 자바 원정편집

1277년 쿠빌라이는 미얀마를 공략했으나 실패하고 되돌아왔다. 1283년, 1287년에 다시 몽골 군을 보내 미얀마를 원정하여 이라와디 삼각주까지 점령했다. 일단 쿠빌라이군은 버마의 수도 바간을 점령하고, 새 정권을 세운 뒤 종주권만 인정받는 선에서 퇴각하였다.

1283년 태국을 공격, 크메르 제국자야바르만 8세는 몽골에 복속, 종주권을 거부했다. 자야바르만 8세는 쿠빌라이에게 경의를 표하길 거부하고 몽골 사절을 수감하였다. 쿠빌라이는 군사를 보냈고, 1283년 자야바르만 3세는 쿠빌라이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공물을 바치기로 약속하였다. 1283년에 참파 에서 육로를 통해 캄보디아 남쪽으로 진출을 시도, 캄보디아 북부를 점령했다. 1284년 캄보디아는 원나라에 속국이 되고, 조공을 바쳤다.

쿠빌라이는 1293년 자바 섬 정벌을 기획, 2만~3만명의 해군을 징발하여 원정 을 시작 했지만, 인도네시아를 침략 한 몽골 군은 3000명 이상의 병력이 상당한 손실을 입은 후 철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쿠빌라이가 죽은 해인 1294년태국수코타이 왕국치앙마이 왕국은 확실히 원나라의 속국이 되었다.

생애 후반편집

 
1294년 경의 원나라

제2차 베트남 원정편집

1284년 6월 쿠빌라이는 아들 토곤을 진남왕(鎭南王)에 봉했다.[6] 그리고 7월 참파를 정복하라는 명령을 내렸다.[7] 진남왕위는 대원 왕실서열 제도에서 6계급 중 2위에 위치하는 고위직 왕호로 제 4-5위의 왕호 밖에 부여받지 못한 다른 서자(후게찌, 아우루쿠찌, 코코츄 등)에 비하면 파격적인 대우였다. 이는 쿠빌라이가 토곤의 남방 정복에 큰 기대를 걸고 있었기 때문으로 추측되고 있다.[8]

1285년 1월 토곤의 군사는 방 키에프(하노이 북동쪽)와 탕롱(현, 하노이)를 점령했고, 소케투가 이끄는 토곤의 제2진 부대는 참파에서 북쪽으로 이동하여 베트남의 중북부 지역을 점령했다. 쩐 성종은 일단 그에게 항복했다. 그러나 쩐흥다오는 '항복을 하려거든 신(臣)의 목부터 먼저 베소서'라며 결사항전을 주장했고, 쩐 성종과 대월군 총사령관 쩐흥다오는 그들의 전술을 방어에서 공격으로 바꾸고 몽골을 공격했다. 4월에 쩐쾅가이(陳光啓)가 소게투를 전사시키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몽골군을 크게 대패했다. 쩐흥다오 군도 함투(Hàm Tử, 현재의 흥옌)에서 전투에서 토곤 군대를 격파하였다. 베트남군의 기습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던 토곤은 대월의 궁수를 피하기 위해, 청동 파이프 안에 숨었습니다. 토곤이 청동 파이프로 숨은 일은 몽골 제국과 토곤 자신에게 굴욕감을 가져다 주었다.

제3차 베트남 원정과 실패편집

1288년 4월 초 쿠빌라이는 해군을 베트남 원정에 파병, 오마르가 이끄는 보병을 딸려 보냈다. 몽골의 해군 함대는 박당강을 거쳐 대월을 공격했다. 곧 교량과 도로가 파괴되고 대월 부대가 공격을 개시하자, 몽골 군은 보병 호위없이 박동에 도착했습니다. 대월은 미리 병력 일부를 매복한 뒤, 작은 소 함대가 전투에 참여하고 후퇴하는 척했고 몽골 인들은 대월 군대를 추격했다. 매복해 있던 수천 대의 작은 베트남 함대가 양면에서 몽골 함대를 공격했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당황한 몽골군은 다시 바다로 나가려 했고, 중간에 좌초되어 침몰하였다. 강둑으로 패주하던 몽골군은 육지에서 기다리던 쩐흥다오가 이끄는 군대에게 격파당했다.

같은 해 말에는 토곤은 안남(대월 쩐 왕조)에 이르러 군을 나누어 대월을 침공했다.[9] 그러나 대월의 장군 진국준(陳国峻)의 활약으로 원군은 고전을 면치 못했고, 1288년 박당강 전투에서 토곤이 이끄는 원군은 대패를 당했으며, 오마르가 포로로 잡혔습니다. 1288년 말 토곤은 몽골군을 이끌고 베트남에서 퇴각하였다. 그럼에도 쩐 성종은 몽골과의 갈등을 피하려고, 일단 원나라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조공을 약속하였다.

1291년 패퇴한 토곤은 명을 받아 몽골군 500명과 한인 병력 1000명과 함께 양주에 출진했다. 하지만 안남의 패전에 분노한 쿠빌라이는 죽을 때까지 토곤이 알현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10] 토곤은 쿠빌라이가 사망할 때까지 양주로 추방당했다.

만년과 최후편집

 
쿠빌라이칸 동상

그는 독실한 불교 신자이면서도 유교 경전을 탐독하고, 유교에서도 일정부분 영향을 받아, 자신의 정책에 반영하였다. 1271년부터 재위기간 중 금 장종의 법률 태화율을 참고하고, 유학자들을 통해 법령을 정비, 1291년 국법 지원신략(至元新格)을 반포하였다.

계속 된 정벌과 정복 사업의 강행으로 젊은 장정들이 사라져 노동력이 황폐해졌고, 군비 조달로 인한 재정난의 증대는 재정의 악화를 가져왔다. 이 재정난을 해결하기 위해 그는 상인들의 교역을 적극적으로 장려했는데, 이슬람교도 출신 서역 상인들과 위구르인 상단 등 주로 색목인(色目人) 계통의 상인들의 중국 진출을 허용함과 동시에 이들 색목인 출신 신흥 관료를 발탁하여 활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만주에서 티베트, 중앙아시아까지 제국 각지에서의 잇단 반란과 그칠 줄 모르는 통치권 도전으로 시끄러웠다. 킵차크 칸국과의 전쟁에서 포로로 잡혔던 장남 친킴이 풀려나 돌아왔다. 그러나 쿠빌라이는 어떤 이유에서였는지 친킴을 북방으로 쫓아냈고, 친킴은 자신이 쫓겨난 것을 불쾌히 여겼다. 황후 차비가 1281년 3월 20일에 죽고, 1286년 1월 5일 장남 황태자 친킴이 알콜중독으로 병사하자, 그는 우울감고독에 시달렸다. 1283년 남필과 재혼하였다. 1285년에 일부 신하가 그가 친킴에게 양위하고 물러나야 된다는 발언을 했다가 그의 분노를 사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이 신하들을 처벌하지는 않았다. 베트남 정벌 실패와, 2회의 일본 원정 실패 역시 그에게 실의에 빠지게 했다. 그는 후처 남필비와 두 딸에게 정치 업무를 일임하고, 폭음과 폭식을 거듭했다.

만년의 쿠빌라이는 폭음과 폭식으로 인한 소화불량과 위장질환, 통풍, 우울증에 시달렸으며, 아리크 부케와 그의 잔당이던 두아 등 한국의 리더들의 반발과 반란에 봉착하는 가운데 1294년 2월 18일 대도 황궁 자단전(紫檀殿)에서 79세를 일기로 병사한다. 합리주의자이기도 했던 그는 중국의 사상에 매료되었는데, 주로 유교 사상 보다는 상앙이사의 법가 사상에 더욱 관심을 가졌으며 인재를 적재적소에 활용하는 용인술에 뛰어났다.

사후편집

시신은 현재의 몽골 켄티 주부르칸칼둔에 매장되었다. 원사에 의하면 기련곡(起輦谷)에 매장되었다고도 한다. 쿠빌라이의 사후, 1294년 5월 10일 손자 테무르가 상도에서 즉위, 그의 뒤를 이었다. 그러나 두아 등 서북의 카안들의 반란은 계속되고, 제국의 북방은 쿠빌라이 사후 한동안 혼란에 빠졌다. 반란을 일으킨 서북의 칸국들은 1303년 손자 테무르와 최종 협상, 형식적인 종주국의 지위를 회복했다.

여진족은 그를 호필내(呼必賚)라 불렀다. 청나라건륭 말년에 건륭제의 명으로, 사서에서 그의 명칭을 홀필렬에서 호필내로 개정되도록 했다. 이는 청나라 멸망 후 회복되었다.

작품편집

  • 일본에 보내는 친필 국서 (1264년)

가족관계편집

형제

후비편집

제1오르도
  • 첩고륜 대황후(帖古倫 大皇后) 옹기라트씨 - 쿠빌라이의 원비(元妃)
제2오르도
제3오르도
  • 탈랄해 황후(塔剌海 皇后)
  • 노한 황후(奴罕 皇后)
제4오르도
  • 오식진 황후 허올신씨(烏式眞 皇后 許兀愼氏)
그 외
  • 속가답사 황후(速哥答思 皇后)
  • 백요올진 황후(伯要兀眞 皇后)
  • 활활륜 황후(闊闊倫 皇后)
  • 알자사 황후(斡者思 皇后)
  • 욱실진 황후(旭失眞 皇后)
  • 타로별진 황후(朶魯別眞 皇侯)
  • 살불홀 비자(撒不忽 妃子)
  • 팔팔한 비자(八八罕 妃子)
  • 살불홀 비자(撒不忽 妃子)
  • 아속진 비자(阿速眞 妃子)
  • 올내홀내 비자(兀乃忽乃 妃子)

자녀편집

아들
  1. 도르지 황자(朶兒只 皇子) - 소예순성황후 소생. 요절함
  2. 명효태자(明孝太子) 진금(眞金) - 소예순성황후 소생. 원나라 제2대 황제 성종(成宗)의 아버지
  3. 진왕(秦王) 망갈라(忙哥剌, ? ~ 1280년) - 소예순성황후 소생.
  4. 북안귀정왕(北安歸定王) 노무간(那木罕, ? ~ 1292년) - 소예순성황후 소생.
  5. 운남왕(雲南王) 후게치(忽哥赤, ? ~ 1271년)
  6. 아야치 황자(愛牙赤 皇子)
  7. 서평왕(西平王) 오그룩치(奧魯赤, ? ~ 1303년)
  8. 영왕(寧王) 쿠쿠추(闊闊出, ? ~ 1313년)
  9. 진남왕(鎭南王) 토곤(脫歡, ? ~ 1301년)
  10. 쿠틀룩테무르 황자(忽都魯帖木兒 皇子)
  11. 테미치 황자(鐵滅赤 皇子) - 남필 황후 소생. 요절함
  1. 조국대장공주(趙國大長公主) 월렬(月烈) - 생모미상(生母未詳), 조무양왕 애불화(趙武襄王 愛不花)에게 하가(下嫁)
  2. 창국공주(昌國公主) 오로진(吾魯眞) - 생모미상(生母未詳), 패화(孛花)에게 하가(下嫁)
  3. 창국대장공주(昌國大長公主) 다륜(茶倫) - 생모미상(生母未詳), 첩감간(帖監干)에게 하가(下嫁)
  4. 노국장공주(魯國長公主) 완택(完擇) - 생모미상(生母未詳), 알라진(斡羅眞)에게 하가(下嫁)
  5.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 낭가진(囊家眞) - 생모미상(生母未詳), 알랄진(斡剌眞), 첩목아(帖木兒), 만자태(蠻子台)에게 하가(下嫁)
  6.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 홀도로게리미실(忽都魯揭里迷失) - 생모(生母)는 야속진 비자(阿速眞 妃子), 고려 충렬왕 왕거(高麗 忠烈王 王昛)에게 하가(下嫁)
  7. 공주(公主) - 남송 공제 조현(南宋 恭帝 趙㬎)에게 하가(下嫁)

족보편집

틀:족보-소형120

기년편집

쿠빌라이 칸이 등장한 작품편집

평가편집

몽골에서는 제국의 영토를 최대한 넓힌 영웅의 한사람으로 존경받는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애산 전투 직후 남송의 군사들과 귀족들을 학살, 남송을 잔인하게 멸망시킨 학살자로 기억된다. 그러나 탐원공정동북공정 이후에는 그를 중국사로 편입시키려는 시도가 있어서 그에 대한 중국내의 평가는 달라질 가능성도 존재한다.

한국에서는 1970년대까지 고려를 복속화시킨 침략자의 한사람으로 부정적인 시각이 주류였으나, 1990년대 이후 객관적인 입장에서 바라보려는 시각이 나타나고 있다.

참고편집

  • 고려
    • 고종(高宗, 1192~1259 재위:1213~1259)
    • 원종(元宗, 1219~1274 재위:1259~1274)

각주편집

  1. Weatherford, Jack. The Secret History of the Mongol Queens. p. 135.
  2. Man, John (2007). Kublai Khan: The Mongol King Who Remade China. London; New York: Bantam Press. ISBN 978-0-553-81718-8. 107pp
  3. 몽골에서는 1227년부터 독자적인 화폐를 발행, 유통시켰다.
  4. 차가타이의 둘째 아들이다.
  5. 이 셋을 소위 동방 3왕가라고 한다.
  6. 『元史』권13, 「[至元21年6月]甲寅, 詔封皇子脱歓為鎮南王、賜塗金銀印、駐鄂州」
  7. 『元史』 권13, 「[至元21年7月]戊子, 詔鎮南王脱歓征占城」
  8. 野口 1986, p302
  9. 『元史』권13, 「[至元21年12月]是月, 鎮南王軍至安南、殺其守兵, 分六道以進, 安南興道王以兵拒於万劫, 進撃敗之, 万戸倪閏戦死於劉村」
  10. 『元史』巻117, 「初、世祖第九子脱歓以討安南無成功、終身不許見、遂封鎮南王、出鎮揚州」

관련 항목편집

외부 링크편집

전임
뭉케 카안
제5대 몽골 제국 카안
1260년 ~ 1294년
후임
손자 테무르 울제이투 카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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