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실

대한민국의 배우 (1968–2008)

최진실(崔眞實, 1968년 12월 24일 ~ 2008년 10월 2일)은 대한민국배우이다.[1] 1990년대를 대표하는 배우로, 텔레비전에서는 김희애·채시라, 영화에서는 강수연·심혜진 등과 트로이카를 구축했으며, 광고계·방송계·영화계에 걸쳐 흥행의 측면에서 연예계 전체를 리드했다.[2]

최진실
출생1968년 12월 24일(1968-12-24)
대한민국의 기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사망2008년 10월 2일(2008-10-02)(39세)
대한민국의 기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서초구
(봉안묘지: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건지미길 5 갑산공원묘원 하늘재 소공원)
국적대한민국의 기 대한민국
직업배우
활동 기간1988년 ~ 2008년
종교개신교 (침례회)
부모최국현(부), 정옥숙(모)
친척연출가 최상현(종숙)
최재성(6촌 오빠)
형제자매최진영(동생)
배우자조성민 (2000년 결혼 ~ 2004년 이혼)
자녀최환희(아들)
최준희(딸)
수상춘사영화상 신인여우 (1990년)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신인여우 (1991년)
MBC 연기대상 여자 최우수상(1992년)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여우주연(1994년)
한국모델페스티벌 CF 부문 대상(1995년)
대종상 여우주연상(1995년)
SBS 여자 최우수연기상(1994년, 1995년)
MBC 연기대상 대상(1997년)
KBS 연기대상 여자 최우수연기상(2005년)
백상예술대상 TV부문 여자 최우수연기(2006년)
제3회 에이판 스타 어워즈 공로상(2014년)

김구라가 최진실을 살인교사로 모함하는 등 억울한 누명으로 자살했다.[3]

1988년 광고 모델로서 연예계에 데뷔하였고 이듬해인 1989년 MBC조선왕조 오백년 - 한중록》(1988년)에 출연하면서 배우의 길을 걷게 되었다. 20여 년 동안 밝은 이미지로 140여 편의 광고, 20여 편의 TV 드라마, 18편의 영화 등에서 주연 배우로서 왕성한 활동을 하였다.[4][1][5] 출연한 여러 작품의 성공으로 인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대중으로부터 오랫동안 널리 사랑을 받고 연기력 또한 인정받아 국민배우라고 일컬어지게 되었다.[6]

2000년대 대한민국은 세계 경제 포럼(WEF)이 조사하는 '세계 성 격차 지수(Global Gender Gap Index)'에서 하위권을 기록하는 국가로서 성 불평등 문제가 심각한 사회였는데, 최진실은 이런 사회 분위기 속에서 성차별을 불식시켜나가는 데 이바지한 바 있다는 평가가 있다. 부부 나이 차이 역전, 이혼유책주의(leverage) 활용(레버리지), 친권포기각서 수령, 자녀의 성·본 변경, 친권 자동부활금지 법안 제정 등과 관련하여 능동적인 여성상을 보여 주었고 아동 인권 수호에도 기여하였다. 이를 통해 가부장제 타파와 젠더권력 해체에도 이바지하였다.[7][8][9][10][11][12][1][13][14][15][16][17][18][19][20][21][22]

활발한 활동 중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 대한민국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고,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에 삶의 의미에 대한 큰 물음을 던졌으며, 심리적 부검을 통한 문제 해결에 대해 사회적 관심을 환기시켰다. 이렇게 심리적 부검의 중요성이 공유되면서 스스로 세상을 떠난 자에 대한 사회적 시선 교정에 실마리가 제공되었다. 최진실의 죽음은 대한민국의 정치·경제·사회·문화적 모순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계기가 되었다.[23][24][25][26][27][28][29][30][31][17][32][33][34][35]

최진실의 죽음허위사실유포행위와 관련하여 사회적 경각심을 불러일으켰고, 연예인의 사회적 위상을 바로잡는 데 영향을 주어 명예훼손행위에 대한 연예인의 소송 제기에 대해 당연한 권리 행사라는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되도록 하였다. 이로써 허위의 사실이 음지에서 흐지부지 처리되는 것이 아니라 공론의 장에서 투명하게 처리되는 물꼬가 트였다. 또 베르테르 효과에 의해 연예인 한 명이 700명의 생명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 언론에 대해 파파게노 효과를 촉구하는 목소리도 높아지는 계기가 되었다.[36][37][38][39][40][41][42][43][25][44][45][31][46][47][48][49][50][51]

성공한 연예인, 성공한 여성으로서 대한민국 사회의 빛과 그림자 모두를 겪었지만, 대한민국 사회의 모순에 눈감지 않고 배우로서 연예인과 여성의 인권 수호에 남달리 관심을 가졌다. 최진실의 삶에는 역사의식, 사회의식, 인권의식이 잘 드러나 있었다. 하지만 연예인과 여성에 대한 혐오가 만연한 대한민국 사회에서 연예계와 여성계를 방어하면서, '허위사실유포에 취약하여 고립되기 쉬운 연예인'이라는 특수한 위치, '부와 명예의 편중이 심한 연예계에서 연예인으로서 대(大)성공한 사람'이라는 특수한 위치, '사회적 소수자인 여성이지만 주류 사회에서 최고의 자리에 있던 사람'이라는 특수한 위치로 인해 최전선에서 고군분투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또 친족, 친구, 친지, 지인 등과의 신뢰 관계에도 균열을 가져오는 여론 조작이라는 위기가 발생했을 때에 대중과의 직접 소통을 지향하는 정면돌파를 택했다.[52][31][53][46][54][55][56][57][58]

학력 편집

경력 편집

    • 2006년 굿네이버스 친선대사
    • 2008년 경기국제보트쇼·코리아매치컵 세계요트대회 홍보대사
  • 연예매니지먼트 연혁
  1. 배병수[59]
  2. 박진희[60]
  3. 대박기획(대표이사 김정수)
  4. 스타즈(대표이사 김성훈)
  5. 플로라베이직(대표이사 이민자)[61]
  6. 드림엔터박스(대표이사 서상욱)

유년기 및 청소년기 편집

최진실은 1968년 12월 24일 아버지 최국현과 어머니 정옥숙 사이에서 태어났고 동생이 있다. 1968년 12월 24일 새벽 2시 55분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현저동 성신병원에서 태어났고 혈액형은 B형이며 돌출귀가 특징이다.[62] '진실'이라는 이름 때문에 친구들이 자주 놀려대 이름을 지어준 할아버지를 원망하기도 했으나 성인이 된 후에는 자신의 이름을 좋아하게 되었다. 1945년생인 어머니는 기독교인이었고 최진실 또한 교회를 다녔는데, 신앙심은 최진실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다.

다섯 살 때까지 서울특별시 은평구 구파발에 살다가 운수업을 하던 아버지를 따라 경기도 고양시 삼송리로 이사를 했고 초등학교는 삼송초등학교에 다녔다. 삼송리에서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 살다가 아버지가 사우디아라비아중동 근로자로 떠나면서 은평구 불광동으로 이사를 했고 초등학교도 서울불광초등학교로 전학했다. 서울에서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동생은 배우 최진영이다. 배우 최재성과는 6촌 관계이다. 최재성의 아버지이자 최진실과 5촌 관계인 최상현은 연극 배우 출신의 KBS 드라마 연출가였다.[63] 1936년생인 최국현은 KBS 탤런트 공채 시험에 합격하기도 했으나 경찰 공무원이었던 최진실의 할아버지의 반대에 부딪혀 배우의 꿈을 접었다.[64] 최진실은 정조의 의무 위반 행위, 폭력 행위, 아동 인권 침해 행위 등의 행태를 근거로 최국현이라는 인물에 대해 부정적 평가를 내렸다.

손위 이복형제가 있고[64], 정옥숙은 최국현에게 자식이 있다는 사실을 결혼 후에 알았다[65]. 1985년에 최국현이 가출을 한 후 최진실의 부모는 별거를 하였고 13년 후인 1998년에 정옥숙은 이혼을 하였다.[66]

최진실은 거울을 보며 연기하는 것을 즐겼고, 장기자랑을 할 기회가 있으면 노래를 부르는 대신에 드라마의 한 장면을 연기했으며, 배우 강수연을 동경했다.[67][68][64] 최진실은 동명여자중학교 출신이고 강수연은 동명여자고등학교 출신인데, 동명여자중학교와 동명여자고등학교는 한 울타리 안에 있다. 최진실이 동명여자중학교 2학년일 때, 강수연은 동명여자고등학교 1학년이었다. 강수연은 1969년부터 배우로서 활동하였다.

TV 드라마를 보고 나면 혼자서 울고 웃고 하면서 1인 5역 흉내를 내기도 하고, 초등학교 5학년 때는 가족들이 자는 동안 벽에 걸린 거울을 떼어 내려놓고 TV 드라마 흉내를 내다가 거울이 가족들 이마를 덮쳐 난리를 피운 적도 있었다.[69]

최진실과 최진영은 서로에게 좋은 연기 파트너였다. 둘은 KBS 탤런트 공채 시험에 합격하기도 했으나 6개월 과정의 연수비 38만 원을 마련하지 못해 연기자로서의 커리어를 바로 이어가지는 못했다. 이들은 희로애락을 함께 나누면서 일생동안 정신적으로 깊은 교감을 나누었다.[65]

학창시절에 예체능에 소질을 보였고[70], 특히 미술에 재능을 보여 미술대학 진학을 꿈꾸기도 했지만 가정형편이 어려워 포기했다. 수제비로 끼니를 때우는 일이 많았고, 집으로 놀러온 친구들에게 수제비를 만들어 주는 일이 많아서 친구들 사이에서 최진실은 ‘최수제비’라고 불리기도 하였다.[71] 최진실은 연예인이 된 후에도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해 음식을 만들어 주는 일을 즐겼다.[72][68]

일요일마다 도화지와 크레용을 들고 친구들과 함께 동네가 내려다 보이는 곳으로 그림 그리러 가는 것이 최진실에게는 가장 큰 즐거움이었다. 연기와 그림 모두에 흥미가 있었지만 배우가 되는 건 엄두를 내지 못했고 각종 미술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미술교사의 권유가 있어 화가의 꿈을 키웠다.

중학교 때 각종 미술대회에 나가 상을 타오자 미술교사는 최진실에게 미술대학에 가라고 권유하였고, 미술교사로부터 미술에 대한 딸의 재능을 전해들은 정옥숙은 어려운 경제적 상황 속에서도 고등학교 2학년때까지 미술학원에 다닐 수 있게 뒷바라지 해주었다. 하지만 화가의 꿈을 키워가면서도 '경제적 상황이 어려운데 꼭 미술을 해야 하는 건가'라는 갈등을 느꼈다.

1970년 택시 운전사였던 아버지가 결핵성 늑막염에 걸려 일을 할 수 없게 되고 소유하고 있던 택시도 팔면서 집안이 기울기 시작하였고 건강을 회복한 아버지가 중동 노동자로 나가 있는 동안에는 경제적으로 안정기를 겪다가 중동에서 돌아온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고등학교 2학년 때 가산이 급격히 기울면서 전업주부였던 어머니는 포장마차를 운영하는 등 본격적으로 생활 전선에 나서게 되며 최진실도 화가의 꿈을 접게 되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던 것은 신앙심, 맹목적인(버릇과 같은) '학교가기', 친구와 교사의 도움 덕분이었다. 생물 교사 이경훈은 자신의 봉급에서 최진실의 등록금을 내주기도 했다.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연예계 진출을 결심하였고, 연예계 진출 후 큰 성공을 거두었다. 국세청 통계상 1992년에 연예인 중 최고 소득자로 기록되었고, 같은 해 제29회 '저축의 날'에 '대통령 표창장'을 받았다. 연예인이 된 후 최진실은 자신이 경제적으로 궁핍한 환경에서 성장했다는 사실을 굳이 숨기지는 않았는데, 이것은 오히려 '최진실 신드롬'에 기여하였다.[73][74][75][76][77][23][78][79][80][81]

최진실은 자신이 어떤 과정을 거쳐 배우가 되었고 어떻게 연예계 생활을 하고 있는지 궁금해 하는 대중들을 위해 자신의 성장기와 생활에 관하여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고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시절도 숨김없이 털어놓았는데, 이에 대해 '부끄러움을 몰라서'가 아니라 '조금도 지나온 일을 미화시켜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서'라고 설명했다.

청년기 이후 편집

활동 개요 편집

  • 고등학교 졸업 후, 동생인 배우 최진영의 지원으로 광고계에 발을 디디게 되었다. 최진영은 고등학교 시절부터 모델로 활동하고 있었다. 최진실이 연예계 진출에 대한 뜻을 나타냈을 때, 최진영은 처음에 그것에 대해 반대의 뜻을 표했으나 나중에는 최진실의 뜻을 존중하여 최진실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게 되었다.[82]
  • 1988년 - 4월에 최진영이 계약을 맺고 있던 모델 에이전시를 통해 광고 모델로서 연예계에 데뷔하였다.[83] 이후 한국화장품의 신제품 '센시티브' 광고에 보조 출연자로 섭외되었다. 이 CF는 한국화장품 전속 모델이었던 배우 김희애가 메인 모델이었는데, 최진실은 촬영 과정에서 김희애와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의 존재감을 드러내면서 메인 모델로 격상되었다. 이 CF가 텔레비전을 통해 방송되면서 광고계에서는 최진실에 대한 관심이 크게 일었고, 이 CF의 감독이었던 박경삼의 추천으로 삼성전자 전속 모델이 되었다. 박경삼은 최진실에 대해 "나는 직업적으로 최진실을 보는 순간 그가 배우로서 성공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았다. 그것은 아마도 연출가에게만 있는 직감이 아닐까……"라고 말했다.[84][85] 삼성전자 VCR 광고에서 최진실이 선보인 "남자는 여자하기 나름이에요"라는 대사가 크게 유행하면서 최진실은 대중으로부터 많은 주목을 받았다. 이 대사의 목소리는 성우 권희덕이 맡았다.[86][87][88] 11월부터 1년간 삼성전자와 전속 모델 계약을 맺었고 전속 계약금은 2천만 원이었다. 그 계약이 만료되고 나서 다시 1년간 삼성전자와 전속 모델 재계약을 맺었고 전속 계약금은 4천만 원이었다. 이렇게 광고 모델 계약금이 2배 상승한 것은 이례적인 것이었다. 삼성전자 전속 모델이 된 후 최진실은 VCR 광고에서 좋은 반응을 얻은 것을 계기로 냉장고, 카메라, 진공 청소기, 전자레인지, 포터블 미디어 플레이어 등 삼성전자에서 나오는 모든 가전제품의 CF를 촬영했다. 최진실을 광고 모델로 기용한 후 삼성전자는 경쟁업체를 제치고 가전제품 판매 1위를 차지하였다.[89][90][91]
  • 1989년 - 2월에 MBC의 특채 배우로 발탁되어, 이미 방영 중이던 MBC 《조선왕조 오백년 - 한중록》(1988년)에 중간 합류하면서 텔레비전 드라마에 데뷔하게 되었다. CF로 얼굴이 알려지자 방송 프로그램에 게스트로 출연할 기회도 얻게 되었는데, 어느 날 MBC 《일요일 일요일 밤에》(1981년)의 <미주알 고주알> 코너에 출연하려고 출연자 대기실에서 녹화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고 이 때 《한중록》의 조연출가의 눈에 띄어 신인 배우를 찾고 있던 《한중록》의 연출가 이병훈을 만나게 되었으며 이병훈으로부터 가능성을 인정받아 연기자의 길에 들어서게 된 것이다.[92][93] MBC 《일요일 일요일 밤에》에 출연할 때 방송사에서 매니저 배병수도 처음 만났고 배병수의 도움으로 영화 《남부군》(1990년)을 준비하던 감독 정지영도 만나게 되었다.[94][95] 4월에 MBC 베스트셀러극장시진읍》에 출연하여 벙어리 역을 맡았는데, 《시진읍》은 지역감정을 소재로 한 드라마로서 최진실의 TV 드라마 첫 주연작이었다.[96][97] 활동 영역을 광고계에서 방송계, 영화계 등으로 넓히면서 촬영 스케줄이 겹치지 않게 활동 시간표를 짜는 일이 큰 일이 되었고, 이런 상황 속에서 배병수와 계약을 맺었다.[90][98]
  • 1990년 - 1월에 뮤지컬 드라마 MBC 《각시방에 사랑 열렸네》에 출연하였다.[99][98] 5월에 청소년 드라마 MBC 《두 권의 일기》에 출연하여 고등학생 역을 맡았는데, 이 드라마에서 최진실과 배우 고두심은 딸과 어머니로서 만났다. 영화 《남부군》으로 영화계에 데뷔하였다. 영화 《꼭지딴》에 출연하여 기자 혜지 역을 맡았고, 이 캐릭터는 대한민국 최초의 여전사라는 평가가 있다.[100][101][102] 영화 《나의 사랑 나의 신부》에 출연하여 배우 박중훈과 호흡을 맞췄고 이 영화를 통해 영화 배우로서 입지를 다지게 되었다. 영화사적으로 새로운 영화 문법을 제시한 《나의 사랑 나의 신부》는 서울에서 관객 20만 명 이상이 들어 흥행에 성공하였다.[103][104][105][106] 연예인들은 통상 방송사에 딸린 분장실을 이용하던 관행을 깨고 최초로 개인 분장사를 대동하고 MBC를 출입하여 방송사에 파란을 일으켰다.[107][108]
  • 1991년 - 영화 《있잖아요 비밀이예요 2》는 1980년대 교복 자율화 세대를 다룬 하이틴 영화인데, 최진실과 최진영이 친구로 함께 출연하여 화제가 되었다.[109] 영화 《수잔 브링크의 아리랑》에서 입양아 수잔 브링크 역을 맡았다. 이 영화는 실존 인물을 영화화해서 화제가 되었고, 대한민국 사회에 국외 입양 문제를 환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수잔 브링크는 스웨덴에서 산전수전을 겪은 끝에 종교학자가 되는 인물이다.[110][111] 11월에 휴먼 다큐멘터리 MBC 《인간시대 - 최진실의 진실》에 출연하였다. 연예인이 《인간시대》에 출연한 것은 배우 안성기에 이어 두 번째였다. 최진실은 'CF를 통해 운 좋게 인기를 얻은 벼락 스타'의 이미지가 강했는데, 《인간시대》는 최진실의 실체는 무엇이고 그의 애환은 무엇인가를 응시하고자 하였고, 최진실은 처음에는 왜 자신을 《인간시대》에서 다루고자 하는지 궁금해 했으나 곧 대본도 연기 주문도 없는 《인간시대》를 매우 편하게 여겼고, 제작진에 '본 대로 느낀 대로' 자신을 말해 달라고 주문했다.[112][113][114] 11월에는 영화 《숲속의 방》을 촬영하고 있었는데, 이 영화에서 자신이 맡은 배역의 캐릭터를 연구하기 위해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하고 학생운동가이기도 했던 다섯 살 연상의 막내 이모 정현숙과 함께 이모 모교 대학 캠퍼스를 둘러보고 얘기를 나누며 이모로부터 조언을 구하였다.[115][116] 이는 MBC 《인간시대 - 최진실의 진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12월에 청룡영화상 시상식에서 최진실은 《수잔 브링크의 아리랑》으로 '여우 주연상'에 노미네이트되었고 '인기 스타상'을 수상했으며, 최진영은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로 '신인 남우상'을 받아 이들은 최초의 남매 수상자가 되었다.
  • 1992년 - 1월에 영화 《숲속의 방》이 개봉되었는데, 이 영화에서 학생 운동과 현실 타협 사이에서 방황하며 삶의 진실을 찾아 헤매는 대학생 소양 역을 맡았다.[117][118] 1월에는 MBC 《약속》에 출연하여 교사 정인 역을 맡았고, 이 드라마는 최고 41.5%의 시청률을 기록하였다. 3월에 MBC 라디오0시의 데이트》의 진행자가 되었다.[119] 6월에 MBC 《질투》에 출연하여 배우 최수종과 호흡을 맞췄고 이 드라마를 통해 청춘스타로서 입지를 다지게 되었다. 10월에 연예인으로서 처음으로 KBO 리그 한국시리즈에서 시구를 하였다.[120] 10월에는 한국방송광고공사에서 실시한 '광고 모델 선호도'에 관한 여론조사에서 최진실은 52%를 기록하여 1위를 차지하였고, 13%를 기록한 유인촌은 남자 광고 모델 중 1위를 차지하였다.[121] 10월에는 저축유공자로서 노태우 대통령이 마련한 청와대 오찬에 초청도 받았다.[122] 12월에 주간 방송정보지 'TV 저널'이 제정한 제1회 '올해의 스타상'을 수상하였다.[123]
  • 1993년 - 영화 《사랑하고 싶은 여자 & 결혼하고 싶은 여자》에서 영어 번역가이자 추리소설 작가 지망생 유라 역을 맡았다. 10월에 토크 쇼 MBC 《김한길과 사람들》에 대중문화계에서 영향력을 발휘하는 인물로서 초대되어 개인적 차원의 이야기를 뛰어넘어 대중문화에 대한 현대인들의 취향까지를 논하는 자리를 가졌다.[124][125] 11월에 토크 쇼 KBS심야에의 초대》에 출연하였는데, 이 자리에서 가수 변진섭과 결혼을 전제로 교제하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공개적으로 밝혔다.[126][127] 연예인의 경우 이성교제 사실을 공개하는 사회 분위기가 아니어서 이는 다소 파격적인 행보였다. 작품 출연과 관련한 계약을 할 때 이성교제 문제나 결혼 문제가 계약서에 언급될 만큼 연예계 내부도 다소 경직된 분위기였다.[128] 연말에 5년 동안 자신의 매니저로서 계약을 맺었던 배병수와 계약 해지하였다.[129]
  • 1994년 - 2월에 영화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에서 심리학자이자 여성운동가 강민주 역을 맡았고, 출연료를 영화 제작비로 재투자하였는데, 배우가 출연료를 영화 제작비로 재투자한 경우는 배우 문성근에 이어 두 번째였다.[130][19] 2월에는 SBS와 배우로서 최고 출연료를 받기로 계약했는데, 60분짜리 100회 출연에 1회당 300만 원을 받기로 했고 이는 그 전에 MBC에서 받던 액수보다 4배 이상 높은 금액이었다. 2월에는 최진실과 최진실의 6촌 오빠 최재성이 4월에 SBS에서 방영 예정인 드라마에서 연인으로 물망에 오르기도 하였다.[131][132] 4월에 SBS 《사랑의 향기》에 출연하면서 만화가 영진 역을 맡았고 배우 이병헌과 연인으로 호흡을 맞췄다.[133][134][135][136] 8월에 금융실명제 홍보 모델로서 금융실명제 정착에 기여한 공로가 인정돼 김영삼 대통령이 마련한 청와대 오찬에 초청을 받았다.[137][138][139] 11월에 서울특별시청은 1394년에 서울을 수도로 정한 후 600년이 되는 해를 기념하기 위해서 400년 뒤인 2394년에 개봉하기로 하고 남산 '한옥마을'에 타임캡슐을 묻었는데, 서울 시민 최진실의 인터뷰도 이 타임캡슐에 담겼다.[140][141] 12월에 영화 《마누라 죽이기》에 출연하여 영화제작자 차소영 역을 맡았다. 12월에는 대한민국 연예계 '전문 매니저' 1세대였던, 전(前) 매니저 배병수가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142][143][144][87] 연말에 MBC 《신(新)인간시대》에서 신년 특집으로 '앞서가는 한국인 50인'이라는 제목으로 분야 별 스타를 조명하게 되었는데, 여론조사를 통해 선정한 이 '앞서가는 한국인 50인'에서 최진실은 여자 연기자 부문 1위를, 안성기는 남자 연기자 부문 1위를 차지했다.[112]
  • 1995년 - 1월에 제1회 '한국 모델 페스티벌'에서 CF 부문 대상을 수상하였다.[145] 5월에 '배병수 살해사건'의 증인으로 법정에 섰는데, 그 과정에서 이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거짓 소문에 시달렸다.[146] 6월에 KBS 《체험 삶의 현장》에 출연하였는데, 갯벌에서 조개 잡는 일을 하여 일당을 벌었다.[147] 5월에 SBS아스팔트 사나이》에서 자동차 디자이너 오화련 역을, 9월에 SBS 《째즈》에서 르포 작가 채송화 역을, 10월에 MBC 《아파트》에서 '신데렐라 콤플렉스'의 소유자 차나리 역을 맡았다.[148] 교통사고를 당하면서 첫 회 방송을 보름쯤 앞두고 《아파트》 출연을 포기하였다가 제작진의 설득으로 다시 출연을 결정하였는데, 이 드라마는 라이벌적 포지션에 있던 배우 채시라와 공동 주연을 맡아 화제가 되었다.[149] 10월에는 PC 통신 연예인 합성 누드 사진 최초 피해자로 언급되었다.[150] 11월에 영화 《마누라 죽이기》로 대종상 영화제에서 '여우 주연상'을 받았다. 변진섭과 결별했다. 13년 후 변진섭은 《사랑이 올까요》라는 곡으로 MBC 《내 생애 마지막 스캔들》(2008년) OST에 참여하였는데, 이 드라마가 인기를 끌면서 이 곡도 많은 사랑을 받았다.[151][152] 중앙대학교 예술전문대학원 공연예술학부 영화학과 지도자 코스에 진학했다. 영화 공부, 영어 공부에 몰두했다.
  • 1996년 - 2월에 KBS 《TV는 사랑을 싣고》에 출연하였는데, 제작진의 도움으로 어린 시절 친구였던 안원형과 만났다. 안원형과는 같은 집에 세 들어 살면서 친하게 지낸 사이였다. 최진실이 출연한 방송은 2002년 5월 12일 4백 회 특집에서 '감동적인 만남 BEST5'에 들기도 하였다.[153][154] 3월에 신한국당 광고 모델이 되었는데, 연예인이 정당의 광고 모델이 된 것은 대한민국 정당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신한국당은 1995년 12월에 창당한 정당으로서 군사정권 이미지에서 탈피하고자 민주자유당이라는 당명을 버리고 만든 당이었다. 신한국당은 "기존 정당에 대한 딱딱한 대(對)국민 이미지를 해소하고 국민들에게 보다 친근하게 다가서는 모습을 보이기 위해 최진실 씨를 신문 광고 모델로 선정했다. 20대부터 60대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유권자에게 인기있는 최진실 씨의 모델 기용은 정당 홍보의 새로운 방식으로 신한국당 이미지 고양에 도움이 될 것이다. 이제 개혁 시대에 국민들에게 친근한 모습을 보이고 과거 권위주의 시대 정치에서 탈피하기 위해 이같은 광고를 결정했다. 최진실 씨의 인기에 누가 되지 않도록 우리 당도 최선을 다하겠다"라고 말했고 최진실은 "연예인 광고 모델로서 신한국당과 인연을 맺은 것일 뿐이며 신한국당에 입당할 생각은 없다"라고 말했다.[155][156] 10월에 SBS 《째즈》(1995년) 등이 중화인민공화국, 중화민국, 싱가포르아시아지역 중화권 시청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홍콩 스타 TV <중국어 채널>을 통해 방영되었고, 해당 드라마들은 현지에서 좋은 반응을 얻었으며, 최진실은 이를 계기로 삼아 국외로 활동 영역을 넓히는 것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2000년 7월 최진실은 국외 활동의 의미에 대해 민간 외교관의 역할이라는 철학을 피력한 바 있다.[157][135]
  • 1997년 - 1월에 최진실은 PC통신 이용자 3백 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자신의 야망을 성취한 연예인'에 관한 여론조사에서 1위를 차지하였는데, 정치인 1위는 김영삼, 경제인 1위는 정주영, 스포츠인 1위는 박찬호였다.[158] 3월에 최진실을 두고 SBS와 MBC 간에 치열한 '쟁탈전'이 벌어졌다.[159] 최진실은 우여곡절 끝에 MBC에 안착했다. 10월에 MBC 《그대 그리고 나》에서 사적으로는 가정을 잘 꾸려가면서 공적으로는 직업적인 성취를 이루고 싶은 여성 윤수경 역을 맡았다. 이 드라마는 최고 66.9%의 시청률을 기록하였다.[160] 10월에는 삼성경제연구소가 '한국 영화 스타의 스타 파워 분석' 보고서를 냈는데, 최진실은 배우 최민수와 함께 관객동원력이 가장 뛰어난 영화 배우로 꼽혔다.[161] 12월에 MBC 연기대상 시상식에서 '대상'을 받았다. 영화 《편지》에서 국문학과 대학원생 정인 역을 맡았다. 이 영화는 1998년 청룡영화상 시상식에서 '한국영화 최다 관객상'을 받았다. 경강역은 이 영화의 촬영지로 사용되면서 명소가 되었고, 황동규의 시 《즐거운 편지》는 이 영화에 삽입되면서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 영화는 태국에서 《The Letter》(2004년)라는 제목으로 리메이크되었다. 연예계 데뷔 이후 배우로서 영화계, 방송계, 광고계 등을 오가며 왕성한 활동을 하면서 일약 국민배우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12월에는 코미디언 이경규와 함께 제15대 대통령 당선인 김대중을 인터뷰 하러 자택을 방문하기도 했다.[162][163]
  • 1998년 - 3월에 한국통신에서 최진실을 모델로 한 경제 위기 극복 캠페인용 공중전화 카드가 나왔다.[164][165] 6월에 MBC 《추억》에서 광고회사 직원 서인영 역을 맡았다. 7월에 일본에서 가장 선호하는 한국 배우로 뽑힌 상황에서 일본어를 공부하며 일본 진출 뜻을 피력했다. 8월에 한국 갤럽 여론조사에서 대한민국 건국 이래 배우 부문에서 최고 인기 연예인으로 뽑혔다.[166] 8월에는 김대중 대통령을 비롯한 여러 유명 연예인, 체육인, 문학인 등과 함께 국가 홍보 CF에 출연했다.[167] 12월에 최진실은 KBS행복 채널》에 출연하였는데, 이는 일본 프로 야구 요미우리 자이언츠 소속 야구 선수 조성민이 최진실의 팬이라는 사실을 안 제작진이, 우상과 팬으로서 만남의 자리를 마련한 것이었다.[168] 12월 30일에 자신의 집 엘리베이터 안에서 괴한에 의해 납치될 뻔한 사건을 겪었다.[169][170][171] 최진실은 1994년 5월에도 납치될 뻔한 사건을 겪었고 연예인이 된 후 스토킹도 자주 겪었었다.[172]
  • 1999년 - 대한민국 연예인 최초로 일본 광고계에 진출하였는데, (주)전일본식품사와 1년 전속 모델 계약을 맺었다.[173] KBS 《슈퍼 TV 일요일은 즐거워》의 코너 중 하나인 《출발 드림팀》에서 최진실, 배우 김희선, 코미디언 이영자, 모델 이소라, 배우 엄정화 등이 1기 여성 드림팀을 결성하여 일반인 팀과 운동경기를 벌였다. 이 여성 드림팀은 초호화 캐스팅으로 화제가 되었고, 《출발 드림팀》은 전국에 운동 열풍을 일으켰다.[174] 영화 《마요네즈》에서 대필작가 아정 역을 맡았다. 이 영화는 제5회 케랄라 국제 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하였다. 케랄라 국제 영화제뉴델리 국제 영화제와 함께 인도에서 가장 규모가 큰 영화제이고, 한국 영화가 국제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한 것은 이것이 여섯 번째였다.[175][176][177] MBC 《별은 내 가슴에》(1997년)가 중화인민공화국으로 수출되어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이후 이 드라마는 '최초의 한류 드라마'로 평가받았다.[178][179] 11월에 최진영은 1집 앨범 《Final Fantasy》를 발매하면서 가수로 데뷔하였는데, 최진실은 최진영의 가수 활동을 측면에서 지원하였고 최진영은 이듬해인 2000년에 SBS 가요대전에서 부문에서 수상하고 대한민국영상음반대상에서 신인가수상을 탔다.[180] 12월에 MBC는 20세기 한국 현대사를 인물로 조망하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하였는데, 역사 또는 사회 전반에 큰 영향력을 미치거나 새로운 물꼬를 트기 위해 노력했던 최진실을 포함한 60명의 인물들을 소개하였다.[181] 12월에는 MBC 《일요일 일요일 밤에》(1981년)에서 서울 시민 1000명을 대상으로 연예계 각 분야 '20세기 최고의 스타' 여론조사를 하였는데, 최진실은 '텔레비전 배우 분야' 20세기 최고의 스타로 선정되었다.[182]
  • 2001년 - 4월에 유가공업체 남양유업으로부터 광고 모델로서 섭외되었으나 모델료와 관련하여 소비자 항의가 거센 상황을 겪으면서 광고 계약을 거절하였다. 소비자들은 남양유업에 '고액 광고 모델료를 지급하는 대신 분유 가격을 인하하라'고 요구했었다. 최진실은 "100원도 절약하며 사는 주부들 처지에선 당연히 화날 만한 사안이었다. 이 때문에 남양유업도 아주 곤란한 처지에 빠졌을 것이다. 주부들을 이해하기에 나 스스로 물러나기로 했다"라고 광고 계약 거절 이유를 설명했다. 이 일과 관련하여 인터넷에 '안티 최진실' 웹사이트가 개설되고 '안티 남양' 웹사이트도 개설되는 등 후유증을 겪었다. 이 일은 인터넷의 발달과 함께 대중의 힘도 성장했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가 되었고, 이 일이 언론의 오보에서 시작되었기에 언론의 옐로 저널리즘이 지적되기도 하였다.[205][206][207][208][209][210][211][212] 7월에 광고 모델로서 삼성전자와 계약을 맺었다.[213][214][215] 8월에 아들을 출산하였다.
  • 2002년 - 1월에 최진영과 함께 토크 쇼 KBS 《서세원 쇼》에 출연하였는데, 《서세원 쇼》는 최진실의 출연에 힘입어 28.0%의 시청률을 기록하였고 이는 3주간 평균 시청률 18.6%를 크게 상회하는 수치였다.[216] 4월에 MBC 《그대를 알고부터》에 출연하면서 배우로서 활동을 재개하였다. 이 드라마에서 중국 교포 이옥화 역을 맡았는데, 연변 사투리를 구사해야 해서 친구인 코미디언 정선희의 도움을 받았다. 이옥화는 중국에서 대학을 졸업한 후 대한민국 무역 회사에서 근무하는 커리어 우먼으로, 중국은 대한민국보다 성평등이 더 잘 이루어지는 사회였고 그런 사회에서 성장한 이옥화는 대한민국에서 생활하면서 성 차별적 사회분위기에 반란을 일으키는 캐릭터였다. 이 드라마는 TV 드라마와 영화를 통해 여러 번 호흡을 맞췄던 배우 김혜자와 함께 출연하여 화제가 되었다. 최진실과 김혜자는 MBC 《당신의 축배》(1989년), MBC 《그대 그리고 나》(1997년), 영화 《마요네즈》(1999년) 등에서 딸과 어머니로, MBC 《장미와 콩나물》(1999년)에서 며느리와 시어머니로 함께 출연했는데, 《그대를 알고부터》에서는 남남인 관계이지만 최진실이 김혜자의 집에 기거하는 설정이었다.[217][218][219] 6월에 유아복업체 <아비또>의 기획홍보 이사직을 맡았고 상품 기획을 총괄하였다. <아비또>가 최진실과 공동 투자하여 내놓은 브랜드 '미아오'는 고양이 울음소리에서 영감을 얻은 것으로 최진실이 직접 작명한 것이었다.[220] 6월에는 인터넷상에서 유포되는 명예훼손 피해도 겪었다.[221][222][223][224][225][226]7월에 《그대를 알고부터》 야외 촬영 중 탈진하여 병원에 입원했고 최준희의 잉태를 인지했다.[227][228] 9월에도 과로로 탈진하여 병원에 입원했다.[229][230][231] 10월에 임신 6개월이었고 《그대를 알고부터》 마지막회가 방송되었다.[232][233][234] 11월에 8년간 여러 언론사에 '섭섭한 게 있다'는 모호한 표현이 담긴 편지만을 보내던 배병수 살해범 전용철이 교도소 내 인터뷰를 통해 기자들에게 실명을 거론하며 그 섭섭함의 실체를 이야기했고 그 실명은 익명 처리된 채 해당 내용이 기사화되었으며 무기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던 전용철은 이 문제로 검찰 소환 조사를 받았는데, 달라진 사실관계는 없었다.[235][236][237][238][239][240][241][242][45][243][244][245] 12월 18일 오후 2시에 조성민은 최진실을 대상으로 여론 조작을 했다. 이 여론 조작의 내용은 최진실이 유책배우자라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최진실은 이혼할 의사가 없다는 뜻을 공개적으로 표현함으로써 기존 입장을 견지하며 이 여론 조작을 제압했다.[246][247][248][249][250][251][252][253][254][255][256][257]
  • 2003년 - 3월에 딸을 출산하였다.[258][259][260][261][262][263][241][242] 영화 오디션 심사위원으로 활동했다.[264] 10월 23일에 조성민은 또 최진실을 대상으로 여론 조작을 했다. 이 여론 조작의 내용 또한 최진실이 유책배우자라는 것이었다. 12월 15일 오후 9시에 최진실은 배우 활동 재개와 관련하여 기자회견을 열었다.[265] 이 기자회견에서 최진실은 이혼할 의사가 없다는 뜻을 표현함으로써 기존 입장을 견지하며 이 여론 조작을 제압했다.[266][267][268][269][270][271]
  • 2004년 - 3월에 MBC 《장미의 전쟁》에 출연하면서 배우로서 활동을 재개하였다.[272][273] 이 드라마에서 산부인과 의사 오미연 역을 맡았다. 이 드라마는 한국 트렌디 드라마의 효시인 MBC 《질투》(1992년)에 주인공들로 출연하여 함께 많은 사랑을 받았던 최진실과 최수종이 12년 후 다시 호흡을 맞추는 것이면서 두 드라마 사이에 내용의 연계성이 있도록 일부러 연출을 하여 많은 관심을 받았다.[274][275][276] 3월에는 또 아파트 광고 모델로서 신한과 계약을 맺었다.[277][278][263][279][280][281][282][283][284][285][286] 6월에 싸이월드 '미니홈피'를 개설했다.[287] 8월 1일에 조성민은 또 최진실을 대상으로 여론 조작을 했다. 이 여론 조작의 내용 또한 최진실이 유책배우자라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최진실은 이혼할 의사가 없다는 뜻을 공개적으로 표현함으로써 기존 입장을 견지하며 이 여론 조작을 제압했다.[270][271] 9월에 이혼 결정권을 행사했다.[87][288][289][290][291][292] 2002년부터 2004년까지 거짓 소문에 시달렸다.[293][65][68][294] 햇수로 3년 동안 자식들의 발달단계를 고려한 언행과 유책배우자라는 모함을 처리하는 언행을 동시에 수행하는 '투트랙 전략'을 출구전략으로 삼았다. 즉 자식들의 존엄성수호하는 일, 여론 조작을 제압하는 일, 자식들의 생부의 실체를 규명하는 일, 비혼자로 복귀하는 일 등을 동시에 추구해 나갔다.[295][296][297][298] 최진실이 유책배우자라는 주장은 입증된 바 없다.[299] 이 모든 과정을 대중이 직접 목격하게 함으로써 시시비비를 투명하게 규명하였다. 최진실은 헤게모니를 쥐고 배우로서, 친권자로서, 피해자로서 정도의 길을 걸었다. 이를 통해 완벽한 수비에 성공했고, 자신을 붕괴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던 혐오(hate speech) 세력들의 여론 조작을 제압했다.[300][45][301][302][303][304][305][306]
  • 2005년 - 5월에 미국 화장품업체 3LAB과 광고 모델로서 계약을 맺었고 미국에서 광고 촬영을 하였다. 3LAB은 아시아 시장의 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해 '한류 스타'의 원조급인 최진실과 계약을 맺었다.[307][308][309][310] 8월에 KBS 《장밋빛 인생》에 출연하여 위암 말기 진단을 받은 전업주부 맹순이 역을 맡았고, 이 드라마는 최고 47%의 시청률을 기록하였다.[311][312][68][313][314] 11월에 《장미빛 인생》의 성공으로 최진실과 매니지먼트 계약을 체결하기 위한 연예 기획사들의 치열한 경쟁이 이루어졌고 이에 제시하는 계약금이 10억 원대에 이르렀다.[315] 12월에 한국갤럽에서 전국의 만 20세 이상 성인 남녀 1502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2005년을 빛낸 배우(TV)'에 관한 여론조사에서 최진실은 18.2%를 기록하여 1위를 차지하였고, 4.2%를 기록한 정지훈은 남자 배우 중 1위를 차지하였다.[316][317] 연말에 KBS 연기대상 시상식에서 '여자 최우수 연기상'과 '네티즌상'을 받았다. 인터넷상에서 악성 루머와 악성 댓글에 시달렸던 최진실에게 이 '네티즌상'은 의미가 큰 것이었다.[318][50] 한편, MBC 전속 연기자였던 최진실은 MBC 사장 최문순의 배려로 KBS 드라마에 출연할 수 있었다.[319][320][321] 이와 더불어 KBS 사장 정연주는 최진실의 매니저를 자청하기도 했다.[322]
  • 2007년 - 1월에 MBC 일일 드라마 《나쁜여자 착한여자》에 전업주부 이세영 역으로 출연하여 시청률 견인에 성공하였다. MBC 일일 드라마를 20% 중후반의 시청률로 끌어올렸는데, 이 드라마는 최고 29.6%의 시청률을 기록하였다.[326][327][328][329][330][331][332][333][334][335][336][337][338][339] 1월에는 광고 모델로서 제약업체 일동제약과 냉난방업체 캐리어 등과 계약도 맺었는데, 해당 업계에서 최고의 대우를 받았다.[340][341][342] 7월에 최환희와 최준희를 《나쁜여자 착한여자》 촬영 현장에 방문하도록 하여 두 아동에게 견학의 기회를 제공했다.[343] 12월에 《나쁜여자 착한여자》로 MBC 연기대상 시상식에서 '여자 최우수상'과 '대상'에 노미네이트되었다.[344][345]
  • 2008년 - 3월에 MBC 《내 생애 마지막 스캔들》에 출연하여 가정관리사 홍선희 역을 맡았고 배우 정준호와 호흡을 맞췄다.[346] '줌마렐라 신드롬'을 일으키면서 《내 생애 마지막 스캔들 시즌2》 제작이 확정되었다.[347][88][348] 이 드라마에는 최진실의 친구로 실제 친구이기도 한 이영자가 출연했는데 이영자의 대사 중 "남자는 여자하기 나름이에요"를 언급하는 장면이 나오고, MBC 《질투》(1992년)의 마지막 장면이자 당시 인구에 회자되었던 카메라 360도 회전 장면을 패러디한 장면이 나오기도 하였으며, 최진실이 20대 시절에 찍었던 '가나초콜릿' 광고를 패러디한 '아나초콜릿' 광고 장면이 나오기도 하여 재미를 더하였다.[349] 3월에는 토크 쇼 OBS최진실의 진실과 구라》의 진행자로도 발탁되면서 진행자로서 회당 출연료로 그 분야에서 최고의 대우를 받았는데, 방송인 유재석을 능가하는 대우여서 화제가 되었다.[350][351][352][353][354] 이 토크 쇼는 방송인 김구라와 함께 진행을 맡았다.[355][356] 《최진실의 진실과 구라 시즌2》 제작이 기획되었다.[357][358] 7월에 데뷔 이래 처음으로 시사 프로그램에 출연했다. 최진실은 MBC 《시사매거진 2580》과 인터뷰를 가졌는데, 제작진은 데뷔 20주년을 맞는 최진실을 통해 한국 드라마의 흐름을 짚는 시간을 가졌다. 최진실은 인터뷰에서 배우로서의 삶과 비혼자로서의 삶 그리고 연예인들의 사회적 이슈에 대한 발언 등에 대해 자신의 소신을 밝혔다.[359][360] 11월에 청룡영화상 시상식에서 '명예 인기 스타상'을 받았다.[361] 12월에 MBC 연기대상 시상식에서 '여자 최우수상'과 '대상'에 노미네이트되었고 '공로상'을 받았다.[362][363][364] 12월에는 서울대학교 소비트렌드분석센터의 2009년 소비트렌드 예측서 《트렌드 코리아 2009》가 발간되었는데, 이 책에서 '줌마렐라 신드롬'은 2008년을 특징짓는 문화현상 중 하나로 언급되었다.[365]

국외 진출 편집

사망 편집

최진실은 만으로 39세, 세는나이로 41세에 세상을 떠났다.

평가 편집

최진실은 1990년대를 관통하면서 광고계, 영화계, 방송계 등에서 자신만의 독자적인 영역을 만들었다. 최진실은 밝고 명랑한 이미지 속에 슬픔과 발랄함이라는 상반되는 특성을 담고서 대중에 어필하였다.[377][378][294][379] 칼럼니스트 박진규는 '최진실은 귀여운 척이 아닌 생활 연기 속에 묻어나는 자연스러운 귀여움이 강점이었다. 물론 그 귀여움 때문에 다른 감정 연기에도 탁월했던 그의 연기가 묻히기도 했다. 하지만 그 친근한 귀여움이 패셔너블한 여성 배우, 연기 잘 하는 여성 배우가 넘쳤던 1990년대에 최진실을 가장 돋보이게 만든 무기였다'라는 평을 내놓기도 하였다.[380][381]

1988년에 출연한 삼성전자 광고의 성공으로 최진실은 광고 모델과 배우의 관계를 뒤집어 놓았다. 광고 모델은 배우가 드라마의 성공을 통해 높은 인지도를 얻은 후에 부업 거리로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최진실은 광고를 통해 배우가 드라마의 성공을 통해 얻는 인지도 못지않은 인지도를 얻게 되었고, 광고계도 배우의 당당한 무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최진실의 이런 성취는 1988년 하계 올림픽 전후로 대한민국의 정치·경제·사회·문화적 상황이 급변한 것과 궤를 같이 하는 것이었다.[382] 이후 1989년에는 여러 편의 텔레비전 드라마에 조연 등으로 출연하여 배우로서의 삶을 단련시켜 나갔다. 최진실은 30초짜리 드라마인 광고에도 그 시대의 정신을 담아내는 미학이 있고 기본적으로 행해지는 영상예술, 심리학을 차용한 마케팅 기술과 이미지 메이킹, 현란한 카피와 대사에 이르기까지 예술 활동의 집약이 이루어진다고 보았다.[383][384] SBS아스팔트 사나이》(1995년)에 출연할 무렵에 <CyberTimes.TV>와의 인터뷰에서 배우로서 광고도 하나의 작품으로 인식하고 있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최진실은 1990년대 한국 영화 부흥기의 시작을 함께 했던 배우였다. 《남부군》(1990년)으로 영화계에 데뷔한 최진실은 특유의 귀여움과 친근함을 무기로, 이전까지 한국 영화에 없던 배우의 매력을 선보였고, 한국 영화계의 기획 영화 붐과 맞물려 '자기 주장이 분명한 신세대적인 여성 캐릭터'의 원조급이 되었다.[385][386] 최진실은 1990년대를 걸쳐 청룡영화상에서 '인기 스타상'을 총 8회 수상하면서 1990년대 청룡영화상 최다 '인기 스타상' 수상자가 되었고, 백상예술대상에서도 영화 부문에서 총 5회의 '인기상'을 수상하였다.[387][388]

시청률 조사 회사인 닐슨 미디어 리서치는 1992년 1월부터 2003년 10월까지 <역대 시청률 톱 50 TV 드라마>를 선정한 결과를 바탕으로 최다 주연 배우를 조사하였는데, 최진실은 MBC약속》(1992년), MBC 《질투》(1992년), MBC 《폭풍의 계절》(1993년), MBC 《그대 그리고 나》(1997년), MBC 《별은 내 가슴에》(1997년), MBC 《장미와 콩나물》(1999년) 등 6편의 TV 드라마에서 주연으로 등장하여 최다 주연 배우로 기록되었다.[389][390] 2011년 10월 13일, 네티즌 1300명을 대상으로 한 1990년대 최고의 TV 드라마와 배우를 묻는 여론조사에서 《질투》와 최진실이 각각 1위를 차지했다. 이 조사에서 드라마 2위는 《별은 내 가슴에》였다.[391][392] 2011년 11월 7일, 최진실은 MBC가 창사 50주년을 맞아 선정한 '지난 50년 동안 MBC를 빛낸 연예인 50인'에 뽑히기도 하였다.[393] 2014년 11월 15일, 한류 배우 1세대로서 대한민국 드라마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제3회 에이판 스타 어워즈에서 공로상을 받았다.[394]

최진실 신드롬 편집

최진실은 광고를 통해 대중의 욕망과 환호를 이끌어내는 이미지를 구축한 뒤 TV 드라마영화를 통해 '시대적 아이콘', '트렌드 세터', '톱스타' 등으로 자리매김하였다. 또한, '가벼운 공처럼 톡톡 튀어 오르고 여름 날의 햇살처럼 쨍한 여자, 깜찍하고 귀엽고 편안하고 참신하며 익살스런 숙녀'라는 이미지를 구축해 단번에 대중의 시선을 붙잡았다. 한남대학교 마정미 교수는 자신의 저서 《최진실 신드롬》(1993년)에서 “최진실을 읽어나가는 것은 일단 광고에서 시작해야 한다. 그의 매력과 성공의 근원은 광고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그를 선호하고 그에게 익숙해진 원인을 찾는 출발점도 같은 곳이어야 한다”라고 분석했다.[395][396]

또한, 가부장적 사회 분위기 속에서 적잖은 TV 드라마, 영화, 광고 등에서 '보이시한 패션'과 '중성적인 매력'을 선보였는데, 이를 통해 연예인으로서 여성성과 남성성 모두를 아우르는 포지션을 점할 수 있었다.[397]

최진실은 데뷔 초기에 다소 연기력이 부족했으나 부단한 노력을 통해 좋은 연기력을 갖춘 배우로 성장했다.[398][399] 최진실이 탄탄한 연기력으로 소화한 TV 드라마나 영화의 캐릭터들은 진정성과 생명력을 얻어 대중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았다.[400][401]

연기 외적으로 데뷔 초기부터 솔직하고 털털한 성격을 보여주었는데, 최진실이라는 배우가 등장하기 이전까지 대중매체에서 이런 모습을 선보였던 배우는 드물었기 때문에 최진실의 이런 모습은 대중에 인상적인 이미지를 심어주었고 대중이 배우를 보다 친숙하게 느낄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402][403][404][405][406]

최진실이 20여 년 동안 톱스타로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은, 세월에 따라 연기 변신을 자연스럽게 한 것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20대에는 '통통 튀면서 귀여운 캐릭터'로 인기를 끌었고, 30대에는 '대중이 갈망하는 새로운 이미지와 캐릭터'를 창출했으며, 40대에는 '줌마렐라 신드롬을 일으킨 캐릭터'로 대중의 환호를 이끌어냈다. 이런 모색을 통해 최진실은 배우로서 20대와 30대 그리고 40대의 매력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구현하였다.[407][408][409]

비슷한 나이대의 다른 여성 배우들에 대해서도 '라이벌'이라는 프레이밍에 반기를 들며 자신은 그들에 대해 '길동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였는데, "(채)시라는 라이벌이라기보다 평생 어깨동무하고 가야 할 길동무예요. 예전에 '트로이카'로 불리던 여배우들 중에 누군가 떠나면 남은 사람 인기도 사그라들었잖아요. 동반상승 효과랄까, 시라가 있어서 더 힘이 나요. 시라도 그렇게 생각할 거예요"라고 말하며 자신의 철학을 드러냈다. 2004년 3월에는 최진실, 채시라 두 사람이 전작에서 잇따라 흥행 실패한 것을 '왕년의 스타도 아줌마 되면 별 수 없다'는 식으로 엮는 데 대해서도 부정적 평가를 했는데, "그건 각자의 몫일 뿐이죠. 이미숙, 황신혜, 김희애, 유호정 씨 등 아줌마 되고 더 빛나는 연기를 보여주는 분들이 많잖아요"라고 응수했다.[410]

  • 연기와 관련된 언급

나는 현실타협적인 사람이다. 후배들이 밀고 올라오는 것에 저항하지 말고, 내가 빨리 다른 길로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가정에도 충실하고 나이와 생활에서 우러나오는 연기를 보여주는, 원미경 씨 같은 연기자가 좋다. 또 박원숙 씨처럼 개성 있는 '조연 캐릭터'도 좋다.[396]

그 때는 대학에 대한 미련이 없었지만 지금은 달라요. 그 때는 돈이 필요했죠. 정말 부잣집으로 시집가지 않는 한 어머니 고생 안 시키려면 돈 버는 지름길이 연예인이라고 판단했죠. 집안에 이쪽에서 일하는 분들이 많았어요. 처음에는 돈을 벌려고 했던 건데 많은 분들의 사랑을 받게 됐죠. 그 때는 공부에 대한 갈증이나 내적인 부분을 채워야겠다는 생각을 못했어요. 정신없이 바빴죠. 이제 이렇게 엄마가 되고, 조금 있으면 40대에 접어드는데, 더 늦기 전에 공부하고 싶어요. 다른 공부가 아니라 좋아하는 연기 공부를 하고 싶어요. 《장밋빛 인생》이 저한테 많은 것을 가르쳐줬죠. 저의 밑바닥이 보이는 거예요. 감정에 몰입해 더 열심히 하고 싶어요. 연극영화과에 가서 발음부터 다시 배우고 싶죠. 그런 욕망이 있어요.[68][411][412]

우리 사는 거 총알만 안 날아다닐 뿐 전쟁이에요, 전쟁. 요즘 촬영 중인 드라마도 가끔 납득이 안 되는 대본을 받으면 작가, 연출가 선생님과 치열하게 싸워요. 무례하다고 욕해도 어쩔 수 없어요. 가짜 연기 하는 건 죽기보다 더 싫거든요. 적당히 머리로 하는 연기, 시청자 속이는 연기는 차라리 안 할 거예요.[413][414][415][399][416]

트렌디 드라마 편집

대중문화 평론가인 배국남은 "최진실은 단순한 톱스타가 아니었다. 그는 한국 드라마의 물줄기를 바꿔놓은 MBC 《질투》(1992년)로 '트렌디 드라마'의 활성화를 꾀했고, MBC 《내 생애 마지막 스캔들》(2008년)로 '아줌마 트렌디 드라마'의 장을 여는 등 한국 드라마사에 족적을 남긴 스타였다"라고 말했다.[417][396][418][419]

한국 트렌디 드라마의 효시는 최진실·최수종 주연의 MBC 《질투》(1992년)였다.[420][421] 《질투》는 젊은이들의 사랑과 우정, 그리고 꿈을 속도감 있는 전개와 세련된 영상, 그리고 경쾌한 주제곡으로 표현했는데, 최고 56.1%의 시청률을 기록하며 젊은이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다. 이후 트렌디 드라마는 신파극 일색의 한국 드라마에 생동감 넘치는 에너지와 경쾌한 리듬을 부여하며 한국 드라마의 주류를 바꿔놓았다. 전통적인 한국 드라마에 비해 트렌디 드라마는 가볍고 감각적이었다. 이런 트렌디 드라마의 인기로 한국 드라마계의 중심은 '중견 연기자'들에서 '청춘스타'들로 바뀌게 되었다.[131][422][423]

MBC 《내 생애 마지막 스캔들》(2008년)은 ‘줌마렐라 신드롬’을 불러일으켰다.[424] 여타의 드라마에서는 배우자의 정조 의무 위반, 고부 간의 갈등, 이혼, 비혼모로서의 삶, 재혼 등이 다소 칙칙하게 그려졌지만 《내 생애 마지막 스캔들》은 이런 소재들을 똑같이 사용하되 여성의 삶을 보다 경쾌하고 유쾌하게 그렸다. 《내 생애 마지막 스캔들》은 최고 19.5%의 시청률을 기록하며 많은 매니아를 양산해냈다. 시청자들은 《내 생애 마지막 스캔들》 시청자 게시판에 《내 생애 마지막 스캔들 시즌2》가 제작되기를 바란다는 글들을 올렸고, 이런 요청이 받아들여져서 《내 생애 마지막 스캔들 시즌2》 제작이 확정되었다. 최진실은 코믹한 연기와 로맨틱한 연기를 적절히 섞어가며 대중과의 소통에 성공했고 인터넷상에서 '최트루'라는 별명을 얻으며 인기를 얻었으며 인터넷 커뮤니티 디시인사이드 '내 생애 마지막 스캔들 갤러리'에 직접 글을 남기기도 하였다. 최진실은 이 작품의 성공 요인으로 반전의 미학을 살린 '작가', 완성도 높은 연출력을 보여준 'PD' 그리고 작품 속 '배우'들의 호흡을 꼽았다.[425][426][427][428][429][430][346][1][431]

2008년 4월 21일, 인터넷 커뮤니티 디시인사이드 '내 생애 마지막 스캔들 갤러리' 이용자들이 최진실의 미니홈피를 방문해 '내 생애 마지막 스캔들 갤러리에 와달라'고 부탁하고 갤러리 주소를 남기자 몇 시간 뒤 최진실은 '내 생애 마지막 스캔들 갤러리'를 방문하였다. 이용자들은 최진실의 갑작스러운 방문에 반색하면서도 '낚시'일 수도 있어서 최진실에게 인증 사진을 요구했고 이에 최진실은 "글 올리는 데 두 시간 걸렸어요. 동생 진영이가 도와줘서. 사진은 어떻게 올려요?" 등의 댓글을 남기다가 결국 자신의 미니홈피를 통해 인증을 대신했다.[432][428][433]

  • 트렌디 드라마와 관련된 언급

사실은 트렌디 드라마를 다시 찍을 수 있을 줄은 몰랐어요. 하지만 이 작품을 하면서 자신감이 생겼죠. 제가 '줌마렐라'라는 희한한 말을 만들어냈지만 전 할머니가 돼서도 로맨스를 연기하고 싶어요. 그 때는 '노(老)마렐라'라는 말이 유행하지 않을까요. 고생이 많긴 정말 많았어요. 잠도 못 자고. 하지만 정말 많은 분들이 작품이 좋다고 말씀해 주시니까 그 힘으로 버틸 수 있었어요. 처음 시작할 땐 톰과 제리 같은 느낌이었어요. 항상 동철이는 자신이 선희를 놀린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선희가 한 수 위였죠. 하지만 둘은 굉장히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고 생각해요. 동철이는 이벤트도 자주 열어주고 유머감각도 풍부하고 얼굴도 잘생기고 재력도 있는 멋진 신랑감이죠. 철이 좀 없긴 하지만 제가 철이 들었으니까 괜찮아요(웃음). 둘은 결혼해서도 잘 살 거예요. 마지막이란 게 실감은 잘 안 나요. 첫 스타트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마지막이네요. 눈을 감으면 홍선희의 과거가 파노라마처럼 흘러가요. 이 작품을 통해서 손해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생각해요. 배우에게도 스태프에게도, 모두에게 제각기 의미가 큰 작품일 거예요.[349][434]

방송계에서의 영향력 편집

최진실은 새로 제작한 드라마나 예능 프로그램의 성패를 처음부터 예측하는 능력이 뛰어났고, 프로그램 초기의 보완점을 조언하는 능력이 탁월했으며, 자신이 인재라고 평가한 사람은 자신과의 친소 관계를 따지지 않고 방송사 연출가들에게 적극 추천했기 때문에 고위급 연출가들도 최진실의 조언을 매우 소중히 여겼다.[435][436]

방송인 유재석은 최진실의 추천으로 톱스타가 된 대표적인 예이다. 2000년, 최진실은 MBC의 한 고위급 연출가에게 유재석을 MBC 《목표 달성 토요일 - 스타 서바이벌 동거동락》의 메인 MC로 추천하였다. 당시 크게 유명하지 않았던 유재석은 최진실과는 친분이 없었다. 최진실은 유재석의 별명인 '메뚜기'는 알아도 실명은 알지 못했지만 KBS서세원 쇼》에 출연했던 유재석을 기억하고 있었고, 최진실이 그 고위급 연출가에게 "새 프로그램이 있으면 '메뚜기'를 쓰라"라고 강력하게 추천하면서 《스타 서바이벌 동거동락》의 메인 MC로 유재석이 발탁되었다. 유재석은 《스타 서바이벌 동고동락》의 메인 MC로 활동하면서 대중으로부터 많은 주목을 받았고 톱스타로 인정받는 전기를 마련하였다. 유재석은 그 후 한참이 지나서야 최진실이 자신을 추천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435][437][438][439]

당시 최진실의 추천을 받아 유재석을 기용했던 연출가는 후일 다음과 같이 말했다.

최진실은 괜히 톱스타가 된 게 아니다. 드라마건 예능이건, 최진실만큼 정확한 감을 갖고 있는 사람은 만나본 적이 없다. 어떤 드라마에 들어가거나 어떤 쇼 프로에 출연할 때 최진실은 본능적으로 그 프로가 대박이 날지 쪽박을 찰지를 꼭 짚어 맞추고, 실제로 도움이 되는 조언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이다. 나는 지금까지 수많은 예능 프로그램을 만들었지만 항상 첫 회 게스트로 최진실을 써왔다. 대개 예능 프로그램은 처음엔 조금 엉성한 데가 있기 마련인데, 녹화가 끝난 뒤 최진실은 어디를 보강하고 어떤 코너를 넣어야 하는지를 누구보다 정확하게 짚어냈다. 자기와 친하다고 아무나 추천하는 사람도 아니었다.[435][440]

배우 안재욱은 대표적인 한류 스타이다. 2009년 9월 2일, 안재욱은 MBC 《황금어장 - 무릎팍도사》에 출연하여 최진실이 같은 소속사에 있던 자신을 적극적으로 추천해서 MBC 《별은 내 가슴에》(1997년)에 출연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안재욱은 《별은 내 가슴에》에서 최진실의 상대역으로 출연하였는데, 이 드라마를 통해 톱스타로 인정받는 전기를 마련하였고, 이 드라마의 중화인민공화국 진출을 통해 중화인민공화국에서 한류 스타로서 활약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후 안재욱은 배우로서, 가수로서 활발한 활동을 하게 되었다.[441][442]

인간관계 편집

동생 최진영 편집

최진실은 자신의 자전적 에세이 《그래, 오늘 하루도 진실하게 살자》(1998년)에서 동생인 배우 최진영을 '동지'라고 표현했다.[443][444] 최진영은 2008년 7월에 출연한 MBC황금어장 - 라디오스타》에서 누나 최진실을 ‘스승같은 존재’라고 표현했다.

2009년, 최진영은 한양대학교 예술학부 연극학과에 입학했는데, 대학 진학에는 최진실의 권유가 있었다.[445]

2008년 11월, 최진영은 베트남 화빙성에서 봉사활동을 하였다. 6박 7일 간의 일정이었고, 기아·난민 아동들을 돕기 위한 여행이었는데, 가수 빽가와 동행했다. 당초 최진영의 봉사활동은 2008년 10월 말로 계획됐었으나 최진실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인해 계획이 미뤄졌다. 최진영은 최진실의 권유로 봉사활동을 떠나기로 결심했고, 최진실은 최진영에게 "너 먼저 다녀와라. 나도 드라마가 끝나면 내년에 봉사활동을 갈 예정인데 기회가 되면 함께 가자"라고 말하며 봉사활동에 대한 의지를 피력했다.[446]

2006년, 최진실·최진영 남매는 여성의식캠페인 사진전에 참여했다. 이 사진전은 출산을 중심으로 가족의 의미를 담아낸 특별한 사진전으로,‘여성’을 주제로 다양한 캠페인을 열고 있는 세정의 여성의식캠페인 오프닝 행사였다. 이 사진전에는 최진실·최진영 남매 외에도 다수의 유명인이 참여했다. 이 여성의식캠페인은 대통령직속저출산고령화사회위원회, 홀트아동복지회, 아름다운가게 등이 동참한 행사였다.[325][447][448][449]

2005년, 최진실은 최진영의 권유로 KBS장밋빛 인생》에 출연하게 되었다. 최진실은 화장품업체 3LAB의 광고 모델로 발탁되어 광고 촬영 및 여행을 위해 가족들과 미국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그 때 드라마 《장밋빛 인생》 출연을 제의받았다. 최진실은 여론조작범들의 악랄한 행태에 불편감을 느끼고 있어 드라마 출연을 망설이다가 최진영의 지지와 격려에 힘을 얻어 《장밋빛 인생》에 출연하게 되었고, 좋은 결과를 얻었다.[450][451][379][452]

2008년 12월 21일, 최진영은 토크 쇼 KBS 《박중훈쇼 대한민국 일요일밤》에 출연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최진실과 나는 어려운 시기를 함께 보냈다. 어머니는 포장마차를 운영하고 나는 모델 일로 돈을 벌었다. 내가 다른 일을 하는 것보단 벌이가 괜찮아서 그 돈으로 나와 최진실의 학비를 내고 생활비도 보탰다. 이런 나에게 최진실은 늘 고마움을 가지고 있었다. 최진실은 고집이 엄청 셌는데, 그래도 내 말은 참 잘 들었다. 최진실은 진솔한 면이 있었다.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솔직한 것이 최진실의 매력이었다. 최진실 자체가 나에겐 도움이었다. 말로는 표현이 안 될 정도로 절대적인 존재였다. 배우로서 최진실은 굉장한 독종이었다. 대본을 받으면 두꺼운 공책 몇 권에 계속해서 작품에 대해 썼다. 방문을 걸어 잠그고 계속 대본 연습을 했다. 밥 먹는 시간 빼고는 나오지 않았다. 또 본인의 목소리가 잘 들린다고 화장실에서 대본 연습을 했다. 최진실이 떠나기 며칠 전 나에게, '사람들은 왜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지 않는지 모르겠다'라고 말했다. 과거 이혼하는 과정에서, 세상으로부터 많은 오해를 받았고 있지도 않은 사실이 기사화되기도 하여 최진실이 매우 괴로워했다. 최진실은 인터넷 악성 댓글을 자세하게 확인하는 편이었다. 이에 많이도 힘들어했다. 최진실에게 '모든 사람들이 악플러들처럼 누나를 생각할 거라고 여기지는 말아라'라고 충고도 했다.[453] 어떤 뉴스 기사에서는 최진실의 죽음을 놓고, 최진실이란 배우는 자기 자신을 사랑할 줄 모르고 인기에 연연했다고 하더라. 결국 그 기사대로라면 최진실이란 배우는 인기가 떨어지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자살했다는 것밖에 안 된다. 그것은 최진실을 너무 몰라서 하는 말이다. 유가족으로서 그런 부분이 상처가 됐다.[452]

이 토크 쇼의 진행자 박중훈은 영화 《나의 사랑 나의 신부》(1990년) 등에서 최진실과 호흡을 맞춘 배우이기도 했는데, 박중훈은 "진실 씨에게 '진실아, 넌 가장 행복할 때가 언제니?'라고 물은 적이 있는데, 진실 씨는 '오빠, 전 진영이가 잘 되는 거예요'라고 대답했다. 그 정도로 진실 씨는 진영 씨를 사랑했다"라는 말을 하면서 게스트 최진영에게 최진실의 마음을 전하기도 하였다.[452][454]

최진영은 최진실 생전에도 누나를 도와 조카들의 양육에 힘을 썼고 최진실 사후에도 어머니와 함께 최진실의 두 자녀를 양육했다.[455][456][457][458]

2010년 3월 29일, 최진영은 서울특별시 강남구 논현동의 자택에서 스스로 세상을 떠났다. 최진실에 대한 그리움, 연예계 활동과 관련된 부담감 등이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의견이 있었다.[459][460][461][462] 같은 해 7월, 최진실과 최진영은 갑산공원에 나란히 잠들 수 있도록 조치되었고, 각자의 비석에 새겨진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웃고 있는 구도로 배치되었다.

최진실 사단 편집

소위 '최진실 사단'은 배우 최진실, 코미디언 이영자, 모델 홍진경, 모델 이소라, 배우 엄정화, 배우 최화정, 코미디언 정선희 등이 참여하는, 연예계의 사적인 모임이다. 이들은 연예계 동료로서 서로의 활동에 조력자가 되었다. '최진실 사단'이라는 명칭은 이들의 친분이 방송을 통해 널리 알려지면서 언론에서 붙인 것이다.[463][464][465][466][467]

최진실은 1990년대 초반에 이영자가 진행하는 한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한 것을 계기로 이영자와 친분을 나누게 되었다.[468][469][470] 또 최진실은 한 쇼 프로그램에서 노래를 불러야 했는데, 당시 MBC 합창단원 소속이었던 엄정화가 최진실의 노래를 도와주게 되면서 이들은 친분을 쌓게 되었고, 그 인연으로 엄정화는 최진실과 계약을 맺고 있던 연예 매니저와 계약을 맺게 되고 연예인으로서 활동하는 전기(轉機)를 마련하게 되었다.[471][472][473]

2008년 11월 19일, 유가족·친구·지인 등이 참석한 가운데 최진실의 사십구재가 기독교식으로 진행되었다. 이 자리에서 이영자는 "너무 죄송하고 죄스러워서 지금까지 아무 말도 못했다. 우리들이 지켜주지 못했다. 고인의 뜻을 받들어 이 사회에서 우리를 사랑으로 따뜻하게 대해 주신 모든 분들에게 힘이 되겠다"라고 말했다.[474][475]

이듬해인 2009년 10월 2일, 최진실의 1주기 추모식이 있었다. 추모식에는 유가족, 친구, 지인 등과 함께 최진실의 두 자녀도 참석하였다. 이 자리에서 이영자는 "1년 동안 걱정해 주시고 안타까워 해주시고 남모르게 기도해주고 기억해 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하다. 저를 비롯한 친구들이 환희와 준희에게 엄마가 못하는 자리를 채워나가도록 하겠다"라고 말했다.[476]

연출가 주철환과의 친분 편집

최진실은 1990년에 대학생 퀴즈프로그램인 MBC퀴즈 아카데미》에 출연하였는데, 이를 계기로 주철환과 20여 년 동안 인연을 맺어왔다.[477][478] 최진실은 《퀴즈 아카데미》 출연 제의를 받았을 때 처음에는 출연을 거절했었다. 왜냐하면 최종 학력이 고졸인 자신이 대학생들을 상대로 문제를 낸다는 것이 어색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철환의 설득으로 최진실은 《퀴즈 아카데미》 출연을 결정하게 되었고, 프로그램에 참가한 대학생들로부터 많은 호응을 받았다.[358][479][480][481]

동생 최진영은 강원도 철원군에서 군 생활을 하였고 최진실은 군 복무 중인 최진영을 면회할 겸, 군인 대상 프로그램인 MBC《우정의 무대》에 출연하였는데, 총 네 번 이 프로그램에 출연하였다. 주철환은 동생 보러 가자며 출연을 권하곤 하였다.[399][481]

2007년 12월, OBS가 개국하였고 주철환은 그 사장이 되었다. 2008년 3월, 주철환의 권유로 최진실은 토크 쇼 OBS 《최진실의 진실과 구라》의 진행자가 되었다.[357] 이 토크 쇼는 방송인 김구라와 함께 진행을 맡았다. 주철환은 신생 방송사인 OBS를 살릴 콘텐츠를 찾다가 '최진실'이라는 카드를 생각하게 되었는데, 연예계 주류에서 최고의 자리에 있던 배우 '최진실'과 연예계 비주류에서 대중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희극 배우 '김구라'의 조합이 좋은 그림이 될 것이라고 보았다.[482][483] 2008년 10월 4일, 주철환은 PD저널에 조시(弔詩) 《굿바이 캔디》를 기고했다.[484] 주철환은 평소 최진실을 ‘캔디’라고 불렀다.[485] 2008년 12월, 주철환은 《주철환의 사자성어》를 발간하였고 그 책머리에서 최진실을 추모하였다.[486]

가수 MC몽과의 친분 편집

2009년 7월, MC몽은 자신의 5집 정규 앨범에 최진실 추모곡인 《진실은 천국에서라도》를 수록하였다. 노래 첫머리에는 최진실의 사망에 대해 전 세계 언론들이 보도한 뉴스들을 삽입했다.[487] 최진실은 스노보드를 타다가 MC몽과 친해졌고 MC몽에게 자신의 노래를 만들어 달라고 한 적이 있었다. 최진실은 MC몽의 모든 앨범을 구입했다.[488][489]

MC몽은 공연과 방송 스케줄을 소화하느라 최진실의 빈소를 찾지 못했다. 2008년 10월 5일, MC몽은 자신의 미니홈피에 《내 가슴 속의 진실》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렸는데 이 글에서 최진실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을 표현했다.[490] MC몽은 2009년 연말 콘서트에서 최진실을 추모하는 시간을 마련했다.[491]

최진실은 사망 전날, 친구 홍진경이 진행하는 라디오 방송에 MC몽의 노래 《I love you Oh Thank you》를 신청하였다.

사진작가 강영호와의 친분 편집

강영호는 MBC 《나쁜 여자 착한 여자》(2007년)의 포스터 촬영을 맡았다. 그 때부터 최진실은 강영호와 친분을 나누었다. 그 후에도 강영호는 MBC 《내 생애 마지막 스캔들》(2008년)의 포스터 촬영을 맡기도 했다. 최진실은 강영호의 작품을 좋아했고, 강영호와 작업한 사진들 중 하나가 최진실의 영정 사진이 되었다.[492]

멘토링 편집

배우 이진성과의 인연 편집

이진성MBC나쁜 여자 착한 여자》(2007년)에 출연하면서 최진실과 인연을 맺었다. 최진실은 이진성에게 선배 연기자로서 조언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고, 자신의 소속사인 <드림엔터박스> 관계자를 소개해 주기도 했다.[493][494] 연예계 활동을 하면서 거짓 소문들에 시달렸고 그러면서 연예계 활동에 회의를 느꼈던 이진성은 《나쁜 여자 착한 여자》를 마지막으로 미국 유학을 떠났고, 2008년 10월에 최진실의 사망 소식을 듣고는 2년여 간의 미국 여행을 마치고 2009년 5월에 귀국했다. 2009년 7월, 이진성은 최진실과의 인연을 잊을 수 없었고, 함께 일해보자는 최진실의 매니저의 제안에 '그래서 누나가 생전 나한테 이 분을 소개시켜줬구나'란 생각으로 <드림엔터박스>와 인연을 맺고 다시금 연기자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495][496]

배우 이태곤과의 인연 편집

2002년, 이태곤은 최진실이 메인 모델인 현대해상 광고에 보험사 직원 역으로 출연하였다. 이태곤은 이 광고를 통해 브라운관에 데뷔하였다.[497] 그로부터 8년 뒤, 이태곤은 MBC 일일 드라마 《황금물고기》(2010년)에 주연 배우로 출연하는 등 연기력과 경력을 인정받는 정상급 연기자가 되었다. 2010년 10월 20일, 이태곤은 MBC 《황금어장 - 무릎팍도사》에 출연해서 최진실과 광고 촬영을 하며 있었던 일화를 소개하였는데, "당시 무릎을 꿇은 채 촬영이 몇 시간째 이어졌는데 아프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그런데 (최진실이) 먼저 '무릎 안 아파요? 아플 텐데'라며 스태프들에게 '무릎이 아픈데 연기를 어떻게 하느냐?'라고 말하며 촬영을 일시 중단시켰다. 그 분은 당시 톱스타였는데 무명 모델인 나를 먼저 챙겨주셨다. 또, '이렇게 하면 더 잘 나올 텐데'라고 연기 조언까지 해주셨다"라고 말하며 최진실에 대한 고마움을 나타냈다.[498][499][500]

배우 정선경과의 인연 편집

정선경은 영화 《엄마에게 애인이 생겼어요!》(1995년)에 출연하면서 최진실과 인연을 맺었다. 최진실은 정선경이 영화에서 TV 드라마로 자리를 옮길 때, 정선경의 입장이 되어 함께 고민해주고, "앞으로 오랫동안 활동하려면 꼭 드라마를 해야 한다"라고 말하며 TV 드라마 쪽으로의 진로 모색을 정선경에게 적극적으로 권하였다. 이후 정선경은 영화와 TV 드라마 양쪽 영역에서 배우로서 입지를 다져나갔다.[501]

배우 남궁민과의 인연 편집

남궁민은 자동차 광고에 최진실과 함께 출연하면서 최진실과 인연을 맺었다. 최진실은 매니저 없이 활동하는 남궁민을 안타깝게 여겼고 이에 남궁민에게 매니저를 소개해 주었는데, 그 매니저를 통해 남궁민은 SBS 시트콤대박가족》(2002년)에 출연하는 기회를 얻어 연기자로서 데뷔하게 되고 대중에게 얼굴과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502][503][504][505][506]

연예계 데뷔 편집

최진실은 MBC 특채 배우가 되기 전에 KBS 탤런트 공채 시험에 합격한 적이 있다. 하지만 최진실의 어머니 정옥숙은 딸의 연예계 진출을 반대하였고 이에 최진실은 배우에의 꿈을 접어야 했다.[507] 이후 연예계 진출에 대한 뜻을 포기할 수 없었던 최진실은 가족들을 설득하는 데 성공하였고, 동생 최진영은 최진실의 프로필 사진 등을 광고계에 돌리며 홍보 활동을 하였고, 그러면서 최진실은 광고에 출연할 기회를 얻게 되었으며, 결국 전속 모델까지 되면서 연예계에 데뷔하게 되었다. 연예계 진출에 대한 최진실의 의지를 꺾을 수 없다는 것을 안 정옥숙은, 이후 최진실의 매니저 역할을 하며 최진실의 연예 활동을 지원하게 되었다.[508]

스토리텔링 편집

최진실 본인이 연재한 스토리텔링은 다음과 같다.(1990년 6월 3일 ~ 1990년 7월 4일, 총 26회, 일간스포츠 19면 연재)

  1. 1회 1990년 6월 3일 일요일
  2. 2회 1990년 6월 4일 월요일
  3. 3회 1990년 6월 6일 수요일
  4. 4회 1990년 6월 7일 목요일
  5. 5회 1990년 6월 8일 금요일
  6. 6회 1990년 6월 10일 일요일
  7. 7회 1990년 6월 11일 월요일
  8. 8회 1990년 6월 13일 수요일
  9. 9회 1990년 6월 14일 목요일
  10. 10회 1990년 6월 15일 금요일
  11. 11회 1990년 6월 16일 토요일
  12. 12회 1990년 6월 17일 일요일
  13. 13회 1990년 6월 18일 월요일
  14. 14회 1990년 6월 20일 수요일
  15. 15회 1990년 6월 21일 목요일
  16. 16회 1990년 6월 22일 금요일
  17. 17회 1990년 6월 23일 토요일
  18. 18회 1990년 6월 24일 일요일
  19. 19회 1990년 6월 25일 월요일
  20. 20회 1990년 6월 27일 수요일
  21. 21회 1990년 6월 28일 목요일
  22. 22회 1990년 6월 29일 금요일
  23. 23회 1990년 6월 30일 토요일
  24. 24회 1990년 7월 1일 일요일
  25. 25회 1990년 7월 2일 월요일
  26. 26회 1990년 7월 4일 수요일

스포츠한국에는 총 12회로 엮여서 다음과 같은 제목으로 연재되었다.

  1. 추억이 어린 곳, 삼송리
  2. 어려웠던 시절
  3. "남자는 여자하기 나름이에요"
  4. "남편 사랑은 가끔 확인해 봐야 해요"
  5. 연기 활동 시작
  6. 불에 타죽을 뻔한 작품 <시진읍>
  7. 연속 캐스팅으로 방송국 내에서 '파문'
  8. 영화 <남부군
  9. 영화 촬영장에서 생긴 일
  10. 여행 도중 교통사고
  11. 액션 영화 <꼭지딴>에 출연
  12. '노력'이라는 단어를 되새기며

모순적 환경 편집

최진실은 내적·외적으로 모순적 환경 속에 놓여 있었는데, 20여 년 동안 연예계 생활을 하면서 직업 활동을 쉰 해가 없을 정도로 자신의 직업에 충실하였지만 몸은 약한 편이었고, 연예인으로서 톱스타의 삶을 살았지만 연예인은 허위사실유포 행위에 취약한 직업이었다.[509][51] 2008년 6월에는 인터넷상에서 백여 개의 명의 도용도 겪은 바 있다.[510]

2008년 10월 6일, 1993년부터 15년 동안 최진실과 인연을 맺어왔던 데일리서프라이즈 편집국장 이석원은 "최진실은 몸이 유난히 약했다. TV 드라마영화를 마친 후엔 반드시 병원에 한동안 입원해 있었다. 데뷔 후 단 한 순간도 톱스타가 아닌 삶을 산 적이 없었기에 그에 대한 모함과 억지는 늘 대중매체의 단골 메뉴였고, 그것이 애증이라는 이름으로 덧칠됐어도 숱한 위기와 고통 속에 그는 20년을 살아왔다. 자신을 향해 악성 댓글을 쓰는 사람까지도 이해하고 아끼려고 애썼다. 최진실은 강한 사람, 강한 배우였다"라고 말했다.[146][47]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정혜신은 "인터넷 루머는 기존의 '소문'과 달리 그 양과 질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이다. 루머의 내용이 직접적이고 구체적이어서 한 인간으로서 정신적으로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선다. 연예인은 '나'는 없고 '너'가 주는 평가와 이미지를 자신과 동일시하면서 산다. '존재하기 위해 가져야 할 기반'이 없는 정신건강상 취약한 직업이다. 최진실의 자살을 통해 우리 사회가 반성하고 성찰해야 할 많은 함의를 찾을 수 있다"라고 말했다.[294][511][512][513][51]

2008년 4월 1일, 드라마 《내 생애 마지막 스캔들》과 토크 쇼 《최진실의 진실과 구라》에 출연 중이었던 최진실은 《최진실의 진실과 구라》 촬영장으로 향하던 중 갑작스럽게 현기증과 구토 증세를 보이다가 실신해 응급 처치를 받았다.[514] 2008년 7월 7일, 광고 촬영 도중 요통으로 응급실로 실려갔다. 최진실은 평소 요통에 시달려왔는데, 광고 촬영 중에 점프하는 연기 등을 하다가 요통이 발병했던 것이다.[515] 2008년 9월 8일, 안재환 시신 안치 병원에 노컷뉴스 방송연예팀장 김대오와 달려가는 도중에 최진실이 주저앉는 모습이 기자의 카메라에 잡혀 그 사진이 배우 안재환 사망 관련 기사에 실렸고 이 사진은 포털 사이트 다음의 메인 화면에 오르기도 하였다.[516][37][38][39][40][41][517][518][47][51]

의사소통 난맥상 편집

의사소통 난맥상은 대개 기자들이 조장했다. 최진실의 사회적 권위를 추락시키려고 혈안이 되었던 사람들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이 사람들은 조성민과 한패가 되어 그 행각을 도모했다는 특징이 있다.[519]

이 외에도 강지원, 김선주, 주진우[530] 등도 개념 없는 행동을 하며 이 행각에 힘을 보탰다. 이 세 명은 피해자 편에 선 것처럼 행동하면서 피해자 흠집내기를 한 특징이 있다.

언론과 최진실 편집

연예인은 보통 언론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대중과 소통한다.[531] 연예 언론은 '개인적 복수의 칼'로서 역할하는 경우도 있었다. 연예인에게 언론은 양날의 칼이었다. 최진실 또한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20여 년 동안 연예계 정상의 자리에 있던 최진실은 늘 언론의 추적에 시달렸다.[532][533][534][535][536][537][538] 기자들 중에는 최진실에 대한 혐오(hate speech) 세력의 구성원도 상당수 있었는데, 일요신문 기자 신민섭이 대표적인 예였고 이는 최진실 사망 직후 본인이 자백한 일이다.[45][539][540][541] 최진실과 관련하여 헤럴드경제 기자 서병기, 일간스포츠 기자 김범석 등도 주목할만한 기사를 쓴 바 있다.[542][543][544][243][545][546][244][547][548][549][550][551][552] 더불어 여성조선 기자 백은영, 우먼센스 기자 하은정 등도 2008년 10월호 잡지를 통해 존재감을 드러냈다.[553][554][555][556][557][558][559][560][561] 언론인 김선주, 동아일보 수석논설위원 황호택 또한 최진실 사망 후 최진실에 대해 자기 투사를 담은 칼럼을 써서 자신들의 지적 수준을 보여주는 해석을 내놓았는데, 이 둘에 따르면 최진실은 성욕으로 인해 사리분별력을 잃은 사람이었다.[562][563][564][565][566] 이와 더불어 재일 언론인 유재순은 2003년 1월 5일 일요신문을 통해 최진실에 대한 자신의 적개심을 표현한 것은 물론이고 최진실에 대한 검증되지 않은 내용을 담은 글을 유포하였다.[239][567][568][569] 한겨레의 선임기자 김도형도 2004년 6월 25일에는 한겨레를 통해, 2011년 3월 9일에는 본인 블로그를 통해 존재감을 드러냈다.[570][571][572] 2015년에 발간된 에서 문학평론가 최강민혐오 세력들의 정신 세계를 단적으로 드러내주는 글을 썼는데, 멀쩡한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간 대한민국 사회의 모순을 짚는 게 아니라 피해자 Archived 2016년 6월 24일 - 웨이백 머신 최진실에게서 문제의 원인을 찾고자 '버려짐의 트라우마'라는 용어를 써가며 마른 수건 쥐어짜듯 최선을 다하였다.[573][55][574] 2016년 8월 이투데이 기자 배국남은 전혀 다른 상황에 최진실을 끌어들이기도 하였다. [575][576] 2016년 10월 THE FACT 기자 강일홍은 사실관계가 모두 규명된 사안에 대해 마치 규명되지 않은 것처럼 말하며 최진실이 허위사실유포자였던 것처럼 여론조작을 했다.[577][578][579][580][581] 이처럼 기자들의 관음증적 놀이에 사건의 본질은 은폐되었고, 혐오 세력에 해당되는 언론인들은 고차방정식을 세워 풀어야 할 사안에 대해 일차방정식을 세워 풀면서 틀린 답을 대중에게 세뇌시켰다.[582]

최진실의 어머니 정옥숙은 자신의 저서 《엄마가, 미안해 그리고 사랑해》(2011년)에서 "언론은 임신한 사람을, 아이 어머니를 배려하지 않았다"라고 지적하며 기자들의 윤리 의식에 의구심을 표현했다. 최진실은 2002년 12월 18일 임신 8개월 상태였는데, 조성민의 1차 여론조작 직후부터 기자들이 최진실의 집 앞에 진을 치고 있어서 최진실은 정기 검진을 받는 날 외에는 거의 집에 갇혀 있어야 했고, 사생활을 생중계하는 듯한 선정적이고 무분별한 기사에 고통을 겪기도 하였다. 최진실은 2002년 12월부터 2004년 8월까지 허위사실이나 사실 왜곡을 바로잡기 위해 반박성·해명성 인터뷰를 하거나 법적 조치를 취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사생활이 더 이상 세상에 알려지고 왜곡되는 것을 막겠다는 취지였다.[583][584] 그 법적 조치의 대상에는 언론 Archived 2016년 9월 16일 - 웨이백 머신도 포함되어 있었다. 인터뷰를 자청하여 허위사실을 유포한 자가 있었고 그 인터뷰를 진행한 기자는 그 유포 내용을 그대로 받아적어 기사화하였는데, 이는 기자가 허위사실유포 행위에 동참한 것이면서 허위사실 유포자와 기자 모두 이혼은 혼인 당사자와 국가가 해결봐야 하는 사안이라는 사실을 망각한 행위이기도 하였다. 이런 허위사실유포 행위에 방송사도 동참했는데, 이를 통해 허위사실은 활자와 영상을 통해 널리 퍼져 나갔고, 거의 전 국민적인 인지도를 가진 최진실이 받은 타격은 상당히 컸으며, 훗날 최진실은 이 때의 상황에 대해 "국민을 '배심원'으로 앉혀놓고 2~3년간 이혼 문제로 시끄럽게 떠들었다. 그 과정에서 치부를 생생하게 보여줘 나도 아이들도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다"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이 말에서 '이혼'은 '조성민의 이혼'이라는 게 정확한 표현이다. 조성민의 이혼 타령 기사에 최진실 이름이 거론된 것뿐이다. 왜냐하면 최진실은 그 기간 동안 '혼인유지' 입장을 견지했기 때문이다. 또 '치부'란 '조성민의 추악한 실체'를 의미한다. 조성민은 그 기간 동안 추악한 실체를 드러내며 최진실, 최환희, 최준희의 명예를 훼손했다.[248][293][68][65][585][249][251][586][256][587] 그 당시 언론 상황에 대해 연출가 정길화는 "IT 강국 한국의 인터넷과 난립한 연예 저널리즘은 그 모든 상황을 거의 실시간으로 중계했다"라고 표현했다.[112] 기자 주진우는 "최진실은 귀엽고 발랄한 여성의 대명사였다. 이혼 때문에 깔끔한 이미지가 손상되면서 최진실은 나락에 떨어졌다. 연예계에서 그를 찾는 곳은 아무 데도 없었다. 2004년에 MBC의 한 국장[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은 '최진실은 끝났다. 귀엽고 발랄함으로 떠오르던 최진실이 이제는 가정폭력과 이혼의 대명사 Archived 2016년 6월 24일 - 웨이백 머신가 되었는데, 최진실을 어디에다 쓰겠는가'라고 말했다"라고 말했다. 이는 가정폭력이라는 범죄 행위의 피해자에게 오히려 그 운신의 폭을 제한하는 대한민국 방송계의 인식 수준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고, 결혼을 하면 이혼할 가능성은 늘 있는데, 합법적인 행위인 이혼을 했다는 이유로 사회활동을 제한받을 수 있다는 사회 분위기를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였다. 더구나 최진실은 그들이 원하는 대로 '혼인유지' 입장을 견지했었다. 폭력범이 유명인을 상대로 대놓고 폭력 행위를 저지른 것은 이런 사회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고 이런 사회 분위기는 오히려 가정폭력을 조장하는 면이 없지 않았는데, 최진실은 2002년부터 2004년까지 알려진 것만으로도 같은 가해자로부터 두 번의 가정폭력 행위를 당했었고, 첫 번째 폭력 행위는 임신 중에 당한 것이기 때문에 태아도 그 행위의 피해자였다.[588][294] 2002년부터 2004년까지 최진실은 민사상·형사상 피해자였지만, 위법행위의 객관적인 사실관계 전달이 아니라 흥미 위주 '가십'으로 팔아먹는 일부 언론의 '상혼' 등으로 이중으로 고통을 받아야 했다. 이를 통해 대한민국의 추악한 이면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589][253][590][45][591][592][593][594][595][596][597][598][599][600][601][602][321][603][604][605][606]

  • 언론과 관련된 언급

2003년 10월 23일에 조성민이 언론에 공개한 이혼합의서라는 것도 초안일 뿐, 그 어떤 것도 결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신문사에 문건을 팩스로 보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에는 더 이상 참을 이유가 없었다. 더 이상 참지 않겠다. 조성민을 상대로 모든 법적 수단을 동원해 엄격히 대응하겠다.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조성민은 이혼합의서 초안을 공개하기 전에도 마치 내가 돈 때문에 이혼문제를 결정하지 못하고 있는 양 10억 원, 13억 원 등 위자료 금액을 임의대로 발설해 치명적인 상처를 줬다. 이혼문제와 관련하여 지극히 개인적인 사생활을 언론에 유포한 조성민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위기에 처한 부부의 사생활문제를 끊임없이 화제 기사로 다뤄온 모든 스포츠신문들의 보도 행태에 분노를 느낀다.[607][253][608][609][610][611][612][613][614][615]

있는 그대로 잘 써주세요.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기사를 쓰면, 이 인터뷰로 끝나는 게 아니라 연예를 다루는 일간지, 주간지들이 베끼니까요. 그래서 제가 그동안 인터뷰를 피했어요. 지금 저 말고도 이렇게 살아가는 '싱글맘' 여성들이 많으니까 그 분들이 위로를 받고 힘을 낼 수 있게 써주세요.[68][616][191][617][618][619][620][621][622][623][624][625][47][626][627]

대중과 최진실 편집

연예인과 대중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벽이 존재한다. 연예인은 대중에 대해 '슬퍼도 웃고 기뻐도 울 수 있는 존재'이고, 대중은 연예인에 대해 '오늘은 좋아했다가 내일은 싫어할 수 있는 존재'이다. 최진실 또한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20여 년 동안 연예계 정상의 자리에 있던 최진실은 늘 대중의 집요한 관심에 시달렸다. 그 관심의 극단적인 예가 시도때도 없이 나도는 근거 없는 소문이었다.[537] 이러한 허위사실유포 행위는 최진실과 대중 사이의 견고한 신뢰 관계를 깨려는 이간책(離間策) 전술이었다.[628][629][89][90][509]

최진실의 진실과 구라》에서 함께 진행을 맡았던 김구라는 무명 시절 유명 연예인들을 대상으로 독설을 퍼붓는 컨셉으로 인터넷 방송에서 활동했던 전적으로 연예계에서 유명한 인물이었고 이후 본인이 유명인이 되어서는 그걸 수습하느라 진땀을 뺐던 방송인이었는데, 최진실은 이러한 김구라의 행보에 대해 대중의 입장에 서서 연예인을 비판한 것일 수 있다고 말하며 그 의미를 짚었다.[630][356][631]

2008년 9월, 코미디언 정선희의 남편인 배우 안재환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고 이 사건은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이 사건을 접한 최진실은 크게 슬퍼하였고 정선희의 곁을 지켰다. 대중은 언론을 통해 최진실의 이런 모습을 지켜보았다. 최진실의 어머니 정옥숙은, 없는 일도 만들어내는 것이 세상 사람들이니 정선희를 적극적으로 도우려는 최진실에게 그 행동을 자제할 것을 주문하였다. 하지만 최진실은 그 말에 개의치 않았다. 어느덧 정옥숙의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안재환의 죽음에 최진실이 연루되었다는 허위사실이 인터넷상에 유포되었던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언론 또한 일이 커지는 데 일조하였는데, 인터넷상에 유포된 근거 없는 이야기들을 그대로 특종으로 실었던 것이다. 더욱이 최진실은 20여 년 동안 연예계 생활을 하면서 크고 작게 허위사실 유포를 겪었는데, 과거의 거짓 소문들까지 인터넷상에서 모두 수면 위로 떠올라 근거 없는 소문이 눈덩이처럼 불어나 최진실을 강타했다.[632] 또, 사람들은 정옥숙을 두고 '소설'을 쓰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이 '소설'은 그냥 소설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정옥숙은 현실 속에서 그 피해를 겪어야 했다. 정옥숙은 자신을 두고 수군거리는 사람들을 목격했던 것이다. 그 당시 상황에 대해 정옥숙은 자신의 저서 《엄마가, 미안해 그리고 사랑해》(2011년)에서 "얼굴을 못 들 정도로 모멸감을 느꼈다"라고 밝혔다. 최진실은 자신은 물론 가족들까지 감옥 아닌 감옥 생활을 하는 일을 겪었던 것이다. 그 당시 최진실의 동생은 연예인이었고, 최진실의 아들은 초등학생이었으며, 최진실의 딸은 유치원생이었기 때문에 최진실의 심적 부담은 상당했다. 최진실은 정옥숙에게 "나 헛살았나봐. 나는 완전히 왕따야. 누구 하나 정말 진심으로 나를 생각해주는 사람이 없네. 그 동안 잘못 산 거야. 최진실은 돈 빌려준 적 없다고 한 마디만 해줬다면, 그 한 마디만 누가 해줬다면, 누구 한 명이라도 나를 아는 사람 그 누구라도…"라는 말을 하며 연예계 내부의 적폐를 짚었다. 2004년 최진실에 대해 인격살인한 전적이 있는 주철환 등이 입을 다물고 있었던 것은 최진실을 물어뜯고 싶은 걸 참고 있었다는 뜻이기도 하고 혹은 상황을 지켜보다가 최진실을 물어뜯으려고 한 순간 최진실이 죽어버렸다는 뜻이기도 했다. 2008년 10월 1일 조성민의 발호는 이런 추측을 가능하게 하였다. 최진실 사망 이틀 후 주철환이 PD저널에 조시를 기고한 것은 시사하는 바가 컸다. 결국, 근거 없는 소문은 최진실을 죽음에 이르게 하였다.[633][294][45][65][634][635][636][637][638][639][640][641][51][642][643][644][645][646][647][648][649][650][651][652][653][654][655] 경찰청 프로파일러 출신 대한민국 내 최초 심리 부검 전문가 서종한은 자살과 관련된 직접적 요인과 추가적 위험 요인에 따라 위험도를 분류하여 '고위험군 분류 프레임워크'를 만들어냈는데, 최진실은 필수 위험 요인('죽고 싶다', '아이들을 부탁한다') + 추가적 위험 요인 4개 이상(악성 댓글, 불면증, 이혼, 부부폭력, 우울증, 자살자 경험 등)에 의거해 고위험군에 속했다고 설명했다.[656][657]

  • 대중과 관련된 언급

정말 밉고 힘들다. 쫓아가서 때려주고도 싶다. 청소년이라면 그 부모를 찾아가서 길거리에 발가벗겨 놓고 창피를 주고 싶다. 하지만 그들이 정말 날 미워만 했을까? 늘 욕만 했을까? 아닐 거야. 때론 나를 보고 즐거워도 했을 거고, 또 행복해 하기도 했을 거야. 그러다가 미워하기도 하고 욕도 했겠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를 욕하는 이들보다, 나를 모함하는 이들보다 나를 사랑하고 아껴주는 이들이 훨씬 많은 것은 사실이잖아.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나를 좋아하는데, 몇 명이 날 욕한다고 대수겠어?[146]

저에게는 두 아이가 있고 제 이름과도 같은 '진실'이 있습니다.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그 진실은 제가 죽어서라도 세상 모든 사람들이 알아줄 것이라고 믿고, 이제는 당당히 세상과 맞서 열심히 살 것입니다.[293][658]

— MBC장미의 전쟁》(2004년)으로 활동 복귀를 앞둔 무렵

기타 편집

2002년부터 2004년 사이에 최진실에 대한 인격 살인 행각은 조직적으로 펼쳐졌다. 이 인격 살인 행각에 최진실과 친분도 있고 MBC 연출가 출신이기도 했던 주철환도 가담했다는 사실은 문제의 심각성을 말해 주었다.

이화여자대학교 언론홍보영상학부 교수 주철환MBC장미의 전쟁》(2004년)의 흥행 저조에 대해 "들은 솔직한 최진실을 원했지만 그는 옛날 이미지를 벗어나지 않으려 했다"고 말했다. 주철환은 최진실의 연기를 두고 '캐릭터의 다양화'가 아니라 '솔직' 운운 하는 인격권 침해의 말을 하였는데, 최진실이 연기에 임함에 있어 '솔직하지 못했다'는 객관적 증거를 제시한 적도 없었다. 또 최진실은 이전에 산부인과 의사 역할을 맡은 적도 없었다. 즉 이것 자체만으로도 새로운 모습이었다.[659][660]

최진실은 《장밋빛 인생》(2005년)에 출연할 때에도 이런 식의 불합리한 저항을 겪어야 했다. 《장밋빛 인생》의 연출가는 김종창이었고 김종창은 자신의 배우자 또한 그런 저항 세력 중 하나였음을 밝혔었다.[661][662] 동아일보 기자 김갑식은 '안티최진실카페' 회원의 최진실[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에 대한 공격을 그대로 기사로 유포했고, 매니지먼트사 '싸이더스HQ' 본부장 박성혜는 최진실[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에 대해 '고상(高尙)' 운운 하는 만행을 저질렀으며, 최진실이 이런 인격 살인 행각을 극복하고 《장밋빛 인생》을 성공시키며 상승 모멘텀을 구축하니 이에 대해 마이데일리 기자 배국남은 비아냥대는 기사[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를 쓰며 최진실을 짓밟았다.[660][663][664][665][321][666]

서프라이즈 논객 출신 김동렬도 최진실을 짓밟는 데 앞장섰다. 최진실이 '이혼하지 않는다'고 한 데에는 합리적 이유가 충분한데 그것을 자기 멋대로 해석해서 망상을 늘어놓으며 진보 정치 세력이 최진실을 비하하고 공격하는 데 기여했다.[667]

명예훼손 수사 편집

2008년 9월 8일, 코미디언 정선희의 남편인 배우 안재환이 자신의 승용차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 경찰 조사 결과에 따르면 안재환의 사인은 자살로 밝혀졌다.[668][669] 이후 최진실은 "최진실이 안재환을 대상으로 사채업을 했다"라는 거짓 소문에 시달렸다.[670] 이에 대해 최진실은 2008년 9월 20일까지도 가볍게 넘기다가 인터넷상의 여론이 심각하게 흘러가는 것을 지켜보면서 2008년 9월 21일 입장 변화를 보였고, 이후 "연예인으로 살다보면 어느 정도의 루머를 감수하며 살아가야 하지만, 이번 사건은 안재환 씨의 유가족과 친구 정선희도 너무나 큰 상처를 입었기 때문에 그냥 넘길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라고 말하며 강경한 입장을 표명했다.[671][672][673][51]

2008년 9월 22일, 최진실은 사이버테러대응센터에 이 사건을 의뢰했다. 인터넷상에서 해당 거짓 소문이 확대되면서 각종 포털 사이트에 2008년 9월 22일 하루 동안 최진실의 '연관 검색어'로 '안재환'과 '사채'가 언급되는 것을 지켜본 최진실의 소속사는 해당 포털 사이트에 해당 게시물을 삭제해줄 것을 요청하였고, 이후 최진실의 '연관 검색어'에서 '사채'라는 용어는 빠졌다. 이에 대해 최진실의 소속사는 "비슷한 피해자가 나타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적극적인 조치를 취하게 됐다"라고 설명했다.[672] 2008년 9월 28일, 증권사 직원 백 모 씨(여·25세)가 경찰에 출두해 피의자 진술을 하였고, 최진실은 그 날 저녁 백 모 씨로부터 선처를 요구하는 전화를 받았다. 이에 최진실은 백 모 씨가 자신의 연락처를 알아낸 점과 당당하게 선처를 요구하는 태도에서 심한 두려움과 모멸감을 느꼈다. 그 후에도 계속된 백 모 씨의 일방적인 전화에 대해 최진실은 친구인 의 김재우 기자에게 '악마의 전화'라고 표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진실은 백 모 씨가 최초 유포자를 알려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 전화를 받았다.[674][675][676][677] 2008년 9월 29일, 서울 서초경찰서 사이버범죄 수사팀은 허위사실을 유포한 혐의로 백 모 씨를 입건했다.

2008년 9월 30일, 최진실은 김재우 기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채설 유포자가 잡혔으니 이제는 사람들이 내 진실을 믿어줄 줄 알았어. 그런데 토론 게시판에서 내 이야기에 서로 찬반양론을 펼치는데, 아직도 내가 안재환을 죽음으로 몰고 간 악덕 사채업자로 그대로 묵인하는 사람들이 많더라. 나 너무 떨려. 이대로 가다간 정말 죽을 것 같아. 죽으면 내 진실을 믿어줄까. 내 이름은 ‘최진실’인데, 사람들은 나를 ‘최가식’이라고 부르네. 너무도 슬픈 일이지 않니? 환희, 준희에게는 미안하지만 세상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는 어머니보단 죽어서 진실이 밝혀진 어머니가 낫지 않을까.[678][679][680]

경찰 조사 결과, 허위사실유포의 근원지는 증권가 사설 정보지인 것으로 밝혀졌다. 경찰은 기술적인 문제로 최초 유포자는 찾아내지 못했다. 미지의 인물이 대한민국 대통령실 경호처 경호과장 출처라면서 최진실이 악덕 사채업자라는 소설을 작성했고, 그것을 쪽지 형태로 백 모 씨 등에게 보냈으며, 백 모 씨 등은 이 쪽지를 150여 명에게 재전송했다. 경찰 조사에서 백 모 씨 등은 이 쪽지를 보낸 사람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했고, 경찰이 백 모 씨 등의 컴퓨터[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를 조사했지만 저장된 내용이 없어서 최초 유포자는 잡지 못했다.[681][682][683][684][685][686][687][688][689][690]

2008년 10월 8일, 국외에 서버를 두고 있는 사이트를 통해 백 모 씨의 신분이 노출되면서 백 모 씨의 싸이월드 '미니홈피'는 네티즌들로부터 공격을 받았다.[691][692] 2008년 10월 13일, 백 모 씨는 증권회사를 사직했다.[693]

2009년 6월 16일, 1심 법원은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법상 명예훼손 혐의'로 기소된 백 모 씨(여·25세)와 증권사 직원 백 모 씨(남·35세)에게 징역형 10개월, 집행유예 2년, 사회봉사 120시간을 각각 선고하였다. 1심 재판부는 "피고인들이 허위사실인지 몰랐고, 비방할 목적이 없었다고 주장하지만, 사건 당시 피고인들은 충분히 이 사건 내용이 허위사실임을 인지했고, 비방 목적으로 인터넷에 글을 올린 것으로 보인다"라고 밝혔다.[694] 이에 징역형이 확정되면 해직 대상이 되는 백 모 씨(남·35세)는 항소를 하였다. 2009년 12월 10일, 2심 법원은 백 모 씨(남·35세)에게 벌금 4천만 원을 선고하였다.[695][696][697]

항소심 최완주 부장판사는 '충격적인 사실! 최진실, 안재환 사채 관련 의혹'이라는 제목의 쪽지를 인터넷 메신저로 100여 명에게 유포한 백 모 씨(남·35세)에게 벌금형에 그친 선고를 한 이유에 대해 "최진실 씨의 명예를 심각하게 훼손하는 내용을 확인 없이 재전송해 죄질이 가볍지 않다. 백 씨가 깊이 반성한다. 쪽지를 최초에 작성한 사람이 밝혀지지 않았고, 언론을 통해 확대된 점 등에서 최진실 씨에 대한 명예훼손 외에 최진실 씨의 자살에 대한 결과까지 책임을 지울 수는 없다"라고 설명했다.[696][697]

최진실의 사망 후에도 최진실의 '미니홈피'는 열려있었다. 2010년 7월, 최진실의 딸 최준희가 최진실의 '미니홈피'에 "엄마 사랑하고 지켜봐"라는 일촌평을 남겼는데, 며칠 후 이것이 기사화되면서 하루 만에 30여 만 명이 최준희의 '미니홈피'를 방문하였고 3천여 명이 응원 메시지를 남겼다.[698][699]

  • 허위사실유포와 관련된 언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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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많은 부분에서 욕심을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더 비우고 더 몸을 낮추라고 하니 내가 어디까지 자존심을 버려야 할까. 행복했던 시절, 그 행복이 당연하다며 오만했던 시절이 지금은 너무도 그립다. 이 고통은 아무도 몰라. 그냥 최진실이 누렸던 모든 것을 한순간에 놓고 싶을 정도로 너무도 아파 미치겠어.[700]

— 사망 이틀 전인 2008년 9월 30일 친구 김재우에게 한 말

여성학과의 만남 편집

2004년 8월 1일, 조성민은 최진실의 자택을 찾아가 최진실을 폭행하였고, 이에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에 현행범으로 체포되었는데, 조성민은 이 사건에 대해 쌍방 폭행이라고 주장하였다. 이후 최진실은 자신의 멍든 얼굴과 파손된 집안 내부 등을 언론에 공개하였다. 그러자 신한이 최진실을 상대로 30억 원 가량의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하였다. 최진실은 2004년 3월에 아파트 광고 모델로서 신한과 계약을 맺었었다.[701][592]

이 소송과 관련하여 신한의 소장에는 '이 아파트에 들어가면 멀쩡한 부부도 갈라서겠다'는 구절이 명시되어 있었다. 2004년 11월 24일, 최진실은 여성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 사건에 대해 '이혼녀에 대한 편견과 차별에 의한 여성인권 침해'라고 규정하였고 여성운동단체와 연대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최진실은 이 인터뷰에서 "이번 사건으로 인해 이혼녀가 '사회적 명예가 실추된 사람', '사생활 관리를 못한 사람'이라는 '주홍글씨' 선례를 남기지 않게 최선을 다해 대응하겠다. (신한이 내게 소송을 건 이유로 미루어보아) 그렇다면 신한이혼녀에겐 아예 아파트 분양 자격을 주지 말아야 하는 것 아닌가. 이번 사건을 통해 '여성'으로서의 아픔을 절감했다. 여성인권 향상을 위해 애쓰는 여성운동단체들이 내 도움을 필요로 한다면 언제든 돕고 싶다"라고 말했다.[702][703]

이 사건과 관련하여 민변 여성복지위원장 진선미 변호사는 "연예인의 CF 계약은 일명 '노예계약'이라지만, 이번 사안처럼 이혼을 최대 귀책사유로 보는 것은 정말 비인간적·반인권적이다"라고 말했다. 수년간 한국여성의전화 대표를 역임했던 신혜수 유엔 여성 차별 철폐 위원회 부위원장은 "(신한의 소송은) 정말 시대착오적 발상이다. 최진실 씨가 양육권 확보를 위해 최선을 다한 점 등을 감안한다면 오히려 회사 측은 최진실 씨를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당당하게 방어한 적극적 여성 이미지로 활용할 수도 있지 않았겠느냐. 최진실 씨의 사건이 잘 매듭지어져서 대중 여성의식을 고양시키는 좋은 계기가 되길 바란다"라고 말했다.[702][278][285][703]

이 사건을 계기로 최진실은 여성·청소년 문제에 관심이 많은 법호사 강지원과 교류하게 되었고, 그 인연으로 여성학자 오한숙희와도 교류하게 되었으며, 여성학 관련 서적도 읽게 되었다. 오한숙희는 "최진실은 서점에서 내 책을 두어 권 구해 읽었노라고 했다. 최진실은 똑똑했다. 내 책의 내용과 논지를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최진실은 자신세상을 잘 몰랐다고, 그저 자신만 열심히 살면 되는 줄 알았다고 했다"라고 말했다. 강지원은 이 사건의 무료 변론을 맡아 최진실을 지원하였고, 최진실의 사망 후에는 최진실의 자녀들을 위해 변론을 했는데, 이 법정공방은 2010년 2월 9일에 마무리되었다.[704][592][593]

2004년 12월 21일, '여성 문화예술인의 인권에 관한 토론회'가 '문화세상 이프토피아'와 '여성문화예술기획' 주최로 열렸다. 여성신문 박이은경 편집국장은 '여성 문화예술인의 사생활에 관한 보도 실태'라는 주제 발표에서 "1990년대 말에는 여성 연예인의 섹스 비디오 사건이, 2000년대 들어서는 여성 연예인의 가정폭력 사건이 이슈로 떠올랐다. 관련 사건이 알려지면 공인이라는 굴레 때문에 영원히 피해자로 남거나 스타에서 추락하는 극단적 결과만 남는다. 최진실 씨는 앞으로 여성운동계와 연대하겠다는 뜻을 밝혔다"라고 말했다. 오한숙희는 "이혼이나 가정폭력으로 고민하는 많은 여성들에게 최진실 씨 사건이 어떻게 다뤄지는가는 매우 중요하다. 최진실 씨 피소 사건이 부당하다는 내용의 서명 운동을 펼치겠다. 최진실 씨가 이번 사건을 계기로 여성학 책을 보고 있다고 한다. 여성 연예인 대상의 인권상담소가 필요한 것 같고 이들을 위해 인터넷이나 책을 보내주는 방법으로 여성학 강의를 하겠다"라고 말했다. '여성문화예술기획' 이혜경 대표는 "최진실 씨는 이번 일로 여성 문제에 눈을 뜨게 됐다고 했고 이혼한 여성들을 위해 애쓰겠다고 했다. 광고 모델이 가정폭력의 피해자가 되었고 그 가정폭력 사건이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다고 해서 광고주인 기업이 폭력 피해자인 모델에게 손해배상금을 청구한 논리는 부당하다"라고 말했다. '문화세상 이프토피아' 박옥희 대표는 "가정폭력의 피해자인 여성 연예인이 그 가정폭력 사건으로 인해 30억 원 가량의 소송을 당할 수 있다는 기사만으로도 그러한 풍토를 당연시 여기는 사회 문화가 형성되지 않을까 우려된다"라고 말했다.[705][706][707][708][709]

이후 최진실은 '여성단체 후원 바자회'에 물품을 기증하는 등 자신의 위치에서 성 차별을 일소하는 일에 동참하였다.[593][710]

자녀의 성·본 변경 편집

개정된 민법이 "자(子)의 복리를 위하여 자(子)의 성(姓)과 본(本)을 변경할 필요가 있을 때는 부모 또는 자(子)의 청구에 의하여 법원의 허가를 받아 이를 변경할 수 있다. 다만 자(子)가 미성년자이고 법정대리인이 청구할 수 없을 경우에는 제777조의 규정에 따른 친족 또는 검사가 청구할 수 있다"라고 규정하면서 2008년 1월 1일부터 자녀의 성(姓)과 본(本) 변경이 가능해졌다. 자녀의 성을 바꿀 수 있게 된 것은 사회사적으로 엄청난 변화였다.[711][712]

2008년 1월, 최진실은 자녀의 성본(姓本) 변경 허가 신청을 하였다. 최진실은 "두 자녀를 당당하게 키우고 싶은 생각에서 신청서를 냈다"라고 밝혔다. 2008년 5월, 법원은 최진실의 신청을 받아들여 자녀의 성본(姓本) 변경을 허가하였다. 최진실의 딸은 성본(姓本) 변경과 함께 '수민'이라는 이름에서 '준희'라는 이름으로 개명하였다.[436][713][714][715] 최진실의 이 결정이 알려지자 '용기 있는 선택'이라는 의견과 '근본을 뒤흔드는 잘못'이라는 의견이 있었다.[716]

이화여자대학교 여성학과 교수 장필화는 "우리나라가 1994년에 여성차별철폐협약에 가입하면서 가족의 성(姓)을 협의해서 정할 수 있고, 자녀에게 어머니의 성(姓)을 줄 수 있다고 협약 조인을 했지만 그 당시에는 이것이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아버지의 성(姓)을 따라야 한다는 전통사상 때문에 저항이 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상이 변화하고 있음을 법이 받아들인 것이고 이에 따라 합법성의 기준이 변한 것이다"라고 말했다.[717][718][716] 이런 사회 변화 속에서 혼인신고서에는 성본(姓本)의 협의 항목이 생겼는데, '자녀의 성본(姓本)을 어머니의 성본(姓本)으로 하는 협의를 하였습니까?'라는 항목을 통해 어머니도 자신의 성(姓)을 자녀에게 줄 수 있게 되었다.[719][720]

자녀의 성본(姓本) 변경이 가능해지자 많은 이들이 자녀의 성본(姓本) 변경 허가 신청을 하였다. 2008년 2월 25일에 발표된 대법원의 '자녀 성본(姓本) 변경 허가 청구 처리 현황'에 따르면, 그 시점까지 자녀의 성본(姓本) 변경 허가 신청은 8169건이 접수되었다.[716]

대한민국에서는 어머니의 성(姓)을 쓰면 "뿌리가 없어진다"라는 전근대적인 사고방식이 남아있었는데, 이는 대한민국 사회가 오랫동안 견지해온 부권제에서 기인했다. 법체계가 부성주의(父姓主義) 및 성(姓) 불변 원칙을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의식 속에는 여전히 그 잔영이 남아있었고, 이런 고정관념으로 인해 최진실은 일부 네티즌들로부터 인터넷상에서 스토킹을 당해야 했다. 2008년 9월 4일, 자녀의 성·본 변경과 관련하여 악성 댓글이 도를 넘자 최진실은 자녀들을 보호하고자 자녀들의 방송 노출을 자제하겠다는 뜻을 표했다.[721][722][723]

통계청에 따르면, 2008년 기준으로 대한민국은 사회적으로 이혼율과 재혼율이 증가하는 추세에 있었다.[724][725] 2008년 3월 10일, 스포츠한국은 "대한민국은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상승하고 사회 구조가 모계(母系)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지만, 자식이 어머니의 성(姓)을 따르는 것과 싱글맘의 존재가 여전히 뉴스가 되는 남성 중심 사회이다. 최진실의 자녀 성본(姓本) 변경은 최진실의 상징성으로 인해 대한민국이라는 사회에서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어느 수준에 와있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기회를 제공한다"라는 기사를 실었다.[726][727] 이런 사회 분위기 속에서 최진실의 자녀 성본(姓本) 변경은 유명인으로서는 첫 사례여서 화제가 되었다.[728][729]

최진실의 자녀 성본(姓本) 변경에 대해 대중문화 평론가 배국남은 "편견에 시달리는 싱글맘들이 어머니로서 좀 더 자신감있게 살아갈 수 있도록 사회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일조할 것으로 보인다. 변화하는 가족의 형태, 의미, 방향 등에 대해 생각할 계기를 마련해주었다"라고 논평하였다.[730]

2008년 9월 30일, 시사IN고재열 기자 주최의 《블로거와의 대화》에 첫 초대 명사로 나온 민주당 소속 국회의원 최문순은 블로거들의 다음 대화 상대자로 최진실을 추천했다.[731] 최문순은 "최진실은 자녀의 성본(姓本) 변경 이후 사회의식에 눈을 떴다. 여러 가지 힘든 일들을 겪으면서 사회문제에 눈을 떴고 눈을 뜬 것을 넘어서 자녀들에게 자신의 성(姓)을 쓰게 할 만큼 사회 진보의 선봉에 선 그를 만나봐야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최진실과 다른 또 다른 최진실을 발견할 수 있다"라고 말하면서 최진실을 블로거들이 만나볼만한 인물로 평가했다. 최진실과 최문순은 최문순이 MBC 사장으로 재직하던 시절인 2005년부터 친분을 나눈 사이였다. 최문순은 고재열에게 '아는 연예인, 최진실', '친한 연예인, 최진실', '좋아하는 연예인, 최진실', '블로거들이 만나야 할 연예인, 최진실', '자신이 섭외해줄 수 있는 연예인, 최진실', '《블로거와의 대화》에 자신이 블로거 자격으로 패널로 참여할 대상, 최진실' 등으로 최진실에 대해 말했고, 고재열은 《블로거와의 대화》를 안착시키기 위해 최진실을 최대한 빨리 초대하려고 계획했다.[732][733]

사회적 발언 편집

미국산 쇠고기 수입 문제 편집

2008년 5월, 최진실은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지켜보면서 침통한 심경을 토로했다.[734][735] 미국산 쇠고기 정부 고시가 있던 5월 29일에 최진실은 스포츠한국과의 인터뷰에서 결국 결국 정부가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발표하는 데 대해 섭섭함을 표했다.

얼마 전 홍콩에 다녀왔는데 현지 신문 1면에 우리의 촛불문화제를 다룬 뉴스가 실려 있었다. 한국의 학생들이 쇠고기 수입을 반대해 촛불을 켰다는 보도를 보고 마음이 아팠다. 가슴이 먹먹해져 왔다. 이런 일로 대한민국을 알리는 게 씁쓸했다. 난 설렁탕을 정말 좋아하고 아이들에게도 자주 먹이는데 어머니로서 참을 수가 없다. 밥을 먹을 때마다 음식을 의심하며 먹어야 한다는 게 화가 난다.[736][737][738][739]

독도 문제 편집

2008년 7월, 최진실은 일본 정부가 교과서 지도 요령 해설서에 독도 영유권 명기 방침을 정했다는 소식에 분노를 표현했다. 7월 14일 스포츠한국과의 인터뷰, OBS최진실의 진실과 구라》 등에서 일본의 부당한 행위에 대해 비판의 날을 세웠다.

독도 생각만 하면 눈물이 난다. 어이가 없다. 일본이 왜 어떤 이유로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고 우겨대는지 모르겠다. 우리나라가 힘이 있다면 이렇게 무시할 수 있을지 싶다. 물론 전문가들이 계시지만 국민의 한 사람이자 가정주부로서 독도 문제를 바라보는 마음이 매우 아프다. 내가 일본 출입 금지 조치를 당하더라도 할 말은 하고 싶다. 일본은 독도 영유권에 대해 차근차근히 준비를 해온 것으로 전해진다. 일본이 만든 세계지도에는 이미 독도가 '다케시마'로 표시돼 있다고 하더라. 사실 적극적이고 꾸준한 대처가 필요했다. 저들은 우리의 황망함을 오히려 즐길지도 모른다. 당장 흥분하기보다 앞으로 10년 뒤를 내다보고 대한민국의 힘을 키워야 한다. 독도뿐 아니라 일본군 위안부 문제 등 일본과 해결해야 할 문제가 많다. 힘을 키워 후손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역사를 만들고 싶다.[740][741][742]

동성애 문제 편집

2008년 3월, OBS최진실의 진실과 구라》에서 동성애를 다루고 싶다는 의견을 개진했다. 하지만 시대적 한계로 좌초되었다.[12][743]

공익적 활동 편집

소년소녀가장 돕기 자선 공연 편집

1991년 5월, 최진실은 소년소녀가장 돕기 자선 공연을 가졌고 공연 수익금 3천만 원을 소년소녀 가장들을 돕는 데 사용하였다. 최진실은 어려웠던 가정형편 때문에 고등학교 시절에 등록금 독촉을 자주 받으며 마음의 상처를 입은 경험이 있었다.[744]

개안 수술비 지원 편집

1999년 4월 23일, 삼성서울병원에서 시각장애인 개안수술비 지원을 위한 후원금 약정서 전달식을 가졌다.

기아자동차 무료 광고 출연 편집

1997년 12월 3일, 대한민국IMF 구제금융 요청이 발생했다. 이는 대한민국이 외환위기를 겪으며 국제 통화 기금과 자금 지원 양해각서를 체결한 사건이다. 이런 경제 상황 속에서 1997년 기아자동차는 부도가 났다. 이 때 최진실은 부도가 난 기아자동차를 위해 광고에 무료로 출연했다. 최진실은 최고의 광고 모델이었고, CF 1편 출연료는 3억 원에 달하는 배우였기에 기아자동차에 큰 도움이 되었다.[745][746]

학예사 자원 편집

2000년 5월, 최진실은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리는 '젊은 작가 창작 지원을 위한 전시회'의 큐레이터에 자원했다. 이 전시회의 수익금은 젊은 미술가 3∼4명에게 창작 기금으로 기부하기로 하였는데, 최진실은 "우리나라를 문화강국으로 만드는 데 도움이 되기 위해 큐레이터를 자원했다"고 밝혔다.[747]

연예인의 퍼블리시티권 편집

2003년 6월 14일에 중앙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장재옥은 '문화예술의 재산적 가치'를 주제로 열린 학술세미나에서 '연예인의 퍼블리시티권'을 발제로 삼았는데, 이 발제는 대한민국 연예인의 초상영리권이 얼마나 취약한지를 보여주었다. 연예인의 퍼블리시티권 개념을 다룬 판례는 주로 광고와 관련되어 있었는데, 2000년에 6개월의 계약 기간을 어기고 60개월 이상 최진실의 초상을 사용한 제약업체에 4000만 원의 배상을 판시한 사례가 대표적이었다. 최진실은 계약 기간보다 5년을 더 자신의 초상을 사용한 제약업체를 대상으로 5억 원의 손해배상소송을 냈지만, 법원은 제약업체에게 4000만 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748][749][750][751]

전국 대학 컴퓨터 등 지원 편집

2002년 6월, 최진실은 전국 대학 가운데 재정 형편이 어려운 학교를 찾아 컴퓨터 등 학습기자재는 물론 재정도 직접 지원하였다. 과거 자신을 전속 CF 모델로 기용했던 한국통신이 다시 여전히 최고의 조건으로 재계약해준 것을 계기로 이 회사와 손을 잡고 이같은 일을 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대해 최진실은 "한 아이의 어머니로서 교육 발전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고 싶었다"고 말했다.[752]

한동대학교 재정 지원 편집

2002년 6월 12일, 최진실은 한동대학교 김영길 총장에게 5천만 원의 재정 지원 기금을 전달했다. 2002년 3월에 배우 활동을 재개하면서 "재정이 어려운 대학을 돕고 싶다"라는 의사를 밝혔는데, 한동대학교를 첫 기부 대상으로 선정했다. 이에 한동대학교에는 '최진실 장학금'이 생겼다. 대한민국 내 대학교에 대중예술인의 이름을 건 장학금이 생긴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753][754]

'밀양 지역 고교생의 여중생 집단 성폭행 사건' 생존자 지원 편집

2004년 12월 13일, 밀양 지역 고교생의 여중생 집단 성폭행 사건 생존자를 지원하였다.[755]

히말라야 등반 편집

2005년 12월, 최진실은 9박 10일의 일정으로 히말라야산맥에 등반했는데, 히말라야산맥의 안나푸르나산 남벽 베이스캠프(4200m)까지 올랐다. 평소에도 등산을 즐겼지만 히말라야산맥 등반을 위해 청계산을 오르며 기초 체력을 다졌다.[756][757]

가톨릭대학교 의정부성모병원 백혈병 환자들이 만든 '루 산악회' 회원 7명, 산악인 한완용·나관주, 배우 손현주·신애 등이 동행했다. '수확의 여신'이라는 뜻을 가진 안나푸르나로의 산행 목적은 백혈병 환자들과 동행하며 그들의 건강 회복을 기원하고 재활 의지를 북돋우기 위한 것이었다. KBS 《장밋빛 인생》에서 연기 호흡을 맞춘 손현주가 최진실에게 등반을 권했고, 최진실이 이에 흔쾌히 동의하여 함께 산행에 참여하게 되었다.[756][758][759][760]

최진실은 등반 일정 틈틈이 소설 《가시고기》(2000년)의 작가 조창인의 신작 소설인 《첫사랑》(2005년)을 읽었는데, 《첫사랑》은 최진실이 《가시고기》를 읽으며 눈물을 흘렸다는 얘기를 전해들은 조창인이 최진실에게 선물한 것이었다. 《첫사랑》은 히말라야를 모티브로 삼은 작품이다. 한편, 최진실은 "드라마 《장밋빛 인생》이 인생의 의미를 일깨워줬다면 이번 히말라야 등반은 세상에 대한 눈을 뜨게 해준 여행이었다"라고 말면서 히말라야 등반에 대한 남다른 감회를 밝혔다.[758][761][762][763][764][765]

히말라야의 별은 눈으로 보는 게 아냐. 귀로 듣는 거야.
나는 히말라야 별들의 속삭임을 들으러 갈 거야.
그리고 별들에게 묻겠어.
내 사랑이 어디쯤 가고 있는지를…….

 
— 조창인 , 《첫사랑》 중에서[766]

굿네이버스 친선대사 편집

2006년 4월, 굿네이버스 친선대사로 위촉을 받았다. 굿네이버스는 아동문제 등을 해결하는 일과 관련하여 활발한 활동을 하는 NGO인데, 굿네이버스 측에서 최진실에게 친선대사 제의를 해왔고, 두 자녀를 둔 어머니로서 평소 아이들의 일에 관심이 많았던 최진실은 이에 흔쾌히 응했다.[323][269][767][768][769][770] 최진실은 보육원을 방문하기도 하고 가족들에게 입양에 대한 강한 의지를 드러내기도 하는 등 아동 인권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65][771][772][773][774]

이듬해인 2007년 7월, 최진실은 굿네이버스와 한미은행 노동조합이 주최한 결식 아동을 위한 여름방학교실 캠프 '신나는 여름 이야기'에 참석하였다. 최진실은 약 100여 명의 결식 저소득 아동 및 자원봉사자가 참석한 이 행사에서 다양한 전통문화 체험 프로그램에 아이들과 함께 참여하였고,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식사를 하고, 함께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고, 아이들의 머리를 감겨 주기도 하였다.[775]

최진실 재단 편집

2008년 11월 19일 최진실의 사십구재를 마친 뒤, 최진실의 친구들은 '최진실 재단'을 세우기로 의견을 모았다.[776] 이들은 생전 자선사업에 관심이 많았던 최진실의 유지를 받들어 장학사업과 불우이웃을 돕는 재단을 만들기로 했다.[777][778][779][780] 재단 운용에 필요한 자금은 이들의 사비를 모으는 것으로 의견을 모았다.[781]

2008년 12월 21일, 코미디언 이영자와 메이크업 아티스트 조성아 등 최진실의 친구들이 사회사업을 시작했다. 이들은 서울 동작구 노량진동의 성로원 아기집에 1,000만 원 남짓한 돈을 전달하는 것으로 '최진실 재단'의 첫 삽을 떴다.[782]

2011년 10월 6일, 최환희·최준희는 '2011 미스아시아퍼시픽월드' 세계대회 개최 기념 및 아동 복지 후원 '진주상단' 한복 패션쇼에 참여했다.[783]

기타 편집

기독교와의 인연 편집

최진실은 강남중앙침례교회를 다니며 신앙생활을 하였다. 갑산공원 안에는 강남중앙침례교회가 임대한 부지가 있고 최진실은 그곳에 잠들어 있다.[784][785]

광고 문구 《남자는 여자 하기 나름이에요》 편집

1988년 최진실은 광고 문구 <남자는 여자 하기 나름이에요>가 담긴 삼성전자 광고로 광고계의 신화적 존재가 되었다.[786][787][788][789][566] 이 문구는 여성이 말하느냐, 남성이 말하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질 수 있다. 화자가 여성이라면 '여자 하기'에 방점이 찍히고 남성이라면 '남자는'에 방점이 찍히게 된다. 화자의 성을 배제한 채 문구 자체로만 따져도 주체는 여성이고 객체는 남성이다. 그러므로 여성은 '남자는 여자 하기 나름'이라고 말해야 맞고 남성은 '여자는 남자 하기 나름'이라고 말하는 게 맞다. 이것은 버전을 달리하여 동생은 '형은 동생 하기 나름'이라고 말해야 하는 것이고 형은 '동생은 형 하기 나름'이라고 말해야 하는 것이다. 남성중심적 사회문화로 인해 이 광고 문구는 여성의 인권과 관련하여 여성운동계의 관심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790][593][791][792] 남성중심사회는 '남자는'에 방점을 찍으며 이 광고 문구를 여성이 남성에게 아부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793][794][617]

여성 화자가 '남자는 여자 하기 나름'이라고 말할 때 여성이 주체이고 남성은 객체가 되는 의미로 여성의 주체성을 드러낸다.[795]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폭력을 저지르는 사람들은 그 탓을 피해자인 여성에게서 찾는 데 이 말을 사용하는 경향이 있어서 이 말이 부권제에 순응하는 의식을 담고 있다는 변질된 해석의 대상이 되었다. 여성폭력을 저지르는 사람들의 이런 논리는 '가해자는 피해자 하기 나름' 혹은 '강자는 약자 하기 나름'이라고 주장하는 것으로, 궤변이고 2차 가해행위이며 법정에서 받아들여질 리 만무한 말일 뿐이다. 즉 남성중심사회에서 남성 화자가 '남자는 여자하기 나름'이라고 말하는 것은 대개 여성에 대한 교활한 덫이기 십상이다.[796][797][798]

여성폭력범들이나 그 공범들 혹은 그 심정적 동조자들이 흔히 사용하는 말을 광고 속에서 최진실이 사용하고 해당 광고가 사회적으로 크게 반향을 일으키면서 '남자는 여자 하기 나름이에요'가 유행어가 되며 사회적 영향력이 커지자 최진실이 부권제를 공고히 하는 데 기여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794] 하지만 이는 '범죄에서 가해자가 피해자 탓 하는 논리'에 휘둘린 측면이 없지 않다. 여성이 '세상은 여자 하기 나름'이라고 말한다거나, 남성이 '여자는 남자 하기 나름'이라고 말하는 것에 이런 식의 해석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799][800][801][802][803]

'A는 B하기 나름이다'라는 관용구를 외국인에게 가르칠 때 (피해자를 부당하게 공격하기 위해) A 자리에는 '가해자'를 넣고 B 자리에는 '피해자'를 넣으라고 가르치지는 않는다. 이 관용구에서 A, B 자리에는 각기 존엄한 존재로서 서로 대등한 경우의 모든 관계가 해당이 될 수 있다. 가치중립적인 칼도 사람을 죽이는 데 이용되기도 한다. 그렇다고 칼을 발명한 사람, 칼을 생산하는 사람이 그 살인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아이에게 칼의 용도를 가르칠 때 (타인을 부당하게 공격하기 위해) 사람을 찌르는 데 사용하라고 가르치지는 않는다. 즉 이 관용구에는 죄가 없고 이 관용구의 맥락이 성 차별적 환경이라는 것이 문제의 본질이다.

최진실은 자전 에세이 《그래, 오늘 하루도 진실하게 살자》(1998년)에서 이 사안과 관련하여 언급한 바 있다. 이 책에서 성장기에 자신 또한 어머니의 삶에서 여성 차별을 목격했고 어머니를 학대하는 친할머니에게 항의한 적도 있다고 하며 성 차별에 대해 어린 시절부터 문제 의식을 가지고 있었음을 밝혔다. 다만 광고자본주의의 꽃이고 그런 광고계에서 모델로서 사회적 책임을 모두 짊어지기에는 한계가 있음을 설명하였다. 이런 맥락 속에서 영화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1994년)에 출연하게 되고 이 영화에서 젠더폭력에 정면 승부하는 연기를 하였는데 이런 배우로서의 경험을 통해 여성인권에 대한 생각도 더 깊어지게 되었다고 서술하였다.[804]

수십 명의 보도진이 몰려든 강당에서 심포지엄이 개최되고 플래카드 <여성운동의 새로운 전망> 아래에서 주인공 강민주(최진실 분)는 연구 발표를 하며 "이 땅의 모든 것을 자랑스럽게 누리고 있는 남성 여러분! 오늘날 많은 남자들이 여성해방의 당위성을 말로는 이해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실천할 생각은 눈꼽만큼도 없는 것이 남자들입니다. 여자를 가둬놔야 당신들이 자유로울 수 있으니까요"라고 말한다.

최진실은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을 촬영할 때 떨리는 목소리로 이 대사를 표현했다고 하였고 연예인으로서 늘 좋은 대접만 받아오던 입장에서 여성 차별을 피부로 느끼지 못하며 살아오다가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을 하면서 대한민국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은 족쇄일 수 있음을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었다고 자평하였다.[805] 최진실은 이 영화로 백상예술대상에서 영화 부문 여자 최우수연기상을 받았다.

삼성전자 VCR 광고에서 "남자는 여자 하기 나름이에요"라고 말한 것이나 영화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에서 "나는 나를 건설한다"라고 말한 것이나 주체는 화자 최진실이었다. 또 최진실은 자신의 삶을 통해 연애 Archived 2013년 4월 2일 - 웨이백 머신 신화, 결혼 신화, 정상 가족 신화귀류법적으로 깨버림으로써 이 광고 문구와 관련한 사회부채를 갚았다.

영화 《남부군》 편집

최진실은 1989년 영화 《남부군》(1990년)에 캐스팅되었다. 최진실은 이 영화에 캐스팅되면서 이태의 실화소설 《남부군》(1988년)을 5차례 읽었다. 최진실은 이념 문제에 대해서 관심도 없었고 알지도 못했으나 이 책을 읽으면서 그 동안 학교에서 배운 반공교육과는 뭔가 차이가 있다고 느꼈고 이런 측면에 대해 한번쯤 영화로 짚고 넘어가야한다고 생각했다.[806][807]

영화 《남부군》을 완성하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는데, 감독 정지영은 영화 촬영 현장에서 'UIP 직배 반대 운동' 관련 사건 혐의로 형사들에게 체포되었다. 정지영이 구속되자 충무로 영화가에서는 《남부군》 제작이 불가능하리라는 소문이 나돌기도 하였다. 기대했던 국방부의 지원도 거부되었고, 영화 제작비도 바닥이 났으며, 감독이 구속되었기 때문에 이는 자연스러운 상황이었다. 이런 어려운 상황에 처하면서 최진실은 '《남부군》이 영화로 완성되지 못한다 하더라도 좋은 책을 읽었다는 걸로 위안을 삼고 싶다'고 생각하기도 하였다.[806][807][808]

KBS연예가 중계》 제작팀이 영화 촬영 현장에 취재를 하기 위해 내려오게 되었는데, 《연예가 중계》 제작팀이 취재하러 오는 날은 영화 촬영에 최진실이 출연하는 장면이 없어 정지영은 최진실에게 '연예가 중계'용으로 어떤 허구적 장면을 구성해 보라고 하며 다음날 아침까지 그 대본을 써오라고 요구하였다. 최진실은 밤새도록 고민해가면서 3가지 대본을 만들었고, 정지영은 그 중 하나를 선택하였다. 실제 영화에서는 안성기, 이혜영, 최민수, 최진실 등이 한 자리에 등장하는 장면은 없었는데, 최진실은 《연예가 중계》 취재를 위해 이들이 함께 있는 상황을 구성해 보았었다.[806][807]

연극 《버자이너 모놀로그》 편집

최진실은 2004년에 젠더폭력에 대항해 싸우게 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변호사 강지원, 여성학자 오한숙희 등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대법관 김영란의 배우자이기도 한 강지원은 여성문제와 청소년문제에 관심이 많은 법조인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809][810][811]

2004년 12월 26일, 최진실은 여성문화예술기획에서 기획하는 연극 '버자이너 모놀로그'를 강지원과 함께 관람하였다. '버자이너 모놀로그'는 여성의 성기를 소재로 성폭력, 동성애, 오르가슴, 출산 등 여성이 겪는 모든 상황에 대해 거침없이 다루면서 여성의 성적 해방을 추구하는, 대표적인 여성주의 작품이다.[812]

최진실은 이러한 여성운동계와의 소통을 통해 세상을 보는 눈을 하나 더 갖게 되었다는 소회를 밝히기도 하는 등 여성운동계와의 연대 경험은 최진실의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한편, ‘버자이너 모놀로그’ 제작사는 공연 수익금을 일본위안부 관련 활동에 사용하는 등 젠더폭력 피해자들과 마음을 나누는 일에도 참여하였다.[812][813][814][815]

음악 《애인 있어요》 편집

《애인 있어요》는 가수 이은미의 6집 앨범 《Ma Non Tanto》(2005년)에 수록된 타이틀 곡이다.[816] 이 곡은 3년 후 MBC내 생애 마지막 스캔들》(2008년)에 삽입되었고 이 드라마가 인기를 끌면서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817][818]

《애인 있어요》는 애절한 가사와 멜로디, 이은미의 뛰어난 가창력, 최진실이 좋아하는 노래 등으로 알려지면서 큰 인기를 얻어, 2008년·2009년 연속으로 노래방 애창곡 1위에 오르며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발라드 곡으로 자리매김하였다.[819]

2008년 10월 6일, 최진실의 삼우제 때 《애인 있어요》가 울려퍼져 당시 자리한 많은 이들의 마음을 달래 주었다. 2010년 11월, 이은미는 최진실의 친구인 코미디언 이영자가 진행하는 tvN현장 토크쇼 택시》에 게스트로 출연하였는데, 그 때 《애인 있어요》가 담긴 오르골을 이영자에게 선물하기도 했다.[820]

2012년 5월, 이은미는 일본에서 <이은미 스토리>라는 제목으로 첫 팬미팅을 열었는데, 이 자리에서 "《애인 있어요》가 드라마 《내 생애 마지막 스캔들》의 히트와 함께 크게 주목받아 가수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곡이 됐다"라고 밝히기도 하였다.[821]

어록 편집

  • 교육에 대해서[70][822][823]
    • "학교 생활에서 '수우미양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특이 사항에 나타난 인성이 중요한 것이지 공부를 잘한다고 해서 인생을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무엇이 되든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서 꼭 필요한 사람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824][825]
  • 가난에 대해서[826]
    • "나는 가난했다. 동정 받으려고 했던 건 아니지만 수제비 이야기도 모두 사실이다. 그 괴로웠던 시절에 어머니는 일기를 썼다. 어느 날 그 일기를 몰래 읽다가 '죽고 싶어도 진실, 진영 때문에 죽을 수 없다'라고 쓴 부분이 마음에 걸려 밤새 울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그 후 더 슬픈 일이 생겼다. 돈을 조금씩 모은 후 그 일기장은 우리집 가보처럼 되어 있었는데, 언젠가 도둑이 들어 그 일기장까지 훔쳐가 버린 것이다. 그것만은 돌려 받았으면 좋겠다. 도둑에게는 아니겠지만 우리 가족에게는 가장 소중한 보석함이다. 그리고 가난으로 얻은 것이 있다면 오기와 끈기이다. 일을 하다 보면 솔직히 피곤이 극에 달하는 경우도 많다. 그 때도 웃을 수 있는 건 가난 때문에 기죽기 싫었던 사춘기 시절의 오기 덕분이다."
  • 여백의 미에 대해서[826]
    • "채시라 씨와 비교하자면, 채시라 씨는 대중들에게 상상할 수 있는 여백을 마련해 주었지만 난 그렇지 못했다. 사람들은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는 것 같다. 장점이기도 하고 단점이기도 하다."
  • 매력에 대해서[826]
    • "나는 연기자이다. 나에게 매력이 있다면 작품 속의 인물이 매력 있는 것이다. 매력 있는 인물로 보이기 위해 노력하는 편이다. 대중은 내게 부담감이 느껴지지 않는 모양이다. 나 역시 솔직한 게 좋다. 내 이름이 무언가?"
  • 관심사에 대해서[826]
    • "난 텔레비전에서 뉴스를 가장 즐겨 본다. 신문도 꼼꼼히 보는 편이다. 요즘에는 대권주자들에 대해서도 관심이 있다. 정치인들을 보면서 느끼는 것은 앞과 뒤가 너무 다른 것 같다는 것이다. 앞을 보면 점잖고 멀쩡한데 뒤를 보면 그렇지 않다는 느낌이다. 난 정치계고 연예계고 뒤에서 비방하고 다니는 건 딱 질색이다. 왜 정정당당하게 당사자 앞에서 꾸짖지 못하는가? 떠날 때가 아름다운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 차별에 대해서[826]
    •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에게 약한 연출가는 싫다. 신인과 스타급 연기자를 대하는 태도가 너무 차이나는 연출가를 가끔 본다.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 오히려 그 반대여야 하지 않을까?"
  • 매체에 대해서[827]
    • "가능하면 영화와 TV 드라마를 다 하고 싶다. 예전부터 그렇게 해오기도 했고. 그렇다고 이번엔 영화했으니까 다음에는 TV 드라마, 이런 건 아니다. 나는 영화만 하겠다는 마인드는 잘 이해 못하겠다. 정말 그 인물에 빠지고 좋은 연기를 보일 수 있다면 매체는 중요한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 캐릭터에 대해서[827]
    • "아줌마 캐릭터에 대해 거부감은 없다. 알다시피 나는 스무 살 때 "남자는 여자하기 나름이에요"라며 데뷔했다. 처음부터 주부로 나왔기 때문에 거기에는 거부감이 없다. 트렌디 드라마도 많이 했지만 《마누라 죽이기》, 《고스트 맘마》, 《편지》 등처럼 결혼한 여성 역할을 많이 했다. 게다가 나이도 있는데. 내 자리는 내가 알아서 찾아가야 하는 것 같다. 실제 나이보다 더 많은 캐릭터를 연기해야 한다면 또 할 거다. 남들에게 예쁘게 보이고 싶은 그런 마음은 없다."
    • "연하 남성은 안 되고, 이혼 얘기 피하고, 불륜은 빼고…. 그러고 나면 내가 할 수 있는 드라마가 있겠습니까? 어차피 넘어야 할 벽이라면 '맹순의 탈'을 통해 내 인생도 한번 정리하고 싶었습니다."[828][660]
    • "《장밋빛 인생》을 할 때는 정말 연기를 처음 시작할 때 마음으로 임했다. 그런데 그 때보다 더 힘들더라. 그 이유가 뭔지 생각해보니까 깨끗한 도화지 위에 그림을 그리는 게 아니라, 그림이 많이 그려진 것을 갈아엎고 다시 그림을 그리려고 하니까 그랬던 것 같다. 그리고 사람들은 맹순이 모습이 최진실의 사적인 부분과 너무 흡사하지 않냐고 한다. 사실 나는 맹순이에게서 내 모습만 본 게 아니라 우리 어머니 모습도, 옆집 아줌마 모습도 봤다. 그야말로 한국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 같다. 그리고 《장밋빛 인생》에 출연하는 데 부담은 없었다. 맹순이의 마음을 알기 때문에. 만약 내게 결혼, 이혼 등 그런저런 과정이 없었다면 몰랐을 거다. 나도 두 아이의 어머니이고, 아이에 대한 애정이 크고, 배우자]의 외도를 겪었고, 이러니까 오히려 연기를 하고 싶더라. 만약 그런 과정을 겪어보지 않은 채 맹순이 역을 했다면 굉장히 오버했을 것 같다. 그 동안 개인적으로 가졌던 물음표를 《장밋빛 인생》을 통해서 정말 마침표를 찍었다. '아, 이거구나' 하는 깨달음 말이다."
    • "과연 내가 다시 사람들에게 웃음을 줄 수 있을까, 나를 보며 사람들이 웃어줄까 두려웠다. 멜로를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시청자들이 드라마에서 내가 연기하는 캐릭터에 공감하지 않고 '최진실의 과거'를 떠올릴까 걱정이 됐다. 이 드라마 덕분에 앞으로는 시트콤도 할 수 있는 용기를 얻었다. 이혼은 마침표가 아니라 시작이란 의미를 문희정 작가가 정말 잘 써주고 잘 그려줬다. 아줌마도 사랑할 수 있고 사랑해야 한다는 걸 보여줬다. 홍선희는 '40대 아줌마여, 섹시하게 살자'는 외침 같았다. 때로는 엄마이기 전에 여자이고 싶을 때도 있다. 그런 마음을 홍선희가 보여준 게 아닐까. 여자는 70대가 되더라도 여자이기 때문에 아름답다는 장동철의 말이 항상 생각난다."[346]
  • 영화에 대해서[827][829][272]
    • "어릴 적부터 추리 소설을 좋아했고, 스릴러 영화를 굉장히 좋아하고 가장 많이 본다. 일반적인 사람들에게도 사이코적인 면은 내재돼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연기자들은 그런 면이 일반인보다 더 많은 것 같다. 많이 억누르면서 사는 것뿐이지."[830]
    • "김기덕 감독 작품은 찾아가면서 본다. 《》도 참 좋았다. 영화가 독특해서 좋다. 김기덕 감독의 생각과 가치관이 영화에 투영된 독특함이 좋다."
  • 일일드라마에 대해서[400][831]
    • "멋진 연기를 위해선 일일드라마를 해야 한다. 예뻐하는 후배들에겐 일일드라마를 하라고 충고한다. 모든 상황을 이길 수 있는 것은 노력이다. 세상에 노력을 이기는 것은 어떤 것도 없다. 지금 처음 시작하는 친구들은 쉬지 말고 노력했으면 한다. 미니시리즈가 100m 달리기라면 일일드라마는 마라톤이다. 일일드라마는 선배들과 함께 어울리면서 연기를 배울 수 있는 최고의 터전이다. 연기의 초년병이라면 경력과 내공을 쌓은 뒤 자신에게 맞는 역할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선배는 배우, 코미디언, 가수를 구분해선 안 된다."
  • 비판에 대해서
    • "이 세상 어느 누가 나쁜 소리 듣는 것을 좋아하겠나. 연기자로서의 비판뿐이라면 받아들이겠는데……. 애초에는 '댓글을 3∼4개만 보다가 그냥 닫아야지'라고 하지만 결국엔 밤을 새면서 보게 된다. 결국 정신세계가 이상해진다. 사람들과의 관계도 이상해진다. 내 앞에서 잘해주는 사람이 인터넷에 글을 올렸을 것이라는 의심도 하게 되더라. 그러니 소심해지고. 그래서 지금은 기사만 보고 댓글은 안 본다. 그런데 문제는 굉장히 많은 분들이 댓글에 신경을 쓴다는 거다. 어느 신인 배우 얘기인데, 그가 어떤 드라마에 출연했는데, 연출가가 인터넷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에 대한 욕설이 엄청 올라와서. 연출가는 결국 그 배우를 불러서 '너 그거 봤냐?'라고 물었단다. 그 배우가 '전 그런 거 신경 안 써요'라고 하니까 연출가가 '우린 신경 쓰거든'이라고 말했단다. 그래서 그 배우는 집에 돌아가서 호의적인 댓글을 직접 올렸다고 한다."[827][832][50]
    • "김구라 씨의 독설을 보고 나도 거기에 말려들까 두려웠다. 동료 연예인들에게 뒤통수를 맞을지도 모르니 조심하라는 말을 꼭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김구라 씨가 대중의 입장에서 연예인들에 대한 비판을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비판과 독설도 내적으로 쌓인 게 많아야 가능하고, 그런 솔직한 면이 오히려 나와 잘 맞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 맞춰 사는 것이 아닌, 몰매를 맞을지라도 자기의 소신을 밝히며 사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그런 측면에서 김구라 씨의 스타일이 마음에 든다. 김구라 씨와 같이 한다고 해서 끌렸다. 김구라 씨의 언변을 누를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다. 처음에는 불협화음을 내기도 했지만 점점 호흡이 맞아간다. 사실 김구라 씨가 무서웠다. 한 울타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돌을 던지는 걸 보고 놀랐다. 하지만 막말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남을 비판하려면 내공이 있어야 한다."[833][630][834]
  • 로맨틱 코미디에 대해서[833]
    • "정극보다 코미디가 훨씬 힘들다는 생각도 든다. 잘못하면 '오버'라는 비판을 받게 되니까. 몸이 아닌 상황으로 적절하게 웃겨야 할 것이다. 현장에서 리허설을 많이 한다. 그러다 보면 정준호 씨가 내게 '이렇게 하는 게 더 웃길 것 같은데'라고 조언을 해주고, 나는 그 조언에 많이 따라가고 있다. 편안하게, 정말 재미있는 순정 만화 한 권 본다고 생각하면 좋을 것 같다."
  • 꿈에 대해서
    • "김혜자 선생님이나 고두심 선생님처럼 그냥 연기 잘하는 그런 배우가 내 꿈이다."[835][836]
    • "내가 브라운관에 나오면, '최진실 너무 지겹다'라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시도때도 없이 눈앞에서 보이던 배우가 어느 날 안 보였을 때 그 배우가 보고 싶어지는 그런 배우가 되고 싶다."[837][838]
    • "배우로서 정상에 올라봤으니 내려올 때도 잘 내려왔으면 좋겠다. 19년, 20년 항상 친구 같은 배우이기를 소망한다. 아이들한테 부모로서 해줄 수 있는 뒷받침을 잘 해주고 싶다는 꿈을 가지고 있다."[839]
  • 연예인에 대해서[835]
    • "연예인으로서 인터넷이 무섭고 세상 사람들의 시선이 너무 부담스러워 많은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것. 모든 인생에는 일장일단이 있다. 그 대신 국민들에게 사랑받는 배우로서 누리는 혜택들이 있다. 난 정말 이 정도까지 온 사실에 늘 감사하며 산다."

가족 편집

  • 어머니: 정옥숙(1945년 ~ )
  • 남동생: 최진영(1971년 ~ 2010년)
  • 아들: 최환희(2001년 ~ )
  • 딸: 최준희(2003년 ~ )

작품 편집

저서 편집

책 이름 출시일 페이지 출판사 국제 표준 도서 번호 비고
그래, 오늘 하루도 진실하게 살자 1998년 8월 1일 274쪽 책이있는마을 ISBN 89-88086-15-5 자전 에세이

시놉시스 편집

최진실은 '사노라면'이라는 제목의 '드라마 시놉시스'를 남겼다. 최진실의 지인은 "최진실은 소속사 측과 함께 2005년부터 '사노라면'(가제)이라는 제목의 드라마를 기획해왔다. 등장인물들의 캐릭터에 관해 묘사한 부분만 A4 10장에 달하는 완결된 형태의 시놉시스가 있다. (만일 그에게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내년쯤 이를 좀 더 발전시켜 드라마를 만들어보자고 했다. 최진실은 연기 생활을 해오면서 평소 '누구나 재미있게 볼 수 있는 드라마를 만들고 싶다'는 얘기를 해왔다"라고 말했고, 최진실과 같은 소속사에 몸담고 있는 배우는 "최진실 씨와 시놉시스에 대해 수차례 대화를 나눴다. 어려운 상황에서 가정을 이끌어가는 여성이 주인공이다. 시놉시스의 주인공은 강하면서도 밝은 성격의 소유자이다. 최진실 씨의 생전 모습과 비슷한 면이 많다. 시놉시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수록 '자신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놉시스를 통해 자신이 하고 싶었던 말을 하려고 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2008년 10월 22일, 최진실과 2008년 10월 2일에 마지막 통화를 한 사람이자 최진실의 친구인 의 김재우 기자는 자신의 싸이월드 '미니홈피'에 "왜 자꾸 세상은 누나(최진실)의 아픔을 상술로 이어가려는지. 시놉시스는 머리를 맞대고 노래까지 읊조리며 만든 것인데. 누나는 더 이상 작품(시놉시스)에 임할 수 없어서 (시놉시스가 유출된 사실이) 더욱 화가 난다"라는 내용의 심경을 밝혔다.[840][841][842]

출연작품 편집

TV 드라마 편집

제목 방송사 연도 역할 비고
조선왕조 오백년 - 한중록 MBC 1989년 장미 역 사극, 단역[843]
MBC 베스트셀러극장 - 시진읍 MBC 1989년 벙어리 역 단막극, TV 드라마 첫 주연작
잠들지 않는 나무 MBC 1989년 찬주 역 조연
조선왕조 오백년 - 파문 MBC 1989년 박선아 역 사극, 주조연[844]
제5열 MBC 1989년 대권후보자의 딸 장기화 역 추리 소설의 드라마화, 추리소설 작가 김성종 원작, 조연
당신의 축배 MBC 1989년 김범경 역 조연
서울 시나위 MBC 1989년 희수 역 로드 무비 스타일의 TV 드라마, 찬조출연
각시방에 사랑 열렸네 MBC 1990년 오도희 역 설 특집극, 뮤지컬 드라마
두 권의 일기 MBC 1990년 해리 역 2부작, 청소년의 달 특집 드라마
추억여행 MBC 1990년 미리 역 추석 특집극
우리들의 천국 MBC 1990~91년 승미 역 대학생들의 이야기, 시추에이션 드라마, 1기 초대 여주인공[845]
약속 MBC 1992년 정인 역 최고 시청률 41.5%
MBC 베스트극장 - 풍경 MBC 1992년 은실 역 단막극
질투 MBC 1992년 유하경 역 16부작, 최고 시청률 56.1%
MBC 베스트극장 - 칡소클럽 MBC 1992년 단막극
매혹 MBC 1992년 지훈 역
폭풍의 계절 MBC 1993년 진희 역 66부작, 최고 시청률 52.1%
사랑의 향기 SBS 1994년 영진 역 52부작
아스팔트 사나이 SBS 1995년 오화련 역 만화가 허영만 원작, 최고 시청률 32.9%
째즈 SBS 1995년 채송화 역 동성애를 다룬 최초의 TV 드라마
아파트 MBC 1995년 차나리 역 54부작, 최고 시청률 34.6%
별은 내 가슴에 MBC 1997년 이연이·소피아 역 16부작, 최고 시청률 49.3%
그대 그리고 나 MBC 1997년 윤수경 역 58부작, 최고 시청률 62.4%
추억 MBC 1998년 인영 역 최고 시청률 38.4%
장미와 콩나물 MBC 1999년 손미나 역 51부작, 최고 시청률 44.1%
그대를 알고부터 MBC 2002년 이옥화 역 48부작
장미의 전쟁 MBC 2004년 오미연 역 23부작
장밋빛 인생 KBS 2005년 맹순이 역 24부작, 최고 시청률 41.1%
나쁜여자 착한여자 MBC 2007년 이세영 역 140부작, 최고 시청률 24.6%
내 생애 마지막 스캔들 MBC 2008년 홍선희 역 16부작, 최고 시청률 19.8%

영화 편집

제목 연도 역할 비고
남부군 1990년 박민자 역 작가 이태 원작
꼭지딴 1990년 혜지 역 액션 영화
나의 사랑 나의 신부 1990년 미영 역
있잖아요 비밀이에요 2 1991년 다혜 역 하이틴 영화
수잔 브링크의 아리랑 1991년 수잔 브링크 역
숲속의 방 1992년 소양 역 소설가 강석경 원작, 소설가 공지영 각색
미스터 맘마 1992년 영주 역
사랑하고 싶은 여자 & 결혼하고 싶은 여자 1993년 유라 역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1994년 강민주 역 소설가 양귀자 원작
마누라 죽이기 1994년 장소영 역
엄마에게 애인이 생겼어요! 1995년 은재 역
누가 나를 미치게 하는가 1995년 김주영 역
고스트 맘마 1996년 차인주 역
홀리데이 인 서울 1997년 전화 교환수 역 홍콩 영화 감독 왕가위 식 연출 영화
베이비 세일 1997년 지현 역
편지 1997년 정인 역
마요네즈 1999년 아정 역 소설가 전혜성 원작·각색
단적비연수 2000년 비 역 은행나무 침대 속편

광고 편집

교양 및 예능 편집

제목 방송사 연도 또는 날짜 역할 비고
유쾌한 스튜디오 MBC 1990년 12월 29일 게스트 퀴즈 버라이어티 쇼
일요일 일요일 밤에 일요스타쇼 MBC 1991년 5월 26일 게스트 토크 쇼
인간시대 MBC 1991년 11월 18일 주인공 휴먼 다큐멘터리
여기 젊은이 MBC 1991년 4월 25일, 11월 21일 게스트 토크 쇼
0시의 데이트 MBC 1992년 3월 9일 진행자 라디오
일요일 일요일 밤에 MBC 1992년 1월 5일, 3월 8일, 8월 9일, 1993년 5월 9일 게스트 버라이어티 쇼
스타와 만나요 SBS 1992년 9월 28일 게스트 다큐멘터리
심야에의 초대 KBS 2TV 1993년 11월 28일 게스트 토크 쇼
즐거운 세상 MBC 1993년 3월 8일 게스트 버라이어티 쇼
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 MBC 1993년 5월 8일 게스트 버라이어티 쇼
이야기쇼 만남 MBC 1993년 5월 19일 게스트 버라이어티 쇼
김한길과 사람들 MBC 1993년 10월 30일 게스트 토크 쇼
다시 뛰는 작은 거인들 MBC 1993년 12월 4일 게스트 MBC 창사 32주년 특집
한국인의 얼굴 MBC 1994년 4월 4일 주인공 다큐멘터리
우정의 무대 MBC 1994년 5월 15일 게스트 버라이어티 쇼
체험 삶의 현장 KBS 1TV 1995년 6월 4일 게스트 리얼리티 프로그램
TV는 사랑을 싣고 KBS 1TV 1996년 2월 9일 게스트 토크 쇼
TV 데이트 KBS 2TV 1996년 10월 22일 게스트 토크 쇼
토요일 전원 출발 KBS 2TV 1997년 3월 15일, 1998년 1월 13일 게스트 버라이어티 쇼
슈퍼선데이 KBS 2TV 1997년 5월 24일 게스트 버라이어티 쇼
스타다큐 MBC 1997년 10월 13일 주인공 다큐멘터리
행복채널 KBS 2TV 1998년 12월 1일 게스트 토크 쇼
슈퍼TV 일요일은 즐거워 KBS 2TV 1999년 6월 19일 게스트 버라이어티 쇼
백지연의 백야 MBC 1999년 5월 10일 게스트 토크 쇼
서세원 쇼 KBS 2TV 2002년 1월 29일 게스트 토크 쇼
파워인터뷰 KBS 1TV 2005년 11월 12일 게스트 토크 쇼
기분 좋은 날 MBC 2006년 7월 10일 게스트 토크 쇼
일요일 일요일 밤에 - 몰래카메라[846] MBC 2006년 12월 17일 게스트 버라이어티 쇼
지피지기 MBC 2007년 7월 5일, 7월 12일 게스트 토크 쇼
좋은 아침 SBS 2007년 5월 24일, 12월 12일, 12월 13일 게스트 토크 쇼
황금어장 - 무릎팍도사 MBC 2007년 8월 22일, 8월 29일 게스트 토크 쇼
좋은 아침 SBS 2007년 12월 28일 게스트 토크 쇼
쇼도 보고 영화도 보고 - 윤피디의 더 인터뷰 OBS 경인TV 2008년 2월 9일 게스트 토크 쇼
최진실의 진실과 구라 OBS 경인TV 2008년 진행자 토크 쇼
현장 토크쇼 택시 tvN 2008년 5월 29일, 6월 5일 게스트 토크 쇼
이경규 김용만의 라인업 SBS 2008년 3월 15일 게스트 버라이어티 쇼
시사매거진 2580 MBC 2008년 7월 13일 게스트 시사 프로그램
행복주식회사 MBC 2008년 9월 4일 찬조출연 버라이어티 쇼

기타 편집

  • 노래
    • 영화 《꼭지딴》 OST - <우리는 서로>(1990년)
  • 낭송
    • 앨범 《작지만 소중한 사랑 이야기》 - <사랑 만들기>(1990년)
  • 노래 내레이션

상훈 편집

관련 기사 편집

  1. 임인숙. (독점 인터뷰 1) 광고주에 30억 원대 손해배상소송 당한 배우 최진실[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여성신문. 2004년 12월 3일(805호).
    임현선. (독점 인터뷰 2) 광고주에 30억 원대 손해배상소송 당한 배우 최진실[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여성신문. 2004년 12월 3일(805호).
    박이은경. (최진실 사건 보도 이후) 최진실 지원 '드림팀' 왜 떴나 Archived 2015년 1월 24일 - 웨이백 머신. 여성신문. 2004년 12월 24일(808호).
    임현선. (포커스 인터뷰) '최진실 사건'과 '밀양지역 고교생의 여중생 집단 성폭행 사건' 무료 변론 맡은 강지원 변호사 Archived 2013년 11월 4일 - 웨이백 머신. 여성신문. 2004년 12월 24일(808호).
    김보협. '최진실에 덮어씌우기' 이상하다. 한겨레21. 2004년 12월 10일.
    이은경. ‘여성신문 20년, 여성인권 20년’ Archived 2014년 5월 25일 - 웨이백 머신. 여성신문. 2008년 10월 10일.
  2. 홍성태. 올 6월 항쟁은 '생활정치'로 기록하라. 한겨레21. 2008년 6월 13일(714호).
    차우진. 마이크 든 연예인들, 단단해지다. 한겨레21. 2008년 12월 11일(739호).
  3. 차형석. 그의 죽음은 우리 세대의 패배 Archived 2013년 11월 3일 - 웨이백 머신. 시사IN. 2008년 10월 7일(56호).
    오한숙희. 여성 연예인에게는 여성학이 필요하다 Archived 2013년 11월 3일 - 웨이백 머신. 시사IN. 2008년 10월 7일(56호).
  4. 허광준. 최진실의 죽음으로 본색 드러낸 파파라치 언론 Archived 2014년 1월 12일 - 웨이백 머신. 시사IN. 2008년 10월 14일(57호).
  5. 길다영. 유대인의 새해에 팔레스타인은 눈물 Archived 2012년 3월 7일 - 웨이백 머신. 시사IN. 2008년 10월 14일(57호).
  6. 최내현. 바보야, 문제는 포털 사이트의 익명성이야 Archived 2011년 11월 27일 - 웨이백 머신. 시사IN. 2008년 10월 14일(57호).
    범상규. 황색저널에 열광하는 심리. 네이버캐스트. 2014년 1월 24일.
  7. 서동삼. 최진실, "부부싸움 끝 악플로 화풀이, 황당". 조이뉴스24. 2007년 6월 15일.
    전종휘. 소문은 영혼을 좀먹는다. 한겨레21. 2008년 10월 17일(731호).
  8. 정덕현. '최고의 사랑' 받거나 '비호감' 되거나. 시사저널. 2011년 6월 8일(1129호).
  9. 김진령. 한류 실어나르는 '디지털 실크로드' 뻗어간다. 시사저널. 2011년 6월 22일(1131호).
  10. 변진경. 정운찬, 이경숙, 이상득 등의 영어 실력은? Archived 2012년 3월 6일 - 웨이백 머신. 시사IN. 2011년 9월 30일(210호).
  11. 이정민. 커트 단발이 가장 잘 어울렸던 그 사람, 최진실. 오마이스타. 2012년 1월 17일.
  12. 배국남. 누가 손현주 몸값을 이리 만들었나. 엔터미디어. 2012년 7월 29일.
  13. 이은주. 정준호 왈, "훈남 역할, 연구 좀 해봤죠". 서울신문. 2008년 3월 31일.
    이은주. 열정이 빛나던 최진실처럼 품격있는 배우가 그립다. 서울신문. 2012년 7월 30일.
  14. 이진호. (위기의 연예계1) 스타 울리는 연예가 찌라시, 사채업자도 함께 만든다 Archived 2014년 1월 12일 - 웨이백 머신. enews24. 2012년 10월 31일.
    이진호. (위기의 연예계2) 증권가 찌라시, 최진실 사건 이후 변종 침투 Archived 2014년 1월 12일 - 웨이백 머신. enews24. 2012년 10월 31일.
  15. 조성식. '배병수 살해 사건' 추적했던 '독종 기자'의 단상(斷想). 신동아. 2008년 11월 25일.
    표창원. 최진실이 유명해질수록 그의 복수심은 커졌다. 한겨레신문. 2013년 5월 31일 등록. 2013년 6월 1일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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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서적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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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인 편집부. 《소설문학》. 북인. 2013년(가을호). ISBN 9772287995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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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홍완식. 《실명입법론》. 피앤씨미디어. 2015년. ISBN 9791157302444
  • 한노을. 《홀로 돌아온 캘리포니아》. 해드림출판사. 2015년. ISBN 9791156340959
  • 장인태. 《이혼소송 재산분할》. 유로. 2015년. ISBN 9788993796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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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종한. 《심리부검》. 학고재. 2015년. ISBN 9788956252957
  • 박장순. 《미래의 한류》. 선. 2015년. ISBN 9788963125459

관련 영상 1 편집

  • OBS 《별은 내 가슴에》(2008년 10월 7일)
  • tvN 《최진실 추모 스페셜 》(2008년 10월 9일)
  • KBS2연예가 중계 - 최진실 추모 특집》(2008년 10월 11일)
  • MBC 《MBC 스페셜 - 시대의 연인 최진실》(2008년 10월 17일)
  • MBC휴먼다큐 사랑》 - 《진실이 엄마》(2011년 5월 27일)
  • MBC 라이프 《히스토리 후》 - 《최진실·최수종의 질투》(2011년 5월 31일)
  • MBC다큐 타임》 - 《이명세 감독의 M》(2011년 7월 28일)
  • MBC 라이프 《히스토리 후》 - 《대한민국이 사랑한 그녀! 최진실》(2011년 9월 27일)

관련 영상 2 편집

같이 보기 편집

각주 편집

  1. 윤고은. '국민요정'에서 '줌마렐라'까지 최진실의 파워. 연합뉴스. 2008년 5월 13일.
  2. "보고 싶은 영원한 국민 배우"…故 최진실 생전 인터뷰
  3. ]https://www.edaily.co.kr/news/read?newsId=01118486586342664&mediaCodeNo=258 최진실 “김구라의 독설에 말릴까 두려웠다”]
  4. 2007년 7월 12일, MBC 토크 쇼지피지기》에 출연한 방송인 이지희는 최진실의 광고 출연 총 횟수가 140여 편이라고 밝혔다.
  5. 정유미. 최진실, 웃음과 감동을 준 그녀의 영화 18편 Archived 2013년 10월 22일 - 웨이백 머신. 맥스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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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0. 배병수와 계약해지를 한 후 최진실은 박진희와 계약을 맺었다. 최진실은 다른 연예기획사와 계약을 맺은 후에도 박진희에게 개인적으로 로드매니저 역할을 맡겼다. 정옥숙이 맡았던 역할을 박진희가 이어받아서 맡았던 것이다. 최진실은 내성적인 정옥숙보다 외향적인 박진희와 일하는 것을 더 선호했다. 신뢰관계가 계속 이어져 최진실은 2003년 3월 1일에 최준희가 태어난 후에는 박진희에게 최준희의 육아매니저 역할을 맡겼다. 더불어 박진희의 딸 이은정과는 의자매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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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5. 김우성. 최초로 공개된 최진실의 연예계 데뷔 사진. 인터뷰365. 2008년 11월 20일.
  86. 이 광고는 더빙이라는 작업을 통해 완성되었다. 이 광고 이후에도 권희덕은 여러 CF에서 최진실의 목소리를 담당했다.
  87. 김수진. 故 최진실, 데뷔부터 사망까지…온 국민 사랑받은 톱스타. 스타뉴스. 2008년 10월 2일.
  88. 김영현. 故 최진실, 20년 연예계 정상 지킨 '톱스타'. 스포츠한국. 2008년 10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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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4. 한국통신은 한국전기통신공사의 약칭이다. 2001년 12월에 한국통신은 KT로 CI를 변경하였다. 대한민국은 1997년 12월 3일IMF 구제금융 요청 사건을 겪었고, 이러한 외환 위기 속에서 1998년 7월에 '공기업 민영화 기본 방침'이 발표되었다. 2000년 12월 4일김대중 대통령은 "국제 통화 기금의 모든 차관을 상환하였고, 우리나라가 IMF 위기에서 완전히 벗어났다"라고 공식 발표하였다. 2002년 5월에 KT의 정부 지분은 전량 매각되어 KT는 완전히 민영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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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 대한민국에서는 김대중 정부1998년 6월에 초고속 인터넷 서비스를 시작했고, 4년 만인 2002년에 대한민국은 초고속 인터넷 가입자가 1000만 명을 넘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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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7. 스포츠투데이/ 최진실 촬영중 탈진 병원행/탤런트 최진실의 건강에 적신호가 켜졌다. 최진실은 지난달 31일 오후 서울 강남구 논현동에서 MBC 주말극 ‘그대를 알고부터’(극본 정성주·연출 박종)의 야외촬영을 하던 중 복통과 탈진 증세를 보여 인근 병원에서 링거를 맞은 뒤 집으로 돌아가 안정을 취하고 있다. 불볕 더위 속에서 연일 촬영을 강행해 몸 상태가 좋지 않던 최진실은 이날 오전 아침 겸 점심식사로 김밥을 먹은 뒤 급체 증상을 보여 촬영을 중단해야 했다. 최진실이 갑자기 병원 신세를 지는 바람에 이날 저녁 계획됐던 류시원과의 결혼식 장면 촬영은 부득이 연기됐다. 연출자인 박종 PD는 31일 “더운 날씨에 웨딩드레스를 입고 땀을 많이 흘린 데다 음식까지 잘못 먹어 링거를 맞게 됐다”면서 “최진실의 회복 상태를 지켜본 뒤 촬영을 하지 못한 장면은 1일 또는 2일께 다시 진행할 예정이다”고 말했다. 최진실측은 “그동안 드라마 촬영을 하면서 신경을 많이 쓰다보니 최근 그녀의 건강이 나빠진 상태”라고 전했다./ 2002년 8월 1일/ 송호진 기자 dmzsong@sportstoday.co.kr
  228. 임상훈. 최진실 둘째 임신 `현재 2개월`. 중앙일보. 2002년 8월 16일.
  229. 일간스포츠/ 최진실 과로 탈진 입원/톱스타 최진실이 과로로 탈진해 병원에 입원했다. 임신 5개월째에 접어든 최진실은 18일 서울 강남 모 병원에 입원, 안정을 취하고 있다. MBC TV 주말극 <그대를 알고부터>에 출연 중인 최진실은 임신과 육아, 빡빡한 드라마 촬영 등 3중고를 이기지 못해 탈진 상태가 돼 결국 병원 신세를 지게 됐다. 이 때문에 그는 <그대를 알고부터> 제작진에게 20~21일로 예정된 드라마 야외 촬영 일정을 취소해줄 것을 부탁했다. 최진실은 “드라마 촬영도 제대로 소화하기 힘들 정도로 몸이 약해졌다. 내 몸도 내 몸이지만, 뱃속의 아기가 걱정될 정도의 상황이어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아들 환희을 키우면서 연기 활동도 병행하는 데다 둘째 아이까지 임신,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지쳐있는 상태라는 것. 그는 “10월 중순께 드라마가 끝나면 정말 푹 쉬면서 태교에만 전념할 것이다. 아기에게 너무 미안하다”고 말했다. 최진실은 “내년 2월에 출산 예정인 때문에 <그대를 알고부터>를 마친 다음부턴 CF 이외의 연예 활동을 중단할 생각이다. <그대를 알고부터> 이후엔 내년 가을 개편 때나 다시 만날 수 있을 것 같다”고 덧붙였다./ 2002년 9월 20일/ 김가희 기자 kahee@dailysports.co.kr
  230. 스포츠서울/ 최진실, 건강 나빠져 드라마 결장한다/ 톱스타 최진실(34)이 28일과 29일 방송되는 MTV 주말드라마 ‘그대를 알고부터’에서 사라진다. 건강이 나빠져 1주일 동안 녹화에 참여하지 못해 결국 방송에서 한동안 빠지게 됐다. 극의 흐름상 빼놓을 수 없는 주인공이 이틀 동안이나 얼굴을 보이지 않는 것은 극히 이례적이다. ‘옌벤 여성 옥화가 왜 안나오지?’ 하며 고개를 갸웃하는 시청자가 적지 않을 듯하다. 이날 방송에서 최진실은 중국 상하이로 출장갔다는 설정으로 빠진다. 최진실이 도저히 녹화를 진행할 수 없다는 의사를 밝힘에 따라 제작진은 부랴부랴 대본을 수정했다. 가뜩이나 대본 출고가 늦어져 촬영에 애를 먹어온 ‘그대를…’팀은 주인공의 결석으로 이중고를 겪고 있다. 최진실은 지난 18일 과로로 탈진해 서울 강남의 한 병원에 입원했다. 임신(5개월)한 상태에서 빡빡한 촬영 일정을 견디다 끝내 몸을 가눌 수조차 없는 상황에 빠진 것이다. 지난 15일 밤을 꼬박 세워 촬영한 뒤에는 제작진에게 눈물을 흘리며 힘겨움을 호소하기도 했다. 병원 측에서 더 무리하면 태아에게도 이상이 생길 수 있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들은 최진실은 부득이하게 촬영을 펑크내게 됐다. “현재 병원과 집을 오가며 안정을 취하고 있는 상태로 건강을 추스른 다음 촬영장에 복귀할 예정”이라고 소속사 측은 밝혔다./ 2002년 9월 26일/ 조재원 기자
  231. 최호열. ‘사업가’로 변신한 최진실 남편 일본 프로야구선수 조성민. 여성동아. 2002년 10월 4일.
  232. 최진실이 《그대를 알고부터》 촬영 초기 인터뷰에서 이 드라마가 끝난 후에 둘째 아이를 임신할 계획이라고 말했던 점, 주인공으로서 드라마 출연 중에 임신을 한다는 것이 일반적이지 않다는 점, 조성민이 임신부 최진실을 대상으로 폭력과 여론 조작 등을 저지른 점 등을 통해 이 임신이 조성민스텔싱에 의해 이루어졌을 수 있다는 합리적 의심을 배제할 수 없다. 물론 최진실은 이 임신을 '계획 임신'이라고 말하였다고 알려져 있지만 '피임 실패'라고 말하는 것보다 그게 자식의 자존감에 더 낫다고 판단했을 수 있다. 2002년 사람들은 성관계를 할 때 통상 콘돔 피임법을 활용했다. 최진실의 두 번째 임신이 공개된 후 조성민이 인터뷰를 한 것이 있는데 각자 한국과 일본에 거주하고 한 달에 한 번 만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계획 임신이 가능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이를 통해 조성민이 최진실과 성관계를 할 때 콘돔을 끼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랬으면서 2002년 12월 18일 최준희가 간통으로 잉태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여론 조작을 저질렀던 것이다. 최진실에게 둘째 아이를 갖겠다는 계획은 있었기에 '계획 임신'이라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니다. 다만 임신 시기가 계획된 것이 아닐 수 있었다. 조성민거짓말을 능수능란하게 할 수 있는 라는 것이 확인된 바 있고 더불어 최진실의 배우자 자리에 '채용'되기 위해 '자살쇼'도 벌인 인물이므로 이러한 상황 연출은 어렵지 않을 수 있었을 것으로 추정될 수 있는 바였다. 조성민은 임산부(妊産婦) 최진실을 대상으로 갖은 위법을 공개적으로 저지르며 부모로서 실격인 자임이 널리 공유되었고 이에 정자저장소로 전락하였다.
  233. 스포츠조선/ 김규리-송윤아-엄정화, 최진실 위해 지면광고 무료 출연/ "진실언니 사업 걱정마" 최진실- 조성민 운영 '비어드파파 파이슈' 광고 "우리는 의리파!" 김규리 송윤아 엄정화가 우정의 광고 출연을 해 화제다. 이들은 최근 '선배' 최진실의 남편 조성민이 운영하는 슈크림전문 브랜드 '비어드파파 파이슈'의 지면용 광고에 함께 얼굴을 비췄다. CF업계에서 정상급 대우를 받는 이들이 한자리에 모일 수 있었던 것은 최진실과의 평소 친분 때문. 특히 송윤아의 경우 영화 '광복절 특사'(감독 김상진)의 막판 작업 때문에 빡빡한 스케줄에 시달리면서도 흔쾌히 카메라 앞에 서는 의리를 보여줬다. 이들은 지면 광고 한 건당 억대의 개런티를 받는 '비싼 몸'들이지만 기꺼이 노개런티 출연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의 우정에 감동한 최진실 측은 정성이 담뿍 담긴 선물로 '오고 가는 정'을 보여줬다는 후문./ 전상희 기자
  234. 굿데이/ 조성민 초보 사업 최진실 사단 '구원' 절친한 후배 엄정화·송윤아 등 무료 CF 출연/ "동생들이 너무 고맙고 자랑스러워요." 톱스타 최진실이 후배들의 정성에 감사의 눈물을 흘렸다. 송윤아 엄정화 김규리 정선희 홍진경 등이 최진실을 기쁘게 한 주인공들. 이들은 얼마 전 사업가로 변신한 최진실의 남편 조성민의 사업에 적극적으로 도움을 줬다. 최진실은 송윤아 엄정화 김규리 등과 함께 지난 13일 서울 강남의 한 스튜디오에서 지면광고 촬영을 마쳤다. 한 달 전 조성민이 문을 연 슈크림빵 전문점 '비어드 파파' 광고를 위한 것이다. 놀라운 사실은 무료 출연이었다는 점. 최진실이야 남편의 사업이니 당연하지만, 그외 스타들은 1시간의 팬사인회 출연료만도 수천만 원을 호가하는 대우를 받고 있어 신선한 충격으로 받아들여진다. "어렵게 부탁을 했는데 다들 흔쾌히 받아들여줘 너무 고맙고 행복해요. 앞으로 더 잘해야죠." 일명 '최진실 패밀리'로 통하는 이들 중 맏언니 격인 최진실은 평소 솔직하고 소탈한 성격대로 후배들을 잘 챙기기로 소문나 있는데 그 결과가 무료 촬영으로까지 이어졌다. "(정)선희와 (홍)진경이는 매장에서 무료 팬사인회도 열었어요.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몰라요." 한편 최진실은 MBC 주말극 <그대를 알고부터> 촬영이 모두 끝나 내년 2월 출산 예정인 둘째의 태교에 전념하고 있다./ 2002년 10월 17일/ 백미정 기자 bmj@hot.co.kr
  235. 최성진. 배병수 살해범 전용철 옥중 인터뷰. 일요신문. 2002년 11월 24일.
  236. 전 톱스타 매니저 배병수 살해범 전용철 옥중 토로 ‘8년 전 사건의 진실’. 여성동아. 2002년 12월호.
  237. 조성민 인터뷰 “설마 뒷조사까지 할 줄이야”. 일요신문. 2002년 12월 29일.
  238. 이영미. 조성민 아버지 조주형씨 인터뷰. 일요신문. 2002년 12월 29일.
  239. 유재순. (최진실ㆍ조성민 파경위기)유재순의 특별 리포트 일본 교민 사회 소문과 진실. 일요신문. 2003년 1월 5일.
  240. ‘이경실 사건’으로 재조명 조성민 부친 조주형씨 단독인터뷰. 일요신문. 2003년 2월 23일(562호).
  241. 이영미. 조성민 아버지 조주형 인터뷰. 일요신문. 2003년 3월 16일.
  242. 인터뷰 밖 이야기 “가끔 TV밖에서 연기하는 느낌”. 일요신문. 2003년 3월 16일.
  243. 김범석. ‘10년 지근거리’ 기자가 털어놓은 최진실 비사(秘事). 신동아. 2008년 11월 25일.
  244. 김범석. 매니저 배병수 살해 전용철 “진실이 누나 죽음에 눈물 참을 수 없었다”. 중앙일보. 2009년 10월 6일.
  245. 표창원. 최진실이 유명해질수록 그의 복수심은 커졌다. 한겨레신문. 2013년 5월 31일 등록. 2013년 6월 1일 수정.
  246. 조성민은 2002년 12월 18일 수요일 오후 2시 최진실을 비방하기 위해 메모까지 해오는 등[출처 필요] 치밀한 설계 속에 기자들에게 허위사실을 유포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하고, 이와 관련하여 김용만성유리가 진행하는 2002년 12월 18일 수요일 밤 11시 MBC섹션TV 연예통신172회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조성민은 이러한 여론조작 행위를 통해 마치 최진실이 비방당할 행동을 한 것처럼 대중이 인식하도록 조장했으나 2004년 8월 1일까지 최진실을 대상으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 오히려 본인이 갖가지 위법행위를 저지르며 자멸의 길을 걸었다.
  247. 노이즈 마케팅
  248. 황선주. 조성민 유감(遺憾). 오마이뉴스. 최종업데이트 2002년 12월 27일.
  249. 이승형. 최진실·조성민 부부 파경위기. 문화일보. 2002년 12월 20일.
  250. 장병욱. 조성민·최진실 파경, 진실은 어디 있나?. 주간한국. 2002년 12월 31일.
  251. 결별 선언한 최진실·조성민 커플 상반된 입장 쌍방 인터뷰. 여성동아. 2003년 1월 1일(469호 P676~679).
  252. 신민섭. 최진실-조성민 커플 파경 임박(일요시사 2003년 1월 7일 364호) Archived 2016년 3월 7일 - 웨이백 머신. 국립중앙도서관.
  253. 백미정. 최진실 '남편 고소'…이혼합의서 초안 공개에 분노. 굿데이. 2003년 10월 25일.
  254. 최진실의 자택은 빌라(고급 공동 주택)로 내부 크기는 100평에 가깝고 거실 구조는 높이를 달리하는 형태라 계단이 존재했다. 최진실의 자택은 방송으로 공개된 적이 많고 이에 거실의 계단은 2개 정도로 구성되어 있고 그 정도의 낙차로 거실의 구역이 크게 나뉘는 것으로 추정되는 바였다. 2002년 11월 6일 발생한 폭행 사건은 그 계단 부근에서 발생한 것으로 추정될 수 있었다. 왜냐하면 기자들이 2002년 12월 18일 이후 시점 기사에서 이 폭행 사건에 대해 언급할 때 최진실이 마치 스무 계단을 구른 것처럼 서술을 하였기 때문이다. 임신부 최진실은 실상 폭행범으로부터 거실에서 밀침을 당하면서 이 거실 계단으로 낙하하여 스무 번 정도 거실에서 구른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는 밀고 넘어지는 상황이 여러 번 반복된 결과였다. 폭행 시점 최진실은 키 164cm, 몸무게 45kg에 임신 7개월의 몸이었고, 폭행범은 키 194cm, 몸무게 101kg에 직업이 투수였다. 실상은 그러한데 흥분한 기자가 그걸 짜깁기하여 최진실이 스무 개 정도의 계단에서 구른 것처럼 멋대로 퍼즐을 맞췄을 가능성이 있다는 합리적 의심이 가능했다. 혹은 최진실을 허위사실유포자로 만들기 위해 기자가 일부러 그런 왜곡을 저질렀을 수 있다는 합리적 의심도 가능했다. 통상 '계단'이라고 하면 스무 개 정도를 연상하기 십상이고 거기에 '폭행'이라는 정보가 더해짐에 피해자가 계단 옆에서 폭행을 당하면서 스무 계단을 스무 바퀴 굴러 떨어졌다고 이야기를 만들 수 있는 바였다. 이 사건의 가해자는 최진실을 대상으로 정조 의무 위반을 저지르기도 하였는데 그 공범자는 자신이 최진실의 자택을 가본 적이 있다고 하며 그 집에는 스무 번 구를 계단이 없다고 말하고 다녔다는 것이 그 근거가 될 수 있는 바였다. 이 자의 말하는 바가 최진실의 집에 계단 자체가 없다는 뜻이었든 스무 번을 구를 만큼의 낙차를 가진 계단이 없다는 뜻이었든 최진실의 집에는 계단이 있었고 그 계단 낙차가 낮아도 스무 번을 반복해서 굴리면 그 계단에서도 스무 번 구르는 것은 가능하고 평지에서도 스무 번 구르는 것은 가능하다. 군인들이 평지에서 구르는 훈련을 하는 것이 그 예가 될 수 있다. 거구의 운동선수 출신이 일반인 임신부를 상대로 밀쳐 넘어뜨리고 그 사람이 일어서려고 하면 다시 밀쳐 넘어뜨려 스무 번 거실에서 구르게 하는 것은 당연히 가능한 바였다. 임신부 최진실이 거실에서 스무 번을 구른 상황을 종합하면 거실 계단 옆에서 폭행범의 밀침에 의해 임신부 최진실이 그 계단에서 굴러떨어지면서 그 구름이 시작되어 이후 일어서려는 임신부 최진실을 대상으로 반복된 폭행범의 밀침이 있었다는 것이고 이것이 이 사안의 수위였다. 즉 사법기관에서 피해자 진술을 하는 것이 아니라 기자들에게 이 사건의 사실관계를 간략하게 언급하는 자리에서 '계단에서 굴러떨어져 스무 번 굴렀다'는 최진실의 말에는 문제가 없다. 이 언론 대응의 핵심은 폭행의 수위가 가해자가 말하고 다닌 것과 다르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최진실이 언론을 통해 이 사건의 사실관계를 짚었던 데에는 폭행범의 사실 왜곡이라는 전제가 있었다. 하지만 그 공범자는 최진실의 이 말을 '스무 번 구를 계단이 있다'고 말한 것처럼 왜곡함으로써 여론조작을 하며 본질을 흐렸던 것이다. 통상 기자들은 기사 작성시 실수로든, 고의로든 허위 정보 Archived 2016년 10월 1일 - 웨이백 머신를 자신의 기사에 담는 경우가 있는 것도 주지의 사실이다. 이에 허위 정보로 피해를 본 유명인이 그것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면 또 다른 기사 거리가 생기기 때문에 확인되지 않은 사실을 기사로 작성하는 일이 대한민국 연예 언론에는 비일비재하였다. 대중으로부터 압도적인 인기를 누린 최진실은 늘 이런 류의 기자들의 먹잇감이었다. 또 최진실 본인이 스무 번 구르는 폭력을 겪은 것을 스무 계단을 굴렀다고 말하는 실수를 하거나 고의로 사실 왜곡을 했을 가능성은 희박하였다. 왜냐하면 임신부가 스무 번 구른 것도 폭력의 수위가 결코 낮지 않아 그 수위를 더 높여 거짓말을 하는 무리수를 둘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 폭행범은 이 폭행 사건에 대해서도 여론조작을 했지만 다른 위법행위에 대해서도 여론조작을 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최진실이 굳이 허위사실을 말하여 그 폭행범의 여론조작 행태에 힘을 실어줄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여론조작가동되는 상황에서 이에 대응 Archived 2016년 10월 1일 - 웨이백 머신하면서 한 마디라도 실수를 할까봐 신경을 쓰는 것이 상식적이다. 최진실은 2002년부터 2004년에 걸쳐 소송이혼의 대상이 되지 않는 것을 기자나 대중에게 보여줌으로써 이 사안과 관련해서 자신의 과실이 없음을 입증하였다. 하지만 혐오세력들은 이 폭행 사건과 관련해서 폭행범의 악질성에 주목하기보다 이 사건의 사실관계를 설명하며 폭행범의 여론조작 행태를 제압한 최진실을 공격하기 바빴다. 혐오세력들의 이런 행태는 폭행범 등이 왜 여론조작을 구사했는지를 말해 주었다. 이렇게 최진실을 향한 여론조작은 무조건 남는 장사였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최진실을 향해 이러한 설계를 안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가해자는 이 폭행 사건에 대해 쌍방 폭행이라고도 말하고 다녔기 때문에 혐오세력들에게 최진실은 허위사실유포자이자 폭행범이었다. 또 최진실의 이 언론 대응의 전제를 무시한 측면에서는 그들에게 최진실은 이혼 생중계자이자 사생활 폭로자이자 명예훼손 행위자이기도 했던 것이다. 즉 이들은 모든 것을 피해자 최진실에게 덮어씌웠던 것이다. 이것이 최진실을 향한 마녀사냥의 실체였다. 폭행범 등은 이 사건에 대해서만 여론조작을 한 것이 아니었다. 이 폭행범은 최진실이 과거에 겪은 여론조작 피해도 끌어와서 그 가해자들 편에 서서 최진실을 공격하기도 했다. 이에 혐오세력들은 폭행범 커플과 한 패가 되어 인터넷상에서 최진실을 공격하였고 그것은 최진실 사망 때까지 이어졌다. 그런 지형 속에서 증권사 직원들의 새로운 여론조작이 가동됨에 최진실은 세상을 떠나기로 결정을 내렸던 것이다. 이토록 최진실을 죽이기 위해 애썼던 이 폭행범은 최진실 사망 후 최진실의 죽음에 기뻐하는 것에서 만족하지 못하고 최진실이 남긴 유산에 대해 재산관리권을 행사하려는 탐욕을 부리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았고 그런 세상을 원망하면서 몇 년 후 죽었다. 2016년 기준으로 이 혐오세력들은 안티최진실카페라는 본진이 폐쇄되고 혐오세력 대표주자였던 이 폭행범도 이 세상에서 사라진 상황에서도 여전히 흩어져서 그 여론조작 행태를 이어갔고 미성년자인 자식들을 두고 자결한 것을 두고 최진실을 공격하는 것을 그 작업에 추가시켰다. 이것은 최진실 관련 방송이나 기사, 그 기사들에 달리는 댓글들을 관찰[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하면 목격할 수 있는 바였다. 혐오세력이 아니라면 최진실의 자결에 그토록 적개심을 표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생전 최진실에게 관심이 없던 사람들은 최진실이 죽든 말든 여전히 관심이 없을 것이고, 최진실에게 호의를 가졌던 사람들은 그 죽음에 슬퍼할 것이고, 최진실에게 악의를 가졌던 사람들은 어떻게든 최진실을 물어뜯을 거리를 찾을 것이라는 것은 상식적이다. 혐오세력들이 미성년 운운 하며 최진실을 공격하는 순간에도 최진실 자녀들이 먹고 자고 배우는 돈은 그들의 주머니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최진실이 번 돈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 실체적 진실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최진실은 생사를 넘어 자신의 자리에서 자식들을 양육했던 것이다.
  255. 최진실의 입계의완(入界宜緩)의 자세는 판 정리를 위한 포석에 해당되는 행동이었다.
  256. “재판상 이혼의 개념”. 2013년 8월 23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2년 4월 9일에 확인함. 
  257. 이신영. 대법 "유책 배우자 이혼 허용 안돼"..7대6 판례 유지. 연합뉴스. 2015년 9월 15일.
  258. 최진실 병원 한층 전세냈다?. 일요신문. 2003년 2월 23일.
  259. 신웅진. 최진실씨 지난 1일 둘째 출산. YTN. 2003년 3월 5일.
  260. 양성희. 최진실씨 둘째 딸 출산 남편 조성민씨에겐 안알려. 문화일보. 2003년 3월 5일.
  261. 이승재. 최진실씨 ‘아빠 몰래’ 둘째 출산. 동아일보. 2003년 3월 5일.
  262. 최진실 시부모 사는 집 가처분 신청에 비밀 출산까지. 일요신문. 2003년 3월 6일.
  263. 수렁에 빠진 조성민 비상구가 없다. 일요신문. 2003년 3월 16일.
  264. 고규대. 최진실, 연예 활동 기지개. 한국일보(워싱턴 DC). 2003년 10월 17일.
  265. 최진실 방송복귀는. 일요신문. 2003년 3월 2일.
  266. 노현. 최진실 내년 3월 연예계 복귀. 매일경제. 2003년 12월 16일.
  267. 양성희. 최진실 "내년 3월 컴백", "아직 이혼 생각 없어". 문화일보. 2003년 12월 16일.
  268. 이미연. 아픔 딛고 원숙해진 최진실, '그래도 얻은 게 많아요'. 스포츠서울. 2004년 6월 20일.
  269. 최진실, 두 아이와 함께 떠난 괌 리조트 여행(주부생활 2004년 8월호)[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국립중앙도서관.
  270. 이혼의 방식에는 합의이혼과 소송이혼의 두 가지가 있다. 최진실이 조성민에게 이혼할 의사가 없다고 말한 것은 조성민이 자신을 대상으로 소송이혼절차를 밟을 길을 열어주는 행동이었다.
  271. 최진실이 이혼할 의사가 없다고 공개적으로 말한 것은 자신이 유책배우자라고 공개적으로 지칭된 상황에서 자신이 이혼소송을 당하는지 여부를 보고 자신을 비난할지 여부를 결정하라는 가이드라인을 언론인과 대중에게 제시하는 행동이었다.
  272. 이희정. 억척스런 아줌마 역으로 컴백하는 최진실. 한국일보. 2004년 3월 3일.
  273. “보고 싶다 돌아오라 고현정” … 연예계 러브콜 한창. 주간동아. 2004년 3월 24일.
  274. <인터뷰> `장미의 전쟁' 최진실, 최수종[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한겨레신문.
  275. 박효실. MTV '장미의 전쟁' OST 인기 폭발. 스포츠서울. 2004년 5월 20일.
  276. 김태근. '백만송이 장미' 시청률 1위 '유종의미'. 스포츠조선. 2004년 6월 8일.
  277. (최진실ㆍ조성민 파경위기) 언제 어떻게 시작됐나. 일요신문. 2002년 12월 29일.
  278. 파경위기 최진실 CF 중단 위약금 어떻게 되나. 일요신문. 2003년 3월 2일.
  279. 최진실-조성민 어떻게 돼가나. 일요신문. 2003년 12월 14일.
  280. 박수현. 자이 이영애·꿈에그린 김현주·래미안 이병헌등… 아파트브랜드 ★마케팅 반짝. 파이낸셜뉴스. 2004년 5월 4일.
  281. 전태훤. 건설광고 '스타모시기' 후끈. 한국일보. 2004년 5월 9일.
  282. (입체추적)최진실-조성민 한밤의 폭행사건 미스터리. 일요신문. 2004년 8월 15일.
  283. 최진실측 이종무변호사 인터뷰. 일요신문. 2004년 8월 15일.
  284. 조성민 부친 조주형씨 인터뷰. 일요신문. 2004년 8월 15일.
  285. 최진실 CF 어떻게 되나. 일요신문. 2004년 8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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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92. 이혼의 방식에는 내용상 합의 이혼(협의 이혼, 조정 이혼)과 소송 이혼(재판에 의한 이혼)의 두 가지가 있다.
  293. 김재우. 《최진실이 자서전 준비하며 틈틈이 직접 쓴 '힘겨웠던 지난 6년 동안의 일기', 마지막 유언 중 '두 아이'에 관한 미공개 이야기》. . 2008년 12월호(223호 P291~301).
  294. 주진우. 전쟁 같은 삶 살다 간 ‘시대의 아이콘’. 시사IN. 2008년 10월 7일(56호).
  295. 최진실의 자녀 최환희와 최준희는 사적·공적으로 최진실의 이혼과 관련하여 주요 이해관계자들 중 한 축이었다. 2002년 대한민국 식으로 최환희는 두 살, 최준희는 태아였다. 친권자 최진실은 발달단계상 의사표현의 한계 상황에 놓여있던 최환희와 최준희가 자신의 이혼을 찬성하는 경우와 반대하는 경우 둘 다를 상정(想定)하면서 판을 정리해 나갔다.
  296. 최진실이 유책배우자인지 아닌지를 규명하는 일은 최진실의 자녀가 최진실과 애착 관계를 형성하는 일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안이었다. 즉 최진실이 유책배우자라는 모함은 최진실과 대중 사이에 대한 이간책(離間策)일 뿐만 아니라 최진실과 최진실의 자녀 사이에 대한 이간책이기도 했다.
  297. 이탈리아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에서 귀도가 총살당하러 가면서 그걸 숨어서 보고 있던 아들에게 우스꽝스러운 몸짓을 보여주는데 이는 걱정스럽게 자신을 바라볼 아들을 안심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부모는 세상이 자신을 우스꽝스럽게 볼지라도 자식의 복리를 위해 필요하다면 우스꽝스러운 몸짓도 지어보일 수 있다는 것을 영화는 담았던 것이다. 최진실도 세상이 자신을 어떻게 평가하든 이혼한 부모를 둔 사람들이 폄훼되는 공동체에서 살아가는 한계상황 속에서 자식들이 어머니인 자기로부터 충분히 존중받았다고 느낄 수 있도록 행동하였다.
  298. 블러핑(bluffing)이란, 자신의 패가 상대의 것보다 약하다고 생각될 때 오히려 더 강한 베팅을 하여 상대를 기만하는 행동을 말한다. 단지 자신이 상대에 비해 약할 때뿐만 아니라, 자신이 더 강하다고 생각될 때도 마치 자신 없는 듯한 행동을 해서 상대가 방심한 상태로 승부를 걸어오도록 하는 행위 또한 블러핑이다. 더 나아가 자신의 강함을 과장해, 상대로 하여금 아예 승부를 포기하도록 해서 자신의 위험 부담을 최소화하는 행동도 블러핑이다. 즉 블러핑은 상대가 알지 못하는 정보를 이용해 진실을 숨기고, 상대를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이끌어 이득을 취하는 행동을 의미한다.
  299. 대한민국 연예 언론은 최진실이 이혼할 의사가 없다고 발화한 행위를 두고 마치 비혼자가 청혼을 하는 행위인 양 스토리라인을 잡아 기사를 쏟아냄으로써 최진실을 이상한 사람으로 만들어 갔다. 이는 언론이 이혼유책주의에 대한 개념이 전혀 없었음을 드러내는 행태로도 파악될 수 있다. 교통사고 피해자가 교통사고 가해자에게 전화를 거는 것은 성애적 관계를 맺자는 뜻으로 하는 행동이 아니라 위법행위의 시시비비를 가리고 가해자에게는 처벌을 가하고, 피해자는 배상을 받기 위한 행동이다. 언론이 이것을 성애적 관계를 맺기 위한 행동이라고 왜곡하는 것은 피해자를 바보로 만들고 가해자를 비호하기 위한 행동과 다름없는 것이다. 최진실은 언론을 통해 자신의 배우자가 자신에게 호의적인 감정이 없는 것에 대해 관심 없음을 확실히 했었고 일관되게 자식들의 안위를 염려했을 뿐이었다. 언론은 최진실의 이런 스탠스를 무시함으로써 최진실을 가지고 놀았다. 더불어 유책배우자로 몰린 자가 '이혼할 의사 없음'을 표하는 건 그 주장을 한 자로 하여금 소송이혼 절차 밟아 그 주장을 입증할 것을 요구한 것이면서 그렇게 입증해서 이혼 판결 받아 떨어져나가라는 뜻이라는 것도 무시했던 바이다. 여기서 짚어두어야 할 것은 최진실의 '이혼할 의사 없음' 의사 표시는 개인의 자유의 영역인데 이런 최진실의 행보에 아니꼬움을 드러내고 더 나아가 억측을 내놓으며 최진실을 조롱한 언론이 있었다는 것이다. 2004년 폭행 사건 직후 '최진실 이혼 결정 임박'이라고 헤드라인을 뽑은 신문이 대표적인 예일 수 있다. 최진실은 2002년부터 이혼과 관련하여 진도가 나가는 행동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폭력이라는 범죄행위에 중점을 두어야 할 시점에 이러고 있었던 것이다. 연예 언론은 최진실이 기혼자가 되는 일, 비혼자가 되는 일에 병적으로 관심이 많았던 것이다. 최진실은 자신의 배우자가 자신을 유책배우자라고 떠들고 다니는 순간 '여론 조작 사건'으로 규정하고 2002년부터 2004년까지 그것을 처리하는 과정을 밟았던 것이다. 언론은 교활하게도 이혼을 원한다며 최진실을 유책배우자라고 떠들고 다닌 최진실의 배우자에게는 이혼 왜 안하고 있느냐고, 이혼 왜 안하고 그러고 다니느냐고, 이혼하고 싶으면 이렇게 이상한 짓 하고 돌아다닐 게 아니라 가정법원 가면 되지 않느냐고 묻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중요한 것은 최진실이 2002년 '이혼할 의사 있음' 의사 표시를 했을 경우 최진실의 배우자의 여론 조작 덫에 걸려 돌이킬 수 없는 수렁 속으로 빨려들어갔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언론은 최진실이 그런 길을 가기를 바랐으나 최진실은 영리하게도 그 길을 피했던 바이다. '이혼할 의사 없음' 의사 표시가 닫힌 계를 설정함에 시시비비가 선명하게 가려졌던 것이다. '이혼할 의사 없음' 의사 표시는 여론 조작을 제압하는 으뜸패였는데 언론은 '왜 이혼하지 않는다는 거냐?'라고 물고늘어지거나 '그렇게 지금 배우자가 좋으냐?'라고 물고늘어지며 이 카드를 무력화시키려고 애썼다. 최진실은 독립된 사회적·경제적 지위를 갖춘 인물이었기 때문에 비혼 상태와 혼인 상태 사이에 사회적·경제적 지위에 있어 큰 차이가 없었다. 이에 이혼한 부모를 둔 아이를 폄훼하는 대한민국 사회의 후진성을 고려하여 친권자로서 성의를 표하는 모양새 정도가 필요했던 것이고 유책배우자로 몰린 유명인으로서 그 명예훼손 행태를 제압하는 일 정도가 필요했던 것이며 그런 명예훼손을 서슴지 않고 저지른 자식들의 생부의 실체를 명확히 하여 자식들에게 유용한 정보를 확보함으로써 친권자로서의 의무를 성실히 수행하는 일 정도가 필요했던 바이다. 이러한 서사에 의거해 비망록에도 2002년부터 2004년까지 3년 동안 자식들(아들: 2세~4세, 딸: 태아~2세)에게 친권자로서 제대로 인정받는 길을 가고자 노력했고 미래의 자식들과의 완전한 소통을 지향했음을 밝혀두었던 것이다. 정옥숙의 공개에 따르면 같은 기간 최진실은 위법행위의 피해자로서 겪은 상황을 상술한 일기도 남김으로써 소송이혼 절차를 밟게 될 경우 제출할 자료도 다각도로 취합해간 철저함도 갖추었음을 알 수 있는 바이다. 거기다가 대한민국 연예 언론은 최진실이 '폭로'라는 무리수(위법)를 두었다는 입증된 바 없는 주장까지 퍼뜨리며 최진실을 구렁텅이에 빠뜨렸다. 그런 일련의 가해 행위의 존재는 무시한 채 그로 인한 최진실의 고통 호소는 상대적으로 부각시킴과 동시에 이를 성애적 관계가 마음대로 안풀려서 히스테리를 부리는 것처럼 스토리라인을 잡아 최진실을 이상한 사람으로 만들어 갔다. 이런 행태의 효과는 피해자의 고통은 희화화시키고 가해자의 악랄함은 감추어주는 것이었다. 자신의 인생을 두고 펼치는 이들의 장난질을 두고 최진실은 2007년 MBC 무릎팍도사에 출연하였을 때 '엉클어진 퍼즐'이라고 표현하기도 하였다. 이 때 최진실은 어디서부터 다시 퍼즐을 맞춰가야 할지 막막했었다고 표현했다. 대한민국 연예 언론이 피해자 최진실의 권위를 흔드는 과정은 교활한 방식으로 이루어졌었고 이에 대중으로하여금 피해자가 피해자같지 않게 느끼도록 하는 것을 넘어 마치 가해자 보관됨 2016-04-07 - archive.today처럼 이미지화하게끔 만들었다.
  300. 최진실은 위법행위의 피해자로서 헌법에서 보장하는 자유와 권리를 누렸지만 대한민국 사회(언론과 대중)는 그 자유와 권리 향유를 문제삼으로써 대한민국이 왜 유엔 개발 계획이나 세계 경제 포럼 등에서 측정하는 성평등 지수상 하위권 국가인지를 예로써 보여주었다. 대한민국 사회는 최진실이 마치 가해자인 양 최진실을 향해 공격퍼부었다. 최진실 사망 후 발간된 책 중에도 피해자인 최진실에게서 문제의 원인을 찾고자 애쓰는 사람이 나옴으로써 대한민국 사회가 피해자의 인권에 얼마나 무지한 사회인지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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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27. 김인식은 간통, 폭행, 사문서 불법 유출, 사기, 중상모략, 면접 교섭 의무 불이행 등을 저지른 범죄자 조성민을 2005년 자신의 구단에 입단시켰다.
  528. 김경문은 간통, 폭행, 사문서 불법 유출, 사기, 중상모략, 면접 교섭 의무 불이행 등을 저지른 범죄자 조성민을 2011년 자신의 구단 코치로 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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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36. 김두호. 누가 최진실을 떠나게 했나. 일간투데이. 2014년 3월 18일.
  537. 고경민. 故 최진실 어머니 "왜 사냐면... 환희, 준희 또 상처 줄 순 없어". 뉴스엔. 2011년 4월 27일.
  538. 강성원. 박찬호 1면에 뜨면 불티나게 팔리던 그 시절. 미디어오늘. 2015년 3월 29일.
  539. 백현주. (단독)조성민, 기자회견에서 못다한 이야기. YTN. 2008년 12월 9일.
  540. 사설정보지 신뢰도는?…‘찌라시’의 빛과 그림자(백현주 기자). 채널A. 2014년 1월 28일.
  541. (연예가파일)태연·백현 열애 인정...누리꾼 '시끌'(백현주, 대중문화 전문기자). YTN. 2014년 6월 21일.
  542. 서병기. 최진실 집단 무료 변론, 씁쓸한 뒷맛. 헤럴드경제. 2004년 12월 16일.
  543. 서병기. 대중스타, 이혼과정과 방법도 중요하다. 헤럴드경제. 기사입력 2007년 11월 2일. 최종수정 2007년 11월 3일.
  544. 김범석. '최진실 매니저' 배병수 살해범 “진실 누나 꼭 한번 만나고 싶었어요”. 일간스포츠. 2008년 10월 15일.
  545. 김범석. ‘10년 지근거리’ 기자가 털어놓은 최진실 비사(秘事)(1). 신동아. 2008년 11월 25일.
  546. 신동아 51권 11호(2008년 11월호), 발행일 2008년 11월 1일, 소장 국립중앙도서관, 김범석 일간스포츠 연예팀 기자 kbs@joongang.co.kr, 388쪽 ~ 399쪽, 목차 '10년 전담 기자'가 털어놓은 최진실 비사:그토록 원망했던 '남편의 애인', 포장마차로 불러내 술 마시며 눈물//낙종한 기자들, 집에 초대해 식사 대접/'남편 애인'이 마담으로 있는 술집 찾아가 '행패' 부리기도/술 취하면 누군가에게 전화해 하소연하는 버릇/IMF 환란 때 자진해 '노 개런티' 광고 찍어/드라마 상대 남자역 직접 섭외할 정도로 연기에 열성/"일할 때 빼고는 늘 '불행하다'고 말해"
  547. (부고)윤창현 서울시립대교수 부친상 外. 한국경제. 기사입력 2010년 3월 26일. 최종수정 2010년 4월 1일.
  548. 2004년 12월 16일 기사에서 서병기는 피해자 최진실이 눈물을 흘린 것에 대해서 불편한 감정을 드러냈다. 피해자는 어떤 자리에서건 눈물을 흘릴 수 있는데, "소송을 당한 최진실의 심경이 괴롭다는 것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기자회견을 겸한 브리핑장에서 시종 눈물을 흘려 주변사람들을 안타깝게 하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라고 서술하며 그것을 문제삼는 비상식적 행태를 보였던 것이다. 최진실은 폭행의 피해자였는데 그 범죄 현장을 언론에 공개한 것을 문제삼아 광고주가 광고 모델 최진실을 상대로 손해배상청구를 하는 어처구니없는 짓을 저질러서 그것을 인권변호사가 무료 변론을 맡았고 자신을 돕기 위해 연대한 25명의 변호사들과 만난 자리에서 최진실이 눈물을 흘린 것을 서병기는 아니꼬워했던 셈이었다. 서병기는 "이 사안은 광고모델과 회사와의 문제이지 결코 반여성적인 문제는 아닌 것 같다. 만약 그녀의 남편이었던 조성민이 CF를 찍어 이혼후 그 광고주로부터 피소당했다면 반남성적인 소송인가?"라고 서술하며 조성민이 폭력범이라는 사실을 무시한 행태도 보였는데, 상식적으로 가해자 조성민이 손해배상청구의 대상이 되는 것을 문제삼는 인권변호사는 없고 광고 모델이 위법행위의 가해자이면 피소당하는 게 당연하다는 것은 최진실도 아는 사실이었다. 대중은 피해자를 대상으로 손해배상청구를 해서 분노한 것이고 최진실의 자택에 강도가 들어 최진실이 폭행을 당했고 다양한 이유로 그 범죄 현장을 공개한 것이면 감히 광고주 <신한>이 최진실을 상대로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상식에 입각해서 반여성적이라는 것인데, 진선미 민변 여성복지위원장신혜수 유엔 여성 차별 철폐 위원회 부위원장을 비롯하여 여성운동계에서도 <신한>의 행태를 비난하고 최진실의 행동을 높이 평가한 사안에 대해 서병기는 젠더폭력에 대한 개념이 없음을 드러내며 최진실과 최진실을 돕는 인권변호사들을 향해 비아냥대며 피해자 최진실을 공격하고 가해자 조성민의 공범으로 역할을 하였다. 서병기는 이 글에서 최진실의 기부 여부를 지적하며 최진실에 대한 대중의 마녀사냥을 유도하였는데, 일단 기부는 개인의 자유의 영역이기 때문에 타인이 왈가왈부할 사안이 아니었고 범죄 피해자를 대상으로 손해배상청구를 하는 불합리함과 싸우는 최진실을 비방하기 위해 논점 일탈적으로 그 이야기를 굳이 가져와 최진실에 대한 적개심을 드러낸 것이었다. 무엇보다 대한민국에는 익명으로 기부하는 사람도 많다. 서병기는 "최진실은 10년 이상 대중적 인기에 힘입어 방송과 CF, 영화 등을 통해 많은 혜택을 받아왔다. 대중스타로서 그의 이미지는 검소를 몸소 실천하는 ’짠순이’였다. 그런데 그는 생활만 ’짠순이’였는데 그치지 않고 이웃을 돕는 데도 인색했다.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하지 않았다. 최진실이 가정적으로 불행스런 상황에 빠져도 대중들이 동정하는 데 인색한 것은 그녀의 인색한 평소 모습 때문이었을 것이다"라고도 서술하였는데, 서병기는 최진실이 예순 살에 혹은 일흔 살에 전 재산 대학 기부를 할 계획이었다면 어쩔 것이냐는 물음에 대답해야 할 것이고 여론 조작으로 노년기도 못맞고 중년기에 사망한 최진실 무덤 앞에서 서병기는 이 점을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이 상식적이다. 서병기는 최진실의 인격을 공격함으로써 최진실의 의미있는 행동을 폄훼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던 것이다. 이렇게 서병기 같은 사람들이 자신을 편들어 주는 상황 속에서 최진실과의 이혼 후에도, 최진실 사망 후에도 이 폭행 사건과 관련해서 가해자 조성민은 여론 조작을 이어갔다.
  549. 2007년 11월 2일 기사를 통해 서병기는 최진실을 유책배우자라고 두고 최진실의 이혼과 관련해서 피해자 최진실을 공격했다. 가해자 조성민이 이혼이 하고 싶다고 하면서 가정법원에는 못가고 기자들을 상대로 최진실을 비방하고 다닌 것 때문에 최진실은 명예훼손을 당한 직접적 피해자였는데, 서병기는 "최진실이 이혼 당시 이미지가 나빠진 것은 이혼했기 때문이 아니다. 조성민과 이혼하는 과정에서 온갖 추잡한 것들을 생중계(?)한 탓이다"라고 서술하며 피해자 최진실을 온갖 추잡한 것들을 생중계한 가해자로 두고 최진실을 비방했다. 피해자 최진실은 가해자 조성민의 여론 조작을 해결하기 위해 기자들을 상대했을 뿐이었다. 즉 최진실은 피해자로서 자신의 권리를 행사했던 것이었기 때문에 서병기로부터 비난받을 근거가 없었다. 그런 근거가 있었다면 이는 이혼 사유를 발생시킨 것이 되는 바이고 최진실은 조성민으로부터 이혼 청구 소송을 당하는 것으로 그 진위가 검증이 될 사안이었으나 최진실은 2002년부터 2004년에 걸쳐 3년 동안 조성민으로부터 이혼 청구 소송을 당한 적이 없는 것으로 최진실은 제3자로부터 비난받을 행동을 한 바가 없음이 입증되었다. 조성민은 자신의 일방 폭행 혹은 일방 과실인 사건에 대해 쌍방 폭행 혹은 쌍방 과실이라고 기자들에게 말하고 다녔고 이에 최진실은 피해자로서 그것이 조성민의 일방 폭행 혹은 일방 과실임을 확실히 하는 대응을 하였는데, 가해자 조성민을 비난하는 게 아니라 피해자 최진실을 공격한 서병기의 행태는 조성민의 그러한 여론 조작이 잘 먹혔다는 증거였다. 즉 가해자 조성민은 언론을 통해 피해자 최진실을 향해 2차 공격을 함으로써 재미를 보았던 것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민법에서 규정하는 이혼유책주의는 피해자 최진실의 편이었고 이에 의거해 최진실이 유책배우자라는 주장은 근원에서부터 성립될 수 없는 논리였다. 이러한 여론 조작은 2004년부터 2004년에 걸쳐 최진실이 이혼할 의사가 없다는 입장을 취한 것에 의거해 완전하게 제압되었고 이는 대중에게 잘 받아들여졌는데, 2005년에 출연한 작품이 큰 사랑을 받았고 같은 해 12월 방송사 시상식에서 최진실이 네티즌상을 받는 것으로 최진실과 대중 사이에 대한 조성민의 이간책(離間策)이 실패했음이 단적으로 확인되었다. 이런 사실관계와는 별개로 서병기 같은 사람들은 2004년 9월로부터 3년이 지난 2007년 11월에도 조성민의 입장에 서서 조성민의 노림수대로 최진실이 유책배우자라는 여론 조작의 흐름을 이어갔다. 더욱이 '온갖 추잡한 것들을 생중계'한 건 언론이었다. 즉 서병기의 논리에 따르면 조성민과 언론이 노린 것은 최진실의 이미지를 나쁘게 만드는 것이었고 최진실에 대한 서병기의 공격은 그 목적이 잘 달성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또 서병기는 "아파트 분양광고 모델 계약 뒤 사생활 관리를 잘못해 기업 이미지에 입힌 손해액이 30억원이 될지는 법원이 결정할 문제다. 최진실의 부정적인 이미지로 인해 아파트의 분양이 안 됐는지는 법원이 판단하면 된다. 이 사안은 광고모델과 회사와의 문제이지 결코 반여성적인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이번 사건을 두고 말들이 많은 것은 대중스타의 이미지와 관련돼 있기 때문이다"라고 서술했는데, 실제 상황에서 위법행위의 피해자 연예인에게 '이미지' 운운 하는 서병기의 논리는 드라마상에서 폭력 행위의 피해자가 되어 얼굴이 멍든 모습(분장)을 널리 알린 배우에게도 '이미지' 운운 할 수 있다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이는 리얼 버라이어티에서 연예인이 녹화 중 선반에서 떨어진 물건에 얼굴이 맞아 멍이 든 모습이 방송을 통해 널리 알려진 경우에도 '이미지' 운운 할 수 있다는 논리였다. 이 두 경우도 광고주의 손해배상청구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논리였다. 그 소송 제기를 문제삼는 해당 연예인이 문제라는 논리였다. 그 소송 제기의 부당성을 공개적으로 지적하는 해당 연예인이 문제라는 논리였다. 또 그 연예인이 무료 변론을 받고 대신 소송 비용에 상응하는 돈을 기부한다고 하면 그 연예인의 기부 전적을 운운 할 수 있다는 논리였다. 또 서병기는 "그러나 명망있는 변호사들의 집단 무료 변론에 대해 대중들은 지극히 냉소적이다"라고 서술했는데, 이는 2008년 9월에도 최진실을 악덕 사채업자라고 규정하며 비난했던 대중들이 있었기 때문에 이에 대해서도 서병기는 그런 대중들을 긍정하며 '대중들은 최진실을 악덕 사채업자로 규정했다'라고 얼마든지 서술할 수 있었다는 논리였다. 그렇게 대중으로부터 악덕사채업자로 규정된 최진실은 자결했다. 이러한 행태를 보여 놓고 서병기는 최진실 사망 후 배려 운운 하는 글을 쓰기도 하였다. 더 나아가 최진영 사망 후에도 한 말씀 남기기도 했다.
  550. 2008년 11월 25일 기사를 통해 김범석은 연예인이 헌법의 보호도 받지 못하는 존재인 양 글을 썼는데, 연예인 최진실은 확인되지 않은 사실에 대해서도 책임을 져야 하는 존재인 양 가해자의 말을 유포하였다. 김범석은 이 글에서 4년 후의 일을 "기자가 최진실을 다시 만난 건 2년 후 병원이었다"라고 하거나, 이미 2002년 10월 조성민은 일본 구단에서 퇴단하여 일본 생활을 정리한 상태였고 조성민의 가출로 2002년 12월부터 최진실은 조성민과 같이 살지도 않았으며 2004년 8월 병원에서 이루어진 최진실 인터뷰 기사 어디에도 일본 운운은 없었는데 2004년 8월에 발생한 조성민의 두 번째 폭행으로 병원에 입원해 있던 최진실을 만났다는 김범석은 "일본에서 평탄치 못한 결혼 생활을 했다고 털어놓은 최진실은..."이라고 서술하거나 합의이혼으로 이혼했는데 "법정 공방 끝에 양육권을 갖게 된 최진실은..."이라고 하면서 허위의 사실을 글에 심어두었다. 또 김범석은 <‘최진실 사단’으로 불리는 이영자와 엄정화, 이소라, 홍진경 등에게 위로를 받으며 거의 매일 폭음한 것도 그 즈음이었다. 술에 취한 최진실은 전 남편의 애인으로 거론된 마담 S를 찾아가 “내 인생을 왜 이렇게 망쳐놓았냐”고 따지기도 했을 만큼 극심한 고통을 겪었다. S가 일하는 유흥업소에선 영업방해를 이유로 최진실의 출입을 입구에서 막는 진풍경도 벌어졌다>라는 확인된 바 없는 이야기를 서술하기도 하였다. 더불어 김범석은 <당시 기자와 만난 S는 최진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보도하는 일부 매스컴 때문에 “엄청난 정신적 피해를 입었다”면서 노골적으로 불만을 토로했다. 언론계에도 ‘최진실 사단이 있고, 그들의 편향적인 보도 때문에 적잖게 힘들었다’는 얘기였다. “두 사람이 이혼 소송 중일 때 새벽 여섯시쯤 어김없이 최진실씨에게서 전화가 왔다”고 밝히며 “그 전화가 내겐 끔찍한 모닝콜이었다”고 했다. 최진실은 술에 취하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거는 버릇이 있다. 상대가 전화를 받지 않으면 받을 때까지 계속하고 배터리를 빼놓은 뒤 나중에 전원을 켜면 부재중 전화가 수십 통 와 있을 정도로 전화에 집착증세를 보였다. S의 얘기다. “최씨는 술에 취한 날이면 내게 전화를 걸어 신세한탄을 했고 저주에 가까운 원망을 수없이 반복했다. 같은 여자로서 그의 심정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수위를 넘는 폭언에는 화가 치밀어 몰래 녹음해두기도 했다.” S는 최진실의 집 근처 포장마차에서 단둘이 캔맥주를 마신 적도 있다고 했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 건장한 남자 동생 두세 명을 데려가 최진실이 눈치 못 채도록 다른 테이블에 앉아 있게 했다고 한다. 그 자리에서 최진실은 이혼 파동으로 드라마와 영화, 광고에서 모두 버림받아 힘들다고 털어놓은 뒤 조성민에 대한 연민, 두 아이를 키우며 겪어야 하는 고충을 말하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S는 “내게 하는 말이 아니라 마치 자기 자신한테 하는 넋두리 같았다. 그의 말을 들어주는 게 유일한 해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라고 말했다. 당시 최진실이 S에게 화를 내고 위로를 구했던 건 어쩌면 세상에 대한 원망과 믿었던 방송, 광고 관계자들에 대한 배신감 혹은 자괴감을 투사했던 것인지 모른다>라고 서술하며 검증된 바 없는 이야기를 유포하고 그 이야기에 근거해 최진실을 자기 멋대로 해석했다. 이 서술에서 S는 조성민의 두 번째 배우자로서 심 씨라고 알려져 있었고 정조의 의무 위반과 관련하여 조성민의 공동불법행위자였는데, 가해자 심 씨는 2002년 12월에 조성민과 함께 언론을 통해 최진실을 납치 가해자로 지칭하였고 이는 최진실이 유책배우자라는 뜻으로 조성민에 의해 검증될 사안이었지만 조성민은 2002년부터 2004년에 걸쳐 3년 동안 최진실을 상대로 이혼 청구 소송을 제기하지 못하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자신과 심 씨가 여론 조작 행위자임을 입증하였고 이에 김범석이 서술한 심 씨의 말 또한 여론 조작임이 입증된 것이었다. 이 말에 따르면 최진실은 스토커였다는 것인데 연예인으로서 스토커로부터 고통받은 바 있던 최진실을 두고 이런 대범한 거짓말을 한 것은 심 씨라는 인물의 실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납치될 뻔한 경험도 있던 최진실이 심 씨 자신을 납치했었다고 거짓말을 한 것은 더더욱 심 씨노림수를 짐작하게 했다. 최진실 또한 비망록(2008년 12월호 잡지 《》에서 일부 소개)을 통해 심 씨의 이러한 이상한 행태에 문제의식을 가졌음을 표현하였는데, 조성민과 심 씨가 무엇을 얻기 위해 자신을 모함하며 다니는 것인지 알 수 없다고 하였던 것이다. 또 심 씨가 운운 했다고 한 '이혼 소송'은 있지도 않았는데, 2002년 12월 조성민은 가정법원에 가서 이혼 소송 서류 접수 하면 되는 순간에 기자들을 불러놓고 최진실을 비방했을 뿐이고 2004년 8월까지도 이혼 소송을 못제기함으로써 자신에게 이혼청구권이 있는 것처럼 말하고 다닌 것이 허위임을 입증했을 따름이었다. 김범석의 기사에 따르면 심 씨는 있지도 않았던 이혼 소송이라는 부정확한 용어를 썼던 것이고 이는 이혼청구권이 없던 조성민의 실체를 은폐하기 위한 속임수라고 봐도 무방했다. 피해자 최진실은 가해자 조성민과 심 씨를 대상으로 문제를 제기할 권리가 있었고 그 권리를 누렸을 뿐이며 그들을 상대로 위법을 저질렀는지는 입증된 바 없었다. 최진실은 헌법에서 보장하는 신체의 자유가 있었고 그 자유를 누렸으며 특정 장소에서 위법을 저질렀는지는 입증된 바 없었다. 언론을 통한 가해자 조성민과 심 씨의 피해자 행세는 대중에게 피해자 최진실을 가해자로 인식시키기 위한 수작이었다. 하지만 이는 이런 수작이 이혼유책주의에 의해 실시간으로 검증된다는 사실을 망각한 행태였다. 김범석은 <최진실은 조성민이 제빵사업을 하면서 만나게 된 유흥업소 마담 S와 단순한 동업자 이상의 관계였다고 폭로했다. 이에 맞서 조성민은 “대꾸할 가치조차 없는 소설”이라고 반박했으며, 두 사람은 2년간 험난한 법정 공방을 벌인 끝에 남남이 됐다>이라고 서술하였는데, 2002년 12월 유흥업소 마담과 연애 편지를 주고받았다는 말을 하며 자신이 정조의 의무를 위반했다고 자백한 것은 조성민 본인이었고 이에 최진실은 조성민이 정조의 의무를 위반한 것이 맞다고 했던 것이다. 애초에 최진실은 광고 모델로 활동하고 있어 조성민이 정조의 의무를 위반했다고 말하고 다니며 명예훼손 행위를 저지를 동기가 없었고, 2002년 12월 18일 가정법원에 가서 소송이혼은 못밟고 기자들을 불러놓고 최진실을 의부증 환자인 양 말하고 다닌 조성민의 비상식적 행동에 의해서도 최진실이 유책배우자가 아님이 입증되었으며, 이후 2004년까지도 조성민은 최진실을 대상으로 이혼 청구 소송을 제기하지 못하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자신이 여론 조작 행위자임을 입증하였다. 2002년부터 2004년까지 이혼유책주의는 작동하고 있었고 최진실은 이혼할 의사가 없다는 입장을 취하며 조성민의 실체를 규명하는 동시에 조성민의 여론 조작을 제압해 나갔다. 그리고 최진실과 조성민은 법정 공방을 벌인 끝에 남남이 된 것이 아니라 피해자 최진실은 다른 위법행위 피해자들처럼 가해자 조성민의 각종 위법행위에 대해 법적인 조치를 취했던 것이고, 이혼에 대해서는 조성민에게 소송이혼 절차 밟으라고 하거나 합의이혼 절차를 밟으라고 했고 이에 조성민은 밟으라는 소송이혼 절차는 안밟고 비상식적인 기자회견을 열거나, 최진실이 건넨 이혼합의서(플랜B)를 받아들여 합의이혼 절차를 밟거나 그 합의서 내용을 받아들일 마음이 없으면 소송이혼 절차를 밟으면 되는데 그 이혼합의서를 기자에게 유포하며 최진실을 상대로 명예훼손을 저지르며 어영부영 지내다가, 2004년 8월 최환희와 최준희에 대해 면접교섭의 의무를 이행하러 왔다고 말하며 최진실의 자택 진입에 성공하여 최진실을 상대로 폭행을 저지르며 자충수를 두었고 이로써 조성민의 여론 조작이 최진실에 의해 제압되었을 따름이었다. 즉 최진실은 자신과 이혼하기를 원하고 자신을 유책배우자라고 주장하며 다니는 조성민의 행태에 대해 조성민이 그것에 대해 법적으로 입증할 기회를 주었고 자신이 유책배우자임이 법적으로 입증이 되면 대가를 치르겠다는 입장을 취했던 것인데, 조성민은 최진실을 대상으로 위법을 저질렀을 뿐 최진실이 유책배우자라는 자신의 주장을 2002년부터 2004년까지 3년 동안 입증하지 못하였다. 최진실은 조성민의 여론 조작을 완전히 제압하고나서 이혼을 하였던 것이다. 조성민은 2002년 12월 이혼이 하고 싶다고 하소연 하는 비상식적인 기자회견을 연 이래 하라는 이혼은 못하고 2004년 8월까지 3년에 걸쳐 최진실을 대상으로 추가적으로 위법을 저지르는 엽기성을 보여주었는데, 이는 이혼을 하겠다는 게 아니라 최진실과 더 얽히는 행태여서 최진실은 물론 대한민국 국민을 기겁하게 만드는 행동이었다. 즉 조성민의 주장대로라면 조성민은 2002년 12월에 최진실을 대상으로 소송이혼 절차를 밟아 남남이 되는 길을 가면 되었는데 그 길을 가지는 못하고 최진실을 대상으로 위법을 추가적으로 저지르며 여론 조작노이즈 마케팅에 열중했을 따름이어서 험난한 법정 공방을 벌인 끝에 남남이 되었다는 말은 어불성설이었다. 조성민의 주장대로라면 조성민은 최진실이 유책배우자라는 것만 입증하면 쉽게 남남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2002년부터 2004년에 걸쳐 3년 동안 조성민은 입으로는 이혼을 원한다고 했지만 실제 행동은 이혼할 생각이 없는 것처럼 처신했던 것이다. 김범석은 <당시 기자는 “폭행당한 사람은 오히려 나”라며 서울 삼성동 모 병원에 입원해 있던 조성민을 단독으로 인터뷰할 수 있었다. 그는 “최진실씨의 주장처럼 운동선수인 나한테 진짜 맞았다면 어디가 부러지거나 사망 직전 상태가 됐을 것”이라며 “내 와이셔츠를 손으로 찢고 할퀴려고 달려드는 여자를 밀쳐낸 것 뿐”이라며 억울해 했다. 그는 또 “주위의 친한 기자를 통해 교묘히 언론플레이를 하는 것”이라며 최진실의 모든 주장을 부인했다>라며 2004년 8월에 발생한 폭행 사건의 진위가 모두 규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규명이 되지 않은 것처럼 최진실의 사망 직후인 2008년 11월 25일에 가해자 조성민의 주장을 그대로 가져와 서술하였는데, 이는 자신이 가해자 조성민의 편에 선 사람임을 보여주는 행동이었다. 가정법원에 갈 시간에 끊임없이 기자를 상대하며 '언론플레이'한 장본인인 조성민이 그 피해자 최진실을 두고 '언론플레이' 운운 하며 여론 조작을 했다는 것이다. 더욱이 조성민의 논리는 '핵주먹' 마이크 타이슨으로부터 폭행을 당한 사람은 최소한 사망은 해야 폭행을 당했다고 말할 수 있다는 궤변이었다. 또 김범석은 <한 경찰관은 "목에 손톱 파인 자국이 있는 걸로 봐서 고통 때문에 상당히 괴로워했던 것 같다. 재능이 많은 사람이 뭐가 급해 그렇게 세상을 빨리 등졌는지 모르겠다"며 혀를 찼다>라고 서술하며 사자에 대한 예의 개념이 있는 사람인지 의심하게 만드는 서술도 하였다. 이 서술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손톱 자국'이다. 이 서술을 통해 독자는 죽는 순간의 최진실을 떠올리게 되는 바이다. 이에 이런 언급은 상당히 선정적인 행태일 수 있다. 이 서술에서 경찰은 그 손톱 자국을 통해 최진실의 죽기 직전 고통을 말하고 있지만 독자는 죽기 직전 최진실의 마음이 바뀌어 살고자 목에 감긴 것을 풀려고 애쓰다가 생긴 상처일 것으로 생각할 확률이 높다. 즉 독자 입장에서 최진실은 '죽기 싫은데 엉겁결에 죽은 사람'이 된다. 이에 경찰의 말을 빌려 김범석이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었을까 따져보는 것은 의미가 있을 수 있다. 통상 그런 손톱 자국타살 Archived 2017년 8월 6일 - 웨이백 머신의 흔적으로 의심되는 요소로, 과학수사상 엄밀성이 요구되는 사안인데 이 서술에서의 경찰은 그냥 '목에 손톱 파인 자국이 있는 걸로 봐서'일 뿐이다. 부검을 통해 사인이 규명된 최진실의 경우 그 손톱 자국은 최진실의 것일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개연성도 있는 바였다. 그 손톱 자국은 사망한 최진실을 처음 발견한 정옥숙의 손톱 자국일 수 있기 때문에 이 추정에 의거해 김범석의 행태를 살펴보면 그 저의가 더 선명해질 수 있는 바였다. 사망한 최진실을 처음 발견한 것이 '정옥숙'이냐, '김범석'이냐에 따라 최진실을 향한 몸짓은 전혀 다를 수 있다. 평소 최진실을 사랑한 '정옥숙'은 슬픔 속에서 눈물을 흘리며 최진실의 목에 감긴 것을 풀어주기 위해 애를 썼을 것이고, 평소 최진실을 죽이기 위해 애를 썼던 김범석은 죽은 최진실을 그냥 담담하게 쳐다보았을 가능성이 크다. 정옥숙은 최진실의 목에 감긴 것을 빨리 풀어주고 싶지만 손이 말을 안들어 계속 최진실의 목에 상처를 냈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김범석 입장에서는 경찰이 언급했다는 그 손톱 자국이 당연히 최진실의 것이고 더 나아가 그 손톱 자국이 좋은 기사 거리가 될 것이라고 머리 회전이 되었을 것이다. 여기서 짚어야 할 것은 경찰이 그 손톱 자국에 대해 언급했다고 하는 것은 김범석의 단독 전언으로, 그 내용 또한 경찰 개인의 인상 비평 수준의 것이지 표피 검사나 유전자 검사 등을 토대로 한 객관적 언설은 아니었다. 김범석이 감히 그 손톱 자국을 자신의 기사에 언급한 것은 최진실의 죽음에 대한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는 것이기도 한 바였다. 김범석이 사망한 최진실을 처음 발견했다면 어떤 몸짓을 취했을지를 말해주는 행태였던 것이다. 김범석은 사망한 최진실의 목에 감긴 것을 풀어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는 뜻과 같았다. 독자 입장에서 그 손톱 자국은 최진실의 것이고 그게 최진실이 '살고 싶은데 사는 데 실패한' 근거로 인식될 수 있음에, 김범석 입장에서는 독자의 그런 인식 가능성이 본인의 쾌감 중추에 이익되는 바가 있을 수 있는 것이, 평소 최진실을 죽이기 위해 애쓴 당사자로서 최진실이 '죽고 싶지 않은데 죽은 것'이 되어야 하지, '죽고 싶어서 죽은 것'이 되면 죽이기 위해 애쓴 보람이 삭감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살인자 입장에서는 '죽고 싶어한 사람'을 죽이는 것보다 '죽기 싫어한 사람'을 죽이는 것이 쾌감이 더 큰 것과 통하는 면이 있는 것이다. 김범석의 이런저런 행실로 볼 때 따옴표로 처리한 경찰의 그 말이라는 것도 정말 경찰이 그런 말을 했는지 알 수 없는 바이고 그냥 김범석 본인이 하고 싶은 말을 그렇게 지어냈을 가능성 또한 배제할 수 없는 바였다. 무엇보다 상식적인 기자라면 죽은 최진실의 몸 상태를 언급하며 죽는 순간의 최진실의 고통을 굳이 기사에 담을 이유가 없다. 상식적인 기자라면 달리는 기차에 스스로 뛰어들어 사망한 사람의 몸 상태를 언급하며 죽는 순간의 사망자의 고통을 굳이 기사에 담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물론 사망자를 모욕하고 싶은 기자는 그런 서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김범석의 이 서술 덕에 최진실의 죽은 몸은 술 자리 안주거리가 되었을 수 있다. 설사 그 손톱 자국이 최진실의 것이라고해도 그게 '살고 싶은데'의 근거라고 딱히 볼 수 없는 것이 인간은 수면 중에 신고 있던 양말도 벗고 모기에 물리면 피가 나도록 긁기 때문이다. 그렇게 피가 나도록 긁어도 아픈 줄도 모르고 자는 게 사람인 것이다. 하지만 잠에서 깨어나 의식이 돌아오면 통증이 느껴지는 것이다. 수면 상태의 인간의 입장과 수면 상태에서 깨어난 인간의 입장은 전혀 다른 것이다. 즉 의식은 없어도 감각신경이나 운동신경은 활동을 할 수 있다. 목이 조여오면 뇌로 가는 혈액이 줄어들면서 의식부터 흐려지게 되어 있다. 그런 와중에 손을 들어 목에 자국이 나도록 힘을 가할 수 있었을지도 의심스러운 바이고 설사 그럴 이 있었다고쳐도 그냥 감각신경과 운동신경이 살아있는 탓에 이루어진 행위일 수 있는 바였다. 더불어 김범석은 <부검이 끝난 후 한 수사관은 "고인의 체중이 31kg이었는데 죽기 얼마 전 지방 흡입 수술을 해 복부 지방이 거의 제로 상태였다"고 밝혔다. 하루 세 시간씩 한강 둔치에서 자전거를 타며 다이어트를 해왔으면서도, 새 드라마 출연을 앞두고 무리하게 체중 감량을 한 것으로 해석됐다. 하지만 나중에 확인한 결과 31kg이 아니라 45kg이었다. 해당 수사관이 잘못 말하는 바람에 언론도 오보를 낸 것이다>라고 서술하며 사적인 진료기록에 해당하는 '지방 흡입' 운운하는 인용문을 담기도 하는 등 다각도로 자신의 수준을 드러내었다. 즉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되는 개인정보를 언급하며 최진실을 모욕 주고 싶은 속내를 숨기지 않았다. 김범석의 정신적 상황을 고려하건대 그런 말을 한 '한 수사관'이 실존인물이기나 한지 합리적 의심의 대상이 되는 바였다. 김범석은 이 글을 "최진실의 자살은 많은 이에게 둘러싸여 사는 것 같지만 실은 쇼윈도의 마네킹 같은 연예인의 고단한 단면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한국 연예계의 쓸쓸한 자화상이었다"라고 서술하며 마무리하는데, 여론 조작의 피해자로서 그 고통이 자식들에게 전해지는 것을 염려하여 스스로 세상을 떠난 최진실을 두고 '쇼윈도의 마네킹' 운운 하며 그 본질을 호도하였다. 요약을 하자면 연예인의 고단함과 한국 연예계의 쓸쓸한 자화상 운운 한 김범석은 이 글을 통해 최진실과 관련한 검증되지 않은 사실을 유포하며 여론 조작으로 사망한 최진실을 우롱하였고 이에 김범석 본인이 피해자 최진실을 인권도 없는 '쇼윈도의 마네킹' 정도로 여겼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즉 김범석 같은 사람들은 최진실과 관련하여 검증된 사실은 무시하고 확인된 바 없는 이야기는 선택·강조·유포하며 가해자 조성민과 심 씨는 비호하고 피해자 최진실은 비하하였다. 이를 통해 피해자 최진실은 마녀사냥의 대상이 되었고 가해자 조성민과 심 씨는 양비론의 대상이 되어 궁지에서 빠져나감은 물론 노이즈 마케팅이라는 반사이익도 누렸다.
  551. 2009년 10월 6일 기사에서 김범석은 배병수 살해범 전용철이 최진실에 대해 쓴 편지를 기사화했다. 이를 통해 김범석이 최진실 생전에도 전용철과 친분을 나눈 사이임을 짐작하게 했다. 최진실 생전 전용철은 기자들과 교감을 나누며 피해자 행세를 했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최진실은 세상으로부터 배병수 사망 관련 교사범인 양 공격을 당했는데, 신동아 기자 조성식은 2008년 11월 25일 "‘독종기자’라는 소리를 듣던 나였지만, 옥중의 전씨한테서 들은 얘기를 차마 최씨에게 물어보지 못했다. 그에게나 배씨에게나 명예스럽지 못한 불미스러운 소문인데다 전씨의 얘기도 전언(傳言)에 지나지 않았기에. 다만 최씨에게 찰거머리처럼 붙어 다니던 또 다른 소문에 대해서는 내 나름의 생각을 밝히고 싶다. 수사기관이 발표한 전씨의 살해동기는 배씨에게 당한 인격적 모욕이었다. 그러나 구치소 접견실에서 전씨가 내게 ‘고백’한 중요한 살해 동기는 여자와 관련된 것이었다. 그런데 그 여성은 항간의 소문과는 달리 최씨가 아니었다. 전씨와 ‘특별한 관계’가 있는 제3의 여성이었다. 사건 초기 불안한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면서 전씨가 밝힌 ‘진실’은 그랬다"라고 서술하였다. 2002년 12월에 조성민은 이 소문을 적절히 활용하며 최진실에 대한 여론 조작을 펼쳤었다.
  552. 김범석은 전용철이 최진실과 관련하여 보낸 편지를 두 차례에 걸쳐 자신의 매체에 실었다. 최진실 사망 직후인 2008년 10월 15일과 광고주 신한가정폭력 피해자 최진실을 향한 손해배상청구소송 상고재판 직후인 2009년 10월 6일이 그 날이다. 이 두 기사는 최진영의 숨통을 죌 수 있는 일에 해당되었다. 왜냐하면 최진실은 생전에 전용철이 저지른 살인사건과 관련하여 여론조작의 피해를 당했고 그로 인해 엄청난 정신적 고통을 토로했었기 때문이다. 그런 것을 동생으로서 지켜봤을 최진영이 살아있는 상황에서 최진실과 전용철을 연관시키는 기사를 내놓았다는 것은 여론조작으로 사망한 최진실에 대한 최진영의 안타까움을 더하게 만들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김범석은 그런 행동을 저지른 것이었다. 이것은 인간의 탈을 쓰고는 못할 행동이라고 할 수 있고 최진실에 대한 혐오 세력에게나 쾌감을 줄 수 있을 뿐 누구에게도 유익함이 없는 행위로 최진실의 유가족만 고통 속에 빠뜨리는 행동이었다. 또 이건 미성년자들인 최진실의 아들 최환희와 최진실의 딸 최준희도 죽여보겠다는 의도가 담긴 행동이나 진배없었다. 기자로서 전용철과 관련하여 최진실이 생전에 어떤 여론조작의 피해를 입었는지 알만한 입장에서 또 다른 여론조작으로 기어이 사망한 최진실을 두고 또 전용철을 언급하는 기사를 쓴 것은 최진영을 죽여보겠다는 행위나 진배없었고 실제로 최진영은 두 번째 기사가 나온 그 다음해 3월에 스스로 세상을 떠났다. 2002년 12월에 과거 전용철이 저지른 살인사건과 관련하여 최진실의 숨통을 죄었던 조성민과, 김범석은 이런 식으로 서로 협력관계에 놓인 사이임을 보여주었다. 2009년 6월의 상고재판은 가해자 조성민의 폭력행위에 기인한 재판이었기에 최진영은 객관적으로 엄청난 분노의 감정 속에 있었을 상황이었다. 이는 보통의 대중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김범석은 그런 최진영의 등에 칼을 꽂는 행동을 열심히 했던 것이다. 김범석은 세상이 계속 최진실이 교사범인 양 여기도록 분위기를 조성하는 일에 기여했던 것이다. 그래서 대중으로 하여금 가정폭력 피해자 최진실에 대해 안타까움을 갖는 것을 막는 일에 기여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궁지에서 빠져나가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누구나 알 수 있는 바였다. 더구나 2009년 8월에는 최진실 유골 도난 사건도 발생했었다. 요약을 하자면 최환희와 최준희는 김범석을 예의주시해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일들이 자신들의 어머니 사망 직후와 삼촌의 사망 직전 발생했다는 것이다. 더구나 2008년 10월 15일 기사가 작성된 때는 사기행위 가해자 조성민이 최환희와 최준희의 재산에 대해 권리를 행사하려고 하며 사기행위 피해자 최진영을 분노케 한 상황이었다. 이 때 김범석은 사기행위 가해자 조성민에게 힘이 되는 기사를 작성했던 것이다. 물론 김범석은 최진실 생전에도 최진실의 숨통을 죄는 입장에 섰었다. 더불어 김범석은 2008년 11월호 신동아에 원정까지 가면서 최진실을 조롱하는 일에 열정을 보였다. 이 또한 최진영의 등에 칼을 꽂는 일에 해당되었다. 신동아도 타 매체 기자의 기사를 실어주고 더 나아가 표지에 제목을 크게 실어줄 만큼 김범석과 좋은 팀플레이를 보여주었다. 김범석이 신동아에 실은 기사의 표지 제목대로라면 최진실이 조성민의 바짓가랑이라도 잡은 줄 알겠으나 실정은 전혀 달랐으니 최진실은 2002년 12월부터 이미 조성민에게 소송이혼 절차 밟으라고 자리를 깔아 준 입장이었고 이에 조성민이 자신을 유책배우자라고 주장하고 다닌 것에 대해 법적으로 책임지겠다는 입장이었으나 최진실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진 것은 조성민이었다. 최진실은 1998년 12월에 조성민의 실체를 알았다면 이후 조성민이 아무리 '자살쇼'를 하며 자신에게 들러붙었어도 동정심을 갖지도 않았고 상종도 하지 않았을 가치관을 가졌음을 드러낸 바 있는 인물로 2002년부터 2004년까지 조성민의 위법성을 인내심을 갖고 문제삼았을 뿐이었는데 김범석은 법적인 측면은 무시한 채 엉뚱한 소리를 늘어놓았던 것이다. 최진실은 자신의 인생에서 조성민을 소거하는 절차를 차분히 밟고 있었는데 김범석은 그러고 살았던 것이다. 누구의 인생에서건 조성민 같은 인물이 알아서 떨어져나가주면 좋은 것이라는 사실을 망각한 행동이었다. 그런 인물이 자식들의 인생에서 떨어져나가주면 좋다는 것도 당연지사였다. 즉 2002년부터 2004년까지 최진실은 자신이 유책배우자가 아님을 대중을 앞에 두고 입증해 보였다. 신동아를 통해 김범석은 술집 마담의 최진실에 대한 여론 조작을 도우며 자신의 정체성이 술집 마담의 손발임을 널리 알렸다. 김범석의 이런 행태는 최진영이 우습고 정옥숙이 우습고 최환희가 우습고 최준희가 우습고 대중이 우습다는 뜻과 다르지 않았다. 또 동아일보의 황호택의 노림수와도 통하는 것이었다. 황호택처럼 김범석도 조성민을 비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행동을 보였던 것이다.
  553. 하은정. 재혼한 조성민, 작심하고 털어놓은 35년 인생 풀 인터뷰[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우먼센스. 2008년 10월호.
  554. 백은영. 조성민 단독인터뷰:야구, 결혼, 파경, 아이들, 이제 찾아온 조심스런 행복까지[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여성조선. 2008년 10월호.
  555. 2014년 9월 30일 TV조선 <대찬인생> 85회 백은영 출연
  556. 최진실 딸, 최준희 인터뷰. (TV조선)연예가X파일 23회(백은영이 최준희를 인터뷰 함). 2016년 1월 7일.
  557. 최진실, 조성민의 재혼에 얼마나 충격받았길래…. 한국일보. 2007년 9월 20일.
  558. 이현아. "연관짓지 마" 최진실, 자살 전 조성민에 메시지!. 스포츠한국. 2008년 11월 25일.
  559. 2008년 10월에 8세의 최환희와 6세의 최준희는 발달 단계또래집단을 형성하기 시작한 시기였다. 최진실을 향해 2002년부터 2004년에 걸쳐 여러 위법을 저지른 조성민과 그 당시 공범으로 역할을 했던 조성민의 두 번째 배우자는 그러한 과거의 행실로 인해 기본적으로 최환희와 최준희에게 부정적 영향을 줄 수 있는 인물들이었다. 조성민 부부는 2002년부터 2004년에 걸쳐 최진실에 대한 여론 조작을 저지른 이었었다. 그런 상황에서 조성민은 2008년 10월호 여성잡지를 통하여 최환희와 최준희에 대해 면접교섭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겠다고 했다. 즉 조성민은 최환희와 최준희의 권리를 언론을 통해 침해했다. 양육친이 아동의 면접교섭권을 침해하는 경우가 아니라 조성민은 비양육친이면서 아동의 면접교섭권을 침해하였고 침해하겠다고 말하고 다녔다. 조성민 부부의 부정적 실체는 최환희와 최준희가 또래집단 내에서 공격을 당할 요인이 될 수 있는 사안이었다. 최진실은 조성민 부부의 실체가 최환희와 최준희의 삶에 부정적 영향을 줄 수 있음에 대해 염려하였다. 2008년 기준으로 대한민국 민법상 친족의 범위는 8촌 이내의 혈족, 4촌 이내의 인척, 배우자이다. 혈족 조성민은 과거의 행실로 인해 본인이 최환희와 최준희에게 부정적 영향을 줄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망각한 채, 2005년 부정적 영향을 줄 수 있는 인물을 그들의 인척으로 만들어줌으로써 개과천선은커녕 추가적으로 아동의 복리에 반하는 행동을 또다시 저질렀었다. 더구나 2008년 10월에 최진실은 조성민이 2004년 8월에 저지른 폭력 행위로 인해 광고주로부터 소송을 당해 상고 재판을 앞두고 있었다. 최진실 사망 후 최환희와 최준희가 그 소송의 피고가 되었고, 대법원의 파기환송과 고등법원의 원고 일부 승소 판결에 의거해서 2010년 2월에 최환희와 최준희는 광고주 <신한>에게 손해배상금을 지급해야 했다. 이는 조성민의 폭력 행위가 없었다면 겪지 않았을 일이었다. 2008년 10월 2일, 최진실은 과거 조성민이 저지른 여론 조작의 부정적 영향 속에 여전히 있었고 추가적으로 2008년 9월에 저질러진 증권사 직원들의 여론 조작으로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었다. 즉 최환희와 최준희 입장에서는 2008년 10월 2일에 자신들의 어머니가 여론 조작의 피해자였다는 것이고 본인들 삶 또한 그런 여론 조작의 피해 상황에 놓여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 놓여 있는 최환희와 최준희를 향해 조성민은 면접교섭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겠다는 을 굳이 하고 다녔던 것이다. 조성민이 2008년 10월호 여성잡지를 통해 그렇게 최환희와 최준희를 공격한 행동이 실제로는 누구를 겨냥한 것인지는 최진실 사망 후에 조성민이 보인 행동에서 잘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행동에 대해 대중은 가만히 있지 않았고 법조계 또한 나서서 친권자동부활금지라는 법안이 제정되었다. 최진실은 모성애가 강한 사람이었고 조성민은 그것을 최진실의 약한 고리로 삼아 최환희와 최준희를 위기에 빠뜨리는 짓을 함으로써 최진실을 분노 상태에 빠지게끔 만들었다. 허위사실유포 또한 최진실의 약한 고리였는데 조성민은 그것 또한 잘 활용하며 2002년부터 2004년에 걸쳐 최진실에게 타격을 주곤 하였다. 2008년 10월호 여성잡지를 통해 한 행동도 그 흐름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졌는데 최환희와 최준희에게 자신이 면접교섭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은 것 또한 쌍방과실이라고 하며 자신의 과오를 물타기하였던 것이다. 2004년 8월 조성민은 최환희와 최준희를 보러왔다는 말로 최진실의 자택 진입에 성공했고 그후 최진실에 대한 폭행을 저질렀다. 조성민은 2008년 10월호 여성잡지를 통해 그 사건을 언급하며 그 사건으로 인해 최환희와 최준희에 대해 면접교섭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았다고 말하였다. 이는 가해자가 피해자를 불편하게 여겨 피해자의 자녀에 대한 법적인 의무를 이행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이었고 채무자가 채권자를 만나는 것이 불편해서 채무 변제를 하지 않았다는 말과 비슷한 논리였다. 즉 가해자인 자기에게 불편감을 불러일으킨 피해자 최진실이 자신이 최환희와 최준희를 상대로 면접교섭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은 것과 관련해서 책임이 있다는 논리였다. 2008년 11월 20일 MBC 100분 토론 396회 <친권! 천륜인가 아닌가>에서 여성학자 오한숙희는 유배당한 추사 김정희가 편지를 써서 아들의 안위를 살피던 사실을 언급하며 편지를 쓰는 일도 면접교섭의 의무를 이행하는 한 방법임을 말한 바 있다. 즉 조성민은 면접교섭의 의무를 이행할 생각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채무자는 채권자를 만나는 게 불편하면 사기를 칠 것이 아니라 계좌이체를 해서 빚을 갚으면 되는 것이었다. 가해자 조성민은 교묘한 말장난으로 위기를 모면하려고 했고 '남 일 말하듯이' 하는 화법을 구사하며 아동의 권리를 침해한 행동을 희석시켰고 더 나아가 아동의 권리를 침해하겠다고 말하고 다녔던 것이다. 한편 시인 김갑수는 2014년 9월 30일 TV조선 <대찬인생> 85회에서 이 말장난과 비슷한 논리의 말을 발화함으로써 조성민의 말장난이 어떤 식으로 대한민국 사회에서 먹히는지를 보여주었다. 같은 자리에 기자 김대오도 있었지만, 김대오는 피해자 최환희와 최준희의 양육친 최진실의 친구라고 말하고 다니면서도 김갑수의 그 발화에 대해 대응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해당 프로그램의 출연진 중에는 누구보다 이혼유책주의면접교섭권에 대해 잘 알고 있을 변호사 박지훈도 있었지만 그 발화에 대해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았다는 건 마찬가지였다. 또한 진행자 안선영도 '이혼 소송' 운운 하며 왜곡된 사실을 언급하였고 이에 대해서도 박지훈은 수정해 주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2002년부터 2004년에 걸쳐 최진실은 자신을 두고 유책배우자라고 말하고 다니는 조성민에게 이혼할 의사가 없다고 대응하며 조성민에게 소송이혼 절차를 밟으라고 했고, 이후 밟으라는 소송이혼 절차는 안밟고 위법을 저지르고 다니는 조성민에게 이혼합의서를 전달하며 합의이혼 절차를 밟으라고 했으며, 밟으라는 합의이혼 절차는 안밟고 위법을 저지르고 다니는 조성민에게 이혼할 의사가 없다고 대응하며 소송이혼 절차를 밟으라고 했을 뿐이다. 최진실을 향해 선제 공격에 나섰던 조성민은 가정법원에 가서 소송이혼 절차를 밟으면 되는데 최진실을 두고 유책배우자라고 말하고 다녔을 뿐 정작 소송이혼 절차는 밟지 못하였고, 이후 최진실로부터 전달받은 이혼합의서에 대해서는 그 내용을 준수하여 합의이혼 절차를 밟으면 되는데 이 이혼합의서를 언론에 공개하며 최진실을 비방하고 다녔을 뿐이며, 이에 대해 최진실로부터 명예훼손으로 고소를 당했을 뿐 이후에도 조성민은 소송이혼 절차는 밟지 못하고 있다가 또 최진실을 대상으로 폭력 행위를 저지르며 자충수를 두었고 이로써 조성민의 여론 조작은 최진실에게 제압되며 해당 사안이 마무리되었다. 즉 개별적인 위법행위에 대해 피해자 최진실이 가해자 조성민을 대상으로 법적 조치를 취한 바는 있으나 '이혼 소송'은 없었다. 대한민국에서 이혼 청구 소송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자신의 배우자가 유책배우자임을 입증해야 가능한 일이고, 더구나 이혼 청구를 했다고해서 끝이 아니라 법정에서 상대방에 의해 논파당하면 패소한다. 김대오는 이 방송에서 최진영에 대해서도 문제적 행태를 보이는데 배우 고소영 관련 인터넷에 떠도는 이야기를 그대로 유포하였던 것이다. 이 이야기는 최진영이 폭행범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 사안은 피해자로 지칭된 자든, 가해자로 지칭된 자든 공식적으로 문제제기하거나 언급한 바 없는 것으로 제3자들이 들쑤시고 다니며 말을 만들어냈을 뿐이었다.(최진영은 10대 시절 어머니 정옥숙이 포장마차를 운영하던 시절에도 그것을 부끄러워한 게 아니라 적극적으로 어머니의 일을 도울 정도로 심지가 굳은 인물이었다. 반면에 최진실은 정옥숙이 포장마차 리어커를 끌고 최진영이 그것을 뒤에서 미는 모습을 발견하면 그 모습이 부끄러워 피했다고 하며 두고두고 그랬던 자신을 부끄러워했다. 그런 최진영이 최진실이 사회적으로 곤란해질 일을 최진실이 보는 앞에서 했을 가능성은 낮다고 보는 것이 상식적이다. 그냥 최진영과 고소영 사이에 실랑이가 있었고 그것을 전해들은 기자들이 부풀려서 말을 만들어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상식적이다. 최진영은 2007년에도 비슷경험을 한 바가 있기도 하다. 무슨 의도로 김대오가 이 건을 방송에 나와 언급했는지 알 수 없으나 이를 통해 김대오가 최진실과 최진영에 대해 만들어낸 이미지의 예는 다음과 같다. http://gall.dcinside.com/board/view/?id=drama_new1&no=2140399 http://gall.dcinside.com/board/view/?id=drama_new1&no=2140635) 이 사안을 앞에 배치하고 최진실이 2004년 8월에 겪은 폭행 사건은 뒤에 배치함으로써 이 방송은 마치 두 사건이 대등한 것처럼 대중이 인식케 했다. 즉 검증되지 않아 제3자가 거론할 사안이 아닌 것과 인권변호사 수십 명이 나서서 공론화한 검증된 사건을 마치 대등한 폭행 사건인 양 방송으로 나란히 내보냈던 것이다. 김대오는 또 마치 최진실, 최진영, 정옥숙 등이 가족이기주의자들인 양 대중이 인식하도록 워딩을 하며 피해자인 그들이 피해자가 아닌 것처럼 이미지화하는 데 기여하였다. 이는 다른 출연자들이 가해자 조성민이 피해자인 양 대중이 여기도록 말을 한 것과 어우러져 '최진실, 최진영, 정옥숙 가족이기주의자들 만들기'가 완성되기에 이르렀다. 이 방송은 마지막 부분에 최진실이 2004년 8월에 조성민으로부터 폭행당한 사진을 내보냈는데, 이에 앞서 상당 부분을 조성민이 자신의 실체를 드러내지 않았을 시기 최진실 관련 행적으로 할애했다. 이는 방송사의 기이한 행동으로, 이 폭행 사건 등으로 과거의 조성민의 행적은 모두 무의미해졌기 때문에 폭행범 조성민의 악질성에 물타기를 할 속셈이 아니라면 이를 다룰 이유가 없었다.(A와 B가 친구관계를 맺어오다가 B가 A를 살해했는데 방송에서 A의 삶을 다루면서 A가 B의 실체를 모르던 시절 B와 친하게 지내던 것을 장황하게 언급하면서 A와 B의 부모들은 A와 B가 친하게 지내는 것을 반대했다느니 할 필요없는 이야기로 B의 살인행위를 물타기하고 A와 B가 어깨동무한 사진까지 굳이 방송으로 내보낸 상황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굳이 다룸으로써 최진실을 조롱하고 싶은 마음을 여실히 드러냈던 바였다.(최진실에게 조성민이라는 존재는 온갖 위법행위를 저지른 가해자일 뿐 실상 아무것도 아니었다. 일단 생전 최진실의 연애 상대가 한둘일 리가 없고, 조성민과의 법적인 혼인상태 4년 중 후반기 2년은 조성민의 위법행위를 처리하느라 최진실이 골머리를 썩던 시기였다. 이미 이혼사유를 발생시킨 상태에서, 기자들을 불러놓고 이혼하고 싶다고 하소연하면서 최진실에 대해 명예훼손을 저지르며 추가적으로 이혼사유를 발생시켰고, 그 이후에도 또 이혼사유를 발생시킨 전대미문의 행태를 보인 것이 조성민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굳이 조성민을 다루고 싶으면 이 자가 최진실에게 저지른 악행을 건조하게 짚고 넘어가면 되는 것이었다. 최진실에게 일생일대의 과업은 여론조작 제압이었고 계속 추가적으로 발생하는 여론조작을 목도하면서 최진실은 살아서 이를 해결하는 데 한계를 느끼고 죽어서 해결코자 하였던 바, 자신의 얼굴 걸고 이름 걸고 직업 걸고 최진실을 향해 여론조작을 저지른 조성민은 최진실이 반드시 처리해야 할 대상이었다. 하지만 그 방송 녹화 자리에는 피해자 최진실을 공격하며 가해자 조성민 편에 섰던 자, 대놓고 가해자 조성민의 입 노릇했던 자들이 출연자로 앉아 있었다. 그들이 모여 최진실의 삶을 논하고 있었으니 방송 내용이 그러했던 것이고 가히 세상이 거꾸로 가는 행태가 벌어졌던 것이다.) 이에 최진실의 인생에서 소거된 인물인 폭행범 조성민의 분량이 평생 직업적 동료였던 최진영의 것보다 더 많은 듯 편집이 되었던 바였다. 폭행범 조성민은 마지막까지(2008년 10월 2일) 최진실의 자녀들을 향해 돌을 던지며 최진실의 분노를 산 자인데 해당 방송사는 최진실을 주제로 한 방송 분에 폭행범 조성민의 분량을 선을 넘어 집어넣으며 백은영을 출연자로 선택한 의도를 보여주었다. 백은영은 폭행범 조성민이 최진실의 자녀들에게 돌을 던지는 것을 도와준 자이기 때문이다. 이는 2008년 10월호 여성조선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 방송에서는 백은영과 백현주 앙상블도 관전포인트인데 이들은 가해자 조성민의 말을 그대로 유포하며 피해자 최진실을 조롱하는 행태를 보였다. 생전 최진실은 가해자 조성민의 여론조작으로 힘든 시간을 가졌었기 때문이다. 즉 백은영과 백현주는 이 방송에서 죽은 조성민을 대신하여 조성민의 입 노릇을 했던 바였다. 백은영과 백현주는 시공을 초월하여 폭행범 조성민과 협력관계를 유지했던 것이다. 조성민이 2002년부터 2004년까지 피해자 행세를 하며 했던 말들은 최진실을 대상으로 소송이혼 절차도 못밟는 걸 통해 허위임이 입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백은영과 백현주는 그런 행태를 보였던 것이다. 이것이 최진실이 살아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었던 여론조작의 메커니즘이었다. 즉 어떤 사안에 대해 입증을 해도 입증이 안되었다고치고 최진실을 공격하는 행태가 자행되었던 것이다. 마녀가 아닌데 마녀라고 치고 누군가를 죽였던 중세의 마녀사냥이 이와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중세의 마녀는 죽으면 마녀가 아닌 게라도 되었지만 최진실은 죽어서도 백은영이나 백현주에 의해 마녀로 규정되었다는 뜻이나 진배없었다. 이런 행태를 보이고서도 이후 다른 프로그램에서 백은영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최준희의 자택을 찾아가고 최준희를 인터뷰하고 최준희가 폭행범 조성민을 닮았다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방송 멘트로 했다. 최진실이 최준희를 잉태했을 때 조성민이 최진실을 폭행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인데도 백은영류가 이토록 당당하게 폭행범 조성민과 협력관계를 유지한 것은 믿는 구석이 없고서는 할 수 없는 행태였다. 이런 백은영의 행태를 최준희가 성인이 된 뒤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고 평가할지는 두고볼 일인 바였다. 최진실은 살아서는 백은영류를 이길 수 없다고 보았던 바, 이는 1 더하기 1이 2라고 아는 사람이 1 더하기 1이 3이라고 우기는 사람을 절대 이길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로, 언론이라는 무기로 그렇게 우기면 대책이 없는 바였다. 하지만 죽음이라는 사건은 한 인간의 삶을 열린 계에서 닫힌 계로 전환시켜주어 시시비비를 가릴 수 있는 틀거리를 마련해주고 거기다가 인터넷의 발달로 누구나 정보의 교차 검증이나 퍼즐맞추기 그리고 집적이 가능해져 '진실'이 승리할 확률을 높여주는 바였다. 최진실에 대한 근거없는 적개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던 조성민은 최진실의 사망에 대해 누구보다 기뻐하고 신이 나서 살았어야 하지만 그렇지 않고 사망한 것은 최진실이 죽음으로써 자신의 삶에 닫힌 계를 설정함에 인과응보 메커니즘이 비로소 제대로 작동할 수 있었기 때문일 수 있었다. 이 메커니즘에서 백은영류도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은 상식적이다.
  560. 여성조선 2008년 10월호 백은영의 기사 일부는 다음과 같다./ <백은영>: 그를 아는 사람이라면, 아니 그를 모르더라도 이제는 누구나 다 알아버린 톱스타 최진실과의 결혼과 파경과 이혼과 갈등의 사건들…. 지난 몇 년간 그는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에 빠져들었다. 다시 운동을 시작했고 재기의 구슬땀을 흘렸지만 전성기를 지난 세월의 무게는 그리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그를 괴롭힌 것은 불신의 벽이었다. 믿을 사람이 없다는 것. 지난 몇 년간 그의 몸과 마음은 모두 만신창이가 됐다. <조성민>: 당시 사건 이야기는 사실 하고 싶지 않아요. 사람들이 저를 찾아와 진실을 말해달라고 부탁해 어렵사리 이야기를 꺼냈는데 제 이야기는 이내 묻혀버렸어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친분이 있는 기자들에게 하소연해도 결국 제 하소연보다는 꼬투리만 잡힐 때가 많았죠. 당시 저는 일본생활을 접고 미국 진출을 꿈꿨어요. 스프링 캠프에 참여해 좋은 인상을 남기고 제의를 해오는 구단이 있으면 입단 테스트를 받고 미국 진출을 하려고 했어요. 그 꿈이 좌절된 셈이죠. 팔자려니 생각해요. 억울하기도 하지만 누가 알아주나요. 이제 더 이상 기회가 없을 것 같아요. 저에 대해 잘못 알려진 부분을 이야기해도 사람들은 변명으로만 들을 거예요.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 그것은 아니었다고 이야기해봐야 저 혼자만의 메아리라는 사실을 알았어요. 진실을 밝힐 수 있는 사람은 제가 아니고 따로 있잖아요./ <조성민>: 아이들 얼굴을 보지 못한 것도, 목소리를 듣지 못한 것도 오래됐어요. 예전에 아들을 만나러 갔을 때 심한 잡음이 나온 이후 계속 피하게 되더라고요. 나중에 아이들이 커서 스스로 판단할 수 있을 때, 보고 싶으면 찾아올 것이고, 만약 보기 싫어하면 그때 가서…. <백은영>: 아이들을 만나는 일이 망설여지는 이유 중의 하나로 그는 '지금 곁에 있는 사람에 대한 예의도 아니고…'라고 말했다.
  561. 우먼센스 2008년 10월호 하은정의 기사 일부는 다음과 같다./ <하은정>: '알고 보면' 그는 호감형인 사람이다. 기자는 4년 전 이혼 공방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고 있을 때 그와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운동선수답게 순수하던 모습이 강하게 기억에 남았다. 덧붙여 말하면, 참 잘생기기도 했었다. 당시 인터뷰를 하는 내내 인물값 한번 혹독하게 치르는 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언론은 그를 많이도 괴롭혔다. 당대 최고의 톱스타와 결혼, 긴 이혼 공방 그리고 사업 실패. 그의 집 앞엔 늘 기자들이 대기 중이었고 그의 부모님 휴대폰도 바람 잘 날이 없었다. 그는 "(언론에) 뒤통수만 뻥뻥 맞았다"고 표현했다. 그런 그가 다시 언론과 마주했다. 무슨 얘기를 할까, 궁금하다./ <하은정>: 4년 전 인터뷰 때 참 순수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조성민>: 그 때는 아마 그랬을 거예요. 어려운 일을 겪으니까 성격이 많이 바뀌더라고요. 지금은 보다시피 까칠해요.(웃음) 의리있고 순수하다는 소리를 꽤 듣고 살았는데, 그렇게 산들 이득이 되는 건 많지 않더라고요./ <하은정>: 아내는 어떤 스타일인가. <조성민>: (전략前略)저희를 연결해준 건 언론이에요. 힘든 일을 같이 겪으면서 정이 들었고, 믿음이 생기고 사랑이 싹텄어요. 그때 제 편은 아무도 없었어요. 다 손가락질만 했어요. 저를 믿어준 유일한 사람, 그 사람이 아내였어요./ <하은정 Archived 2016년 10월 27일 - 웨이백 머신>: 확실히 빵보다는 야구 쪽이 어울린다(그는 한때 슈크림빵 체인 사업을 했다). <조성민>: 하하. 사실 이혼 공방만 아니었으면 슈크림빵 사업은 잘될 사업이었어요. 안 되는 사업이 아니었다니까요. 어릴 때부터 사업가가 되고 싶었어요. 경영학과(고려대)를 선택한 것도 같은 맥락이에요. 아내도 저와 비슷해요. 압구정동을 비롯해 의류매장을 네 개나 운영했을 정도로 사업 수완이 좋아요. 밤새 둘이 얘기하면 호텔을 몇 채나 지어요.(웃음) 아내는 엔터테인먼트 분야에 지인들이 많아 그쪽 사업을 구상 중이에요. 지금은 용돈 벌이정도만 하고 있어요. <하은정>: 그는 잘되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부모님, 아내, 그리고 최진실과의 사이에서 낳은 두 아이에게도 멋진 아빠가 되고 싶다. 아이들이 존경할 수 있는 아빠가 되고 싶다. 그는 갈 길이 멀다며, 꼭 성공해야 한다고 되뇌었다./ <하은정 Archived 2016년 10월 27일 - 웨이백 머신>: 아이들과 안 만나나? <조성민>: 안 봐요. 만나려면 만날 수도 있겠지만 아이들 성까지 엄마 성으로 바뀌었고, 또 지금 내 옆에서 고생하는 아내를 생각하면…. 보고 싶은 마음이 있더라도 지금은 때가 아닌 것 같아요. 나중에 어느 정도 커서 만나게 됐을 때 멋진 아빠이고 싶어요. 생일날, 어린이날, 어버이날 등등 때 되면 많이 보고 싶죠. 볼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 훗날을 기약하는 거죠. 마지막으로 본 게 작년이에요. 우연히 마트에 갔다가 먼발치에서 봤어요. 생각보다 많이 안 컸네, 그랬죠. 달려가서 와락 안고 싶었는데 외할머니가 옆에 있어서 먼발치에서 보고만 왔어요./ <하은정>: 환희는 유독 아빠를 많이 닮았다. <조성민>: 커가면서 조금씩 외가 쪽을 닮아가는 것 같지만 여전히 제 붕어빵이죠. 잘 커줬음 좋겠어요. 가끔 애들이 보고 싶을 때 인터넷을 뒤적거려요. 옛날 사진밖에 없더라고요. 내가 기운 빠져 있을 때 아내는 일부러 인터넷에서 애들 사진을 찾아 보여줘요. 안 보는 척하면서 슬쩍 보죠. 그런 아내에게 고맙고 미안하죠./ <하은정>: 아이들 성이 바뀌었을 때 기분이 어땠나. <조성민>: 한마디 상의 없이 벌어진 일이라 당황했어요. 굳이 그렇게 할 필요가 있나, 싶었어요. 참 많이 힘들었어요. 뭘 해도 의욕이 안 생겼으니까요. 더 이상은 이것보다 아픈 일이 없겠지, 하고 마음을 잡았어요./ <하은정>: 2세 계획은 없나. <조성민>: 아내가 많이 원해요. 있으면 좋겠죠. 근데 계획한다고 뜻대로 되는 게 아니잖아요. 언제든지 생기면 감사하죠.
  562. 김선주. 고양이야 … 여기 생선이 …. 한겨레. 2008년 10월 8일.
  563. 황호택. 최진실의 못 이룬 꿈. 동아일보. 기사입력 2008년 10월 10일. 최종수정 2008년 10월 11일.
  564. 김선주성폭력을 저지른 적도 없고 성매수를 한 적도 없으며 혼인 기간에 정조의 의무도 위반한 적 없는데다가 성 중독 진단도 받은 바 없는 최진실을 두고 마치 성애에 미친 여자인 양 서술하기를 서슴지 않았는데, 최진실이 마치 성욕을 마음껏 못누려 우울해 하다가 어린 자식 둘을 두고 세상을 등진 어머니인 양 억측을 내놓았다. 이는 최진실에 대한 모욕으로, 여론 조작의 피해자로서 그 고통이 자식들에게 미치는 것을 염려해 세상을 떠난 최진실의 객관적 상황과 배치되는 것이었다. 승객으로서 버스를 타고 가다가 죽을 뻔한 경험을 한 사람은 버스를 타는 것에 대해 불편감이 있기 마련인데 이런 상황에서 버스를 타지 않게 되어 우울해진다는 것이 김선주의 논리였다. 중국음식점에서 짜장면을 먹다가 짜장면 그릇에서 구더기를 발견한 경험을 한 사람은 짜장면을 먹는 것에 대해 불편감이 있기 마련인데 이런 상황에서 짜장면을 먹지 않게 되어 우울해진다는 것이 김선주의 논리였던 것이다. 성애로써 인간관계를 맺은 상대로부터 피해를 입은 경험이 있는 사람은 성애로써 인간관계를 맺는 일에 불편감이 있기 마련인데 이런 맥락에서 성애로써 인간관계를 맺는 일을 하지 않아 급기야 이로 인해 우울해진다는 것이 김선주의 논리였기 때문이다. 더구나 최진실은 성애로써 맺은 인간관계 상대로부터 위법의 피해를 입었을 때 이런 젠더폭력에 대해서는 사회적으로 피해자로서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는 것이 대한민국의 현실이라는 것을 직접 겪은 사람이었다. 이런 사람이 대한민국에서 성애로써 남자와 인간관계를 맺는 일을 추구할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것이 상식적이다. 이런 현명한 선택을 성애로써 인간관계를 못맺어 정신병이 걸린 사람으로 자기 멋대로 해석하는 근거로 삼는 김선주 같은 성애에 미친 사람들로 인해 최진실은 생전 불편함을 겪었던 것이다. 남자와 커피만 마셔도 연애한다고 떠들며 기사를 쓰는 것이 이런 부류의 기자들이었고 최진실 또한 그로 인한 불편함을 자전 에세이 등을 통해 설명한 바 있었다. 김선주는 최진실이 연애를 즐겼어도 같은 해석을 하며 최진실을 성애에 미친 여자로 만들었을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면 김선주는 그렇게 젠더폭력을 극심하게 겪었고 겪었다고 말하는 사람이 남자를 놓지 못하고 연애를 한다고 최진실을 성애에 미친 여자로 말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김선주의 올가미에 의거해서 최진실은 어떤 경우에도 성애에 미친 여자가 될 수 있었다. 이렇게 최진실에 대해 해석하는 근거가 결국 최진실의 이기 때문에 김선주의 노림수는 최진실의 침묵인 셈이다. 하지만 피해자 최진실이 가해자의 정조 의무 위반에 대해 문제를 삼지 않고 이혼을 했어도 김선주는 그렇게 위법의 피해를 겪고도 합당한 대응을 하지 않은 것을 보면 최진실은 성애에 의거해 사리분별력을 잃은 것이라고 결론지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런 궤변은 여자의 거절을 자신에 대한 호감의 표시로 마음대로 해석하는 남자들의 그것과 맥이 닿아 있다. 최진실은 성애에 의거해서 남자와 엮이는 일에 흥미가 없음을 공개적으로 밝힌 바 있음에도 불구하고 김선주는 자기 멋대로 최진실이 성애에 미친 여자인 양 해석하며 글을 썼기 때문이다. 버스를 타는 것과 관련해서 불편감이 있는 사람은 택시를 타면 되고 짜장면을 먹는 것과 관련해서 불편감이 있는 사람은 냉면을 먹으면 되고 성애로써 남자와 엮이는 것과 관련해서 불편감이 있는 사람도 성욕은 있을 수 있고 그런 사람은 자위행위를 하면 된다. 남성도 자위행위를 하지만 여성도 자위행위[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를 한다. 남성들도 자위행위로 성욕을 해결하며 살고 여성들도 자위행위로 성욕을 해결하며 산다. 성애동성애, 이성애, 양성애 등으로 분류가 되고 성애로써 인간관계를 맺는 일은 당사자의 자유의 영역이다. 김선주는 이런 지적 맥락을 무시한 채 최진실을 광인(狂人)으로 몰았다. 최진실이 남성이었다면 김선주는 이런 류의 을 쓰지 않았을 확률이 높다. 명예남성(honorary male) 김선주는 남성의 자위는 본능이자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겨지지만 여성의 자위는 금기시되고 남성성매수는 흔하지만 여성의 성매수는 금기시되는 대한민국 사회에서 남성이 성욕 해결에 차질이 생겨 우울해하다가 어린 자식 두 명을 두고 스스로 세상을 떠난다는 황당한 이야기를 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즉 김선주는 애인이나 남편이 없는 여성은 불완전한 존재라는 편견을 전제로 글을 쓴 것이다. 김선주의 논리에 따르면 건강하고 정상적인 행위인 자위행위가 금기시되는 존재인 여성은 애인이나 남편이 없으면 성욕이 해결 안되는 존재로 전락하고 이에 성욕이 해결이 안되어 우울해 하다가 어린 자식 두 명을 두고 스스로 세상을 떠날 수 있는 한심한 존재로 규정되는 것이다. 결국 남성중심사회에서 여성의 자위행위를 금기시하는 것은 여성의 삶을 이런 식으로 모욕하고 폄훼하려는 의도라고봐도 무방하다. 이는 흡연이라는 기호품 향유 행위와 관련하여 여성의 흡연에 대해서는 금기시하는 트릭을 가동하여 여성의 삶을 통제하는 메커니즘과 통하는 바이다. 성매수는 돈 몇 푼이면 성애로써 맺는 인간관계가 가능한 행태이다. 성애로써 맺는 인간관계는 일단 호의관계이다. 그런데 이를 상거래 방식으로 실현하는 것이다. 이는 결혼식 하객을 돈을 주고 고용하는 행태와도 통하는 면이 있다. 통상 결혼식 하객은 호의관계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성매수는 위법행위이다. 이렇게 위법을 저지르면서까지 남성들은 성애로써 인간관계를 맺는 일을 돈을 지불하면서 추구한다는 것이고 그러므로 성매수는 성욕의 문제라기보다 권력욕문제라는 뜻이 된다. 즉 성매수는 권력욕의 발현이어야 말이 된다. 강간도 권력욕의 발현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판단이다. 그리고 남성은 만 있어도 해결되는 성욕이, 자위가 금기시되는 존재인 여성은 연인이나 남편이 없이는 그것이 해결이 안되어 우울해지고 급기야 어린 자식 둘을 두고 스스로 세상을 떠날 수 있는 요인이 된다는 것이 김선주의 논리였고 이는 성욕과 관련하여 남성과 여성에 대해 차별적 시선을 가진 대한민국 사회를 반영하는 바였다. 전 지구적 관점에서 임신부를 폭행하는 일은 문명 국가에서는 인간 취급 받지 못하는 대표적인 행위이다. 가해자 조성민은 임신부 최진실을 폭행했고 그 폭행 사실을 본인이 직접 떠들고 다녔으며 그 폭행의 원인을 피해자 최진실의 탓이라고까지 했다. 즉 조성민이라는 인물을 통해 알 수 있었던 것은 대한민국 사회에서 남자는 성애로써 여자와 인간관계를 맺을 경우 설사 그 여자가 자기 자식의 어머니여도 그 여자를 대상으로 온갖 범죄행위를 저지르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행하고 더 나아가 그걸 떠들고 다녀도 사회생활에 전혀 지장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이라는 사회에서 남자는 성애로써 여자와 인간관계를 맺을 경우 아무런 심리적 마지노선 없이 그 여자를 대상으로 위법을 저지를 수 있다는 의미였고 그것이 용인되는 곳이 대한민국이라는 뜻이나 진배없었다. 이런 곳에서 여성이 성애로써 남성과 인간관계를 맺는 것은 '반드시 지게 되어 있는 게임'을 하는 것과 같다. 김선주는 이 모든 맥락을 무시한 채 자기 투사에 의거해서 글을 써서 최진실을 무뇌아로 전락시켰다.
  565. 황호택은 피해자 최진실이 2005년에 가해자 조성민과 재혼할 생각이 없다고 자신에게 분명히 말했는데도 2008년 10월 10일에 자기 멋대로 피해자 최진실이 가해자 조성민과 재혼을 원했다고 칼럼에 썼다. 또 피해자 최진실이 2005년에 아동의 법률행위대리권자로서 아동 최환희와 최준희가 가해자 조성민에 대해 면접교섭권을 가진 채권자임을 확인하는 말을 한 것에 대해서도 2008년 10월 10일에 자기 멋대로 해석했다.
  566. 문정민. 신화해석은 파워게임이다. 여성신문. 2002년 5월 17일.
  567. 유재순은 이 기사에서 "애시당초 최진실은 조성민과 결혼하면 연기 생활을 줄이고 조성민이 1군에 올라 올 수 있도록 내조를 하겠다고 언론을 상대로 입에 침이 마르도록 떠들었다"라고 하면서 '떠들었다'라는 표현을 썼는데, 이는 최진실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드러낸 셈이었다. 2002년부터 2004년에 걸쳐 3년 동안 최진실이 법에서 규정하고 있는 배우자로서의 의무를 위반했다는 증거가 나온 바 없었는데도 유재순은 최진실이 마치 유책배우자인 양 이런 표현을 썼던 것이다. 혼인신고의 전제는 상부상조다. 상부상조를 할 것이기 때문에 혼인을 하는 것이다. 이에 기혼 남성이 '외조를 잘하겠다'고 굳이 말할 필요 없고 기혼 여성이 '내조를 잘하겠다'고 굳이 말할 필요 없는 사안이다. 결혼을 앞둔 여성이 '내조를 잘하겠다'고 굳이 말했으면 그 결혼 상대 남성은 '그렇게 말까지 해주니 고맙다'가 되어야 상식적이다. 그런데 유재순은 그 말을 물고늘어지며 그 여성을 잡는 거리로 그 말을 악용하는 어처구니 없는 짓을 저지른 것이다. 더구나 그 여성은 전업주부도 아니고 별도의 직업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고 그것도 그 직업세계에서 매우 잘나가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더더욱 고마워해야 하는 사안이었는데 유재순은 어찌된 영문인지 최진실을 후려치지 못해 안달하는 행태를 보였다. 유재순은 뭔가 크게 착각하고 있었다. 객관적으로 최진실은 능력으로든, 재력으로든, 인성으로든, 성격으로든, 외모로든, 남자가 아쉬운 입장이 아니었다. 최진실의 결혼 또한 조성민이 매달려서 이루어진 일이었다. 1998년 12월에 고등학생 때부터 최진실의 팬이었다며 조성민이 최진실에게 들러붙기 전까지는 조성민을 알지도 못했던 것이 최진실이었고, 1999년 2월에 7년 동안 최진실을 짝사랑했다며 성애적 관계를 원한다는 뜻을 최진실에게 표현한 쪽도 조성민이었다. 2002년부터 2004년까지 최진실에게 엉겨붙은 것도 조성민이었다. 2008년 10월 최진실의 사망 때까지 최진실을 대상으로 여론 조작을 하며 최진실에게 엉겨붙은 것도 조성민이었다. 최진실의 사망 후에도 최진실의 유가족에게 엉겨붙은 것도 조성민이었다. 다만 대한민국 사회 분위기가 이혼한 부모를 둔 아동에 대한 인권 침해가 심해 최진실에게는 그걸 염두에 둔 행보가 필요했을 뿐이었다. 최진실은 사회적, 경제적 지위에서 조성민보다 우위의 인물이었는데도 유재순은 '내조[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운운하며 평등 사상에 위배되는 행태를 보였던 것이고, 이는 기본적으로 조성민의 편에 선 자신의 포지션을 드러낸 것이었다. 2002년부터 2004년에 걸쳐 조성민이 최진실을 상대로 끊임없이 무리수를 두고 최진실을 고리로 노이즈 마케팅을 한 것은 최진실이 조성민보다 사회적, 경제적 지위가 우위임을 말해주는 반증이었다. 그리고 유재순은 마치 운동선수는 배우자로부터 반드시 수발[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을 받아야 하는 직업인 양 서술하였고, 최진실은 당연히 조성민의 수발을 들어야 하는데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아 불만이라는 듯 서술하였다. 유재순은 최진실이 마치 조성민의 수발이라도 들기 위해 결혼한 것처럼 최진실이 한 말을 따오며 조성민이 자신의 직업세계에서 무능한 모습을 보인 것이 최진실의 책임인 양 말하였다. 즉 최진실의 의례적인 성의 표시를 물고늘어지며 그런 행태를 보였던 것이다. 더구나 조성민이 자신의 직업세계에서 무능한 모습을 보인 것은 비혼자일 때도 보였던 바였고, 조성민은 자신의 수발을 들 사람이 필요하면 개인적으로 사람을 고용하면 될 일이었다. 요약을 하자면 유재순의 이런 비상식적인 행태는 2002년 12월 18일 오후 2시에 조성민이 기자회견을 통해 보인 행태와 대동소이했다는 것이다. 조성민은 최진실의 배우자가 되는 일을 추진하다가 그게 막히자 자살을 시도한 인물이었는데 자신의 수발을 들 사람을 얻기 위해 목숨을 건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더구나 조성민이 연예인 최진실을 굳이 자신의 수발을 들 사람으로 선택했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았다. 즉 유재순과 조성민의 행태는 여성은 남편의 수발을 들어야 한다는 비상식적 사회 분위기를 등에 엎고 최진실을 공격한 행태에 불과했다. 즉 조성민은 최진실의 수발을 들기는커녕 최진실의 명예를 훼손하며 다녔다. 그리고 그 시간에 최진실은 2살의 아들과 태아인 딸을 양육하고 있었다. 다시 말하면 법에서 규정하고 있는 배우자로서의 의무를 위반한 것은 조성민이었고 유재순이 비난의 대상으로 삼아야 했던 것은 피해자 최진실이 아니라 가해자 조성민이었다. 하지만 유재순이나 조성민은 피해자 최진실을 비방하며 양비론의 프레임을 대중에게 주입시켰다. 유재순은 또 2002년 12월 18일 오후 2시에 조성민이 기자회견을 연 사건과 관련하여 '이혼 소동' 운운 하며 본질을 호도하였는데, 실체적 진실은 '이혼 소동'이 아니라 여론 조작 사건이었다. 애초에 최진실은 조성민으로부터 유책배우자라고 지칭된 상황에서 이혼할 의사가 없다고 하며 조성민에게 소송이혼 절차를 밟으라고 한 입장이었고, 조성민이 그런 기자회견을 열었다는 것은 합의이혼이 불발되었다는 반증이고 조성민은 가정법원에 가서 소송이혼 절차를 밟으면 되는 시간에 그런 황당한 기자회견을 열었던 것이다. 즉 이혼 문제는 소송이혼이라는 답이 나온 상황이었고 조성민은 가정법원을 통해 최진실이 유책배우자라는 주장을 입증하여 이혼 판결을 받으면 되었다. 이 기자회견에서 조성민은 최진실과 이혼이 하고 싶다고 했고 최진실이 유책배우자라고 주장했는데, 최진실은 2002년부터 2004년에 걸쳐 자신이 유책배우자라는 조성민의 여론 조작을 제압해 나갔다. 더불어 유재순의 여론 조작도 제압한 셈이었다. 더구나 최진실은 2002년 6월에도 여론 조작 사건을 겪은 바 있어 법적인 조치를 취한 바 있었고 2002년 12월의 여론 조작 사건은 그 내용의 심각성이 더 악질적인 것이어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상황이었다. 무엇보다 그 여론 조작 행위자가 자기 자식들의 생부였기 때문에 반드시 그 진위를 공개적으로 규명해야 할 상황이었다.
  568. 이 기사에서 유재순은 일본에서 최진실이 공개된 장소에서 조성민에게 문제적 행동을 했다는 이야기를 많은 사람들로부터 들었다고 했고, 이 사건에 대한 목격자도 많다고 했으며, 이 사건의 보도에 대해 최진실이 '악랄한 음해'라고 했었다는 것에 대해서도 '틀림없는 사실' 운운 하며 최진실을 조롱하는 듯한 글을 썼다. 하지만 이 기사에서 언급한 최진실이 조성민의 머리를 쳤다는 것, 최진실이 조성민에게 욕을 했다는 것은 최진실이 유책배우자라는 뜻과 진배없었고 최진실이 유책배우자라는 주장은 검증된 바 없었다. 유재순의 이 기사는 조성민이 최진실을 유책배우자라고 말하고 다닌 상황에서 나온 것으로, 최진실이 유책배우자라는 내용인 셈이었고 이 내용은 이혼을 하고 싶다고 하소연하며 다니던 조성민에 의해 검증될 수 있는 사안이었으나 유재순의 말에 따르면 그렇게 증인이 되어줄 사람들이 많았다는데도 조성민은 2004년까지도 최진실을 상대로 이혼 청구 소송 서류 접수조차 하지 못함으로써 최진실이 유책배우자라는 유재순의 이 기사 내용은 허위임이 입증되었다. 유재순의 이러한 행동은 가해자 조성민의 편에 서서 피해자 최진실을 공격한 행동이나 마찬가지였다. 2002년 12월 18일 오후 2시에 조성민은 기자회견을 열어 자신의 일방 폭행에 대해 쌍방 폭행이라고 주장하며 피해자 최진실에 대해 여론 조작을 했었는데, 유재순의 이 기사 내용은 이러한 조성민의 행태에 날개를 달아주는 역할을 하였다. 해당 내용들은 그 패턴도 대동소이했는데, 피해자 최진실이 가해자 조성민의 가해 행동을 유발했다는 것이었다. 최진실을 두고 여론 조작을 함에 있어 가해자 편에 선 유재순이 서술하는 사건과 가해자 조성민이 서술하는 사건의 패턴이 유사했던 것이다. 이 기자회견에서 가해자 조성민은 임신부 최진실을 폭행했었다는 사실을 자백하면서 피해자 최진실이 폭행당할 행동을 했었다고 주장했다. 이 기자회견은 이렇게 폭행당할 행동을 한 최진실과 이혼이 하고 싶다고 하소연하는 가해자 조성민의 기자회견이었는데, 유재순의 이 기사 내용도 구체적인 내용은 다르나 이야기 구조가 조성민이 묘사하는 조성민의 임신부 폭행 사건과 유사했던 것이다. 하지만 2002년부터 2004년에 걸친 3년 동안 피해자 최진실이 '가해자'라는 주장도 입증된 바 없고 가해자 조성민이 '피해자'라는 주장도 입증된 바 없다. 이는 대한민국의 이혼유책주의가 진위를 가리는 준거가 되어주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요약하자면 유재순이 언급한 사건은 그 내용의 진위는 물론이거니와 그 사건의 존재 유무도 검증된 바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최진실이 이 소문을 '악랄한 음해'라고 했다는 것은 진실임이 입증되었다. 2002년부터 2004년에 걸쳐 최진실은 공개적으로 이혼할 의사가 없다는 입장을 취하였는데 이는 이 '악랄한 음모'를 처리하는 카드이기도 하였다. 또 따로 짚어야 할 것은 유재순의 이 기사 내용에 의하면 조성민이 최진실을 대상으로 폭력 행위를 저질렀다는 것인데 어차피 조성민의 폭력성은 임신부 최진실을 폭행하고 같은 대상을 2년 후 또 폭행함으로써 입증되었기 때문에 굳이 검증되지 않은 소문을 가져와서 조성민의 폭력성을 말할 필요가 없었다는 점이다. 조성민의 폭력성은 대한민국 국민이 모두 주목하는 와중에도 드러낸 폭력성이었기 때문이다. 이와 더불어 유재순은 같은 기사에서 조성민의 직업이 운동선수라는 것을 강조했으면도 조성민이 최진실보다 체격과 완력이 우위인 상태에서 최진실을 상대로 이 폭력을 저질렀다는 것은 언급하지도 않았다. 요약을 하자면 유재순과 조성민의 행태는 여론 조작은 100% 날조를 통해서도 이루어지지만 실제 있었던 사실을 일부 왜곡시켜서도 가능한 행위임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즉 피해자 최진실은 가해자 조성민에 대해 일방적 피해자임이 2002년부터 2004년에 걸쳐 입증되었지만, 가해자 편에 서서 역할을 한 유재순과 가해자 조성민의 여론 조작에 의해 최진실이 일방적 피해자가 아닐 수도 있다는 대중 세뇌가 이루어진 셈이었다. 조성민은 이런 설계 속에서 최진실과의 이혼 후에도 그 여론 조작의 흐름을 이어갔고 최진실 사망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569. 방송인 전여옥의 시사터치: 32살 최진실의 結婚 비즈니스/ 뜨거운 양철지붕 위의 암팡진 고양이…32살 최진실의 結婚 비즈니스… '5살 연하 未完의 남자'에게 미래지향적 投資/ 언론인 전여옥/ 중앙일보iWeekly(아이위클리)》 16쪽/ 2000년 6월 20일/ 최진실의 선택은 상당히 비즈니스적이고 실리적이다. 상대인 조성민은 빛나는 재능을 지니고 있지만 아직 ‘미완’이다. 어제나 오늘의 남자가 아니라 내일의 남자에 최진실은 투자하기로 마음 먹은 셈이다. 이중적인 최진실의 이미지 결혼은 비즈니스적 특성을 지닌다. 한 사람이 어떤 결혼을 했느냐는 그 인간의 모든 것을 말해 준다. 명문(?) 재벌가의 며느리가 된 모 여배우의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평소 베드신은 물론 키스신에도 까다로웠다는 그녀의 알몸을 본 느낌이 들었다. 단정하고 똘똘해 보여 좋은 배우가 되겠다고 생각했던 그녀가 결국은 신데렐라 콤플렉스 환자였구나 하는 씁쓸한 생각이 들어서였다. 게다가 요즘 같은 좋은 세상에 혼자서 큰소리 땅땅 쳐가며 수십억도 벌 수 있는데 왜 그녀는 재벌가의 며느리가 되어 기도 못 피고, 돈도 당당하게 쓰지 못하는 ‘부잣집 몸종’의 신세를 선택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런 점에서 최진실의 결혼은 최진실이라는 여배우가 과연 어떤 여자였는지를 정확하게 짚어 준다. 내가 아는 최진실을 정리해보자. 우선 최진실의 이미지는 이중적이다. 깜찍하고 귀엽기만한 이미지와 동시에 노란 물이 뚝뚝 떨어지는 짠순이이자 소녀 가장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최진실은 여러 인터뷰에서 솔직하게 가난을 이야기했다. 몇몇 찢어지게 가난했던 여자 연예인들이 부잣집 딸 행세를 하는 것과는 사뭇 대조적이다. 두 번째, 최진실은 상당한 노력파이다. 모 전자회사의 VTR선전에 나왔던 최진실이 지금의 최진실이 되리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CF로 한창 물이 올랐던 몇몇 여자 연예인 가운데 ‘여배우’로 자리를 잡은 경우는 최진실 외에 거의 없다. 처음 겉돌고 어설펐던 최진실이 ‘마누라죽이기’나 ‘장미와 콩나물’에서 보여 주었듯 실감나는 연기자로 변신한 것은 그녀가 대단한 노력형이었다는 이야기이다. 세 번째로 최진실은 프로의식이 대단한 듯하다. 헐리우드에서 프로정신이 탁월한 여배우하면 데미 무어를 꼽는다. 아무리 돈을 많이 들였다 해도 각고의 노력으로 스트립 댄서의 몸을 만들어낸 점은 존경스럽기 그지없다. 최진실이 존경스러운 점은 ‘정상’에서 뜨거운 양철지붕 위의 고양이처럼 암팡지게 버티고 있다는 점이다. 벌써 몇 년째인가? 네 번째는 최진실의 화끈한 면모이다. 한 번도 그녀와 이야기를 나눈 적은 없으나 ‘개고기를 잘 먹는다’든가 대낮 인터뷰에서 ‘커피 대신 맥주 한 병을 시켰다’는 기사를 읽을 때 나는 그녀가 좋아졌다. 그 최진실이 야구선수 조성민과 결혼한다는 기사를 읽고 나는 ‘최진실답다’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여배우로서 한 여자로서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정확히 감을 잡았다. 비즈니스적이고 실리적인 최진실의 선택 여배우의 결혼 형태는 시대와 더불어 달라진다. 가까운 일본의 예를 들어보자. 1970년대를 대표하던 인물은 여배우 야마구치 모모에였다. 모모에는 언제나 상대역으로 공연했던 배우 미우라 도모가즈와 결혼을 발표했다. 그녀는 21살에 은퇴를 밝히면서 만일 배우일을 계속하면 가정을 지키기 어렵기 때문이라고 했다. 또한 덧붙이길 “그를 위해, 그를 기다리며” 살고 싶다고 했다. 1980년대 일본 여배우의 결혼이라면 마쓰다 세이코를 들 수 있다. 마쓰다 세이코는 한마디로 스캔들러스하다. 자신보다 10년 이상 나이가 많은 배우 간다 마시키와 결혼했지만 ‘왜 그와 갑자기 결혼했을까?’ 하며 모두들 수상쩍어 했을 정도였다. 예상대로 아이를 낳고 뉴욕으로 음악공부를 하러 떠났고, 수없는 남자들과 염문을 뿌리고, 결국은 이혼했다. 그랬는가 싶더니 젊고 매력적인 의사와 후딱 재혼하는 저력을 보이기도 했다. 철저히 ‘나’만을 위해 사는 여배우의 결혼이다. 1990년대 일본의 대표적 여자 연예인이라면 아무로 나미에이다. 아무로는 이른바 일본의 외지라고 흔히 이야기하는 오키나와 출신이다. 가난했지만 투지를 갖고 가수가 되었고, 엄청난 돈과 인기를 거머쥐었다. 그런데 갑자기 아무로가 결혼을 발표했는데, 임신중이라는 사실까지 밝혔다. 상대는 ‘톰’이라고 불리는 댄서겸 음악인이었다. 일본 최고의 톱가수와 그냥 그런 톰의 결혼은 일본을 발칵 뒤집어놓았다. 그 둘은 결혼을 해서 아주 잘 살고 있고, 그렇게 돈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헌 옷을 얻어다 아이에게 입히면서 검소하게 살고 있다고 한다. ‘우리’의 개념을 선택한 결혼이다. 그럼 최진실의 선택은 어떠한가? 상당히 비즈니스적이고 실리적 선택이다. 상대인 조성민은 야구선수이다. 박찬호의 동기로서 일본에서 활동하고 있는 조성민은 빛나는 재능을 지니고 있지만 아직 ‘미완’이다. 지금보다 앞으로가 더 좋을 가능성이 있는 남자이다. 어제나 오늘의 남자가 아니라 내일의 남자에 최진실은 투자하기로 마음 먹은 셈이다. 연예계와 스포츠계는 한 집안 출신이다. 미국의 경제학자 프랭크가 지적했듯 연예계와 스포츠계는 ‘승자가 모든 것을 송두리째 차지하는 세계’이다. 그만큼 실력 하나로 버틸 수 있는 세계이자 무시무시한 경쟁의 세계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 둘은 바로 그런 치열함 속에서 싸워왔고 앞으로도 그 안에 있을 것이다. 마치 테니스의 슈테피 그라프가 안드레아 아가시의 재기를 도왔듯 같은 종류의 인간만이 줄 수 있는 신뢰와 지원이 이 커플의 성공적인 미래를 약속할 수 있을 것이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이 둘의 연령 차이이다. 최진실은 27살의 조성민보다 5살이나 위이다. 여자가 서른을 넘기면 현명해진다. 짙은 안개속에서 불안한 마음으로 운전대를 잡는 것이 20대라면 30대는 안개가 깨끗이 걷힌 가운데 툭 트인 고속도로를 달리며 운전하는 것과 같다. 서른을 넘긴 여자는 알 것도 다 알고 이것저것 본 것도 꽤 되고 해본 일도 많다. 굳이 자신보다 나이 많은 남자를 찾을 이유가 없다. 어린 여성은 경험 많은 남자에게 의존하고 그의 눈으로 그의 온실에서 잠자고 싶어한다. 그렇지만 독립적으로 자신의 인생을 개척하고 살아온 여자들은 ‘나보다 나이도 많고 키도 크고 돈도 많고 아는 것도 많은 남자에게 의존해야 한다’는 열등감에서 일찌감치 벗어나 있다. 누구라도 좋고 연하의 남자 역시 개의치 않는다. 그 남자가 ‘미완성’이라는 것, ‘연하’라는 것은 그만큼 미래지향적이라는 인물이라고 볼 수 있으니 말이다. 최진실의 결혼은 주먹을 꼭 쥐고 오로지 자신의 힘으로 모든 것을 얻고 이루고 쌓아온 여자의 당당한 선택이다. 스스로 지도를 읽어가며 길을 찾고 운전해온 자가운전자인 여성의 탁월한 선택이다. 빵빵하고 단단한 차 한 대를 직접 운전하면서 자잘한 접촉사고도 또 대형사고도 내봤던, 그랬기에 인생이라는 길을 구석구석 잘 아는 개인택시 기사급의 실력을 갖추게 된 착실한 여성이 고른 결혼 비지니스이다. 내가 아는 꽤 이름있는 여성은 “만일 여행을 간다면 어떤 남자와 떠나고 싶냐?”고 묻자 “야구선수”라고 대답했다. 나는 대충 그 이유를 알겠다. 한 남자로서 매력있는 27살의 야구선수와 야무진 32살의 여배우가 결혼한다. 그 결혼이 최진실의 고단했던 삶에 평온한 휴가여행이 되었으면 한다. 그리고 또 하나, 나는 최진실이 여배우로서 남길 바란다. 그래서 그녀의 결혼이 한 배우로서 ‘허브’가 아니라 ‘포털’이 되었으면 한다. 여배우가 평범한 일상을 산다는 것은 ‘자살행위'이므로….
  570. 김도형. 이미지로 사는 스타들의 이별. 한겨레. 2004년 6월 25일.
  571. 현빈, 송혜교 결별선언이 석연치 않은 까닭. 2011년 3월 9일.
  572. 김도형은 2004년 6월 25일 '상호비방전'이라는 용어를 쓰며 양비론을 펼쳤고 이를 통해 가해자 조성민의 편에 섰다. 조성민은 이걸 노리고 가정법원에 가서 판사 앞에서 떠들 이야기들을 기자들을 불러놓고 하였다고 봐도 무방한 바였다. 김도형은 조성민의 뜻대로 잘 움직여 준 셈이었다. 조성민이 펼친 여론조작에 대해 그 피해자 최진실이 언론 대응을 하며 방어권을 행사한 일은 김도형류에 의해 이렇게 매도되었고 이는 최진실의 숨통을 죄는 일이었던 셈이었다. 가해자와 한 패가 되어 움직이는 언론인들을 보며 피해자 최진실이 무슨 생각을 했을지는 2008년 10월 1일 밤 "다 필요없어, 내가 뭘 잘못했기에...죽을 거야, 죽으면 다 끝이 나는거야. 더 이상 싸우기도 하기도 상대하기도 싫어"라고 최진실이 마지막 통화에서 한 말을 통해 잘 알 수 있는 바였다. 조성민은 2002년부터 2004년에 걸쳐 최진실(가족)을 상대로 정조의 의무 위반 행위, 폭력 행위, 사기 행위, 명예훼손 행위, 허위사실유포 행위를 저질렀다. 2002년 12월 18일 오후 2시 현재 정조의 의무 위반 행위, 폭력 행위, 사기 행위를 이미 저지른 상태였고 그 각각에 대해 여론조작을 가동시켜 피해자 최진실을 가해자로 모는 언론플레이를 했다. 이 언론플레이를 통해 명예훼손 행위, 허위사실유포 행위도 추가되었다. 졸지에 가해자로 몰린 최진실이 사실관계를 바로잡는 언론 대응을 했던 것이고 기자나 대중 입장에서는 누구의 말이 맞는지 알 수 없을 것이기에 객관적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이혼유책주의라는 '리트머스 종이'를 제공했던 것이다.(이혼유책주의라는 '리트머스 종이'는 최진실이 자체적으로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 민법전에서 가져온 것이다. 이혼은 합의이혼이거나 소송이혼이거나 둘 중 하나이다. 최진실은 이혼 불가 입장을 표함으로써 합의이혼 가능성을 배제시켰다. 그러므로 최진실을 유책배우자라고 떠들고 다닌 조성민은 소송이혼 절차를 밟거나 못밟거나 둘 중 하나였다. 조성민은 후자의 모습을 보임으로써 자신이 여론조작범임을 입증했다. 사실 조성민이 가정법원은 못가고 2002년 12월 18일 오후 2시 기자회견을 한 행동 자체가 최진실이 유책배우자가 아니라는 증거였다. 즉 교차검증이 되는 바였다. 조성민은 2003년 10월에도 최진실이 건넨 이혼합의서를 언론에 공개하면서 여론조작을 펼쳤었고 이에 대해 최진실은 2003년 12월에 배우 활동 복귀를 앞두고 마련한 기자회견 자리를 빌어 이혼 불가라는 기존 입장을 확실히 하며 여론조작을 제압했다. 주지하다시피 그 후에도 최진실은 소송이혼의 대상이 된 바 없다. 이렇게 깔끔하게 정리를 한 최진실에 대해서도 김도형은 '어정쩡'이라는 용어를 쓰며 여론조작을 했다. 김도형은 피해자 최진실이 직업활동을 하는 것이 아니꼽다는 본인의 심경을 드러낸 바였고 피해자 최진실이 가해자 조성민 앞에 무릎을 꿇으라고 말하고 있는 셈이었다. 김도형은 피해자 최진실이 가해자 조성민이 원하는 대로 행동하라고 한겨레라는 언론권력을 이용해서 압력을 행사한 셈이었다. 안그러면 계속 '너를 후려칠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셈이었다. 김도형은 조성민만 비난하면 되는 상황에서 최진실의 직업활동을 물고늘어지는 이상한 행태를 보였던 것이다. 2004년 6월 기준으로, 조성민은 자신이 기자들을 불러놓고 최진실이 유책배우자라며 떠든 이야기들을 가정법원 판사 앞에 가서 똑같이 하고 그 증거도 제시하면 이혼이 완료되는 바였다. 2004년 기준으로 최진실은 배우로서든 피해자로서든 본인의 길을 갔고 조성민도 피해자로 자칭한 본인의 길을 가면 되는 상황이었다. 본인의 길을 가지 않은 것은 조성민이었고 두 달 후 2004년 8월 1일 최진실 자택을 찾아가 최진실을 대상으로 폭력이나 행사한 것이 조성민이었다. 가해자 조성민의 궤변에 김도형류는 계속 힘을 실어주며 피해자 최진실의 숨통을 조여갔다. 사실관계가 이러함에도 김도형은 이에 대해 반성은 전혀 없고 2011년까지도 그 여론조작 행태를 이어가는 모습을 자신의 블로그를 통해 보여주었다. 이런 부류를 최진실이 무슨 수로 이길 것인가를 생각하게 하는 일인 바였다. 최진실 입장에 처한 누구라도 김도형류의 이런 행태를 지켜보며 여론조작을 반드시 제압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라는 것은 상식적이다. 그 여론조작의 중심에 선 조성민을 처리하는 것은 필연이었다.) 자신의 말이 허위이면 조성민에 의해 소송이혼의 대상이 될 것이고 법정에서 이혼 판결이 내려질 것이기 때문이다. 김도형은 이런 메커니즘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었다. 그저 최진실이 2003년 12월 '지금은 이혼은 할 수 없다'고 한 것에 대해 '그의 복잡한 심경을 대중들은 이해할 수 있을까'라고 했을 따름이다. 최진실에 대해 이해는 할 수 없고 혹은 이해할 생각은 없고 비난은 하고 싶은 그런 본인의 심정을 드러낸 기사인지, 칼럼인지를 한겨레를 통해 썼고 이를 통해 최진실에 대한 대중의 마녀사냥 미끼를 던져 주었다. 김도형류는 최진실의 여론조작제압행위를 계속 공격하며 여론조작범과 자신들이 공범임을 보여주었다. 같은 글에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상대방에 대해 갈 데까지 가는 공방을 벌인 최진실이 어떤 방식으로든 이를 정리하지 않은 채 다시 대중 활동에 나선 결과 시청자의 평가는 혹독한 것으로 드러났다'라고 말하며 자의적 해석까지 서슴지 않고 내놓기도 하였다. 2004년에 최진실이 출연한 드라마 시청률이 낮았던 이유를 최진실의 여론조작제압행위 탓으로 돌리는 이 악랄함이 결국 2008년 최진실의 죽음으로 이어졌다고 봐도 무방했다. 통상 드라마의 시청률은 다양한 이유로 낮을 수 있는 바였기 때문이다. 최진실이 위법한 행위를 한 바 없다는 것이 입증된 상황이었는데도 김도형은 최진실을 위법한 행위를 저지른 사람인 양 취급을 했던 것이다. 최진실은 위법한 행위를 하기는커녕 여론조작의 피해자였는데 김도형은 그런 행태를 보였던 것이다. 여론조작으로 최진실을 파렴치한으로 만들고 최진실이 파렴치한이라고 비난하고 있는 모양새였다. 이것은 전형적인 가스라이팅의 모습이었다. 대중은 김도형에게 물어야 하는 것이 당신 말대로 최진실이 조성민을 부당하게 공격을 했는데 왜 조성민으로부터 소송이혼의 대상이 되지 않은 것이냐는 것이다. 이를 통해 대중은 김도형은 철저하게 가해자 조성민 편이었음을 알 수 있는 바였다. 최진실로부터 공격당했다고 떠들고 다닌 것이 조성민이기 때문이다. 최진실은 조성민을 공격한 것이 아니라 조성민의 여론조작을 제압한 것이라는 실체적 진실을 김도형은 필사적으로 가리고 있었던 셈이다. 이러한 최진실을 죽이기 위한 거대한 팀플레이에 의해 결국 2008년 10월 최진실은 스스로 세상을 떠났다고봐도 무방했다.
  573. 최강민에 따르면 아동 인권, 연예인 인권, 여성 인권을 수호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최진실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 버리고 최진실은 그저 '버리짐의 트라우마'에 제정신이 아니었고 특정 남자에 미친 여자였을 따름이었다. 최강민의 이러한 사고체계는 최진실을 의부증 환자로 몰았던 가해자 조성민의 노림수와 맞아떨어지는 것이었다. 최강민은 가해자 조성민이 원한 바대로 잘 처신해 주었다. 최강민은 가해자와 같은 편에 서서 글을 써내려갔다. 또 최강민은 그저 성적으로 문란했던 가해자 조성민에 대해 연상의 여자에게 편안함을 느낀다는 설명을 늘어놓으며 피해자 최진실을 웃음거리로 만들어 놓기도 했다. 이에 그렇게 편안함을 추구한 가해자 조성민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고 소송을 제기한 피해자 최진실은 졸지에 남의 편안함을 방해한 인물이 되었다. 최강민의 이런 행태는 가해자 조성민이 첫 번째 혼인 상태에서 연하의 여자와 정조 의무 위반을 저질렀고 이후 그 여자와 재혼을 했다면 배우자 선택에 있어 자신이 분석을 해보니 가해자 조성민은 연상의 여자와 연하의 여자 모두에게 편안함을 느낀다는 결론을 도출한다는 논리였다. 왜 이런 결론을 굳이 도출하고 있는지가 최강민의 포지션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였다. 물론 최강민은 가해자 조성민과 한 편에 서있기 때문에 이때는 연하의 여자에게 편안함을 느껴 정조 의무를 위반했다고 두둔해 주었을 가능성이 크다. 무엇보다 자식들의 등에 칼을 꽂으며 맺은 인간관계에 대해 편안함 운운 하는 최강민의 정신 세계는 어떤 트라우마가 있기에 가능한 것인지 의문을 갖게 하기도 하였다. 최진실을 다루는 글에 이런 상관없는 서술을 한 것도 지적되어야 할 지점이지만 이것이 위법을 교묘하게 물타기하는 맥락으로 역할하기 때문에 최강민의 노림수는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정조 의무 위반 가해자를 갑에 포지셔닝하는 교활한 술수였다. 연상의 이성과 혼인을 하여 정조 의무를 잘 준수했던 혼인자가 성격 차이로 그 혼인에 대해 이혼을 하며 비혼자로 복귀를 하였다가 다른 연상의 이성과 재혼을 한 경우에나 겨우 갖다댈 수 있는 이야기를 위법행위자에게 적용한 것은 최강민의 의도를 잘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조성민은 5살 연상의 첫 번째 배우자에 대해서는 폭력을 비롯해서 온갖 못된 짓을 저질렀었고 3살 연상의 두 번째 배우자는 조성민이 첫 번째 혼인 상태일 때 정조 의무 위반을 저질렀던 대상이자 첫 번째 배우자를 대상으로 여론 조작을 하고 다닐 때 공범이었는데 여기서 조성민의 배우자 선택 기준에 특별히 관심을 가지며 조성민이 연상의 여성에게 편안함을 느낀다는 결론을 도출하는 객관적 근거가 무엇인지 최강민의 정신 세계에 의구심을 가질 수 밖에 없고 최강민은 어떤 트라우마가 있기에 이런 사고 메커니즘이 가능할 수 있었는지 최진실을 '버려짐의 트라우마' 소유자로 규정한 최강민의 프레이밍을 그대로 본인에게 적용해 볼 수 있다. 최강민 본인은 편안함을 느끼는 상대에게 폭력을 저지르고 온갖 못된 짓을 저지른다는 뜻이자, 편안함을 느끼는 상대와 위법을 저지르고 자식들을 위기에 빠뜨리기도 한다는 뜻이기도 하였다. 최강민은 조성민이 유명인이자 배우자인 임신부를 폭행한 것과 그 임신부를 2년 후에 또 폭행한 것, 조성민이 유명인이자 임신부인 배우자를 두고 정조 의무를 위반한 것, 조성민이 유명인이자 임신부인 배우자를 모함하고 다닌 것, 조성민이 유명인이자 임신부인 배우자와 이혼하고 싶다고 떠들고 다닌 것에 대해 정신병리적 해석을 내놓아야 했지만 그렇게는 하지 않고 오히려 그런 비상식적 행태에 대해 합리적으로 대응한 피해자 최진실만 정신병리적 해석의 대상으로 삼았다. 임신부 최진실이 임신 8개월 시점에 이혼하고 싶다고 떠들고 다녔거나 정조 의무를 위반하고 다녔다면 최강민은 역시나 '버려짐의 트라우마'를 거론하며 최진실의 정신병리성을 문제삼았을 가능성이 크다. 최강민의 이런 처신은 천동설을 주장하는 사람이 정상인으로 취급되고 지동설을 주장하는 사람이 미치광이가 되었던 중세 말기의 세계사적 상황을 연상시키는 행태였다. 또 사회적 약자의 인권을 수호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사람을 두고 '버려짐의 트라우마' 운운 하는 평가를 한 최강민의 논리대로라면 노동자 인권을 수호하기 위해 애썼던 인권운동가 전태일도 '버려짐의 트라우마'에 시달리다가 스스로 세상을 떠난 사람이 안될 이유가 없었다. 최강민의 논리대로라면 전태일도 대학교를 찾아가 대학생 친구를 만들거나 변호사를 찾아가 함께 행동을 했으면 되었는데 세상의 외면으로 인한 '버리짐의 트라우마'를 겪다가 분신한 것이 된다. 최강민은 인권 침해 사건에 대해 '버려짐'이라는 용어를 쓰며 피해자의 능동적 문제의식을 수동적인 것으로 변질시켰다. 이는 사회적 약자를 처리하는 기득권 사회의 전형적인 행태였고 젠더폭력 Archived 2016년 6월 10일 - 웨이백 머신에서 가해자의 편을 드는 남성들의 전형적인 모습이기도 하였다. 최강민은 또한 1973년 5월 성폭행 피해자에게 성폭행 가해자와 결혼하라고 한 대구 고등법원 형사부 판사들과 유사한 정신 세계를 가졌음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최강민은 폭행 가해자와 폭행 피해자의 결혼해피엔딩인 양 스토리라인을 잡고 글을 전개시키며 폭행 피해자 최진실의 삶을 웃음거리로 만들었다.
  574. 이민영·강신. (혐오에 빠진 대한민국) "돈·권력의 시대.. 약자에 분노 표출". 서울신문. 2016년 5월 30일.
  575. 배국남. 정형돈과 스타 산업의 이면. 이투데이. 2016년 8월 4일.
  576. 배국남은 2016년 8월 4일 칼럼에서 "최진실의 비극은 스타 산업의 이면, 그 자체다"라고 썼다. 이는 최진실을 죽인 게 '스타 산업'이라는 논리였다. 코미디언 정형돈이 불안장애를 겪어 연예 활동을 중단한 일에 최진실을 끌어들인 것이다. 최진실만 끌어들이기 그랬는지 배우 이은주도 같이 등판시켰다. 최진실은 연예 활동을 꾸준히 했던 인물로, 직업 활동 맥락이 정형돈과 달랐다. 최진실은 일찌감치 연예인으로서 안정기에 접어들었기 때문에 '스타 산업'에 휘둘릴 객관적 상황도 짧았고 여론 조작이 유독 심하던 때에도 그에 개의치 않고 직업 활동을 이어갔던 인물이었다. 그래서 최진실을 죽이려고 애썼던 혐오 세력들은 그런 최진실을 '잡초'라며 비아냥거렸었다. 즉 최진실에게 늘 문제가 되었던 것은 자신을 대상으로 여론 조작을 펼쳤던 존재들이었다. 그 존재들이 최진실의 직업 활동을 방해했었다. 노년기에도 배우 활동을 하기를 원했던 최진실을 기어이 중년기에 죽게 만든 것도 그런 존재들이었다. 최진실이 치열한 여론 조작의 터널을 뚫고 화려하게 배우 활동 복귀를 하였을 때 배국남이 어떤 기사를 썼었는지를 보면 배국남이 왜 이 칼럼에 최진실을 끌어들였는지 그 의도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바였다. 그 때도 정형돈을 챙기듯 최진실을 챙겼었는지 살펴볼 일이다. 배국남은 개인적으로 불안장애가 있어 활동을 중단한 정형돈에 대해서는 '스타 산업' 운운 하며 몹시 안쓰러워하는 기사를 썼는데 반해, 여론 조작을 극복하고 활발한 활동을 한 최진실에 대해서는 '위기 관리 능력도 스타급?'이라는 제목을 단 기사를 썼었다. 2002년부터 2004년까지 최진실이 위법행위 피해자로서 어떤 고통을 겪었는지에 대해 제대로 개념 정리가 안 된 기자 배국남은 " ‘장밋빛 인생’으로 스타성을 회복한 최진실이 이제는 드라마외적인 사생활 퍼포먼스도 스타답게 해줬으면 한다"라고 2005년 9월 18일 기사를 마무리했었다. 같은 기간 거구의 근육질 남성으로부터 신체적 폭행을 당한 피해자이기도 했던 최진실은 세상으로부터 그런 대접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또 '배국남은 자신의 말대로 최진실이 2002년부터 2004년까지 3년에 걸쳐 문제적 행동을 한 바 있었다면 최진실은 그 배우자에 의해 소송이혼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라는 법적인 맥락 정도는 머릿 속에 기본적으로 장착한 기자가 되었으면 한다'로 대응될 수 있는 바였다. 즉 배국남 또한 최진실에 대해 여론 조작을 펼쳤었던 존재였던 것이다. 최진실이 소송이혼패소자이거나 배국남이 여론조작자이거나 둘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최진실이 이혼할 의사가 없다고 한 것은 배국남 같은 존재들을 처리하는 카드였었다. 자신이 유책배우자가 아님을 입증하기 위해 3년이라는 인내의 시간을 가진 최진실에 대해 판 정리가 다된 시점인 2005년에 배국남은 엉뚱한 소리를 하며 최진실을 위기에 빠뜨렸던 것이다. 이는 알베르 카뮈시지프의 신화에 비유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이는 2008년 10월 1일 밤 "다 필요없어, 내가 뭘 잘못했기에...죽을 거야, 죽으면 다 끝이 나는거야. 더 이상 싸우기도 하기도 상대하기도 싫어"라고 최진실이 마지막 통화에서 한 말과도 통하는 바였다. 배국남의 논리대로라면 그냥 두어도 힘든 것이 연예인이라는 건데 그런 연예인을 상대로 외부에서 여론 조작까지 저지르며 공격을 했다면 얼마나 더 힘들었을 것인지를 배국남의 이 칼럼은 역설적으로 말해주는 바였다. 자신의 존엄성을 지켜내기 위해 애썼던 모습이 '사생활 퍼포먼스'로 희화화되었을 때 한 인간으로서 최진실이 느꼈을 비애가 정형돈의 불안장애보다 과연 하찮은 것이었을지 생각해봐야 하는 바였다. 최진실이 그런 퍼포먼스를 펼칠 이유가 있었는지 배국남은 생각해봐야 하는 바였다. 연예 언론도 '스타 산업'의 일부라면 "최진실의 비극은 스타 산업의 이면, 그 자체다"라는 배국남의 서술은 맞을 수도 있겠다. 배국남의 행태를 통해 짐작할 수 있는 것은 'A는 B를 대상으로 여론 조작을 저지르고 그런 B는 우울증에 걸리고 A는 우울증에 걸려도 자유롭게 정신과 병원에 내원할 수 없는 B 같은 사람들을 안타까워 하고' 이런 스토리라인이 대한민국 연예 언론의 현실이라는 것이고 이후 B가 스스로 세상을 떠나면 A는 열심히 B를 비난해주고 그게 싫증나면 B의 죽음은 스타 산업 탓이라고 유체이탈화법을 구사하면 '무사 탈출' 되었던 바였다. 기자 배국남은 배우 최진실이 '이혼 거부 의사 카드'를 쓴 것이 바로 배국남 본인에게 최진실이 직격탄을 날린 것이라는 현실을 직시해야 하는 바였다. 배국남은 본인 논리대로 자신의 이름을 걸고 칼럼을 쓰는 기자답게 맥락을 살펴가며 누가 피해자이고 누가 가해자인지 구분은 하면서 그 기자 일을 해줬으면 한다라고 대중이 말할 수 있다는 사실을 새겨야 하는 바였다. 최진실이 어떤 맥락 속에서 말하고 행동했는지를 살펴야 하는 것이 기자인 것이다. 배국남의 논리대로 2002년부터 2004년까지 최진실이 한 행동이 '사생활 퍼포먼스'라면 최진실의 사망도 '사생활 퍼포먼스'인 셈이고 그게 퍼포먼스인 것은 언론이 다루어 주었기 때문이고 최진실의 사망이라는 사생활을 자꾸 다루는 배국남은 왜 자꾸 '최진실 사생활 퍼포먼스'를 펼치며 기사 조회수를 올리느냐는 말을 들을 수 있는 바였다. 배국남은 본인이나 '최진실 사생활 퍼포먼스'를 이젠 그만 멈춰야 할 때라는 말을 들을 수 있는 바였다. 언론이 유명인의 자살을 자꾸 다루어서 베르테르 효과가 나타나고 이에 전문가들의 검증 결과 상관관계 1위에 해당되는 인물이 최진실임을 배국남도 잘 알 위치라는 것은 상식적이다. 또 최진실이 여론 조작 피해를 입지 않았다면 애시당초 최진실은 2002년부터 2004년까지 언론을 통해 자신의 사생활을 언급하며 진실 규명에 나설 이유가 없었음을 배국남은 자각할 때도 되었다는 것이 상식에 부합된다는 것도 지적되어야 하는 바이다. 피해자 최진실에게 퍼포먼스 운운 하며 침묵을 강요했던 배국남은 본인도 최진실의 사망에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자각할 때도 되었다는 것이다. 배국남은 최환희와 최준희의 안위를 걱정하는 칼럼을 쓰며 금전적 이익을 취할 시간에 최환희와 최준희의 어머니에게 깊이 사죄하는 마음을 가질 때도 되었다는 것이다. 최진실이 배국남에게 기쁨을 주는 형태의 이혼을 했을 때 실제 기뻐할 사람이 누구였을지 생각해봐야 하는 바였다. 그 이후 발생하는 일에 대해 최진실이 책임을 지게 될지, 배국남이 책임을 지게 될지도 생각해봐야 하는 바였다. 진실 규명을 제대로 하지 않고 이혼했을 때 그 후과를 최진실이 지게 될까, 배국남이 지게 될까를 생각해봐야 하는 바였다. 그 진실 규명에 대해 기자들은 기사를 써서 금전적 이득을 보고 나중에는 그것을 '사생활 퍼포먼스'라고 네이밍하여 금전적 이득을 보았던 바였다. 최진실은 기자들 좋으라고 진실 규명에 나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인권을 수호하기 위해 나선 것이라는 것도 짚어야 하는 바였다. 이 모든 메커니즘을 챙겨야 배국남은 자신이 소중히 여기는 정형돈도 여론 조작으로 사망에 이르는 일이 없을 것임을 인지해야 하는 바이다. 배국남이 그렇게 사랑하는 정형돈이 최진실과 비슷한 경우를 당했을 때도 배국남은 과연 '사생활 퍼포먼스'라고 칭할지는 알 수 없는 바이다. 최진실이 이혼할 의사가 없다고 천명한 것은 자신의 전 존재를 걸고 진실 규명에 나섰다는 것을 의미함을 배국남은 깨달을 때도 되었다는 것이 상식적이다. 최진실이 배국남으로부터 비난받을 행동을 했다면 그 천명에 의해 법적인 대가를 받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최진실은 소송이혼의 대상이 된 바가 없었다. 기자로서 이혼유책주의라는 상식도 갖추지 못해 한 인간을 고통 속에 내몰고 기어이 죽음에 이르는 데 기여했으면 스타 산업 운운에 그 사람을 끌어들여 자신의 과오를 가릴 것이 아니라 그 당시 상황을 제대로 복기하는 일이 급선무라고 할 수 있는 바이다. 연예 언론의 악마성을 해부해야 하는 것이다. 스타를 팔아 돈을 버는 일에 연예 언론도 결코 예외가 아닌 상황에서 이 칼럼은 그 점을 거의 짚고 있지 않다. 배국남은 "노명우 아주대 사회학과 교수는 '셀레브리티화한 사람(스타)의 자살에서는 전면적인 상품화로 인한 달콤함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그것을 얻지 못해서 생긴 좌절, 상품화로 해결될 수 없는 인간 본연의 번민 등이 범벅된 고통의 흔적이 남겨져 있다'고 분석한다"라는 내용을 이 칼럼에 담음으로써 교묘하게 최진실을 치고 있다. 최진실은 여론 조작이 현실적으로 힘을 발휘하는 상황에 크게 문제의식을 가졌을 따름이었다. 최진실은 자신의 상품화와 관련하여 염려할 객관적 위치도 아니었다. 최진실은 인기 그 자체로만 보면 차고넘치게 누려 늘 스토킹의 대상이 되었었다. 여론 조작이 힘을 발휘하여 자신의 직업 활동에 방해로 작용하는 모순된 현실을 바로잡고 싶어 했던 것이다. 인기가 그냥 사라지는 게 아니라 여론 조작에 의해 사라진다면 사실관계를 바로잡아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바로잡아도 인기가 회복되지 않을 수 있지만 그렇더라도 여론 조작을 바로잡는 것이 정의에 부합하는 것이고 민주 시민의 자세인 것이다. 여론 조작이 현실적으로 힘을 가지는 것을 제압해야 연예인이 부당하게 직업 활동을 방해받는 일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은 상식이다. 더구나 최진실은 '신뢰'가 자신의 무기였고 2002년까지도 삼성전자는 제품 판매 순위에서 뒤로 밀려나면 최진실을 광고 모델로 찾곤 할 만큼 최진실에 대한 대중의 신뢰도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존재였다. 최진실은 직업인으로서 가야 할 길을 갔던 것뿐이다. 배국남은 그 당시 누가 여론 조작을 주동했고 그에 대해 기자들이 어떻게 공범으로 역할을 했는지 모르지 않을 것이다. 이혼이 하고 싶다면서 가정법원에는 가지 못한 자, 그 자가 가정법원은 가지 못한 채 기자들을 모아놓고 최진실을 비방하고 그걸 그대로 기사로 실은 자들을 기록해야 다시 생사람을 잡는 일이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는 게 상식이다. 서정희, 김주하 등 이혼을 원하는 유명인 중에 가정법원은 못간 채 기자들 불러놓고 자신의 배우자를 비방하며 여론 조작을 한 자가 있었는지 배국남은 생각해야 하는 바이다. 그래야 최진실이 2002년부터 2004년까지 어떤 황당한 일을 겪은 것인지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서정희가, 김주하가 그런 짓을 저질렀으면 서정희와 김주하가 '사생활 퍼포먼스' 운운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최진실은 그런 행태의 피해자인데 배국남에게 '사생활 퍼포먼스' 운운의 대상의 되었으니 최진실이 느꼈을 황당함은 짐작되고도 남음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에 반해 웃음을 짓는 자가 있었을 것임은 자명한 바이다. 참고할 만한 경우가 있긴 한데 최태원이 그에 해당될 수 있다. 배국남은 스타 산업 운운 할 때가 아닌 것이다. 배국남 본인이 그 대단하다는 최진실을 대상으로 무슨 짓을 저질렀고 그 여파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되새겨야 할 때인 것이다. 배국남은 최진실도 머리가 있고 그 머리 안에 뇌가 있는 사람이라는 결코 어렵지 않은 진실을 이제라도 생각할 때라는 것이다. 피해자와 가해자 사이에 중립은 없다는 것이 상식이다. 피해자와 가해자 사이에 중립을 지키며 양비론을 펼치는 것이 바로 가해자 편에 선 행태라는 것은 상식이다. 배국남류의 그 중립 속에 피해자가 죽었고 그나마 정의가 살아있어 가해자도 죽은 것이다. 배국남류는 애시당초 피해자 편에 서서 피해자를 살려야 했고 그러면 가해자도 죽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라는 게 상식적이다. 왜냐하면 가해자가 개과천선을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가해자가 피해자 사망 이후에도 죽은 피해자를 대상으로 여론 조작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배국남류가 뒤에서 받쳐주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상식적이다. 자신의 편에 서주는 수많은 중립자들이 가해자에게는 든든한 후견인이었기 때문이다. 최진실이 뭔가를 잘못한들 두 아이를 양육하는 입장에서 위법을 저지를 가능성 희박하고 더구나 자식들의 생부가 위법을 아무렇지도 않게 저지르는 자임이 만방에 알려진 마당에 자신이 완벽을 추구해도 모자를 판에 위법을 저지를 이유 전혀 없었고, 사회적·경제적 지위상으로도 위법을 저지를 이유 전혀 없었고, 위법을 저지른 바 없으니 소송이혼 대상 안된 것인데, 배국남이 2005년 9월 18일이라는 날에 즉 거구의 근육질 남성에게 최진실이 폭행을 당한 지 일년 정도 된 시점에, 그 폭행 사건 여파로 피해자로서 광고주로부터 손해배상청구소송이라는 황당한 일도 겪고 있던 최진실에게 근거없는 공격을 한 것이 과연 최진실의 사망에 기여한 바가 없겠느냐는 것이다. 피해자임이 입증된 자를 향해 그렇게 공격을 할 만큼 한가했으면 가해자를 더 가열차게 비난하는 게 사회 정의에 부합하는 바이고 피해자 최진실이 사망할 확률을 낮추는 행위였다라는 것은 상식적이다. 최진실이 성격 차이로 이혼을 했어도 최진실을 향한 공격이 부당할 판에 도대체 피해자로서 이혼한 최진실에 대해 무슨 근거로 배국남은 그리도 당당하게 공격을 할 수 있었는지 생각해볼 바이다. 최진실이 제3자가 공격해도 될만한 행동을 했는데 어찌 소송이혼의 대상이 되지 않은 것인지 배국남은 생각해봐야 하는 바이다. 최진실이 바보라서 제3자가 공격해도 될만한 행동을 하고 이혼할 의사가 없다는 말을 했겠느냐를 배국남은 생각해봐야 하는 바이다. 배국남은 스타 산업이라는 거시적 사안에 관심을 가지는 것뿐 아니라 자신이 최소한의 민주 시민으로서의 자질을 갖춘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를 생각해봐야 하는 바이다. 정형돈의 경우도 정형돈 본인이 연예 활동 중단이든 뭐든 알아서 잘 판단하여 행동한다. 2002년부터 2004년에 걸쳐 최진실에게 발생한 여론 조작이, 폭행 사건이, 폭행 피해자가 손해배상청구소송 대상이 되는 일이 과연 사생활인지 배국남은 생각해봐야 하는 바이다. 이걸 처리하는 행동이 '사생활 퍼포먼스'라고 네이밍되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배국남은 생각해봐야 하는 바이다. 배국남 본인이 교통사고를 당해 그걸 처리하는 일이 '사생활 퍼포먼스'라는 뜻인지 본인 스스로 생각해봐야 하는 바이다. 사실관계를 파악하는 일에 이토록 허술한 배국남이 최진실이 배병수 살해 교사범이라는 소문과 관련해서 최진실을 어떻게 보았을지, 최진실이 안재환 살해 악덕 사채업자라는 소문과 관련해서 최진실을 어떻게 보았을지 짐작할 수 있는 바이고 최진실 본인도 배국남류의 정신 세계에 대해 염려되는 바가 없었을지 생각해볼만한 바이다. 유책배우자도 아닌 최진실을 유책배우자라고 자기 멋대로 여김에 의해 유책배우자 어머니를 둔 게 아닌 최환희와 최준희는 졸지에 그런 어머니를 둔 사람이 된 것이 배국남이 선사한 현실이었는데 최진실 사망 후 최환희와 최준희를 최진실보다 더 안타까워하는 듯한 배국남을 대중은 도대체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도 생각해봐야 하는 바이다. 누가 보면 최환희와 최준희 양육비도 배국남이 대고 있는 줄 알 듯이 그들의 삶을 매우 걱정하는 것이 배국남이었기 때문이다. 최진실이 살아있을 때에는 근거없이 용감하게 최진실을 죽이는 길을 가더니 최진실이 사망하자 왜 최환희와 최준희의 수호천사인 양 구는 것인지 배국남의 그 저의를 생각해봐야 하는 바이다. 최진실은 2002년부터 2004년까지의 기간에 이혼을 원했건 이혼을 원하지 않았건 위법행위를 저지를 이유가 없었다. 최진실이 이혼을 원했으면 공개된 이혼 사유만으로도 얼마든지 할 수 있었고 이혼을 원하지 않았으면 더더욱 위법을 저지를 이유가 없었다. 최진실이 소송이혼의 대상이 되지 않은 것이 최진실이 위법을 저지르지 않았다는 사실의 확증이다. 더구나 최진실에 대해 최진실의 배우자는 덫을 놓고 있었기 때문에 최진실이 무리수를 두면 바로 드러나게 되어 있었다. 최진실이 위법행위 현장 검증차 찾은 주차장에 대해 언급한 것도 위법행위 당사자였던 최진실의 배우자였고 최진실이 건넨 이혼합의서를 언론에 흘려 최진실에게 타격을 주는 행태를 보인 것도 최진실의 배우자였다. 최진실이 그 주차장에 간 것이나 최진실이 작성한 이혼합의서 내용이나 문제될 것이 없었다. 최진실의 배우자는 그런 문제될 것 없는 사안을 떠들고 다니며 최진실이 자기가 거주하는 건물 주차장에 나타나서 기분나빴다고, 이혼합의서 내용이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대중에게 최진실 혼내주라고 징징대었던 것이고 이걸 그대로 받아적어 기사화한 기자들도 이 자의 어리광에 동참했던 것이며 이 자의 어리광을 받아주며 '최진실 나빠'를 외쳤던 대중들이 있었던 것이다. 이로 인해 명예훼손 당한 최진실이 언론 대응에 나서면 배국남류는 최진실이 '사생활 퍼포먼스'를 하고 앉았다고 손가락질하였던 바이다. 드러난 사실들 중에 최진실이 배국남으로부터 그렇게 당당하게 공격을 당할 객관적 근거는 없었다. 하지만 배국남류는 그런 객관적 근거가 있다고치고 최진실을 공격했던 것이다. 2005년 기사에서 배국남은 또 "그러나 그녀의 사생활과 연기의 진부함에 고개를 돌린 상당수 대중은 여전히 그녀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마음속에 색인하고 있는 상태였다"라고 서술했는데, 이는 2008년 9월에도 최진실을 악덕 사채업자라고 규정하며 비난했던 대중들이 있었기 때문에 이에 대해서도 배국남은 그런 대중들을 긍정하며 '대중들은 최진실을 악덕 사채업자로 규정했다'라고 얼마든지 서술할 수 있었다는 논리였다. 그렇게 대중으로부터 악덕 사채업자로 규정된 최진실은 엄청난 고통을 토로하다가 여론 조작 행태에 대단원의 막을 내리기 위해 자결했다. 배국남 등의 이러한 '최진실을 죽이기 위한 거대한 팀플레이'에 의해 결국 2008년 10월 최진실은 스스로 세상을 떠났다고봐도 무방했다. 백승연 등은 그 인격 살인 행각의 마지막 퍼즐 조각을 맞추는 역할을 하였다고해도 무방했다. 이 중 조성민, 백은영, 하은정 이 세 명의 팀플레이는 단연 돋보였다. 이 셋의 행태는 '최진실 사망'이라는 '골인'에서 훌륭한 어시스트 역할을 하였던 셈이다.
  577. 2002년 12월에 조성민이 '배우자가 아닌 다른 이성'과 동거하는 정조의 의무를 위반했다는 것은 조성민 본인의 행동에 의해 입증되었다. 조성민의 말대로 자신의 선배 집에서 머물렀다면 최진실은 조성민에 의해 소송이혼의 대상이 되는 것이 법치국가 대한민국의 '게임의 룰'이기 때문이다. 강일홍은 2016년 10월 24일 채널A < 풍문으로 들었쇼>에 출연하여 같은 건물에 조성민의 선배가 살았던 것이 맞았다고 말하며 논점에 맞지 않는 말을 하며 최진실이 2002년 12월에 허위사실을 유포한 것처럼 여론조작을 했다. 그 선배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규명된 바 없다. 같은 건물에 '선배'가 아니라 '부모'가 살았어도 '배우자가 아닌 다른 이성'과 동거하는 정조 의무 위반 행위는 가능하다. 조성민의 아버지 조주형은 조성민을 비호하고 최진실을 치기 위해 여론조작을 한 바 있다. 선배라는 '모호한 관계'의 인물을 섭외하는 것, 그 선배라는 인물이 조성민이 원하는 말을 해주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무엇보다 조성민이 최진실을 대상으로 소송이혼절차조차 밟지 못하는 것을 대중에게 보여줌으로써 이 모든 상황의 사실관계를 규명하는 '소모킹 건'에 해당하는 행동을 조성민이 본인이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일홍은 '조성민의 스피커'가 되어 '죽은 최진실 바보 만들기 작업' 내지 '여론조작'을 했다. 같은 방송에서 하은정은 2004년 8월 1일 조성민이 저지른 폭력 행위와 관련하여 조성민의 일방적 주장을 그대로 유포하며 강일홍과 더불어 '조성민의 스피커' 역할을 했다. 하은정은 '조성민이 2004년 8월 1일 그 야심한 밤에 최환희의 생일 선물 문제를 의논하러 최진실의 자택을 방문했다는 것이 말이 된다고 생각해서 그것을 방송에 나와 그대로 유포하고 있나?'는 물음이 가능한 행태를 이 방송에서 보여주었다. 이 날 조성민은 최환희와 최준희의 얼굴만 잠깐 보고 간다며 최진실을 설득하여 최진실 자택 진입에 성공했었다. 즉 하은정은 가해자 조성민의 일방적 주장을 열심히 유포했다. 이 방송에서 또 다른 관전 포인트는 김대오도 출연자로서 같이 앉아 있었는데, 조성민의 귀가가 늦어 최진실이 조성민이 머물고 있었던 건물의 주차장에 간 것처럼 말하는 다른 출연자의 말에 김대오는 사실관계를 바로잡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조성민은 2002년 12월 5일 본인 사무실(C&C컴퍼니)에서 기거하겠다고 하며 가출을 했었기 때문에 최진실이 조성민의 귀가에 신경을 쓴다는 것은 논리상 말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최진실이 2002년 12월 17일 새벽에 이 사무실을 찾았을 때 조성민은 거기에 없었고 실상 조성민은 이 사무실 옆 건물에 있던 '배우자가 아닌 다른 이성'의 집에 기거하고 있었던 것이다. 조성민이 2002년 12월 5일에 가출했다는 사실이 허위라면 이 또한 최진실이 허위사실을 유포한 것이기 때문에 최진실은 조성민으로부터 소송이혼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 법치국가 대한민국의 '게임의 룰'이다. 최진실은 2002년 12월 18일부터 2004년 9월 1일까지 자신이 조성민으로부터 소송이혼의 대상이 되지 않은 것을 대중들에게 보여줌으로써 자신이 언론을 통해 한 말들이 모두 진실임을 입증했다. 이러한 입증 노력은 '죽은 최진실'이 '살아있는 강일홍, 하은정, 김대오'에게 더 이상 자신을 대상으로 여론조작하지 말라고 말하는 셈이기도 했다.
  578. 강일홍. (강일홍의 연예가클로즈업)'만인의 연인' 故최진실을 애도하며. 스포츠조선. 기사입력 2008년 10월 2일. 기사수정 2008년 10월 3일.
  579. (인사)더팩트, 강일홍 편집국 부국장 임명. THE FACT. 2015년 3월 9일.
  580. 차윤호. '풍문으로 들었쇼' 故 최진실 사건,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최진실법, 동생 故 최진영, 전 남편 故 조성민, 자녀 아들 최환희, 딸 최준희 언급. 글로벌이코노믹. 2016년 10월 25일.
  581. 강일홍. (강일홍의 연예가클로즈업)이국주-온시우 논란과 '최진실 죽음'이 남긴 교훈. THE FACT. 2017년 3월 22일.
  582. 이승철. 21세기 관음증…지라시 or 찌라시!!!. KBS. 2014년 12월 12일.
  583. 사생활 침해는 개인과 관련된 여러 가지 정보(성별, 주소, 나이, 재산정도, 학력, 취미 등)들이 다른 사람에게 노출되거나 악용되는 것을 뜻한다.
  584. 반론권은 정기간행물이나 방송 등에서 공표된 사실적 주장에 의하여 피해를 입은 자가 발행인이나 방송사업자에게 서면으로 반론보도문을 게재해 주거나 반론보도를 방송해 줄 것을 청구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585. 주진우. "조성민이 아이 포기한 날 진실이는 통곡했다" 보관됨 2013-01-11 - archive.today. 시사IN. 2008년 11월 3일.
  586. 최진실, 조성민·스포츠지 상대 고소. YTN. 2003년 10월 27일.
  587. 최진실, 9시간 인터뷰(주부생활 2004년 1월호)[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국립중앙도서관.
  588. 모성 보호헌법 제36조에서도 규정하는 개념이다.
  589. 이영미. (책과 길)21세기 미디어,권력도구서 대중의 무기로… 미디어 바이러스. 국민일보. 2003년 1월 16일.
  590. 그만 해라, 고마 해라, 그만 하랑께…. 주간한국. 2003년 12월 10일.
  591. 김종창. 온몸으로 말거는 연기자 -김종창. 씨네21. 2008년 10월 21일.
  592. 김보협. ‘최진실에 덮어씌우기’ 이상하다. 한겨레21. 2004년 12월 10일.
  593. 오한숙희. 여성 연예인에게는 여성학이 필요하다 Archived 2013년 11월 3일 - 웨이백 머신. 시사IN. 2008년 10월 7일(56호).
  594. 여성의 권리에 대한 인식 국제 비교. EAI 여론브리핑 21호. 2008년 3월 7일.
  595. 이혼여성·미망인 차별 문제 나라별 인식 차, 한국인이 가장 심각한 문제로 받아들여[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EAI 여론브리핑 34호. 2008년 6월 24일.
  596. 민노씨. 송원섭, 박수나를 조롱하다:자기배반과 사이비 오리엔탈리즘. 민노씨.네. 2008년 10월 24일.
  597. 2003년 10월 23일 조성민의 궤변을 자신소속 매체를 통해 유포한 전적이 있는 송원섭최진실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글들을 남겼다.http://fivecard.joins.com/search/전격공개!%20유재석,%20성공%20뒤엔%20톱스타%20C양이%20있었다 http://fivecard.joins.com/165 http://fivecard.joins.com/167 http://fivecard.joins.com/170 http://fivecard.joins.com/239 http://seires.tistory.com/750 Archived 2017년 1월 16일 - 웨이백 머신 http://economicview.net/726/ http://www.mediaus.co.kr/news/articleView.html?idxno=4501 http://www.journalist.or.kr/news/article.html?no=19996
  598. 대한민국 인터넷상에서 일부 네티즌은 익명성을 방패 삼아 무책임하고 무자비한 공격성을 띠는 '마초이즘'을 드러내고, 대한민국은 대표적인 부권제 국가로서 문화예술계·재계·언론계·대중 등 도처에 '여성에 대한 보수성과 남성우월주의'가 퍼져 있어 여성 유명인도 이런 사회 분위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599. 조현호. 스포츠지 비수기 '최진실'로 때우나. 미디어오늘. 2003년 1월 7일.
  600. "이경실씨 사건, 가십거리 삼지마라". 오마이뉴스. 2003년 2월 13일.
  601. 이영태. "이경실 폭행사건이 가십거리인가" - (미디어비평) 스포츠신문들의 비윤리적 보도태도. 프레시안. 2003년 2월 14일.
  602. 김선주. 모든 폭력은 똑같다. 한겨레신문. 2003년 2월 13일.
  603. 이정국. 악플러만 잘못? 지상파 연예정보가 더 문제. 한겨레. 2007년 1월 27일.
  604. 조범자. 이상호 기자, 김장훈-싸이 전말 공개 "자살 재시도 의사에…". 헤럴드경제. 2012년 10월 9일.
  605. 이하나. 지역사회 개입이 ‘가정폭력=범죄’로 인식 바꿨다. 여성신문. 2015년 9월 9일.
  606. 유성애. "강간범은 남자" 말 못하는 미디어의 속사정. 오마이뉴스. 2015년 9월 16일.
  607. 송원섭. 조성민, "이혼 결심 변함 없어" 화해설 일축. 스포츠조선. 2003년 10월 23일.
  608. 홍제성. 최진실, 조성민ㆍ스포츠지 상대 고소. 연합뉴스. 2003년 10월 27일.
  609. 김수경. “조성민씨 불륜탓 결혼파탄”최진실씨 3억원 배상 소송. 동아일보. 2003년 11월 26일.
  610. “위자료(위자료청구권)의 개념”. 2014년 10월 8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4년 5월 31일에 확인함. 
  611. 최진실이 조성민에게 이혼합의서를 건넨 것은 조성민이 자신을 대상으로 합의이혼절차를 밟을 길을 열어주는 행동이었다.
  612. 최진실이 조성민에게 이혼합의서를 건넨 것은 이 이혼합의서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을 경우 조성민이 자신을 대상으로 소송이혼절차를 밟을 길을 열어주는 행동이었다.
  613. 김태훈. 네티즌의 '조성민 여론재판'. 경향신문. 2008년 11월 19일.
  614. 조수경. 비극 말하는 언론, 조성민 불행에 책임 없는가. 미디어오늘. 2013년 1월 7일.
  615. 스포토픽. 제2 제3의 조성민, 내일이라도 나올 수 있다. 미디어스. 2013년 1월 8일.
  616. 배선영. '대찬인생', 고(故) 최진실 사망 6주기 특집, 파란만장 인생 되돌아본다. 텐아시아. 2014년 9월 30일.
  617. 한상덕. (한상덕의 문화경)궁금하지 않습니다 '유명인의 속사정'. 브릿지경제. 2015년 3월 5일.
  618. 한상덕. (한상덕의 문화경)이완구 스타 만들기. 브릿지경제. 2015년 4월 23일.
  619. 김기란·최기호. 싱글맘. 대중문화사전. 2009년.
  620. 싱글맘은 비혼(非婚) 상태에 있는 어머니를 뜻한다. 비혼은 미혼(未婚)이라는 어휘가 '혼인은 원래 해야 하는 것이나 그것을 아직 하지 않음'을 의미하는 경향이 커서 '혼인 상태가 아님'이라는 보다 주체적인 의미로 사용하는 어휘이다.
  621. 허재현. 법률로 동거가족 보호하는 ‘생활동반자법’ 기대하시라. 한겨레신문. 2014년 9월 14일.
  622. 오형주. "싱글맘이 무슨 버스 운전.." 시내버스 채용 차별 논란. 한국경제. 2014년 9월 17일.
  623. 양선아. 한부모 가족에 비수 꽂는 편견, “불쌍해” “역시 문제야”. 한겨레신문. 2014년 11월 10일.
  624. 엄수아. 여성 변호사들이 본 가족정책, '진짜 가족'은 배제 Archived 2014년 12월 5일 - 웨이백 머신. 여성신문. 2014년 11월 12일.
  625. 동거 비난 말라! 유연한 결합, 출산율 올린다. 프레시안. 2014년 11월 26일.
  626. 동아일보 기자 황호택은 최진실로부터 직접 이 말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최진실 사망 직후인 2008년 10월 10일 최진실을 마치 광인(狂人)인 양 해석하는 칼럼을 썼다. 황호택은 이 칼럼에서 피해자 최진실이 자신을 향해 적개심을 공개적으로 드러내며 모함하고 다닌 가해자 조성민과 부부관계를 몹시 맺고 싶어했던 사람인 양 해석했다. 황호택은 2005년 인터뷰에서 최진실에게 재결합 운운 했었고 이에 최진실은 재결합하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대답한 바 있는데도 최진실이 조성민과 부부관계를 몹시 맺고 싶어했다고 자기 멋대로 해석하는 아전인수식 글을 최진실 사망 후에 썼던 것이다. 무엇보다 최진실은 '단지 한때 부부란 인연을 맺었다는 이유로 상대의 이름이 나올 때마다 나의 이름이 거론되는 것조차 너무나 부담되고 싫다. 어떤 식으로든 연결고리가 나오지 않기를 바란다'는 것이 기본 입장이었다.(이는 2008년 12월호 잡지 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를 통해 가해자 조성민이 피해자 최진실에게 저지른 갖은 위법이 은폐되는 효과를 낳았다. 젠더권력을 획득한 가해자 혹은그 가해자 편에 선 자들의 발언은 이런 식으로 피해자목소리를 빼앗았다. 더구나 가해자 편에 선 존재가 언론이라면 피해자의 목소리는 빼앗기는 것을 넘어 피해자의 뜻과 정반대의 것이 대중에게 전달될 수 있다. 더구나 황호택은 2005년 인터뷰 기사에서 이혼해서 남남인 조성민의 사진이 거실에 없다는 둥 비상식적인 언급을 하기도 했었다. 이는 황호택이 최진실이라는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보여주는 행동이었다. 황호택은 최진실이 아동의 법률행위대리권자로서 아동의 입장에 서서 한 행동에 대해 마치 누군가에 대한 애정 표현인 것처럼 해석을 함으로써 '위법 문제'를 '남녀 간의 애정 문제'인 양 여기게끔 하여 대중의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글을 썼던 것이다. 이렇게 '위법 문제'를 '남녀 간의 애정 문제'로 프레이밍한 것은 가해자 조성민이었는데, 조성민은 2002년 12월부터 최진실을 의부증 환자로 모는 여론 조작을 시작했었고, 2004년 8월에도 자신이 저지른 폭력 행위와 관련해서 말하고 다닐 때 쌍방폭행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더불어 피해자 최진실이 자신의 여자 문제를 거론했었다는 거짓말을 하며 여론 조작을 했으며, 2008년 10월 여성잡지를 통해서도 최환희와 최준희에 대해 면접교섭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 위법적 행위에 대해 자신의 두 번째 배우자에게 미안한 일이어서 그 짓을 저지르는 것이라고 당당하게 말하며 자신의 애정 행각과 법적인 의무를 엮어서 '위법 문제'를 '남녀 간의 애정 문제'로 프레이밍을 했었다. 황호택은 이러한 조성민의 프레이밍을 충실히 따랐던 셈이었다. 배우자의 정조 의무 위반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하는 것은 모든 혼인자의 법적인 권리였고 최진실 또한 그러한 자유와 권리를 누렸던 것이고, 최진실은 이혼과 관련해서는 조성민에게 소송이혼 절차 밟으라는 입장을 취했었다. 조성민은 같은 행동을 이혼 후에 비혼자로서 하면 되는 것이었는데 혼인자 상태에서 배우자 이외의 이성과 연애 행위를 했던 것이고 그 행위는 위법한 것이라서 피해자 최진실은 그것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 것이었다. 이러한 최진실의 행동은 조성민에 대한 애정 유무와 상관없는 자신의 법적인 권리를 누린 것일 뿐이었다. 또 조성민은 최진실을 대상으로 이혼 청구 소송 절차상 법원에 서류 접수조차 하지 못함으로써 최진실이 의부증 환자라는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지도 못했었다. 비양육친이 면접교섭의 의무 불이행으로 아동을 위기에 빠뜨리는 경우에는 비양육친이 정상인인 경우보다 양육친이 그 아동의 복리에 대해 더 관심을 쏟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고 최진실 또한 그러했다. 최진실은 이혼 후에도 최환희와 최준희가 자신의 이혼에 대해 불편감을 가질 수 있는 입장임을 고려하여 혼인 관련 보수적인 태도를 보이며 성의를 표시하였고, 최환희와 최준희는 머지않은 미래에 자신들의 어머니에게 일어난 일을 뉴스 기사 등을 통해 복기를 하게 되어 있고 최진실 또한 언론을 상대함에 있어 그것을 염두에 두고 언행을 하였다. 황호택이 가해자 조성민을 편들어 주는 역할을 하는 칼럼을 쓴 것은 최환희와 최준희를 위기에 빠뜨리는 일이기도 한 셈이었다. 황호택이 피해자 최진실의 본심을 자기 멋대로 해석하는 일은 그 자체로 최환희와 최준희의 어머니에 대한 모욕인 셈이기 때문이다. 최진실은 2002년부터 자신을 대상으로 여론 조작을 하고 다니는 조성민을 향해 소송이혼 절차를 밟으라고 대응한 인물이었다. 다만 아동의 친권자로서 2살의 최환희와 태아 최준희가 자신의 이혼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일 수 있음을 상정하였기 때문에 최진실은 이혼 숙려 기간을 충분히 가지는 모양새를 취하며 그들의 입장에 성의를 표시하는 행동을 보였을 따름이었다. 이런 사실은 2005년 황호택이 최진실을 인터뷰했을 때 최진실이 황호택에게 밝힌 바였다. 즉 햇수로 3년 동안 이혼 숙려 기간을 가진 것은 어머니로서 최선을 다한 행동이었었다고 최진실은 밝혔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황호택은 가해자 조성민이 좋아할 만하게, 가해자 조성민에게 유리하게 여론이 흐르도록, 최진실의 정신세계에 대한 해석을 내놓으며 가해자 조성민의 편에 서는 모습을 취했다. 황호택이 피해자 최진실이 가해자 조성민을 배우자 삼고 싶어 한 사람인 양 집요하리만치 주장한 행태는 가해자 조성민에게 면죄부를 주는 효과를 유도하는 행태였는데 이는 강간 가해자가 강간 피해자와 결혼에 합의를 하게 되면 강간 혐의를 벗겨주는 요르단의 사법기관의 행태와 통하는 면이 있었다. 황호택은 증권사 직원들의 여론 조작으로 인해 사망한 최진실에 대해 안타까움을 표현하는 이 칼럼에서, 2002년부터 2004년에 걸쳐 최진실을 상대로 여론 조작을 저질렀고 그 흐름을 2008년에도 이어갔던 조성민 편에 서서 글을 쓰는 모양새를 취함으로써 죽은 피해자 최진실을 조롱했던 셈이다. 여론 조작으로 사망한 최진실을 두고 최진실이 여론 조작 행위자 조성민과 부부관계를 몹시 맺고 싶어했다고 굳이 해석하는 칼럼을 쓴 것은 여론 조작의 고통을 토로하며 죽어갔던 최진실의 죽음을 희화화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황호택은 2005년 인터뷰에서 조성민의 여론 조작임이 검증된 내용에 대해 마치 검증되지 않은 내용인 것처럼 처신하며 과거 조성민의 비방 행동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피해자 최진실에게 묻는 만행도 저질렀었다. 또 황호택은 같은 칼럼에서 2004년 8월에 발생한 최진실에 대한 조성민의 일방적 폭력 행위에 대해 맥락을 배제한 표현인 '육박전'이라는 용어를 쓰며 사건의 본질을 물타기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렇게 '육탄전' 운운 하는 황호택에게 대중은 "당신이 길을 가다가 조직폭력배에게 폭행을 당하면 그것도 육탄전이냐?"라는 반문이 가능한 행태였다. 이 폭력 행위를 쌍방 폭행이라고 말하고 다닌 것도 가해자 조성민이었고 이에 황호택은 가해자의 입이 되어 글을 쓴 셈이었다. 즉 2008년 10월 10일의 황호택은 특정 범죄사건을 가해자에게 유리하게 해석을 해주고 피해자의 말도 가해자에게 유리하게 침소봉대하여 혹은 왜곡하여 해석을 해준 셈이었다. 다른 측면에서 동아일보 논설위원 황호택의 이러한 행동은 최진실에 대한 조성민의 여론 조작이 어느 정도까지 대한민국 사회에 먹혔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기도 하였다. 더불어 젠더폭력 가해자에게 우호적인 사회 분위기도 보여주는 예였다. 이는 대한민국이 젠더폭력 피해자에게 잔인한 사회임을 보여주는 예이기도 하였다. 왜냐하면 황호택은 최진실의 자택을 방문하여 최진실을 인터뷰하며 젠더폭력과 관련하여 최진실이 토로하는 고통을 직접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가해자 측에 서서 글을 썼기 때문이다. 황호택이 2005년에 최진실과 인터뷰할 수 있었던 것은 변호사 강지원을 통해서라고 황호택 본인이 밝혔으면서도 이 사안의 본질은 망각한 채 이런 모습을 보였던 것이다. 인권변호사 강지원은 2004년 8월에 조성민이 최진실을 향해 저지른 폭력 행위와 관련하여 광고주가 폭행 피해자인 광고 모델 최진실을 대상으로 소송 제기를 한 사건에 대해 같은 해 12월에 최진실의 편에 서서 변호를 맡은 인물이었다. 최진실은 조성민의 폭력 행위로 인해 신체적 상처를 입은 것은 물론이거니와 제3자로부터 소송도 당한 입장이었던 것인데, 피해자 최진실이 가해자 조성민과 부부관계를 몹시 맺고 싶어한 사람이라고 글을 쓴 것은 황호택은 최진실을 광인(狂人)이라고 여겼다는 뜻과 다르지 않았다. 더구나 조성민은 이 폭행 사건을 쌍방 폭행이라고 말하고 다녔고 황호택 또한 그 말을 그대로 되풀이 했는데, 이는 폭행범이라고 모함당한 피해자 최진실이 자신을 폭행범이라고 말하고 다닌 가해자 조성민과 부부관계를 몹시 맺고 싶어했다고 한 것이기도 하기에 더욱 더 황호택이 최진실을 광인(狂人)으로 여겼다는 뜻과 다르지 않았다. 더구나 조성민은 최진실뿐 아니라 최진실의 어머니 정옥숙, 최진실의 동생 최진영, 최진실의 자녀 최환희와 최준희도 위기에 빠뜨린 인물이기 때문에 황호택이 굳이 이러한 해석을 한 것은 더욱 더 이해불가한 것이었다. 또 최진실이 폭행범이라는 조성민의 주장은 법적으로 입증된 바가 없기 때문에 허위의 주장인 것이었고 이에 황호택이 조성민의 주장을 그대로 되풀이 한 것도 가해자 편에 선 것이나 진배없었다. 이는 황호택은 최진실 사망 후에도 조성민의 여론 조작에 인공호흡기를 대주는 행동을 한 셈이었다. 이 폭력 행위는 최진실이 일방적 피해자임이 법적으로 확인된 것이었다. 광고주는 피해자 최진실이 범죄 현장을 언론에 공개한 것을 문제삼은 것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인권변호사가 최진실을 도왔던 것이었다. 그런데 황호택은 마치 폭력 행위의 진위가 규명되지 않은 것처럼 2005년 인터뷰 당시 최진실에게 쌍방 폭행 운운 하며 이 폭행 사건에 대해 물었었고 최진실 사망 후에는 같은 맥락으로 글을 써서 죽은 최진실을 부관참시하는 것과 진배없는 행동을 하였다. 이것이 최진실에 대한 부관참시와 진배없는 행태인 이유는 최진실이 이 범죄 현장을 언론에 공개한 것이 조성민의 쌍방 폭행 운운하는 여론 조작 때문이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최진실 본인이 여성중앙 2007년 6월호를 통해 폭력적인 사람은 피하는 게 좋다는 말을 공개적으로 하면서 자신이 정상인임을 확실히 한 바 있었다. 그런데도 황호택 같은 사람은 최진실을 광인(狂人)으로 치고 이야기를 이어가며 최진실의 인격 따위는 무시하는 것과 다르지 않은 행태를 보였다. 2002년부터 2004년에 걸쳐 자신을 광인(狂人)으로 만들어가는 세상과 싸우느라 힘들다는 표현을 비망록에도 남긴 바 있는데, 조성민은 최진실을 의부증 환자로 모는 여론 조작을 하면서 최진실을 미치광이로 몬 주동 인물이었다. 그러했음에도 불구하고 황호택은 자신을 광인(狂人)으로 몬 남자와 부부관계를 몹시 맺고 싶어하는 사람으로 최진실을 해석하는 글을 굳이 쓴 것이었다. 대한민국의 상식적인 부모 대부분은 이혼을 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면 '자식의 동의'라는 절차를 밟거나 자식이 결혼을 한 후에 이혼을 하거나 하면서 자식에게 소위 '정상적인 가정'을 지켜주기 위한 모양새를 취하는데, 최진실 또한 그런 맥락의 태도를 취한 것이었고 황호택은 그런 맥락을 충분히 알 만한 위치의 인물이면서도 마치 피해자 최진실이 가해자 조성민에게 애정이 있어서 이혼에 대해 부정적인 모습을 보인 것처럼 해석하며 가해자 조성민을 기분좋게 하는 글을 썼던 셈이었다. 이는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애정이 있다는 말을 대중에게 세뇌하고 있는 셈이었고 이를 통해 대중이 피해자를 비하하게 하고 가해자를 비난하는 강도를 낮추게 하는 효과를 낳았다. 피해자가 가해자에 대해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는 주장은 피해자가 가해자를 용서한 것처럼 대중이 여기게끔 만들 수 있는 행태였고 이는 제3자는 해당 가해자를 비난할 근거가 없다라고 말하는 것이나 진배없었다. 젠더폭력의 피해자는 절대 다수가 여성이고 가해자는 절대 다수가 남성인 상황에서 언론인 황호택이 보인 이러한 행태는 결국 여성은 사리분별력 없는 존재로 비하하고 남성은 위법을 저질러도 비호받도록 하는 사회 분위기 조성인 셈이었다. 조성민이 최진실을 유책배우자라고 주장한 것도 조성민이 최진실을 대상으로 이혼 청구 소송을 제기하지 못한 것으로 진위가 규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2005년 인터뷰 당시 황호택은 조성민이 최진실을 유책배우자라고 주장한 내용을 또 최진실에게 묻는 무례함을 보였었다. 또 최진실이 폭행범이라는 주장은 동기의 측면에서도 해당사항이 없었던 것이, 최진실은 당시 두 건의 광고 계약을 맺고 있어서 위법을 저지를 동기가 없었고 2002년부터 조성민에게 소송이혼 절차를 밟으라고 한 입장이어서 더욱 더 무리수를 둘 이유가 없었다. 황호택이 최진실을 통해 보여준 이 모든 상황은 조성민과 조성민의 두 번째 배우자가 여론 조작을 통해 노린 바나 다름없었고 황호택은 조성민 부부가 노린 바대로 움직인 셈이었으며 조성민에 대해 최진실이 일방적인 피해자라는 검증된 사실관계를 대중이 끊임없이 의심하게 만드는 일에 일조하는 셈이었다. 이런 사회 분위기 덕분에 최진실 사망 후에도 조성민은 2004년 8월의 폭력 행위에 대해 여론 조작을 계속 이어갈 수 있었다. 2002년부터 2004년에 걸쳐 팀을 이뤄 최진실을 가해자로 몰면서도 조성민 부부가 정작 경찰서나 법원은 가지 못하고 기자들만 상대했던 것은 이 모든 상황을 노리고 한 행동이었던 셈이었다. 이를 통해 피해자 최진실은 마치 가해자인 양 대한민국 사회로부터 공격을 받았었고 황호택의 행동은 그 상황을 간접적으로 말해주는 예였다. 조성민과 조성민의 두 번째 배우자는 2002년부터 2004년에 걸쳐 사업파트너 사이라고 말하고 다녔고 경찰서나 법원은 가지 못하고 기자들만 상대하며 최진실을 광인(狂人)으로 만들어가는 팀이었는데, 이러한 노이즈 마케팅은 황호택 같은 사람들 덕분에 일시적으로 성공적이었고 이에 조성민은 2008년 10월호 여성잡지를 통해 자신의 배우자의 사업 수완과 연예계 인맥을 과시하기도 하였다. 2002년부터 2004년에 걸쳐 조성민은 최진실과 관련한 기사 거리를 던져주며 기자들과 협력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고, 그런 상황 속에서 기자들은 조성민의 말을 사실 검증 없이 받아 써주어 최진실은 광인(狂人)이 되었으며, 조성민은 피해자로 포지셔닝하였다. 이렇게 조성민은 거물급 연예인 최진실에 대한 혐오 세력의 대표 주자가 되어 공개적으로 활동을 하였고 혐오 세력의 다른 한 축인 포털 사이트 다음의 '안티최진실카페'는 최진실 사망 직전까지도 카페 웹사이트 첫 화면에 조성민에게 폭행당해 얼굴이 멍든 최진실의 사진을 걸어두고 최진실을 조롱하며 조성민과 협력 관계를 유지했다. 이런 설계 속에서 2008년 9월 최진실이 악덕 사채업자라는 소문이 대한민국 전역으로 퍼졌고 이 무렵 조성민은 여성잡지 두 군데와 인터뷰를 하며 최진실과 관련하여 피해자 행세를 이어갔다. 이 인터뷰에서 조성민은 최환희와 최준희를 위기에 빠뜨리는 말도 하였는데 이는 최진실을 향해 또 공격을 개시한 것으로 이에 최진실은 문자메시지를 통해 조성민에게 경고를 보냈었다. 하지만 조성민은 그 경고를 무시한 채 최진실 사망 후 또 최환희와 최준희를 위기에 빠뜨리는 행동을 함으로써 사회적으로 심각하게 배척되었고 그 여파 속에 두 번째 이혼하였으며 자살도 하였다. 최환희와 최준희는 어머니 최진실의 사망으로 최진실의 재산을 물려받게 되었는데, 자신들의 양육자들을 상대로 사기를 친 전적이 있던 조성민이 자신들의 재산을 관리하는 일에 대해 권리를 행사하려고 하면서 이들은 위기에 처했었다. 한편 조성민은 죽기 직전에도 여전히 남 탓을 하며 피해자 행세하는 것을 잊지 않아 죽을 때까지 개과천선은 없었음을 보여주었다. 이는 황호택 같은 인물들을 믿고 한 행동이라고 봐도 무방했는데, 조성민 사망 후 대중문화 전문 기자 백현주가 보여준 행동이 좋은 예였다. 또 조성민은 사망 직전 성인 남성과 관련하여 폭행 사건의 주인공이기도 하였는데, 조성민이 이 폭행 사건의 피해자이든 가해자이든 조성민에 대한 사회적 평가와 관련해서 크게 달라질 게 없었던 것이, 조성민은 2002년 12월 본인 입으로 자신이 임신부 폭행범이라고 자백했었고 그러고도 피해자 최진실을 탓하고 모함하며 잘 살았었고, 2004년에 또 최진실을 폭행하였고 그 후에도 최진실의 자녀에 대한 법적인 의무를 이행하지 않았으며 더 나아가 2008년 10월호 여성잡지를 통해 그 법적인 의무를 이행하지 않겠다고 말하며 당당하게 살았었기 때문이다. 한편 조성민의 사망 장소는 지인의 집이었는데, 이 사망 사건 바로 직전 그 집 주인은 자신을 방문한 조성민에게 연인 관계를 종결하자는 말을 했었다고 하고 이후 그 집 주인은 잠시 외출을 하였는데 그 틈에 그 집에서 조성민은 자살을 한 것이었다. 또 조성민은 자신의 재산을 모두 자신의 누나 조성미에게 남긴다는 유서를 남겼는데, 그 이유로 법적인 분쟁을 들었다. 굳이 그런 유서를 남기지 않았으면 민법상 그 재산은 최환희와 최준희가 물려받도록 되어 있었고 이 두 아동의 재산관리권자가 법적으로 지정되어 있는 상태여서 법적인 분쟁도 일어날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법적인 분쟁 운운은 궤변일 뿐이었다. 최진실의 사망으로 최환희와 최준희가 최진실의 재산을 물려받자 조성민은 그 재산을 지켜주고 싶은 마음을 담은 보도 자료를 기자들에게 돌렸었는데, 그 마음대로라면 자신의 재산을 최환희와 최준희에게 물려주고도 남아야 하나 실상은 자신의 재산이 최환희와 최준희에게 흘러가는 것을 막는 행동을 했을 뿐이었다. 또 조성민 사망 후에는 조성민의 어머니와 누나가 피해자 최진실을 가해자 조성민에게 애정을 가진 광인(狂人)으로 모는 일에 앞장서서 2002년부터 2004년에 걸쳐 최진실을 상대로 저지른 조성민의 위법행위를 희석시키며 사안의 본질을 호도하였고, 이와 더불어 조성민처럼 피해자 행세[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도 하였다. 최진실은 여론 조작으로 사망한 것이고 이에 최진실의 연예계 활동 기간 20년 동안 이 여론 조작에 가담한 모든 사람들이 이 사망 사건의 가해자였다. 그러므로 조성민 집안에 대한 대중의 부정적 평가에는 객관적 근거가 있었다. 그리고 추가적으로 짚어야 할 것은 조성미가 조성민으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에는 조성민이 정옥숙과 최진영을 대상으로 사기를 쳐서 챙긴 돈도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요약을 하자면 2002년부터 2004년에 걸친 기간 동안 피해자 최진실이 가해자 조성민에게 애정을 가지는 광기를 가졌든, 안 가졌든 최진실이 조성민에게 위법을 저지른 바 없고, 가해자 조성민 편에 서서 사고하는 사람들 말대로 피해자 최진실이 가해자 조성민에게 애정을 가지는 광기를 가졌다고쳐도 그것은 전문가로부터 심리치료를 받으면 되는 사안이었으며, 무엇보다 최진실은 2007년 6월 '폭력적인 사람은 피하게 좋다'는 말을 공개적으로 남겨둠으로써 이런 사람들이 나서서 자신을 모욕하는 문제를 해결했다. 이렇게 해결된 문제에 대해 황호택은 해결이 안된 문제인 양 자기 멋대로 치부한 채 최진실을 광인(狂人)으로 모는 글을 최진실 사망 후 소위 최진실을 추모한다고 쓴 칼럼에서 서술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황호택의 행동은 2005년에 최진실이 왜 황호택에게 '있는 그대로 잘 써주세요'라고 굳이 말했었는지를 말해주는 예가 되기도 했다. 황호택은 2008년 10월 10일 칼럼에서 강지원 변호사의 말을 빌려 심리치료 운운 했으나 최진실의 언행을 아전인수식으로 해석하는 황호택 같은 인물이 최진실이 심리치료를 한다고해서 사라지지는 않는다는 게 상식이다. 황호택은 '안티최진실카페' 등의 발호에 불편감을 가졌던 최진실이 전문가로부터 심리치료를 받는 것에 대해 회의적이었다고 강지원이 말했다고 했는데, 상식적으로 최진실도 심리치료가 사안의 근본 해결책이 되지 못하는 대증요법에 불과함을 알았다고 보아야 하고 이에 그런 식으로 에둘러서 표현한 것이라고봐도 무방했다. 왜냐하면 '안티최진실카페'나 황호택 같은 인물의 여론 조작 행태가 최진실이 심리치료를 받는다고해서 사라질 리가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황호택의 경우는 최진실로부터 직접 말을 들었고 그게 자기 이름을 건 인터뷰 기사로 남아있는데도 최진실의 말과 다른 이야기를 유포하는 뻔뻔한 여론조작 행태를 보인 인물이기도 하였고 이에 심리치료는 최진실이 아니라 황호택 같은 인물이 받아야 정상적인 상황이었다. 2008년 10월 10일 황호택의 칼럼에 따르면 여론 조작 피해자 최진실은 황호택에 의해 여론 조작 가해자와 부부관계를 몹시 맺고 싶어한 광인(狂人)으로 규정되었고 여론 조작 행위자 황호택은 여론 조작에 분노한 피해자 최진실을 두고 치료 운운 하는 상황이었던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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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39. (다큐프라임)33분마다 떠나는 사람들- 제2부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 EBS. 2013년 9월 10일.
  640. 조윤호. "사망한 훈련병 아버지가 '설득해 줘 고맙다'고 하더라". 미디어오늘. 2014년 11월 11일.
  641. 이민지. '휴먼다큐 사랑' PD "故최진실 자녀 4년만 출연, 재섭외 이유는..". 뉴스엔. 2015년 4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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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59. 배우의 연기를 두고 '솔직'이라는 단어를 갖다붙일 수 있는지 꼼꼼하게 따져보면 다음과 같다.'솔직하다'의 반의어는 '숨기다' 혹은 '거짓되다'이다. 주철환의 이 말은 일단 최진실의 연기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전제가 깔린 말이니 최진실이 자신의 연기력을 '숨겼다'는 말이냐는 의문이 가능했다. 또 배우가 자신이 공감하지 못하는 대사를 기계처럼 내뱉는 경우 '거짓 연기'라고 하는데 이는 배우 본인만이 알 수 있는 영역이다. 대중이 공감하지 못하는 대사를 배우가 읊는 건 배우의 문제라기보다 작가의 문제이다. 주철환은 최진실이 '국어책 읽듯' 대사를 읊었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최진실의 연기가 옛날 이미지를 벗어나지 않으려 한 것인지, 벗어난 것인지는 둘째치고 '옛날 이미지를 벗어나지 않으려 하는 것은 솔직하지 못하다'는 명제가 가능한 것인지 의아함을 갖게 하는 말이었다. 배우 A의 옛날 이미지가 B인데 2004년 기준으로 B라는 이미지를 구현하는 것은 A가 솔직하지 못한 길을 가는 것이고 B가 아닌 C라는 이미지를 구현했으면 솔직한 길을 가는 것이라는 의미는, C라는 이미지 구현이 왜 그 배우에게 솔직한 행보인 것이고 그런 것을 배우에게 요구하는 일이 합당한 것인지 의구심을 불러일키는 말이었다. '솔직한 연기', '솔직하지 못한 연기'라는 말이 가능하다면 과연 다른 배우에게도 이런 식의 반응이 가능한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는 말이었다. 데뷔를 한 20대부터 60대가 되어서까지 같은 이미지를 구현하는 배우는 솔직하지 못하다는 말이 가능한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는 말이었다. 100평짜리 고급 빌라에 살던 배우가 10평 짜리 싸구려 원룸에 살게 되었는데도 여전히 같은 이미지를 구현하는 연기를 하면 솔직하지 못하다는 말인지 알 수 없는 발언이었다. 10평짜리 싸구려 원룸에 살던 배우가 100평 짜리 고급 빌라에 살게 되었는데도 여전히 같은 이미지를 구현하는 연기를 하면 솔직하지 못하다는 말인지 알 수 없는 발언이었다. 20년 동안 《전원일기》에 출연한 배우 최불암은 '솔직하지 못한 연기'를 한 것이냐고 묻지 않을 수 없는 말이었다. 수많은 배우들이 멋진 연기를 펼치고도 대중의 주목을 못받는 경우가 허다한데 그것 또한 그 배우들이 대중이 원하는 이미지를 구현하는 연기를 하지 않아 그런 결과로 이어졌다고 할 수 있는 바 이것 또한 그 배우들이 대중이 원하는 이미지를 구현하는 연기를 하지 않았으니 '솔직하지 못한 연기'를 한 경우이냐는 질문이 가능한 사안이었다. 상식적인 대중은 위법행위 피해자 최진실이 직업 활동을 하는 것에 부정적일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팬이라면 더더욱 그럴 이유가 없었다. 다만 드라마 홈페이지에 적힌 연출가의 변에 의거하면 드라마 자체가 결혼 신화를 추종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시대착오적이었고 젊은 사람들을 주 시청자로 삼은 드라마로서 시청률이 잘 나오기 힘든 요소가 있었다. 더욱이 최진실이 2008년에 출연한 MBC 《내 생애 마지막 스캔들》은 최진실의 예전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 열광의 대상이 되었다. 이 드라마에서는 최진실의 직업이 가정관리사였다. 물론 드라마 시놉시스상에는 '스타 전담 작가'가 최종 직업으로 되어 있었으나 실제 드라마에는 그 내용이 담기지 못해 아쉬움을 남겼었다. 이 드라마 <시즌 2>에서는 최진실의 직업이 정신건강의학과 의사가 될 것이라는 추측이 인터넷상에서 떠돌기도 했었다. 왜냐하면 최진실이 2008년 8월경[출처 필요] <최진실의 진실과 구라>에서 게스트로 출연한 배우 이광기와 가수 김태원의 독특한 캐릭터를 눈여겨보면서 그들을 자신의 드라마에 까메오로 출연시키고 싶다고 했기 때문이다. 주철환은 이 드라마에 대해서는 '솔직' 운운 하지 않았으니 결국 최진실의 극중 직업이 비위가 상한 요소였던 것으로 추정될 수 있었다. 최진실이 《장미의 전쟁》에서 의사 역을 맡은 것이 불만이었다는 뜻 말고 다른 이유를 찾기 어려웠다. 《장미의 전쟁》 연출가 본인이 수년 전 최진실이 출연한 드라마 내용을 이어서 전개하는 것으로 서사를 구성하였는데 주철환이 최진실의 캐릭터에 대해 트집을 잡은 것은 최진실 입장에서는 황당한 것일 수 있었다. 더욱이 최진실은 MBC의 전속 배우였기 때문에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드라마 출연을 거절할 입장도 아니었다. 이미 최진실은 시청률 저조라는 대가를 치렀다. 즉 이 시점에 주철환이 이런 말을 하고 다녔다는 것은 조성민이 최진실을 유책배우자로 몰고 다니던 시절이었음을 감안할 때 주철환이 조성민과 한 패라는 뜻과 다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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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47. 스포츠서울[출처 필요]/ 톱스타 최진실(32)이 창작 여건이 넉넉지 못한 젊은 예술가들을 후원한다. 최진실은 오는 6월30일부터 7월13일까지 서울 안국동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리는 ‘젊은 작가 창작지원을 위한 전시회’의 큐레이터로 변신, 이 전시회의 수익금을 젊은 미술가 3∼4명에게 창작기금으로 기부한다. 큐레이터란 화랑에서 전시를 기획, 유치하고 고객을 관리하는 ‘화랑의 꽃’. 최진실은 “우리나라를 문화강국으로 만드는 데 도움이 되기 위해 큐레이터를 자원했다”고 밝혔다./ 2000년 5월 17일.
  748. 마태운. "연예인의 퍼블리시티권 보호돼야". 문화일보. 2003년 6월 17일.
  749. 장정화. (학회탐방)한국스포츠엔터테인먼트법학회. 법률신문. 2006년 8월 10일.
  750. 조진서. 내국기업 역차별 없애야 외국기업도 투자 활성화… 동북아 경제허브로 도약. 동아일보. 2012년 6월 21일.
  751. 배선영. 송혜교vsJ사 갈등 해결의 키워드 #퍼블리시티권 #PPL계약 #이미지회복. 스포츠조선. 2016년 5월 2일.
  752. 스포츠서울/톱스타 최진실과 중견연기자 김영철의 선행이 잔잔한 화제를 낳고 있다. 최진실은 전국 대학 가운데 재정 형편이 어려운 학교를 찾아 컴퓨터 등 학습기자재 외에도 재정적으로 직접 지원한다. 최진실은 결혼 전에 그를 전속 CF 모델로 기용했던 한국통신이 최근 여전히 최고의 조건으로 재계약해준 것을 계기로 이 회사와 손잡고 이같은 뜻깊은 일을 하기로 결정했다. 최진실은 “한 아이의 어머니로서 교육 발전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고 싶었다”고 말했다. 액수는 밝히지 않았으나 지원 규모는 최소한 수천만 원대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K2TV ‘태조 왕건’에 이어 MTV ‘위기의 남자’로 나이가 들수록 오히려더 인기를 누리고 있는 김영철은 시청자들의 성원에 보답하기 위해 전국 각지의 복지시설을 돌며 봉사활동을 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는 ‘위기의 남자’가 지난 3일 18회로 막을 내림에 따라 오는 9월 STV ‘야인시대’의 김두한 역을 연기하기 전까지 3개월간의 휴식 시간이 있다. 이 기간에 봉사활동을 할 계획이다. 최진실과 김영철은 “이런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면 본뜻이 잘못 비쳐질 수 있다”며 한사코 보도 자제를 요청했다./ 2002년 6월 7일/ 유진모 기자 ybacchus@sportsseoul.com
  753. 최진실, 한동대에 5천만 원 전달. 매일경제. 2002년 6월 13일.
  754. 김은혜. 한동대 '최진실 장학금' 생긴다. 크리스천투데이. 2002년 6월 14일.
  755. 곽인숙. 최진실, "강인하게 다시 태어나 어려움 겪는 여성 돕겠다". 노컷뉴스. 2004년 12월 13일.
  756. 남궁성우. 최진실, "청계산 오르며 몸 만들고 있어요". 노컷뉴스. 2005년 11월 25일.
  757. 산악계에서 안나푸르나 남벽은 로체(8516m) 남벽, 낭가파르바트(8125m) 루팔벽과 더불어 히말라야산맥의 3대 난벽으로 꼽힌다.
  758. 박미애. 최진실 히말라야 여행기 "무지하면 용감하다고...". 뉴스엔. 2005년 12월 14일.
  759. 백혈병 환자와 '히말라야 등반'한 배우 최진실(퀸 2006년 1월호)[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국립중앙도서관.
  760. 최진실의 히말라야 등반기(주부생활 2006년 1월호). 국립중앙도서관[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761. 서주영. 최진실, 백혈병 환자와 히말라야 등반기 공개. 스포츠조선. 2005년 12월 14일.
  762. 김영현. 최진실, "눈 뜨면 걷고 먹고 또 걷고". 연합뉴스. 2005년 12월 15일.
  763. 김태은. 최진실, 연예인 최초 등반모임 만든다. 머니투데이. 2005년 12월 24일.
  764. 히말라야산맥에서 가장 높은 산인 에베레스트산티베트에서는 초모룽마(Chomo Lungma: 세계의 어머니)라고 불렸고, 네팔에서는 사가르마타(Sagarmatha: 하늘의 여신)라고 불렸다.
  765. '신 페미니스트' 현경 교수가 말하는 삶의 지침은? Archived 2014년 7월 14일 - 웨이백 머신. 위키트리. 2014년 5월 12일.
  766. 네이버 책
  767. 최진실의 두 아이 교육법(주부생활 2006년 8월호)[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국립중앙도서관.
  768. 맹순이 이후 1년 만에 돌아온 최진실: 두 아이 키우면서 자전거로 7kg 다이어트 한 사연(주부생활 2007년 1월호)[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국립중앙도서관.
  769. 톱스타 최진실의 크리스마스 하우스(여성중앙 2007년 12월호)[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국립중앙도서관.
  770. 최진실, 인생 9단 풀 고백:아이·엄마·사랑에 관한 뜻밖의 반전 드라마(주부생활 2008년 3월호)[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국립중앙도서관.
  771. 강기헌·장주영·이유정·정종문·장혁진. 스티브 잡스처럼 … 미·영 등 선진국선 입양·가정 위탁. 중앙일보. 2014년 4월 9일.
  772. 김광덕. (한국 시사토크) "현수처럼 고통 겪는 아동 많아… 해외 입양 결국은 사라져야". 한국일보. 2014년 3월 26일.
  773. 송옥진. "아이·엄마에게 평생 상처 해외 입양, 마지막 선택 돼야". 한국일보. 2014년 7월 18일.
  774. 2014년 현재, 아동 복지법에서 '아동'은 18세 미만의 사람을 이르는 말이고, 청소년 기본법에서 '청소년'은 9세 이상 24세 이하인 사람을 이르는 말이다.
  775. 김현록. 최진실, 결식 아동 돕기 캠프서 '사랑 나눔'. 스타뉴스. 2007년 7월 26일.
  776. 최진실 재단 설립 예정… 고인의 생전 뜻 살린 것!. 아이비타임즈. 2008년 11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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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80. 유숙. "故 최진실, 자녀 사랑했던 어머니. 세계 어린이 위한 일 꿈꿨는데. 이데일리. 2008년 10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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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83. 임수정. 故 최진실 자녀 환희-준희, 한복 곱게 차려입고 이종순 원장과 함께~. 한국경제. 2011년 10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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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37. 금빛나. 유인나 생방송 눈물, 고(故)최진실 3주기 영상에 '울컥'. 인터뷰365. 2011년 9월 29일.
  838. 브라운관1897년에 첫 개발된 이후 한 세기 이상 동안 텔레비전의 대표적인 화면 표시 장치로 쓰였다. 하지만 화질을 높이는 데 한계가 있고 화면 크기가 커질수록 앞뒤로 차지하는 공간도 기하 급수적으로 불어난다. 그래서 1990년대 후반 및 2000년대 초반부터는 벽걸이로 장착할 수 있을 정도로 두께가 얇은 평판 디스플레이 방식의 텔레비전이 브라운관 방식의 텔레비전을 대체하기 시작했다.
  839. 이예슬. ‘5년간 광고 130편’ 최진실, “친구 같은 배우로 남고 싶어” (‘연중라이브’). OSEN. 2021년 6월 25일.
  840. 하경헌. 생전 최진실이 쓴 시놉시스 나왔다 Archived 2011년 8월 29일 - 웨이백 머신. 스투닷컴. 2008년 10월 22일.
  841. 도병욱. 자전적내용 故최진실 시놉시스 "드라마화 시기상조". 머니투데이. 2008년 10월 23일.
  842. 윤여수. '최진실이 쓴 드라마' 햇빛 못보고…. 동아일보. 기사입력 2008년 10월 24일. 기사수정 2009년 9월 23일.
  843. 총 62회 중에서 28회, 33회, 34회, 35회, 36회 등 도합 5회 출연했다.
  844. 박경은. 영화 '사도' 개봉을 계기로 돌아본 영조와 사도세자 드라마들. 경향신문. 2015년 9월 10일.
  845. 윤여수. (스타 그때 이런 일이)‘우리들의 천국’ 방송 100회. 스포츠동아. 2015년 11월 20일.
  846. 남궁성우. 최진실 '몰래카메라' 세 번째 속아. 노컷뉴스. 2006년 12월 13일.

외부 링크 편집

MBC 방송대상 《여자 최우수상》
1991년 1992년
최진실
1993년
채시라 최진실
질투
유하경 역
MBC 방송대상 《여자 최우수상》
1992년 1993년
최진실
1994년
최진실 윤미라
폭풍의 계절
이진희 역
SBS 연기대상 《여자 최우수상》
1993년 1994년
최진실
1995년
김혜선 최진실
사랑의 향기
영진 역
SBS 연기대상 《여자 최우수상》
1994년 1995년
최진실
1996년
최진실 이휘향
아스팔트 사나이
오화련 역
째즈
채송화 역
MBC 연기대상 《대상》
1996년 1997년
최진실
1998년
김혜수 김지수
별은 내 가슴에
이연이/소피아 역
KBS 연기대상 《여자 최우수상》
2004년 2005년
김해숙, 최진실
2006년
송혜교, 오연수, 채시라 이태란
장밋빛 인생
맹순이 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