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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보수주의

대한민국의 보수주의(大韓民國의 保守主義)는 대한민국보수주의 사상이다. 일반적으로 대한민국의 보수주의자들은 기본적으로 모두 우익에 속하며 가족적 가치, 자유시장경제를 중시하며[1], 표면적으로는 국가 안보를 중요시 여긴다. 다만 민족주의적 가치만은 예외가 된다.[2][3] 해방 이후 대한민국 내 진보 성향 국회의원이 창설한 반민특위이승만 일각을 비롯한 보수주의 인사들의 방해로 인해 실패로 끝난 후 대한민국에서의 보수주의는 민족 대신 반공을 내세우게 되었다.[4][5]

역사편집

대한민국의 보수주의는 그 역사가 진보주의에 비해 오래되었다. 일반적으로 대한민국의 보수주의의 시작을 온건개화파 또는 위정척사파로 보며[6][7] 일제강점기에서는 신민회와 같은 우익 독립협회로 보는 면이 많다. 그리하여 그들은 자립론자를 형성하게 된다. 일제강점기 내 거의 대부분의 민족진영 보수주의자들은 일제 당국에 점진적인 자치를 요구한다.

일제 강점기편집

이 당시에서 대한민국의 보수주의는 종교를 주축으로 한 교육 운동, 신민회와 같은 조직을 만들어 민족의 교육, 민족의 독립과 더불어 일본제국의 점진적인 자치를 요구했다.

일제 강점기는 현대에서의 대한민국 보수를 의미하는 출발점이 되는 시기였다. 당시 지식인 사이에는 실력운동과 문화운동의 대립이 있었다. 실력운동을 선택한 사람들 대다수는 진보주의적이고 좌파적 성향을 가지고 있었으며 만주로 나가 싸워 항일파르티잔, 항일투사가 되었다. 그러나 보수주의자들은 한반도 내에서 비밀 항일결사 운동을 하거나, 문화운동을 선택한 이들은 계몽운동을 벌였다.

해방 이후편집

이 당시에서 대한민국의 보수주의는 반공주의, 자유민주주의, 신탁통치 반대운동, 단일정부수립 찬성운동으로 나타났으며, 한국독립당의 경우 친일파 처단을 주장하기도했다.

해방 이후 중도좌파 세력이 주축이 된 여운형인민위원회 그리고 조선건국준비위원회가 임시 정부의 역할을 도맡아했다.[8] 그러나 상해 임시정부 내의 우익 보수주의 성향을 띤 한국독립당 인사들, 지역 유지들이 결성한 보수우파 정당인 한민당에서는 여운형의 조직에 참여할 의사가 없었고 이때부터 흔히 국내에서 논하는 좌파와 우파의 싸움이 일어났다.[9] 한편, 모스크바 3상 회의로 인한 신탁통치가 결정되자, 보수주의 인사들은 강력히 반발하였으며, 신탁통치 반대 운동을 벌였다. 그러나 이는 실패로 돌아가고, 38선 이남은 미국, 이북은 소련 하의 군정기가 실시된다. 이 기간도중 이북에서 실시된 사회주의적 정책은 북한주민 상당수가 월남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들은 공산주의가 좌파사상이라는 이유로 조선인민당과 같은 대한민국에서의 진보세력과 타협하지 않았으며 대부분 한민당 구파인 김성수밑에 들어가거나 한민당의 신파인 이승만(후에 독립촉성국민회로 독립)밑에 들어간다. 같은 보수주의 세력에 들어갔다. 다만, 한국독립당의 경우는 친일파들을 받아주지 않았다. 이러한 과정에서 설립된 단체가 바로 서북청년단이다.

이승만 정권편집

이승만을 위시한 우익진영은 1947년 유엔총회에서 남북한 전지역에서 유엔 감시하에 인구비례에 의한 자유 선거로 국회를 구성하고 통일 정부가 이루어지면 90일 이내에 남북한에서 미군과 소련군은 완전히 철수한다는 유엔결의를 이끌어내었다. 결국 남한만의 총선거가 이루어졌다.이는 한반도 역사상 처음의 보통, 자유, 직접, 비밀 선거였다. 이를 통해 구성된 제헌국회에서 이승만이 압도적인 지지를 얻어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이시영이 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이 시기 북한에서는 북조선인민위원회를 만들어 실질적인 국가를 운영하고 있었고 대한민국정부의 수립에 맞춰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라는 공산정권을 세우게 된다.

박정희 정권편집

5.16 군사정변으로 권력을 잡은 박정희는 당시 혼란상을 빠른 시일내에 수습해갔다. 그리고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중화학공업에 전력하여 대한민국의 경제발전을 획기적으로 달성한다. 약 18년에 걸친 집권으로 대한민국의 경제는 비약적으로 발전하였으며 국민의 생활에 있어 실질적인 변화가 발생했다

전두환 정권편집

이 당시에는 민주화-재야권이었던 보수주의 정당인 민주당 내 호남 세력을 주축으로 한 동교동 세력인 평화민주당과 영남 세력을 주축으로 한 상도동 세력인 통일민주당으로 분리하면서 후에 통일민주당은 3당 야합으로 민주자유당의 민주계파로 나뉜다.[10] 이 당시에는 민주정의당이라는 대구권 인사들이 중심이 된 하나회의 후신인 보수주의 정당, 신민주공화당이라는 충정권을 주축으로 한 보수주의 정당이 있었다.[11]

민주화 시대와 현대편집

민주화 이후, 대한민국의 보수주의는 극적인 변화를 겪었다. 당국의 제재가 풀린 뒤 수 많은 민주적인 성향을 띤 보수주의자, 자유주의자들이 자유롭게 의견을 발언했다. 그들은 진보 및 좌파 운동권의 지나친 자살, 폭력적 운동을 비판했다. 특히 김지하는 대한민국 운동권의 과격성을 비판했다. 운동권측은 그의 칼럼을 맹렬히 비난했지만 보수주의자들의 많은 공감대를 받았다. 민주자유당신한국당으로 당명이 바뀌었다. 이 시기 문민정부에서 IMF가 발생하므로, 김영삼을 필두로한 보수주의 세력의 지지율이 급감하면서 세력이 위축되었고 이 과정에서 한나라당으로 당명을 바꾸었다. 이 시기 김대중을 주축으로 한 새정치국민회의는 신한국당과 다를 바 없는 보수주의 정당이었지만, 문민정부를 크게 비판하면서 지지율이 급증했다.

1997년, 국민의 정부가 출범했다. 김대중 정부는 민주당계 정부였으나 보수주의자인 김종필자유민주연합과의 DJP연합으로 탄생하였다. 정권이 안정화 되면서 북한정권에 대한 자금 송금 등 진보적 정책으로 보수세력과의 갈등이 빚어졌다.

참여정부가 사회자유주의를 공식 이념으로 내걸면서 민주당계 정당들이 좀 더 진보적으로 변했다. 일부 보수주의자들이 뉴라이트 운동을 시작하였다.

이명박정부가 들어서면서 보수주의자들이 다시 힘을 얻었다. 특히 뉴라이트 계열은 2008년 총선에서 많은 당선자를 내고 정부 요직을 차지하여 권력을 행사하였다. 한편, 한나라당의 지지율은 급격히 떨어졌고, 당시 한나라당 비대위원장 박근혜는 한나라당의 당명을 새누리당으로 개칭했다. 박근혜는 이명박을 주축으로 한 기존의 보수주의자들과는 차별화 된 보수주의를 약속하였고 그 결과 2012년 총선에서 민주통합당을 누르고 다수당이 되었다. 그 외 보수주의 정당은 자유선진당이 있으며, 자유선진당은 후에 선진통일당으로 개명하고 새누리당에 흡수되었다.

새누리당이 2012년 대선에서 문재인 후보를 누르고 51.6%로 승리하자 2013년 2월 25일에 집권하게 되었다. 그러나 세월호 침몰 사고 이후 정윤회비선실세 국정개입 사태를 일으켜 박근혜 정부는 점점 흔들리기 시작했다. 심지어 2016년 총선에는 여소야대까지 일어나면서 결국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인하여 비박계의 분쟁이 커져 바른정당의 창당되었다. 또한 친이계의 중진들은 이와 별도로 늘푸른한국당을 창당하였다. 게다가 퇴진 운동과 [박근혜 대통령 탄핵 반대 시위|탄핵 반대 시위]]까지 일어났다. 2016년 12월 9일 헌재는 박근혜를 탄핵시켜 직무 정지를 시키고, 2017년 3월 10일 탄핵이 인용되어 박근혜가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 탄핵 이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여파로 친박계와 비박계의 분쟁이 점점 심화되고 있었다. 새누리당은 이름을 자유한국당으로 바꾸고, 우익 성향을 제거하였다. 그러나 친박계 일부가 탈당하여 새누리당을 창당하고, 박근혜 전 대통령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그 후 대선이 시작되었고, 자유한국당은 홍준표 후보를, 바른정당은 유승민 후보를, 늘푸른한국당은 이재오 후보를, 새누리당은 조원진 후보를 선출하였다. 그러나 더불어민주당의 문재인이 41.1%로 당선되어 결국 자유한국당은 야당이 되었다.

자유한국당이 19대 대선에서 패배하자, 자유한국당은 야당이 되었다. 이후 극성 친박세력이 분열되어 대한애국당을 창당하였다.

각주편집